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마 무신의 기억-97화 (97/298)

# 97

97. 마지막 기회.

97. 마지막 기회.

다른 모든 문제를 젖혀두고 오 일이 넘도록 대장간에서 파이살과 사투 아닌 사투를 벌인 테세우스는 그 결과물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아닌 말이 아니라 달궈진 쇠를 다루다가 위험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작업환경 자체가 그리 훌륭한 환경이 아니었기에 테세우스는 별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막판에 쓸만한 결과물이 탄생했다.

“물결치는 문양이 아름답군요.”

파이살에 말에 테세우스는 땀을 손으로 훔쳐내며 눈앞의 창을 바라봤다. 말했지만 창이라기보다는 피(鈹)에 가까운 형태로 파이살이 말했던 것과 같이 검신이 달린 창의 형태에 가까웠다. 창두뿐만 아니라 창미에도 적을 찌를 수 있게 뾰족한 형태로 마무리되어 있었다. 다만 군데군데에 물결 문양이 있긴 하지만 이 창이 다마스쿠스 강철로 만들어졌다는 말은 아니었다.

‘인도산 철을 얻어야 한다. 다마스쿠스의 비밀은 역시 제조법의 문제가 아니었다. 다마스쿠스 강을 나타나게 만든 철괴를 구할 수만 있다면 다마스쿠스 강철을 내 손으로 뽑아낼 수 있다.’

눈앞의 결과물도 결과물이지만 테세우스는 일종의 확신을 얻었다. 그때가 된다면 이보다 가볍고 단단하고 날카로운 무기와 튼튼한 방어구를 얻을 수 있으리라.

시험작에 가깝긴 했지만 시행착오 끝에 나온 이 창도 매우 쓸만했다. 후에 완성할 무기의 프로토타입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무거워서 어지간한 전사들도 부담스러울 무게겠지만 테세우스님의 애병이 되기에는 충분한 무기입니다. 이런 무기에는 응당 이름이 있어야 합니다.”

매우 지친 표정의 파이살이 자부심이 넘치는 얼굴로 테세우스에게 말했다. 그와 테세우스의 합작품이었고 만족스러운 결과물이 나왔기에 자부심을 느낄만했다.

테세우스는 담담한 표정으로 한 손으로 창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보아디케아.”

“보아디케아?”

파이살의 반문에 테세우스가 간단하게 대답했다.

“벨리키의 본래 이름이었다.”

그 말에 파이살의 표정이 변했다.

“적절하군요. 아니 그것 외에는 없겠습니다.”

*

오피다니 부족장들과 약속된 일주일 후 이우리아 해변.

그곳에는 수많은 켈타인들이 환호를 지르며 벌어질 대결에 대해 기대하고 있었다.

“와아아아아!”

“와아아아!”

테세우스는 오피다니의 각 부족들이 가져온 식량과 자원을 대거 풀어 이 대결 자체를 일종의 축제로 만들어버렸다.

그런 그의 수완에 오피다니의 9개 부족 치스몬타니, 카브라우게니기, 기구리, 란키엔시스, 로게이, 오리나키, 슈퍼라티이, 수사리, 티부리의 부족장들은 크게 당황함과 동시에 분노했다. 하지만 모든 부족민들이 즐거워하는데 자신들만 분노를 터트릴 수는 없는 노릇이라 그들의 표정은 상당히 떨떠름한 표정으로 변해있었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왕서방이 받는다는 표정이랄까? 심히 아까웠다. 저 식량과 자원이 부족의 것이기에 아까운 것이 아니다. 모두 자신들의 것이었다. 자기들의 것을 가져다가 본인의 인기를 높이는 것에 사용하니 분통이 터질 지경이었다.

모든 식량을 걷으며 테세우스가 강제로 우리의 것을 취한다고 선동했다. 당연히 분노를 일으킬 정도로 과하게 징집했고 뒷구멍으로 짭짤한 수입도 제법 챙겼다.

하지만 테세우스가 그렇게 걷은 식량과 자원으로 이렇게 축제를 열어버림으로 그 모든 계략이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도리어 자신들만 테세우스를 매도한 속 좁은 자들로 비추어질 확률이 높았다.

“제법. 제법이로군.”

“어쩌면 50명 대 50명의 집단전투로 여흥을 돋을 계획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요?”

“로마 군단병과 각 부족의 전사를 맞붙게 할 가능성도 있단 말이오! 애당초 그것을 노리고!”

“이런 분위기라면..”

즐거워하면 즐거워했지 그걸 걸고 넘어가는 부족민은 거의 없을 것이다.

“테세우스 그가 또 다른 술수를 부리기 전에 먼저 선수를 쳐야 하오.”

“옳소! 약속을 이행하라고 밀어붙인다면 그도 별수 없을 거요.”

*

테세우스는 먹고 마시며 요란한 환호를 터트리는 오피다니 연맹의 켈타이족을 바라봤다.

군중은 우매하다. 고상한 대의나 가치 따위 개나 주라지. 잘 먹고 잘 살 수 있으면 그게 장땡인 거다. 아이들만 봐도 그렇다. 사탕 하나라도 물려주고 뭔가를 시키면 아주 좋다고 따른다.

‘전쟁 준비에 돌입하느라 즐겨야 할 축제를 제대로 즐기지 못했을 것이고 외부인이 통치권을 잡았으니 축제가 아예 물 건너갔을 거라 여겼을 터, 그런 상황에서 축제가 벌어졌으니..’

바라마지 않던 축제지만 축제가 벌어질 거라 예상한 부족민은 거의 없었다. 도리어 저들은 분노와 살의를 가지고 자신에게 몰려왔다. 피와 살육 가운데 비통함과 절규가 흘러넘칠 거라 생각하고 나름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왔을 것이다.

당연히 저들의 살벌한 모습에 호라티우스와 나디르를 비롯한 테세우스를 따르는 모든 자들이 잔뜩 긴장하며 대항할 준비를 하고 있었고.

살벌한 두 진형 가운데 태연한 사람은 오직 테세우스뿐이었다.

심지어 그는 저들이 반란을 일으킬 것에 대한 어떤 대응책도 없이 저들을 맞이했다. 이에 호라티우스 등이 극심하게 반대했지만 테세우스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이유는 한 가지. 저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전쟁이 아니라 축제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쟁과 피를 원하는 자들은 부족장들과 그를 따르는 기득권 세력 몇몇에 불과했다.

축제를 원하는 자에게는 축제를 피를 원하는 자에게는 피를 준다. 축제를 원하는 자들에게도 피와 살육을 안겨줄 이유가 무엇인가? 그래서 번거롭지만 무대를 꾸몄다. 무대가 성대하게 마련되었으니 이제는 화려한 극을 시작할 차례다.

‘저기 피를 원하는 배우들이 몰려오는군. 너희에게 준 마지막 기회다. 부디 잘 선택하길 바란다.’

테세우스는 무심한 눈으로 자신에게 몰려오는 부족장들을 지켜봤다.

“축제를 베풀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오나 이제 약조를 지켜주십시오.”

“약속대로 당신의 실력을 증명해주시오!”

테세우스는 눈매를 좁히며 미미하게 고개를 좌우로 흔들면서 마련된 단상의 의자에서 일어났다.

“약속은 지켜질 것이다. 나의 실력을 증명하고자 하는 너희의 의지를 잘 알았다. 하지만 이 좋은 날 살육이 벌어지고 비통한 음성이 울려 퍼지는 것을 원치 않으니..”

테세우스가 그렇게 말했을 때 그가 행여라도 대결을 피할까 염려가 되었는지 오피다니의 부족장들이 급히 외쳤다.

“상관없소이다.”

“약속을 지키시오!”

테세우스는 말을 멈추고 서늘한 눈빛으로 말을 꺼낸 족장과 그에 동조하는 자들을 훑어봤다. 일촉즉발의 상황이라 달아오른 분위기는 순식간에 싸늘하게 식고 좌중이 조용해졌다.

“나 퀸투스 세르토리우스 테세우스. 적어도 공적으로 뱉은 약속은 지킨다. 하나 응하지 않아도 되는 너희의 요구에 내가 응했으니 이 일 후에 너희들도 나의 요구에 응해야 하리라. 동의하는가?”

“동의하오!”

“물론이오! 약속을 지키기만 한다면! 그리하지 않을 까닭이 없소이다!”

테세우스는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병사들에게 말했다.

“대결에 참여하고자 하는 전사들에게 나눠줘라.”

병사들은 수레를 끌고 왔는데 그곳에는 나무로 만든 검이나 방패 창들이 수북하게 쌓여있었다. 그게 450개에 달했다.

“내 검은 피를 봐야 할 때만 뽑힌다. 전사의 검은 응당 그러할 것이다. 그러니 묻겠다. 오늘 너희는 나의 피를 보려고 이 자리에 섰느냐?”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신들에게 맺은 맹세를 부족민들 앞에서 저버리는 대답이 되니 당연히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었다.

“그렇지 않소이다.”

“그렇지 않소. 우리는 당신의 실력을 보고 싶을 뿐이오.”

“나 역시 그러하다. 그러니 조잡하지만 받아라. 오늘을 위해 준비한 것들이니. 마찬가지로 너희 전사의 양심에 맡기겠다. 본인이 치명상을 입을 만한 곳에 타격을 입은 자들은 알아서 전투에서 빠져라.”

테세우스는 옆에 서 있던 나무창과 나무 검을 착용한 다음 해변가로 뛰어내렸다. 오피다니 연맹의 켈타이인들은 테세우스의 당당한 배포와 세심한 안배에 그에 대한 적의가 눈 녹듯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테세우스는 적당한 곳에 가서 창을 모래 위에 박아넣고 우렁차게 소리쳤다.

“오늘 나와 함께 축제의 여흥을 더할 자 누구냐? 한 번에 50명? 너무 적다. 나와 대결을 준비한 너희 모두 한꺼번에 나와라. 모조리 쓰러뜨려 줄 터이니.”

광오한 테세우스의 모습에 켈타이인들은 가슴이 뜨거워져 참지 못하고 고함을 질렀다.

“와아아아아!”

“와아아!”

환호하는 켈타이인들의 마음속에 테세우스에 대한 소문이 사실이고 아니고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의 모습만으로도 그를 인정하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

“와아아아아!”

“와아아아!”

자신들의 예상과 다르게 요상하게 흘러가는 분위기에 부족장들은 뭔지 모를 박탈감과 분노를 느끼며 자신들에게 충성을 바치는 50명의 정예들에게 외쳤다.

“으드득! 쳐라!”

“공격해라!”

“저자의 뜻대로 해줘라!”

전사들은 다소 황당함을 느꼈지만 명이 떨어졌으니 그대로 수행할 뿐이었다. 결국 450명 전원이 테세우스의 삼면을 둘러쌌다. 왜 삼면인가 하면 테세우스가 바다를 등지고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나무로 만든 무기지만 나무라고 해도 인체보다는 단단하다. 그것에 제대로 얻어맞으면 살이 터지고 뼈가 부러지고 피가 튀어 오른다. 강철무기가 아니라 나무무기라 할지라도 능히 죽음에 이르게 만들 수 있는 흉기에 가깝다.

싸워야 할 대상이지만 전사들의 표정에는 감탄이 떠올랐다. 테세우스는 그는 심지어 어떤 방어구도 입지 않고 있었다. 웃통을 까고 기다란 창과 검을 차고 있을 뿐 흔한 방어구 하나, 투구하나 착용하지 않았다.

홀로 450명의 전사를 앞에 두고도 오시하는 그를 바라보는 전사들의 마음에는 자연히 경탄부터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자신들은 명에 따를 뿐이다. 따라서 앞열에 있던 전사들이 일제히 모래를 박차고 테세우스에게 달려들었다.

“와아아아아!”

“와아아아”

어찌나 거세게 뛰어가는지 튀어 오른 모래가 저 하늘까지 솟았다가 땅에 떨어졌다. 그 광경을 모든 사람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숨죽여 지켜보고 있었다. 오직 단 한 명 테세우스만이 편안한 표정으로 지금의 광경을 주시하고 있었다.

*

일전에 400명의 메투리치전사를 베었지만 이렇듯 적에게 완전히 포위되는 경우를 피하며 싸웠다. 지속적으로 움직이며 자신이 유리한 전장을 선택하며 적을 요격하듯 베어 넘겼다.

하지만 테세우스는 그때보다 지금의 전장이 훨씬 더 편안했다. 그간의 경험도 경험이지만 당시 메투리치족을 맞닥뜨렸을 때보다 유리한 점이 여러 개 있었기 때문이다.

첫째 어떻게 달려오고 포위하든지 간에 뒤편의 바다에서 적이 나타나는 경우는 상대적으로 극히 드물 수밖에 없다.

둘째 저들이 사용하는 무기 중 화살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수시로 장소를 바꾸며 계속해서 체력을 소모하며 저들을 상대할 필요가 없다.

셋째 나무 검이 위협적이라고는 하나 강철 검에 어찌 비하겠는가? 그런 강철검에도 상처를 입지 않았던 테세우스이니 어지간해선 상처를 입을 염려 자체가 없다.

마지막으로 이 전투에 승리하든 패배하든 자신은 무조건 승리한다. 이미 이긴 전투다. 자신은 져도 이기지만 저들은 이겨도 패배한다. 자신이 안배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오피다니의 부족민들이 이미 자신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패배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방심할 생각이 없기도 마찬가지.’

테세우스는 해변에 박혀있는 창을 뽑아 옆구리에 끼웠다가 길게 잡고 돌리며 앞에 다가온 세 명의 전사들을 그대로 후려쳤다.

퍼어억 퍼어억

“크허허허헉!”

“크허헉!”

테세우스의 창에 얻어맞은 전사들은 달려오던 가속력에도 불구하고 몸이 뒤로 붕 뜨더니 대번에 모두 해변에 나뒹굴었다.

진짜 무기였다면 즉사였겠지만 나무창에 불과해서 목숨을 건졌다. 하지만 나무창에 얻어맞았다고 해도 테세우스가 휘두른 힘이 대단했기에 얻어맞는 순간 기절이라도 한 모양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꽤 심한 상처를 입었을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그것까지 고려해줄 생각은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테세우스가 자신의 안전을 염려해 실제 무기가 아닌 나무 무기로 바꿨을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실상은 그 반대였다. 그렇게까지 배려하고 양보한 테세우스이기에 더는 사정을 봐줄 생각이 없었다.

테세우스는 사나운 기세로 도리어 멈칫거리는 전사들을 향해 쇄도하며 창을 급소에 찔러넣었다.

훙후후훙

“컥 커커컥”

“커어억!”

그 모습은 거대한 해일에 모든 것이 뭉개지는 모습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테세우스의 창에 얻어맞은 전사들은 거의 동시에 튕겨 나가듯 사방으로 나뒹굴었다.

테세우스는 바닥에서 신음을 터트리며 꿈틀거리는 전사를 발로 걷어차며 소리쳤다.

퍼억!

“싸우지 못하겠으면 거치적거리지 말고 꺼져! 죽여버리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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