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
96. 하룻강아지.
96.
테세우스는 저들을 서늘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사람은 자신의 명예와 명성과 그 자존심이라는 것에 많은 가치를 부여하기 마련이지만 그것도 참 부질없는 거다.
역사상 유명한 위인들은 둘째치고 직계선조 중 5대만 역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선조의 이름이나 그 가족들의 이름을 꿰고 있는 자가 얼마나 되는가? 그들이 어떤 명예를 지녔고 명성을 지녔으며 어떤 생각으로 살아갔는지 아는 자는 또 얼마나 되는가? 5대라고 해봐야 150년에 불과하다.
150년도 안 되는 사이에 후손조차 그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 이름조차 말이다.
명예와 명성 중요하다. 자존심을 지키는 것 역시 중요하다. 하지만 겨우 그 정도다. 그보다 길 수도 짧을 수도 있지만 겨우 그 정도에 불과하다.
저들의 건방진 태도는 분명 기분을 상하게 만들기에 충분하고도 넘친다. 병사들을 시켜서 모조리 죽일 명분과 힘도 갖추고 있다.
‘비단 병사들이 아니더라도 저들을 죽이는 건 닭 모가지 비트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다. 그러나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내 손에는 피가 흐른다. 고작 사라 없어질 명예와 명성을 지키기 위해 피를 흘리고 싶지는 않군.’
자신이 쌓은 명성과 공적에 어떤 애착도 없다. 그래 봐야 살인하고 얻은 명성 따위에 불과하다. 그걸 위해 손에 피를 묻힌다고?
자신이 죽일 전사들에게도 가족은 있을 것 아닌가? 저들을 아버지나 남편이나 아들로 둔 자들이 있을 것 아닌가? 애착도 없는 명성 따위가 더럽혀졌다고 그런 비극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자신을 죽이려는 적이라면 두말하지 않고 베어버렸을 것이나 어쨌든 명은 따른다고 하니 엄밀히 말해 적은 아니다.
테세우스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하지만..’
지도자는 냉정해야 한다. 우유부단하게 대충 넘기면 결국 문제를 더 키울 뿐, 결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따르는 자들이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보편적 기준을 세워주는 것도 지도자가 해야 할 일이다.
이 자리에는 솔리치 족장으로 추대된 마에도크도 자리하고 있었다. 주변의 조소하는 시선을 뒤로한 테세우스는 마에도크를 바라보며 질문했다.
“솔리치족도 뜻을 함께하는 건가?”
마에도크는 가당치도 않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결단코 그렇지 않습니다. 저희는 그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이 자리에 왔을 뿐입니다. 솔리치족은 테세우스님께 언제나 모든 충성을 다할 것입니다.”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던 테세우스가 우렁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10명? 가당치도 않군. 돌아가라! 가서 각 부족당 50명의 전사로 만들어서 되돌아와라. 그러면 얼추 400명에 가깝겠군.”
솔리치를 제외해도 아홉 부족이니 400명이 아니라 450명이다.
그 말에 저들은 다소 황당한 표정으로 테세우스에게 반문했다.
“그게 무슨 소리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나? 너희 원하는 대로 해주겠으니 가서 50명씩 만들어오란 말이다! 시일은 일주일 후. 마찬가지로 그때까지 내가 명한 모든 것을 시행해서 내 앞에 대령해라. 명심하도록. 만약 하나라도 시행되지 않았을 시에는 그때는 너희 땅 가운데 숨 쉬는 자가 없을 것이다.”
*
“오만한 놈. 끝까지 허세를!”
그러자 다른 족장이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400명을 상대한 전사가 아니오? 10명이 턱없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겠지.”
함께 비웃음을 터트리던 족장이 다소 정색하며 말했다.
“과장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범상치 않아 보이는 건 틀림이 없으니 일단 저자의 말대로 따릅시다. 10명이든 50명이든 어차피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지 않소?”
당장 죽일 생각은 없었다. 테세우스의 소문이 거짓이라는 것을 모든 부족민에게 확인하게 만들어 그를 신뢰할 수 없는 자로 만들기 위한 계략이었다. 아울러 그 소식을 전한 드루이드 킨벨의 영향력 역시 덩달아 줄어들 것이다.
그것에 분노한 테세우스가 병사를 움직여 자신들을 죽이려고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맹세를 깰 수 있는 명분을 얻게 되는 셈이다.
세르토리우스군을 홀로 상대할 수 없어 킨벨의 제안대로 별수 없이 충성을 맹세하기는 했으나 정당한 이유 없이 부족을 친다면 맹세의 효력도 사라지는 셈이다. 거짓된 명예가 더럽혀졌다는 이유로 군을 일으킨 테세우스를 따르려는 부족민이 어디 있을까?
일단 일이 그렇게 되면 킨벨은 죽이고 테세우스는 인질로 삼아 켈티시 연맹과 함께 루시타니아의 세르토리우스를 상대한다. 그러면 맹세는 맹세대로 지킨 셈이고 실리는 실리대로 취할 수 있다.
400명의 전사를 홀로 죽여? 어리숙한 자는 그 소문에 겁에 질리겠지만 자신들은 아니다. 저 나이라면 전장의 향기도 제대로 맡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400명의 전사를 죽여?
“10명에도 겁먹고 싸우지 않고 거부하면 어쩔까 염려했건만 50명이라니.. 제법 강단은 있어 보이지만 그런다고 우리가 속을 줄 알았던 건가? 제 무덤을 스스로 파는군. 일단은 따릅시다. 아직은 그래야만 하는 입장이니.”
“야속하다고 하지 말아라. 네가 무리한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면 우리도 이렇게까지는 하지 않았을 것이야.”
저들끼리 작게 속삭이며 고개를 끄덕이던 오피다니 족장들은 큰소리로 대답했다.
“좋소!”
“좋소이다.”
“일주일 뒤! 이곳 이우리아 해변으로 오겠소!”
테세우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저들은 데리고 왔던 병력을 데리고 돌아갔다.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나디르가 나지막이 말했다.
“저들은 분란을 일으킬 자들이 분명합니다. 살려두면 필히 테세우스님을 찌르는 비수가 될 겁니다.”
테세우스는 피식 웃으면서 나디르를 바라봤다.
“무대에 오를 배우가 없어서야 되겠나?”
정확히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그 말에 느껴지는 바가 있었던 나디르는 더 말을 꺼내지 않았다.
“······.”
하긴 테세우스가 잔혹한 자는 아니었으나 자신의 적은 결단코 살려두지 않았다. 따라서 나디르는 일어날 일들이 머릿속에 확연하게 그려졌다.
생존하기 위해서 기본적인 요소가 바로 주제 파악이다. 자신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언제까지 버틸 수 있는지를 알아야 비로소 생존준비를 시작할 수 있다.
사막을 여행 중이라면 물은 몇 일치를 챙겨야 하는지, 식량은 얼마를 챙겨야 하는지, 그것을 얼마나 운반할 수 있는지, 그래서 어디까지 이동할 수 있는지 등 모두 자신의 한계를 기반으로 계산된다. 자신의 한계를 과신한다면 죽음을 맞이할 것이고 평가 절하한다면 그만큼의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 이렇듯 자신을 정확하게 보는 일은 생존의 기본이다.
자신을 정확하게 보는 것이 기본이라면 사막의 기후나 환경이나 이동 경로상 위험요소를 살피는 일은 생존의 필수다.
스스로를 맹신하는 자들은 모래폭풍의 무서움도 체감하지 못한다. 다 죽었어도 자신만은 살아남을 거라 맹신한다. 자신도 사막도 보지 못하는 자들이 맞이할 결과는 결국 하나뿐이다.
사막에 모래폭풍이 칠 기미가 보인다고 솔리치족의 장로 카오므가 경고했고 저들의 드루이드 킨벨도 경고했건만 귓등으로도 처듣지 않았으니 그 결과야 더 말해 뭐하겠는가?
*
땅 땅 땅
모루 위에 달아오른 철을 놓고 망치질을 하던 파이살이 고개를 돌려 대장간 안으로 들어선 이를 바라봤다. 그는 바로 테세우스였다.
“나무라지 마십시오. 벨리키의 적을 벨 검을 조금이라도 가까운 곳에서 만들고자 한 바람이었을 뿐이니..”
군에 몸담은 이상 테세우스는 그의 상관이다. 따라서 파이살은 전과 달리 정중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테세우스는 별말 하지 않고 들어와 주변에 풀썩 앉았다. 그가 왜 군에 가담했는지 왜 이곳까지 따라왔는지 일일이 확인할 생각은 없었다. 자신이 부모도 아니고 파이살은 파이살 스스로의 선택으로 이곳에 있는 것이니 자신이 상관할 부분은 아니었다. 다만 그의 마음을 편하게 해줄 요량으로 입을 열었다.
“어디서 망치를 잡는지까지는 벨리키가 나무라지 않을 거다. 일단 검은 아니니 말이야.”
그 말에 파이살이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테세우스에게 다가왔다. 자리에 앉은 그가 갑옷을 벗고 있었기에 갑옷 벗는 것을 도와주기 위해서였다.
파이살은 갑옷의 가죽이나 끈이 피로 인해 새까맣게 물든 것을 보고 테세우스가 헤쳐온 사투를 속으로 짐작했다.
“더 상하기 전에 가죽과 끈부터 교체해야겠습니다.”
“그렇게 해야 한다면 그렇게 해. 지금부터는 로리카 하마타를 입어도 되니.”
파이살은 고개를 주억이며 묵묵히 끊을 풀었다. 그렇게 등 뒤의 줄을 풀어내는 파이살에게 테세우스가 말했다.
“철괴가 조금 있나?”
“괜찮은 철괴를 꽤 많이 얻어놓았습니다. 다만 인도산 철괴는 아직 구하지 못했습니다.”
인도산 철괴에 대한 기묘한 집착을 알고 있는 파이살이 콕 집어서 말하자 테세우스가 웃으며 말했다.
“어차피 지금은 그것을 가지고 시험해볼 여유도 없어. 하지만 어떻게든 구해봐. 구해지는 대로 이야기하고. 그나저나 이곳의 괴철로는 쓸만한가?”
“생각보다는 쓸만합니다. 아무래도 켈타이인들의 대장장이가 마우레타니아의 대장장이들보다 더 뛰어난 것 같습니다. 벨리키를 봐도 그렇고. 어쨌든 무기를 만들거나 방어구를 손질하는 데는 지장이 없습니다.”
고개를 주억이던 테세우스가 파이살에게 말했다.
“창을 하나 만들 생각이야. 단순히 찌르는 용도의 창이 아니라 적을 베거나 찍어낼 수도 있는 형태의 창을 말이야.”
제일 먼저 방천화극의 형태를 떠올렸지만 그런 형태는 나중에 다마스쿠스 강의 비밀을 알아낸 다음 만들기로 했다. 간단한 것이 최선이라고 창을 만들되 창날이 길게 이어진 일종의 피(鈹)를 만들기로 결정했다.
“특이한 형태군요. 제대로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검신을 창에 결합한 형태를 말하는 겁니까?”
테세우스가 긍정하는 표정을 짓자 파이살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균형 맞추려면 꽤 어렵겠군요. 창두 부분을 부실하게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고 창대의 뒷부분에 무게추 식으로 달면 음 창대에 무리가 갈지도 모르니 적당한 비율을 찾아내는 게 관건이겠습니다.”
파이살의 말에 테세우스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나무? 아니 창대도 아예 쇠로 만들 생각이다.”
“창대를 쇠로? 쉽지 않은 작업입니다. 낭창낭창 휘면서도 복원력이 강한 탄성 높은 쇠를 만드는 건 아시다시피 쉬운 일이 아닙니다. 게다가 구상한 것을 보니 통짜로 이어진 형태로 만들려는 것 같은데.. 그건 너무.”
“그래서 네게만 맡긴 것이 아니라 같이 작업하려고 오지 않았나?”
테세우스는 바로 말을 이었다.
“창두와 창미에 달릴 날 부분은 내가 집중적으로 단조할 테니 파이살 너는 창대를 중점으로 맡아줘.”
“실패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도 알고 계시는 것이겠죠?”
“그렇게 말하는 것치고는 너무 눈빛이 반짝거리는 것 아닌가?”
“대장장이에게 새로운 시도는 즐거운 일이지요. 대장장이의 명예를 걸고 무기 제조도 테세우스님을 뛰어넘어볼 생각입니다.”
벨리키의 죽음 이후 파이살이 대장장이 일을 대하는 태도가 훨씬 더 진중해졌다. 재능있는 파이살이 매진하기로 마음을 먹었으니 특별한 성과가 나올 것은 어쩌면 자명한 일이었다.
“그러면 나야 나쁠 것이 없지. 게다가 어차피 이건 시험작에 가까워. 실패하더라도 상관없다. 일단 적당한 형태와 비율을 찾는 작업이니 부담 없이 작업에 임해도 상관없겠지.”
“으흠.. 혹시 인도산 철괴와 연관이 있는 겁니까?”
“시험해봐야겠지만 일단은 그런 셈이지.”
“대체 뭘 구상하고 계신 것인지 모르겠지만 테세우스님께서 구상한 것이니 기상천외한 물품이 나오겠군요.”
테세우스의 발상을 이어받은 파이살 본인부터 대장장이 실력이 월등하게 높아졌기 때문에 파이살은 뭔지는 모르겠지만 심히 기대되었다.
“아직은 그저 추측일 뿐이지. 그러니 헛물은 켜지 말도록. 나도 실험해봐야 알 수 있어.”
파이살은 눈을 빛내며 테세우스에게 질문했다.
“그렇군요. 단조는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벨리키식입니까? 테세우스식입니까?”
벨리키식은 켈타이 특유의 제조법을 말하고 테세우스식은 리처드가 얻은 다마스쿠스 제조법을 말했다.
“적절하게 섞어서. 더 나은 것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