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마 무신의 기억-95화 (95/298)

# 95

95. 하룻강아지.

95.

푸르륵 푸륵

투레질 소리가 거칠게 울려 퍼졌다.

스윽 스윽

테세우스는 말의 목을 쓰다듬으며 애정 어린 눈으로 흑마를 바라봤다.

“오랜만이로구나.”

아랍 순종의 흑마를 오랜만에 만난 테세우스가 그러게 중얼거리듯 말하자 흑마는 그 말에 화답하듯 다시 투레질을 했다.

“오냐! 달려보자!”

어딘가에 침투하기 위해서, 누군가에게 도망치기 위해서, 혹 어떤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말을 달리기 위해서 흑마에 오른 테세우스는 가벼운 마음으로 말을 달렸다.

“이랴!”

히이이이잉

흑마가 울부짖으며 바닥을 박차고 반원을 그리듯 출발했다.

다그닥 다그닥

점점 빠르게 달리던 흑마는 이내 바람처럼 해안을 질주했다.

해안의 모래가 쉴 새 없이 움직이는 말발굽에 의해 짓이기고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바닷바람과 함께 파도가 잔잔하게 해안을 덮치고 있었고 흑마와 한 몸이 된 테세우스는 유려한 몸놀림으로 그 모든 것을 헤치고 경쾌하게 새벽을 갈랐다.

거의 최대 속도에 다른 그때 테세우스는 활을 손에 쥐고 화살을 시위에 건 채 빠르게 당겼다.

퉁 투퉁 퉁

순식간에 여섯 발에 달하는 화살이 바다로 쇄도했다. 당연히 화살은 쏜살같이 날아가 바닷속으로 사라졌다.

그러자 푸른 물결만 가득해야 할 바다에 곧 붉은 핏물이 퍼져나갔다. 테세우스는 흑마를 멈춘 다음 붉은 핏물이 흘러나오는 바다로 헤엄쳐갔다.

파도를 헤치고 제법 깊숙한 곳까지 잠수한 테세우스는 이윽고 자신이 쏜 화살들을 수거했다. 그 화살의 끝에는 놀랍게도 하나같이 토실토실한 물고기가 꽂혀있었다. 빠르게 달리는 와중에도 바닷속을 유영하는 물고기의 움직임을 포착하고 화살을 날려 맞춘 것이다. 이쯤이면 신궁이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하지만 테세우스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머리 부분을 보고 쐈는데 몸통에 맞았기 때문이었다. 이 감정 자체가 황당한 일이었지만 어쨌든 그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바다 밖으로 다시 헤엄쳐서 나온 테세우스는 화살에 박힌 물고기를 뽑아내서 주머니에 대충 집어넣었다. 양손에 핏물과 화살촉에 쓸려 나온 물고기 내장이나 살점이 묻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자신의 손을 바라보던 테세우스는 다시 말없이 주머니에서 물고기를 꺼내 검으로 고기의 밑창을 따고 내장을 뜯어낸 다음 바닷물에 씻었다. 물고기의 내장은 먹지 못한다. 간혹 창자까지 쓰는 경우가 있지만 쓰고 비리고 부패하기 매우 쉽기에 대부분은 제거하고 그 살만 먹는다.

잡은 물고기를 손질해서 바닷물에 씻으면 살점이 물러지지 않고 신선도가 조금 더 오래 유지된다는 장점이 있다. 무엇보다 바닷고기를 민물에 씻으면 해산물 특유의 단맛이 빠져서 맛이 떨어진다.

따라서 테세우스는 이왕 피가 손에 묻었으니 죄다 손질하기로 마음먹고 그 자리에서 물고기의 배를 따고 내장을 모조리 손질했다. 그렇게 손질한 물고기가 모두 여섯 마리에 달했다.

‘아침 식사로 먹기엔 조금 부담스러울 수 있지만 뭐.. 초장만 있다면 회를 쳐서 먹는 건데.. 게다가 오리지날 자연산!’

테세우스는 회를 별로 좋아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렇듯 손질을 하고 보니 문득 회 생각이 떠올랐다.

하지만 테세우스는 금세 생각을 접었다. 자신이 먹었던 회는 사람에게 해가 되는 균이 없도록 양식된 생선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자연산이라고 꼭 좋은 것이 아니라는 소리였다.

‘됐고. 익혀 먹어야겠군. 초장도 없는데 회는 무슨.’

어차피 자신은 회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 초장 맛으로 먹는 게 대부분이었으니 그야말로 잠깐 든 생각이었을 뿐이었다. 게다가 생선 날것을 그대로 먹는 경우도 없진 않겠지만 이쪽의 문화를 생각하면 거의 드물 테니 야만인 보듯이 바라볼 가능성도 꽤 높았다.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지만 말이다.

비릿한 냄새가 코끝을 찌르자 테세우스는 손에 남은 내장 찌꺼기와 물고기의 피를 모두 씻어냈다. 손에 묻은 피 찌꺼기는 손을 문지르는 테세우스의 거친 손놀림 아래 바다 저편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물고기 특유의 기름이 완전히 씻기지 않았기에 테세우스는 해변의 모래를 손으로 비비며 기름을 마저 제거했다. 확실히 모래로 씻기 전보다는 나았지만 아주 깔끔하게 지워지지는 않았다. 자연히 비누 생각이 절실해졌다.

이렇듯 현대인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테세우스로서는 불편한 것이 너무 많았다. 지금 당장 어떻게 개선할 방법이 없으니 감수할 뿐이었다.

이런 것을 맞닥뜨릴 때마다 테세우스는 당연하지 않은 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며 살아왔다는 생각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마찬가지로 로마인이 왜 로마를 갈구하는지도 다시금 알 수 있었다. 문명화된 로마 사회에서 살다가 다른 사회에 섞여 살라고 한다면 수시로 문명화된 로마 사회가 떠오를 것이다.

세르토리우스 역시 전쟁터를 전전하고 있고 또 뛰어난 장군이지만 테세우스가 본 그는 전투를 즐기는 성품이 아니었다. 그 역시 평온하고 안락한 로마의 품에 안기고 싶은 것이리라.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다.’

대체 자신이 언제부터 피비린내가 익숙해졌던가? 전투가 없는 이 순간마저 자신은 생선 피비린내를 맛보고 있어야 했다. 심지어 그것이 너무나 익숙했다. 갑자기 괴리감을 느낀 테세우스는 바다 저편에 끝없이 늘어선 수평선을 바라봤다.

세상은 약육강식의 세상이다. 피를 보기 싫다고? 잔혹한 것이 싫다고? 누군가 대신 피를 보고 잔혹한 행위를 해주기 때문에 피를 보지 않고도, 잔혹한 것을 겪지 않고도 상 위에 고기를, 또 무언가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이 싫다고 부르짖고 실제로 행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이 주는 대가를 편안하게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이 직접 행해야만 그것들이 주는 이로움을 얻을 수 있다면 과연 그런 식으로 매도할 수 있을까?

전쟁의 참혹함을 겪어본 자들은 다시는 그런 전쟁을 겪기를 원하지 않지만 역설적으로 전쟁 준비가 필요 없다고 결단코 말하지 않는다. 전쟁 준비가 필요 없다고 말하는 자들은 대부분 그 전쟁의 참혹함과 그 대가를 생각해보지도 않은 이상론자들에 불과하다.

‘내가 평화를 부르짖고 이상을 늘어놓는다고 모두가 나를 따라서 평화를 부르짖고 이상적인 세상을 꿈꿀 것이라 생각하는 것 자체가 지극한 오만이 아닌가? 수천 년 동안 이어진 인간의 욕망을 끊을 수 있다고? 그야말로 헛소리지.’

수평선을 붉게 물들인 해가 찬란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테세우스는 가만히 그것을 바라보다가 매서운 눈빛으로 말 위에 올랐다.

평화를 택할 것인지 전쟁을 택할 것인지 선택할 기회를 줬다. 평화를 택한다면 윤택함을 주도록 노력하겠으나 전쟁을 택한다면 처절한 피로써 그 선택을 후회하게 만들어 주리라.

비정하다고 매도하고 잔혹하다고 외쳐도 상관없다. 내 생명과 내게 소중한 것들을 지키기 위해서 내 적들의 피를 삼키고 그 육체를 씹어야 한다면 아주 흔쾌히 씹어주리라.

다만 부디 달려가는 그 길이 순리에서 벗어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벗어난 길을 간다면 그 피가 나와 내 소중한 자들을 덮칠 테고 그것을 피할 길은 어디에도 없을 테니까.

자신의 마음이야 어쨌든 이제 저들의 대답을 들을 시간이다.

*

오피다니 연맹의 9개 부족 치스몬타니, 카브라우게니기, 기구리, 란키엔시스, 로게이, 오리나키, 슈퍼라티이, 수사리, 티부리의 족장들이 저마다 자신의 전사 몇몇을 대동한 채 테세우스를 만나고자 기다리고 있었다.

테세우스가 호라티우스와 나디르를 비롯한 군단병의 호위 아래 저들이 모여 있는 곳에 도착하자 오피다니 연맹의 킨벨이 나서며 입을 열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테세우스님.”

테세우스는 9 부족의 족장들을 쓰윽 살펴보다가 킨벨에게 말했다.

“그래서 대답은?”

킨벨은 잠시 주저하다가 별수 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노여워하지 마시고 들으시길 바랍니다. 저들은 당신에 대한 소문을 확인하고 싶어 합니다.”

“소문?”

“솔리치족의 카오므 장로에게 테세우스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각 부족장에게 전해줬고 부족장들은 그 이야기가 정말 사실이라면 당신이 무슨 명령을 내리든 따르겠다고 합니다. 그 대신 그것을 두 눈으로 확인해봐야겠다고..”

호라티우스가 그 말에 분노를 터트렸다.

“그러니까 감히 테세우스님을 시험해보겠다? 네깟 놈들이? 더 볼 것도 없습니다. 명을 내려주십시오. 당장 저들을 쳐죽이고 저들의 부족도 쓸어버리겠습니다.”

나디르 역시 검자루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명하여 주소서.”

테세우스는 사나운 기세로 오피다니 부족들을 바라보는 나디르와 호라티우스를 손짓으로 물러나게 만든 다음 킨벨과 부족장들에게 켈타이어로 말했다. 지금까지는 라틴어로 대화하고 있었기에 부족장들은 흠칫 놀라며 테세우스를 바라봤다.

“너희는 너희 신들의 이름을 걸고 아버지께 맹세했다. 그분의 명령을 따르기로! 그렇지않느냐?”

“그렇소이다. 하지만 이 같은 내용에도 굴복하겠다 말한 적은 없소이다.”

“통치권을 바치기로 했지만 이 같은 조항은 당시에 당신 아버지는 요구하지 않았소이다. 그랬다면!”

저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테세우스는 조소하는 표정으로 말을 꺼낸 부족장을 바라봤다.

“그랬다면 뭐? 우리와 싸웠을 거라고?”

부족장들과 테세우스의 분위기가 매우 싸늘해지자 급히 킨벨이 나섰다.

“그런 뜻이 아니오라!”

“그만!”

테세우스는 킨벨의 말을 끊은 다음 부족장들을 서늘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래서 너희가 내게 확인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

그러자 기구리 부족의 문양을 가진 족장이 입을 열었다.

“듣기로 사백 명의 전사와 홀로 싸워 그들 모두를 전멸시켰다고 들었소. 사실이오?”

그 말을 하는 족장은 물론 듣는 오파다니 부족장들의 표정엔 비웃음이 가득했다. 어디서 거짓말을 늘어놓는 것이냐 라는 표정이었다.

테세우스는 대번에 이들의 노림수를 파악했다. 그것을 근거 삼아 자신에게 대련을 요청하고 치욕을 안겨줄 속셈이리라. 400 명의 전사를 홀로 맞아 싸운 놀라운 전사가 자신을 증명하는 자리를 피할 리 없고 만약 피한다면 그 자체로 거짓이라는 것을 증명하게 될 테니까.

피한다면 피하는 대로 피하지 않는다면 피하지 않는 대로 치욕을 안겨줄 계산으로 이 자리에 섰으리라. 어떤 식으로든 그걸 꼬투리 잡아 자신의 권위를 훼손시킬 수 있을 것이다.

테세우스는 서늘한 눈빛으로 저들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사실이다.”

“그것을 증명하길 바라오!”

“그것을 증명해주시오!”

테세우스는 가소롭다는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증명을 하든 아니하든 너희는 너희 맹세로 인해 내가 내린 명령을 따르게끔 되어있다. 그런데 너희 마음대로 거기에 조건을 붙인다라..”

“흥! 홀로 400명을 죽였다는 대전사가 싸움을 거부하는 것이오?”

“거짓이로군! 어디서 거짓부렁을!”

“그딴 수작질에 우리가 넘어갈 줄 알았나?”

상황이 점점 더 흉흉해지자 킨벨의 표정은 사색으로 변했다. 이런 결과를 낳고자 그 소문을 전한 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자신이 카오므 장로에게 듣기에 그건 거짓이 아니었다. 하지만 테세우스를 직접 경험하고 그 일을 확신하는 자가 전한 일과 그렇지 않은 자신이 말을 전한 차이 때문인지 저들은 테세우스에 대한 소문을 거짓으로 치부하고 있었다.

“그만두시오! 테세우스님의 말대로 당신들은 신들에 대한 맹세를 저버리는 행위를 하고 있소이다!”

“드루이드 킨벨! 누가 맹세를 저버린다고 했던가? 우리는 그 대전사의 모습을 확인하고 싶을 뿐이다.”

“그렇소이다. 맹세는 지켜질 것이오.”

테세우스는 말없이 주변을 훑어봤다. 각 부족당 10명의 전사들이 저들 뒤에 서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결과에 상관없이 내 말에는 따르겠다 이 말인가?”

테세우스는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맹세는 지킬 것이오.”

“하지만 소문이 당신 스스로 사실이라 인정한 이상, 당신도 당신의 말을 증명할 필요가 있소이다.”

“그렇소이다!”

그걸 왜 자신이 증명할 필요가 있단 말인가? 자신이 저들 400명을 죽였다고 맹세한 것도 아니고 그걸 왜 자신이 증명한단 말인가? 하지만 테세우스는 무심한 표정으로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것을 어떻게 증명하게 할 참인가? 4백 명의 전사와 싸우기라도 하란 말인가?”

“그것까지는 바라지도 않소이다. 대신 우리와 함께한 각 부족의 10명의 전사들과 전투를 치러서 당신의 용맹을 증명해주시오. 우리에게 맹세를 요구한 자가 거짓을 주장하는 자가 아니란 것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겠소?”

“하하하하. 이 얼마나 황당한 소리란 말인가? 너희 스스로 충성을 맹세해놓고 그 맹세가 이제 와 맹세에 대상이 어떤 존재인가에 따라 충성할지 말지를 결정하겠다?”

“언제 따르지 않겠다고 했소이까? 그 대상이 어떤 존재인지 알고 싶을 뿐이오. 뭐 정 두렵다면 거부해도 좋소이다. 홀로 400명을 상대한 전사께서 고작 10명의 전사가 두려운 것이라면 말이오.”

“맞는 말이오. 굳이 그것을 강요할 권한도 생각도 없소이다.”

훗날 빠져나갈 구멍까지 만드는 뱀 같은 노련함에 테세우스는 다시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소문이야 아무래도 상관없다. 하지만 저들이 오만방자하게 이런 요구를 할 수 있는 건 저들 사이에 퍼진 소문이 자신이 조작한 소문이라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리라.

테세우스는 웃음을 그치고 입을 열었다.

“너희 부족으로 돌아가라.”

그렇게 말하자 이 자리에 모인 오피다니 부족들 모두가 비웃는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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