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
90. 전무(全無).
90.
베토네스 회합장에 도착해 칼란티엔스와 베레토네시족을 필두로 연맹 내의 극심한 대립을 바라보던 솔리치 대장로, 카오므는 베토네스 연맹은 솔리치족을 보호해 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솔리치족이 멸족한다고 해도 이들은 내분에 집중하느라 신경도 쓰지 않을 것이다.
중립을 지키고 상황을 주시하는 족장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소수에 불과했다. 중립을 지키는 것도 힘이 필요하다. 이들은 소수에 불과하고 세도 약한 부족들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불안한 시선으로 상황을 주시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 그러나 저들은 하나같이 담담한 시선으로 이 상황을 방관하듯 바라보고 있었다.
연맹 내에서 중립을 지키는 핵심이유가 뭘까? 바로 베토네스 연맹이 분열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렇듯 방관하는 것이 아니라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해야 했다. 물론 그런 자들도 더러 있었다.
다만 카오므가 의심을 품고 지켜본 자들은 상황을 방관하듯이 무심한 눈으로 지켜보는 족장들이었다. 공교롭게도 그들의 부족은 대부분 베토네스 외곽에 위치한 부족들이었다. 그 가운데는 칼루리족도 포함되어 있었다.
새 부족장을 만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카오므는 테세우스가 어리숙한 자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과연 그가 이 상황을 예측하지 못했을까? 물론 그럴 가능성도 있다. 사람의 마음을 파악하는 건 연륜에 꽤 많은 영향을 받으니까. 하지만 그의 명령을 생각하면 명령을 내렸을 때 이미 예측했다고 봐야 했다.
테세우스가 베토네스 연맹에 가맹하라 명한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다른 명령, 베토네스 연맹 내에서 카르페타니의 위협을 부각하라는 이유는 모를 수 없었다. 지금 상황을 방관하는 자들은 외부연맹, 특히 카르페타니 연맹과 결탁했거나 연관이 있을 확률이 매우 높았다.
카오므는 이곳에서 자신이 취해야 할 태도를 깨달았다. 마찬가지로 테세우스가 자신을 이곳에 보낸 이유 역시 깨달았다. 단순히 족장의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함 따위가 아니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카오므는 등 뒤로 전율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논리나 이성이 사라지고 감정싸움으로 변질된 상황이기에 자칫 말을 잘못 꺼내면 목숨을 잃는다. 그러니 목숨을 건다.
솔리치족을 배반한 카르페타니에게 도움이 되는 상황은 목숨을 걸고 막을 것이다. 서로를 향한 적의를 카르페타니로 돌릴 수만 있다면 전사 수천 명으로 카르페타니 연맹을 친 것과 같은 결과를 낳는다. 죽어간 솔리치족을 위해서라면 세 치 혀가 아니라 자신의 머리라도 베어다가 바치리라.
카오므는 굳은 표정으로 소리쳤다.
“솔리치족의 카오므. 베토네스의 여러 부족장들께 한 마디 올리겠소!”
회합을 주도하는 드루이드로부터 그가 오늘 열리는 마지막 회합에 참석한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연맹에 속한 부족장들이 그를 바라봤다. 하지만 하나같이 심기가 불편한 눈빛으로 카오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을 오시하던 카오므는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 가만히 지켜보니 베토네스 연맹은 이미 그 운이 다한 것 같소이다.”
“뭐라!”
“뭐 이런 부지깽이 같은 작자가!”
“감히!”
카오므는 비웃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우리 솔리치족은 침략전쟁을 반대한다는 이유 하나로 카르페타니에 축출당했소이다. 어쩌면.. 어쩌면 이미 멸족했는지도 모르는 상황이오. 그런데 도움을 청하러 온 베토네스 연맹은 정작 저들끼리 다투기 여념이 없으니 어찌 비웃지 않을까? 차라리 선봉에 설 것을 그랬소이다. 그랬다면 멸족의 위협을 겪지도 않았겠고 내분에 휩싸인 당신들 따위 단번에 쓸어버렸겠지.”
“내 당장 저자를 죽여버리리라!”
베르토네시 부족장, 마예르가 흥분한 표정으로 허리춤의 검을 찾았으나 무기를 착용할 수 없는 회합장의 규칙으로 인해 자신의 허리만 매만졌을 뿐이었다. 분을 이기지 못한 그는 씩씩거리며 당장에라도 카오므의 목을 분지를 것처럼 흉흉한 기세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의 태도는 베토네스 드루이드의 수장, 파에란에 의해 막혔다.
“이곳은 신성한 곳이오. 감히 이곳에서 살인을 저지르려는 것이오?”
“흥. 베르토네시족이야 본래 그런 족속이지.”
칼란티엔스 부족장, 브라단이 이죽거리자 마예르가 더 크게 분노했다.
“뭐라?”
쿵 쿵 쿵
“그만! 그만하시오.”
오크나무로 만든 지팡이를 바닥에 찍으며 쉬어버린 목소리로 고함을 지른 파에란이 지친 눈빛으로 카오므를 바라봤다.
“이야기를 더 자세하게 풀어보시오.”
분열과 내분으로 인해 날뛰는 전쟁의 고삐를 간신히 틀어쥐고 있던 파에란은 카오므가 잠시라도 이 불길을 잠재워주길 바라는 심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더 풀고 말고 할 것이 있소? 카르페타니는 베토네스 연맹이 두 쪽으로 갈라질 때만 기다리고 있소. 그 후에 갈라진 연맹을 하나하나 흡수할 테고 결국 베토네스 연맹에 속한 부족들은 카르페타니에 속한 자들의 발이나 핥아야겠지. 아닌 것 같소? 침략에 반대하는 입장에 섰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를 축출하는 것은 물론.. 으드득. 부족민을 허수아비에 넣고 불태우기까지 했단 말이오.”
“정녕 그게 사실이오?”
질문을 던진 브라단은 물론 마예르와 다른 부족장 모두가 굳은 표정을 지으며 카오므를 주시했다.
“내 말에 한 치의 거짓이라도 있다면 지금 당장 안쿠께서 그 커다란 낫으로 내 목을 베고 내 시신을 그의 이륜전차에 매달아 끌고 다니길 주청하겠노라.”
죽음의 신 안쿠까지 서슴없이 거론한 마당에 이 이상 진위를 의심하는 건 의미가 없었다.
저들을 바라보던 카오므는 다시 고함을 지르듯 말을 이었다.
“베토네스의 명맥이라도 유지하겠다고 버티는 부족들이 똑같이 불태워지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겠소? 당신들끼리 싸우는 것도 베토네스의 연맹이 유지될 때나 가능한 일이오. 저들은 대부족장까지 선출하여 침략야욕을 굳히려 하고 있소이다. 각기 다른 입장을 견지하고 있겠지만 이것 하나만 명심하시오. 침략의 목적은 침탈에 있지 배분에 있지 않음을! 베토네스라는 이름을 빼앗긴 당신들은 카르페타니가 먹고 남은 찌꺼기조차 얻지 못할 것이오!”
*
촤아아악
물살을 가르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테세우스는 솔리치족들과 함께 가벼운 소재의 전나무를 베어다가 나무줄기를 얼기설기 엮어 만든 뗏목을 타고 아나스 강을 지나고 있었다.
이런 일들을 주로 하던 사람들이라 그런지 이들은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뗏목을 만든 다음 그 위에 몸을 실었다. 테세우스는 그런 일련의 과정을 보면서 자신이 간과한 사실이 있음을 깨달았다.
사람은 성격과 재능, 그 모든 것이 제각각이다. 상황이 상황이었던지라 지금은 비록 짐처럼 여겨질지 모르나 이들은 결국 아군의 잠재력으로 화할 것이다. 인구가 많으면 많을수록 사건 사고도 끊이지 않겠지만 그만큼 다양한 일들에 맞는 일꾼들이 넘쳐난다는 소리도 된다.
‘요는 한 가지.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이끄느냐의 문제이리라.’
테세우스가 전방을 살펴볼 때 함께하던 에고르가 입을 열었다.
“오랫동안 뗏목을 타고 이동하기는 어렵습니다. 이대로 강을 타고 루시타니아 지역까지 이동할 수 있다면 최선이겠지만..”
테세우스는 에고르가 무엇을 염려하는지 알아차렸다. 아나스 강에도 무시무시한 포식자가 살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악어다. 인간의 치악력은 65kg 정도, 사자의 치악력은 300kg에 달한다. 사자도 사자지만 악어의 치악력은 무려 1톤에서 2톤 정도다. 악어의 목 주변을 감싸고 있는 삼중으로 이뤄진 근육이 아니라면 저 스스로 씹는 힘을 이기지 못하고 턱뼈가 모조리 아작나거나 그 충격에 뇌가 곤죽이 될 수도 있는 어마어마한 치악력이다.
당연히 그런 이빨에 제대로 씹힌다면 제아무리 단단한 뼈도 흐물흐물한 가루가 되어버린다. 이 같은 악어를 강에서 맞닥뜨린다면 죽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리라. 그나마 사람이 주로 지나다니는 길은 전사들이 수시로 사냥을 해서 위협을 제거했지만 테세우스가 이동하는 해로는 주로 사용하는 길도 아니었다.
“별수 없다. 3천 명이 넘는 인원이 제 영토에 서는 건 사람 역시 꺼리는 일이다. 베토네스 연맹에 가맹한다는 뜻을 보내 베토네스 지역의 부족들의 공격을 최소화하긴 했지만 그 소식이 닿지 않은 부족이 대다수일 테니 자칫하면 그들과 전투를 치를 수 있다. 전투를 치르는 건 문제가 되지 않지만 그랬다간 베토네스 연맹 자체를 적으로 돌릴 수도 있는 일이다. 단 무엇을 염려하는지는 안다. 그래서 따로 먼저 이동하고 있는 것이고.”
에고르는 고개를 저으며 테세우스에게 말했다.
“오해하셨군요. 저는 솔리치족을 염려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테세우스님의 실력을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강 위에서 악어는 그 어떤 포식자보다 위험합니다. 그러니 후방으로 가셔서..”
“내가 이끄는 길이다. 내가 선두에 서지 않으면 누가 서지? 무엇보다 가장 뛰어난 전사가 앞길을 여는 것이 가장 효율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 진중에 나보다 뛰어난 전사가 있던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에고르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지만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다. 테세우스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자신의 실력을 자랑하려고 함이 아니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가 앞길을 열 것이다.”
“······. 알겠습니다.”
에고르의 굳은 표정을 바라본 테세우스는 간단하게 부언했다.
“무엇보다 헛되이 목숨을 잃은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 괜한 걱정은 하지 말라.”
아닌 게 아니라 대화를 하는 와중에도 테세우스는 매서운 눈으로 주변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더 이동했을까? 강 수면이 기이하게 일렁이는 것이 테세우스의 눈에 들어왔다.
테세우스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들고 있던 창을 그곳을 향해 냅다 던졌다.
쐐에에엑
테세우스가 던진 창은 빛살처럼 날아가 곧장 물속으로 사라졌다.
푸우우욱
부그르르르
그렇게 창이 사라지기 무섭게 둔탁한 소음과 함께 붉은 피가 수면 아래에서부터 피어올랐다. 요동치는 무언가 때문에 공기 방울도 수없이 올라왔다.
테세우스는 뗏목 위에 비치해놓았던 창을 두어 개 더 던져 수면 아래에서 빠르게 다가오는 악어를 격퇴시켰다.
“신호를 보내라!”
긴장한 표정으로 창을 들고 두리번거리는 전사들에게 테세우스가 말했다. 그러자 그들 중 하나가 급히 뿔피리를 불었다.
뿌우우우
“여기서부턴 육지로 이동한다. 악어가 출몰하는 것으로 봐선 이 주변으로는 사람들이 거의 출입하지 않을 테니 이 근방으로 이동하겠다.”
테세우스의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이미 뗏목은 강가로 향하고 있었다. 이미 약속된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설마 악어가 나타나길 기다리셨던 겁니까?”
테세우스는 에고르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도리어 질문을 던졌다.
“루시타니아까지 얼마나 남았지?”
“오차가 있을 순 있지만 이틀, 이틀 거리 정도 남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도 강으로 이동해서 시간을 크게 단축했습니다.”
고개를 주억이던 테세우스는 매서운 눈빛으로 에고르를 바라봤다.
“에고르. 가서 네가 해야 할 일을 해라.”
“예? 그게 무슨?”
“내게 충성을 바친 이유가 뭐지? 내 손에 죽게 될 자들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나?”
물론 그랬었다. 하지만 그건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스쳐갔다. 그렇게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 에고르를 향해 테세우스가 다시 말했다.
“전사들을 데리고 루시타니아로 먼저 복귀해라. 나흘. 나흘 후에 너희를 따라 루시타니아로 들어서겠다. 그때 나의 신분은 솔리치의 족장일 뿐, 테세우스가 아니다. 내 신분은 아버지께서 루시타니아로 진격한 이후에 찾는 것으로 하지. 유예기간은 아버지께서 루시타니아로 진격하기 전까지다. 그전에 모두 정리해라.”
드르르륵 쿵
뗏목이 강바닥에 긁히는 소리와 함께 이윽고 멈춰섰다.
에고르는 테세우스의 명령에 먼저 이동한 주변의 전사들을 바라봤다. 모두 루시타니아의 전사들이었다. 이것조차도 즉흥적으로 내린 명령이 아니었다는 뜻이었다.
“정리하고 오겠습니다. 그 후엔 죽는 그 순간까지 테세우스님의 사람으로 살 것입니다.”
그런 뒤 에고르는 검을 뽑아 하늘로 추켜들며 외쳤다.
“테세우스!”
그러자 루시타니아 전사들 역시 자신의 무기를 뽑아 하늘로 추켜올리며 함성을 질렀다.
“테세우스!”
“테세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