# 86
86. 엄중한 무게.
86.
경계병들이 밝히고 있는 횃불을 제외하고 사위가 어둠으로 뒤덮여 있었다. 칼루리족의 마을은 그 어둠 가운데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흐아아아암. 졸려 뒈지겠군. 쉬브네 족장은 대체 언제 복귀하는 거야?”
예년 같으면 족장이 대회합에서 돌아와 축제를 선포했어도 벌써 했을 텐데 모든 축제준비를 마친지 오래였는데도 돌아올 기미조차 없었다.
그러자 같이 경계를 서고 있던 동료전사가 피식 비웃으며 입을 열었다.
“돌아오면 뭐? 축제가 벌어져도 넌 경계나 서야 할걸?”
“지랄한다.”
그러자 다른 전사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대회합이 길어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다른 부족도 부족이지만 베레토네시와 칼란티엔스 두 부족의 대립이 격화되면 베토네스 연맹은 갈가리 찢어지고 말 테니까.”
베레토네시족은 베토네스 연맹 가운데 가장 힘이 센 부족으로 켈타이인으로 이뤄진 부족이다. 칼란티엔스 역시 베레토네시족에 비견될 정도로 세력이 강성하지만 이들은 비켈타이인으로 이뤄진 부족이었다.
이 두 부족의 대립은 왕왕 있었던 일이지만 작금은 상황은 예전보다 훨씬 더 심각했다. 지금보다 갈등이 심화되면 베토네스 연맹이 두 진형으로 나뉘어 전쟁을 치르게 될 테고 베토네스 연맹은 그 즉시 산산이 분열되고 말 것이다.
“그래서 메투리치족과 손을 잡은 건가? 일이 틀어질 경우, 카르페타니에 가맹하려고? 하지만 왜 하필 메투리치족이지? 놈들은 믿을 수 없어. 솔리치족이라면 모를까. 알잖아? 놈들이 어떤 놈인지.”
“뭐 내 생각도 동일하긴 한데 그보다는 카르페타니에선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모르겠군. 솔리치족이 자신들의 땅을 버리고 우리 지역으로 들어선 이유도 모르겠고 같은 연맹인 메투리치족이 저들을 잡으려고 설치는 것도 이상하고.”
“메투리치족 뿐만 아니라 모니치족도 있었다.”
“그래?”
“정말 모르겠는 건 쉬브네 족장의 명령이지.”
솔리치족이 영토로 넘어올 경우, 어떤 도움도 주지 말고 그들을 쫓아낼 것을 명했다. 축제 기간 중 피를 흘리게 되는 일이 있더라도 말이다. 그러면서도 카르페타니 연맹에 속한 다른 부족이 영역을 활보하는 건 내버려 두라고 했다. 이상한 명령이 아닐 수 없었다. 솔리치족도 카르페타니 연맹이 아니었던가? 더욱이 다른 연맹에 속하긴 했지만 솔리치족은 형제처럼 지내던 부족이었다.
바로 그랬기에 솔리치족이 베토네스 연맹으로 도망칠 때 칼루리족의 영토로 향했다. 그런데 이들은 전사를 내세워 완강하게 막아섰고 그런 저들을 우회하느라 메투리치나 모니치족과 생각보다 빨리 맞닥뜨릴 수밖에 없었다. 이들이 자신의 행동을 뭐라고 변명할지는 모르나 솔리치족으로서는 결국 배신당한 셈이다.
“더 고심해봐야 알 수도 없고 우리가 뭘 안다고 해도 달라질 것도 없다.”
“맞는 말이야. 우리가 알아야 할 건 베토네스 연맹이 갈가리 찢어질지 모른다는 사실이고 그에 따라 카르페타니 진형에 가맹할 수도 있다는 점이겠지. 그런 면에서 보자면 조금 이상하긴 해도 족장의 명령을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어.”
고개를 끄덕이던 다른 전사가 말했다.
“돌아가는 정황을 볼 때 어쩌면 카르페타니가 솔리치족을 처단하기로 작정했는지도 모르지. 그렇게 생각한다면 족장의 명령이 적절한 명령은 아닐지 몰라도 부족을 위해선 현명했던 거다. 베토네스 연맹이 분해될지도 모르는 이 시점에서 카르페타니 연맹과 척을 지는 건 어리석은 일이니까.”
그때 마을 외곽을 순찰하고 온 칼루리 전사들 중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현명했다라.. 저들이 솔리치족에게 무슨 일을 행했는지 목격했다면 그런 말이 나오기 힘들 거다.”
그 말에 모두의 입이 굳게 닫혔다. 모르지 않았다. 자신들의 행동을 합리적인 선택이라 자위하면서도 꺼림칙한 이유 중 하나가 솔리치족의 비극을 알았기 때문이다. 전혀 관계가 없다면 가책을 느낄 것도 없지만 자신들이 저들을 막아섬으로 더 큰 비극이 일어난 셈이다.
형제와 같은 부족을 외면한 점과 아울러 그 일로 인해 사람들이 끔찍하게 죽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그 마음의 짐을 벗어버리기 쉽지 않았다.
그때 저편에서 수풀이 흔들리는 것을 발견한 전사 중 하나가 의아한 표정으로 지었다.
“음? 저게 뭐?”
퍼어억
“커헉!”
그 전사는 이마에 화살을 맞고 그 즉시 절명했다. 경계를 서고 있던 전사들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고함쳤다.
“저.. 적이다!”
어둠 속에서 흉흉한 기세를 풍기며 돌격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100여기의 말을 탄 전사들이었다.
저들은 쏜살같이 경계병이 있던 곳까지 다다라 칼루리 전사를 휩쓸어 버렸다.
“커허허헉!”
“크아아악!”
“막아라!”
“메투리치 새끼들이! 감히!”
칼루리 전사들이 분노하며 그들을 막아서려고 했지만 야음을 틈타 습격한 기마대를 상대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설상가상으로 마을 곳곳에 불길이 치솟기 시작했다.
“부.. 불이다!”
“불이야!”
*
테세우스는 무감정한 눈으로 칼루리 전사를 베었다. 이들은 솔리치족을 배신한 셈이지만 자신은 이들에게 어떤 악감정도 없다.
다그닥 다그닥
테세우스는 말을 달리며 다시 칼루리 전사 두 명을 꼬챙이 꿰듯이 창으로 찔러서 단번에 절명시켰다.
‘아무 감정도 없지만 솔리치족을 살리기 위해선 필요한 일이다.’
모든 인명이 동등한 생명의 가치를 지닌다지만 실제로도 그러한가? 그 말이 사실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실제로 그러하냐는 말이다. 악인과 의인의 목숨을 동일하게 보는가? 사랑하는 자와 원수된 자의 생명을 동일하게 소중하게 여기는가?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무엇이 선인지 악인지, 무엇이 흑인지 백인지 극명하게 나눌 수 있다면 선택하기 쉽겠지만 선이라 생각했던 것이 악이고 흑이라 생각했던 백인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그러니 그 부분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내게 소중하고 내게 필요한 자를 살린다. 그것이 악이라면 나 역시 결국 멸망할 것이고 그것이 선이라면 순풍을 받은 배처럼 멀리 항해할 수 있겠지.’
‘내가 너희를 죽여야 솔리치족을 살릴 수밖에 없었으니 내 행동은 정당하다. 그러니 어쩔 수 없었다’ 라는 이딴 어쭙잖은 변명 따윈 떠올리지도 않았다. 무슨 이유를 붙이든 살인이다. 심지어 자신과 원한조차 맺지 않은 생면부지의 사람을 자신의 목적을 위해 죽인 계획 살인 말이다. 손바닥으로 해를 가린들 해가 가리워지겠는가?
따라서 합리화하지 않는다. 그 일에 대해 변명하지도 않겠다.
테세우스는 무심한 눈으로 칼루리 전사를 베어 넘겼다. 누군가를 죽이면 죽일수록 자신을 베어내는 것 같았다. 항우와 리처드를 지켜볼 때는 이점에 대해선 자유로웠다. 저들이 죽인 것이지 자신이 죽인 건 아니니까.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모든 행동이 바로 테세우스 본인의 선택에 의한 것이다.
‘이렇게 베어내고 베어내다 보면 나라는 존재는 완전히 사라지고 없겠지. 그래서 미치는 걸지도 모르겠군.’
모든 광기가 그를 사로잡고 결국은 그 대가를 치르게 만들겠지. 두려운 일이다. 문득 항우가 떠오른다. 리처드의 광기 역시 떠오른다.
테세우스는 말을 달려 고함을 지르며 다가온 칼루리전사의 목을 베어냈다.
부우웅
서걱
뜨거운 피가 얼굴에 튀어 오르고 그 피가 금세 차디차게 식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적어도.. 피를 위한 피를 흘리지는 않겠다. 적어도..’
*
솔리치족이 은신한 거점으로 돌아온 테세우스는 무심한 눈으로 솔리치족의 장로들을 바라봤다. 그 시선을 마주한 장로들은 숨이 턱 하니 막히는 것을 느꼈다. 연륜으로도 읽을 수 없는 공허함을 마주한 느낌이랄까? 그도 아니면 자신의 모든 것을 샅샅이 훑어보는 느낌이랄까? 아니 이건 항거할 수 없는 맹수 앞에선 피식자의 두려움에 가까웠다.
“지시한 사항은?”
“확.. 확보했습니다. 축제 기간이라 제법 풍족한 식량이 쌓여있었던지라······.”
“그래 봐야 당분간이겠지.”
칼루리족이 축제 기간 사용할 식량을 털었다고 해도 식량은 결국 소모품이다. 지속적인 공급책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금세 동이 나고 말 것이다.
“그.. 그건 그렇습니다.”
테세우스는 에고르의 루시타니아 전사들과 함께 메투리치족으로 가장하고 칼루리족을 쳤다. 이 일에는 세 가지 목적이 숨어있었다.
첫째, 메투리치족과 칼루리족의 불화를 유도한다. 둘째, 축제기간 동안 모아둔 저들의 식량을 탈취해 당면한 솔리치족의 식량문제를 얼마간 해소한다. 마지막으로 셋째, 베토네스 연맹 내에 카르페타니에 대한 위협을 증폭시킨다. 정도였다.
테세우스는 동이 트기 직전인지 새파랗게 물들인 하늘을 바라보다가 대뜸 말했다.
“흩어진 2백여 명의 전사들과 부족들을 찾으라고 보낸 전사들은 아직인가?”
별개로 테세우스는 남은 백 명의 솔리치 전사들에겐 흩어진 전사들을 찾아오라 명했다. 그러니 이번 칼루리 마을을 친 전사는 루시타니아 전사 100명이 전부였다. 단 솔리치족 내에 식량을 운송할 수 있는 사람들이 대거 동원되었다. 전투에는 적합하지 않더라도 그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으니 말이다.
축제 기간에 식량을 보관하는 장소는 부족마다 대동소이했다. 그것을 얻기 위해 테세우스는 일부러 거창하게 저들을 치고 죽이면서 시선을 끌었고 이번 작전에 동원된 솔리치족은 마을 곳곳에 불을 지르고 칼루리족의 눈을 피해 식량을 탈취했다. 테세우스가 아무리 시선을 끌었다고 해도 식량이 중요한 시기라면 힘든 일이었겠지만 풍족한 시기다. 그래서 이때 축제가 벌어지는 것이었고.
어쨌든 사람의 신뢰란 얼마나 얄팍한 것인지.. 형제같이 지내던 자들이 배신하고 도둑질하는 관계로 변하는 건 그야말로 한순간에 불과했다.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뭐 하나라도 잘못된다면 솔리치족은 물론 테세우스조차 위험할 수 있었던 상황, 그러나 다행히 식량 탈취는 물론 테세우스와 루시타니아인들은 성공적으로 저들을 속일 수 있었다.
테세우스의 의도대로 이들을 메투리치족이라 여긴 칼루리족은 주변에 병력이 더 은신해있을 것이라 지레짐작하고 적당한 시점에 물러나는 테세우스 등을 추격하지도 못했다. 메투리치족의 평판이 이들에게 좋았다면 이렇듯 쉽게 속지 않았을 것이다. 메투리치족이라면 능히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테세우스의 기만책과 맞물려 벌어진 결과였다. 메투리치족의 평판까지도 계책으로 이용한 셈이다.
“아닙니다. 명하신 대로 전투준비를 마쳤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던 테세우스는 다시 장로들을 바라봤다.
“모니치족에 가기로 한 자들은?”
“벌써 출발했습니다. 지금쯤이면 모니치족의 전사들을 만나고 있을 겁니다.”
모니치족으로 향했다고? 이건 또 무슨 말인가?
테세우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솔리치 전사를 바라봤다.
“이름이 무엇이냐?”
“오넨구스라 합니다.”
“오넨구스, 네게 50명의 솔리치 전사를 붙이겠다. 네가 해야 할 일은 50명의 전사로 이곳에 오백 명의 전사가 있는 것처럼 가장하는 일이다.”
오넨구스는 테세우스가 무엇을 노리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의심하지 않고 즉각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테세우스는 다시 장로들을 바라봤다.
“칼루리족에 사람을 보내야겠다. 누가 갈 것인가?”
그러자 지금껏 테세우스에게 대화하던 장로가 즉시 입을 열었다.
“저 누아란을 보내주십시오.”
테세우스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누아란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10명의 솔리치 전사를 붙이겠다. 가라 가서 죽더라도 저들을 메투리치족과 싸우게 만들어라.”
“목숨을 걸겠습니다.”
테세우스가 선두에서 추격하던 세이실을 죽였으나 근 이백에 달하는 메투리치족이 이미 솔리치 마을이 위치한 곳에 다다랐을 것이다. 바로 이미 자신의 손에 죽은 이백여의 메투리치족과 합류하기 위해서.
칼루리 부족으로 하여금 지난밤 당한 습격에 대한 분노를 저들에게 토해내게 만든다. 그들을 죽인다면 메투리치족은 더 이상 어떤 위협도 될 수 없다. 이미 죽은 전사만 700여 명에 달한다. 여기서 다시 2백 명의 전사가 사망하면 무려 900명의 전사가 사망한 셈이 된다.
그렇게 되면 결국 메투리치족의 남은 전사는 많아야 그 수가 오백 명 정도. 마에도크와 장로 카오므가 베토네스로 향함에 따라 100명의 전사가 빠졌어도 4백에 달하는 테세우스로는 저들을 단번에 쓸어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적은 메투리치족만이 아니다. 무엇보다 카르페타니와 전면전을 치러서는 상처뿐인 승리만 얻을 뿐, 적과 적이 싸우게 만든다. 이 일은 베토네스를 힘의 우위만으로 자연스럽게 흡수하려는 카르페타니의 의도를 완전히 무너뜨리게 될 터, 저들은 진흙탕 싸움을 면치 못하게 될 것이다.’
테세우스의 눈빛에는 잔혹한 살의가 넘실거렸다. 그 눈빛을 마주한 자들은 움찔거리며 그를 두려운 표정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내딛는 걸음마다 흉계(凶計)로 점철하니 아군임에도 공포를 느꼈다. 심지어 옆에서 보고 있음에도 몇 개의 계략이 얼마나 얽혀있는지 짐작하기도 어려웠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