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
94. 하룻강아지.
94. 하룻강아지.
은은한 향기가 사방에서 감돌고 있었다. 어떤 향을 피웠기 때문이 아니라 건물 자체에서 나는 향기로 보였다.
테세우스는 오피다니 지역의 드루이드 수장, 킨벨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 향기는 어디서 나는 것인가?”
“삼나무입니다. 집을 짓거나 배를 만들 때도 자주 사용되는 목재 중 하나입니다. 삼나무는 향이 있는데 특별히 향이 강한 것들을 선별해 이 집을 지은지라 지금 맡으시는 향기는 바로 그 삼나무 때문에 그렇습니다.”
테세우스는 심신이 차분해지는 향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향을 더 음미했다.
킨벨은 그런 테세우스를 유심히 바라봤다. 다시 봐도 이제 막 전사의 향기를 풍기는 아이에 불과했다. 얕잡아보려면 한없이 얕잡아볼 수 있었다. 세르토리우스의 아들인 이상 대놓고 얕잡아볼 수는 없겠지만 살살 구슬리면 원하는 바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을 정도의 나이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킨벨은 그와 함께 이곳에 도달한 솔리치족들을 만나봤다. 테세우스와 대체 어떤 식으로 카르페타니 연맹에 속한 솔리치족들과 연관이 있는지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잠깐의 만남 속에서도 킨벨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저들은 테세우스에게 절대적인 충성과 존경을 보이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이 같은 태도는 억지로 가장하려고 해서 가장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가장한들 자신이 그것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어리숙한 자가 아니다.
혹 자신이 속는다고 해도 무려 삼천 명이다. 저들 모두가 능숙한 연기자일 리도 만무하고 어린아이들만 봐도 이것이 거짓인지 아닌지는 확연하게 드러난다. 다시 말해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들이 테세우스에게 가지는 존경심은 어떤 강압이나 명령에 의한 태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게다가 테세우스의 심복들로 보이는 호라티우스나 나디르라는 자에게는 솔리치족이 사무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것을 볼 때 그 모든 존경과 충성은 오로지 테세우스에게만 향하고 있었다.
그렇게 의심이 들고나니 천 명의 병사들로만 오피다니 지역에 도달한 것도 의심스러웠다. 테세우스는 세르토리우스의 아들이다. 아닌 말로 자신들이 전사들을 동원해 그의 병사들을 죽이고 그를 인질로 삼아 세르토리우스를 협박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걸 세르토리우스가 예측하지 못했을까? 병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로마군을 쳐부순 세르토리우스가 그 정도도 예측하지 못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모든 것을 종합해보면 결론은 간단해진다. 테세우스는 함부로 대해서도, 함부로 대할 수도 없는 사람이라는 결론 말이다. 따라서 킨벨은 매우 신중한 태도를 고수했다.
테세우스는 그런 킨벨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대뜸 말했다.
“식량은 어떤 식으로 관리하고 있지?”
“일단 일괄적으로 창고에 모은 다음 필요할 때에 배분하고 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던 테세우스는 오피다니 연맹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마을의 정경을 떠올렸다. 자신의 경험에 비하면 마을이라 부를 수도 없는 조잡한 곳에 불과했지만 어쨌든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모든 식량을 일괄적으로 모으고 있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부패하기 쉬운 식량은 비축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곳은 해안가인지라 어족자원이 다른 곳보다 풍부할 수밖에 없다. 냉동고도 없는 이 시대에 물고기를 한데 모아 보관할 리는 없으니 킨벨은 바로 그 점을 언급하고 있었다.
‘식량을 한데 모은다고는 하지만 이것을 감안하면 중앙 통제권이 그리 강하지는 않겠어.’
어부로 살아가는 이들이 태반으로 보이고 그렇다고 잉여생산량을 어디에 팔거나 비축할 수 있는 수단이 있는 것도 아니니 연맹이라고는 하나 결국 각자도생하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당연히 킨벨의 통제력이 강하다고 볼 수 없었다.
‘이자의 통제력이 약하다는 건 각 부족의 입김이 그만큼 세다는 말도 된다. 그럼에도 각 부족을 조율하며 이끌어 온 자일 테니 뭐랄까 정치력이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그 점은 제법 뛰어나겠어.’
아울러 주변 정황을 통해 테세우스 본인에 대해서도 얼추 파악했다는 뜻도 되리라.
테세우스는 고개를 주억이다가 단호하게 말했다.
“앞으로 내가 총괄한다.”
킨벨은 어떤 반발도 없이 순순히 그에게 대답했다.
“그리하십시오.”
어차피 창고에 비축하는 식량은 비상식량에 가깝다. 자신이 총괄하던 부분이 테세우스에게 넘어간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것도 없었다.
“내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군. 오피다니 지역에서 산출되는 모든 식량과 자원을 총괄하겠다는 말이다.”
지금까지의 통치체계를 변화시킨다는 것인데 나름의 질서 안에서 임의대로 살아온 오피다니 부족들로서는 이 점에 대해 크게 반발할 것이 틀림없었다. 따라서 킨벨은 다소 당황한 표정으로 테세우스에게 말했다.
“예? 그건 어려운 일입니다. 각 부족의 반발이 거셀 것입니다.”
“반발? 얼마든지 하라고 해.”
킨벨은 테세우스의 의도를 어렴풋이 알아차렸다. 일벌백계할 생각으로 보였다.
“오해하지 마시고 들어주십시오. 테세우스님의 의도가 무엇이든지 간에 이로운 결과를 낳지 않을 겁니다. 일단 식량 가운데 물고기들부터 그렇습니다. 남는 물고기를 어떻게 처리하려 하십니까? 고작 부패하여 못쓰게 될 것을 얻고자 분란을 조장할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지금의 체제를 유지해주신다면 오피다니 연맹은 테세우스님께 충성을 바칠 것입니다.”
테세우스는 피식 웃음을 지으며 싸늘한 어조로 킨벨에게 말했다.
“허튼소리를 지껄이는군. 너희 입맛대로 움직이는 허수아비를 원한다 이 말인가? 썩혀 나무의 거름으로 줘버리든 아니면 벌레떼가 파먹게 내버려 두든 그건 내가 알아서 할 바다. 내가 명령하면 너희는 따른다. 이점을 간과하고 너희 뜻대로 행동한다면 나에 대한 반발로 여기고 주동자들과 그것에 동조한 자들 모두를 참해버리겠다.”
킨벨은 테세우스에게서 피오르는 광포한 살의에 압도당해 잠시 어떤 말도 뱉지 못했다. 잠시 뒤 새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킨벨이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며.. 명분을 원하시는 겁니까?”
테세우스는 무심한 눈으로 킨벨을 바라봤다.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모르겠군.”
“이미 저희는 세르토리우스님께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말뿐인 맹세 따위 누가 믿지? 행동으로 보여라. 가라. 가서 전해라. 나의 뜻에 따를 것인지 아니면 거스를 것인지 너희의 선택을 지켜보도록 하지.”
킨벨이 굳은 표정으로 테세우스를 바라보다가 가볍게 고개를 숙인 뒤 밖으로 나갔다.
나디르가 그것을 지켜보다가 번뜩이는 눈빛으로 테세우스에게 말했다.
“모두 죽일 생각이십니까?”
“필요하다면.”
곁에 같이 있던 호라티우스가 질문을 던졌다.
“조금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럴 생각이시라면 지금 당장이라도 저들의 족장을 베고 우리의 입맛에 맞는 자를 세우면 될 일 아닙니까? 또한 그렇게 토벌할 의도를 지니신 거라면 레가투스께 왜 천 명의 병력만 요구하셨는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들 오피다니 연맹은 루시타니아 연맹과 다르다. 루시타니아 연맹은 저들 스스로 굴복해왔지만 이들은 어쩔 수 없이 굴복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한 번 칼을 뽑은 자는 두 번도 뽑는 법이다. 상황이 불리하여 굴복한 자들이니 상황이 유리해지면 다시 반발하는 자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면 우리의 병력이 천 명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이미 다른 마음을 품은 자들이 있겠군요.”
테세우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호라티우스가 반문했다.
“그럼 위험한 것 아닙니까? 테세우스님의 명령은 저들에게 봉기할 명분을 준 것이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 말에 나디르가 입을 열었다.
“우리가 저들을 칠 명분도 얻는 셈이지. 자신들이 맺은 맹세를 스스로 깬 셈이니 우리가 저들 모두를 잔혹하게 죽인다고 해도 아무 문제도 없을 것이다.”
“으흠.”
호라티우스가 침음을 삼키자 테세우스가 말했다.
“나는 기회를 준 것이다. 나를 따를 기회와 배반할 기회 모두를.”
‘지금의 체제를 유지하는 것도 나쁘진 않다. 아군의 상황이 좋을 때는 저들은 아군의 뜻대로 따를 테니 말이다. 하지만 아군의 상황이 나빠진다면 이들은 품 안의 비수가 되어 가슴에 날카로운 검을 박아넣는 존재가 되기에 충분하다. 그러니 이곳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한이 있더라도 그 싹을 잘라버린다.’
이타주의? 평화주의? 인권? 뭐 다 좋다. 그런데 그렇게 무분별하게 베푼 인정이 배반으로 돌아와 내 가슴에, 내게 소중한 사람들에게 비수로 박힌다면 그게 다 무슨 의미가 있나? 다 죽은 다음에 너희가 어떻게 내게 이렇게 했느냐고 외치기라도 할 참인가? 신의를 모르는 자는 은혜도 알지 못한다. 그런 자들에게 줄 것은 차디찬 검뿐이다.
착한 가면 따위를 쓰고자 내 생명을 내 사람을 위협하게 하는 멍청한 짓은 안 한다. 적이라 여겨지면 벤다. 그게 싫다면 저들 스스로 자신들이 적이 아님을 증명해야 하리라.
테세우스의 말을 음미하던 호라티우스가 대뜸 테세우스에게 다시 질문을 던졌다.
“만약 저들이 테세우스님의 명대로 순순히 따른다면 그때는 어찌하시겠습니까? 명하신 대로 따르는데도 저들을 칠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만약 그렇게 한다면 저들은 나의 충실한 동맹이 될 수 있겠지. 나는 나를 따르는 자들에게 검을 들이미는 자가 아니다.”
테세우스의 대답에 호라티우스가 단호하게 외쳤다.
“언제든 출정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겠습니다.”
테세우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이 향기가 제법 괜찮군.”
그러자 나디르가 입을 열었다.
“셀레우코스 제국에는 백색의 줄기를 가진 삼나무가 있습니다. 이를 백향목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만 어쨌든 귀한 건축자재로 쓰입니다. 기회가 된다면 그것을 구해보겠습니다.”
테세우스가 나디르의 말에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마음은 고맙지만 셀레우코스라. 너무 멀군. 무엇보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 나무는 나무일 뿐이니. 오늘의 향기가 그때에도 이어진다고 누가 보장할 수 있을까?”
“그래서 기회가 된다면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만..”
“하하하하. 좋아. 기회가 된다면 나도 보고 싶기는 하군.”
*
킨벨은 이 소식을 서둘러 알릴 필요를 느꼈지만 그보다 먼저 알아볼 것이 있었다. 전에는 그럴만한 여유가 없어 제대로 확인해보지 못했으나 테세우스가 어떤 사람인지 확실하게 알아야 했다.
때문에 킨벨은 곧장 솔리치족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어서 오십시오. 보다시피 거주할 곳을 마련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아닙니다. 거주지를 마련하려면 당연한 일이지요. 그나저나 전에는 경황이 없이 물어보지 못했지만 무슨 일로 카르페타니에서 예까지 오신 것인지 들을 수 있겠습니까?”
오피다니 지역은 넓다. 같은 마을에 수용하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이들이 따로 마을을 짓는다면 그것을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무엇보다 테세우스의 휘하에 있는 자들이 아닌가? 거부할 명분도 없었다.
따라서 솔리치족은 마을을 짓기 적당한 곳을 물색하고 집을 지을 터를 정리하느라 한창이었다. 거의 모든 솔리치족들이 그 일에 집중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당연히 솔리치의 장로들이나 전사들 역시 그 일에 매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오피다니 연맹을 대표하는 드루이드 킨벨이 찾아왔는데 그를 방치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장로의 수장격인 카오므가 그를 맞이하고 있었다.
“이미 어느 정도 추측하고 계신 사실이 아닙니까?”
카오므와 킨벨은 솔리치족들이 일하는 주변을 천천히 걸으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정확한 내용을 듣고 싶습니다.”
“으흠.. 저희 솔리치족에 겪은 일이 그토록 궁금하셨다면 물어볼 기회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니 그 전에 여쭤보셨겠지요.”
카오므가 눈매를 좁히며 킨벨을 바라보자 킨벨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제 뜻을 알고 계시고 숨길 것도 없는 내용이니 단도직입적으로 여쭤보겠습니다. 솔리치족이 테세우스를 각별하게 생각한다는 건 스쳐본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습니다. 단순히 세르토리우스의 아들이라 그런 것이 아니란 것도 말입니다. 그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그 전에 먼저 말씀해주시지요. 테세우스님께서 뭐라 말씀하셨는지 말입니다.”
“모든 식량과 자원을 총괄한다고 했습니다. 이는 부족들이 반발할 수 있는 내용이라..”
카오므는 걸음을 멈춰 세우며 킨벨의 말을 끊었다.
“저희가 겪은 일을 구구절절 말씀드리기에 앞서 결론부터 말씀드리지요.”
“경청하겠습니다.”
“테세우스님의 뜻에 따르도록 오피다니 부족들을 잘 타이르는 것이 좋을 겁니다.”
“으흠.”
킨벨이 침음을 삼키자 카오므가 다시 걸음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테세우스 그는 숙련된 전사 400명과 홀로 싸워 그들 모두를 죽인 전사입니다. 또한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적들을 모조리 궤멸시켰고 저희 솔리치족을 지켰지요. 그 일을 옆에서 보고 겪은 저조차 그의 심산을 헤아리기 어려우나 한 가지만은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와 적이 되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은 없습니다. 자세한 것은 이렇게 길거리에서 얘기를 나눌 부분이 아니니..”
킨벨은 심각한 표정으로 카오므에게 급히 말했다.
“아닙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실례를 무릅쓰더라도 지금 듣고 싶습니다. 그러니 말씀해주십시오.”
카오므는 킨벨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드루이드께서 그리 말씀하시는데 어찌 거부하겠습니까?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