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
98. 마지막 기회.
98.
한순간에 열 명도 넘는 전사들이 테세우스에게 크게 당했다. 실전이었다면 즉사였을 것이고 지금 역시 적지 않은 상처를 입은 것으로 보였다. 테세우스의 놀라운 무용에 오피다니 전사들은 긴장한 표정으로 방패를 앞세우고 조심스럽게 전진했다.
테세우스가 열 명이 넘는 숙련된 전사마저 순식간에 처리할 수 있는 실력자라는 건 방금의 대결로 똑똑히 확인했다.
하지만 그가 제아무리 대단한들 자신들은 여전히 4백 명이 넘는다. 그에게 당한 전사들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나 저들은 방심하다가 당한 것에 불과하다. 이런 식으로 방패를 앞세우고 공격을 한 번이라도 차단할 수 있다면 손이 두 개뿐인 테세우스가 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단 한 번의 격돌로 이우리아 해변은 숨이 막힐 것 같은 긴장감에 휩싸였다. 전투에 임하는 전사들은 말할 것도 없고 지켜보는 자들도 모두 입을 다물었다.
오피다니 족장들은 서로를 마주 봤다. 방심한 탓도 있겠지만 어쨌든 10명의 전사를 그야말로 순식간에 쓰러뜨렸다. 그들의 눈에는 전과 달리 불안감이 서려 있었다. 그 때문인지 서로를 바라보긴 했지만 어떤 말도 뱉지 않고 이어지는 대결을 주시했다. 입을 열면 그 불안이 증폭이라도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창이야말로 만병지왕(萬兵之王)이다. 검을 만병지왕으로 일컫는 경우가 있으나 모든 무기의 기본이 검에 있기에 그리 부를 뿐, 실전성에서는 창에 비할 바가 아니다. 창이 대두됨으로 인간은 자신보다 강력한 맹수조차 수월히 사냥할 수 있게 되었다.
창의 대표적인 장점으로는 다른 무기에 비해 월등하게 사거리가 길다. 단순히 찌르는 용도로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투창으로 적을 요격할 수도 있다. 인간이 맹수를 힘으로 이기겠는가? 순발력과 힘, 모든 것이 열세다.
하지만 창의 찌르기를 막아낼 수도 없는 맹수로서는 속수무책으로 공격을 허용할 수밖에 없다. 인간은 먼 거리에서 몸을 피하며 과녁판에 가까운 맹수를 찔러 격퇴하거나 투창으로 맹수의 몸에 창을 박아넣어 죽이면 된다.
창을 들고 싸웠을 때, 검을 들고 싸웠을 때 어떤 것이 생존확률이 높고 훨씬 더 효율적으로 적을 격퇴할 수 있겠는가? 단연코 창이다.
맹수를 상대할 때도 그러한데 그보다 약한 인간인들 다르겠는가? 다만 인간은 맹수와 다르게 창의 날카로움을 막아낼 방어수단을 지니고 있다. 방패로 창을 막고 창대를 가격해 부러뜨릴 수도 있고 거리를 좁혀 창을 유효사거리를 무효화시킬 수도 있는 지혜가 있다.
테세우스와 대결에 나선 전사들은 숙련된 정예들이다. 창을 어떻게 해야 무력화할 수 있는지 모를 자들이 아니었다.
다만 창대를 부러뜨리는 일은 생각하지 않았다. 나무검이 아니라 철검이었다면 시도했겠지만 나무로 나무를 내리쳐 봐야 자신의 손만 아플 뿐이고 도리어 반격을 당하기 쉬워진다. 대신 집단전술을 이용하기로 암묵적으로 결의했다. 어떤 약속이나 훈련도 하지 않았지만 숙련된 전사들이라 지금 이 상황에서 가장 효율적인 전술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했다.
게다가 검과 창을 쥔 전사들이 적절하게 섞여 있는 상황, 단 한 번, 단 한 번만 멈칫거리게 만들면 적의 몸통에 무기를 박아넣을 수 있다. 오피다니 전사들은 맹수를 상대하는 심정으로 치밀하게 계산하며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무기를 막는 대표적인 수단은 방패다. 매우 효율적인 수단이지만 대개 이 방패는 같은 인간끼리 싸울 때 주로 사용된다. 맹수와의 전투에서도 방패를 십분 활용하는 자는 없다. 아니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유는 간단하다. 곰과 사자의 공격을 방패로 막을 수 있을까?
맹수의 공격은 막는 게 아니라 피해야 한다. 막는 그 즉시 팔이 부서지든 몸이 뒤로 날아가든 결국 맹수의 먹잇감으로 전락할 테니 말이다.
이 자리에 모인 누구도 전사들의 대응을 어리석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정석 그대로의 대응방법이었다. 테세우스가 뛰어난 전사라는 것은 알지만 이건 너무 무모한 대결이었다. 방패로 이뤄진 숲을 대체 혼자 무슨 수로 뚫는단 말인가?
완벽한 대응태세를 취하고도 패배한다면 그와 싸우는 전사들이 어리숙하다는 소리인데 부족민 모두가 알다시피 저들은 정예 중의 정예였다. 따라서 다음에 나타날 광경이 그들의 머릿속에 선명하게 그려졌다.
하지만 이들은 눈앞의 테세우스가 맹수 중의 맹수라는 것을 간과했다. 단순히 기세 따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부분에서 그러했다.
테세우스는 급소를 방어하고 전진해오는 오피다니 전사들을 향해 달려가 거세게 창을 내질렀다.
퍼어억
콰지지직
방패가 산산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방패를 앞세우고 있는 자들은 테세우스의 거센 힘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뒤로 내동댕이쳐졌다. 창을 내지르는 족족 방패를 내세운 자들은 공중으로 얼마간 떠올랐다가 해변에 나뒹굴었다.
“크허허헉!”
“커허헉!”
고통 섞인 비명이 울려 퍼졌고 이에 그것을 지켜보던 모든 이들이 크게 놀랐다. 하지만 그것을 곁에서 직접 확인한 오피다니 전사들보다 놀란 자들은 없었다.
테세우스는 저들이 놀란 감정을 수습할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았다. 그대로 저들의 품안으로 파고 들었다.
테세우스는 눈앞에서 짓쳐드는 전사의 가슴을 창두 부분으로 찍었다. 창두라고 해봐야 뭉뚱한 나무뭉치에 불과했기에 예리한 살상력을 지닌 건 아니었다. 하지만 테세우스의 창에 격타당한 전사는 입에서 피를 뿜으며 뒤로 날아갔다.
머리를 찌르려다가 마음을 바꿔서 가슴을 격타했기에 그나마 그 정도로 끝날 수 있었다. 테세우스는 눈을 희번덕거리며 다음 사냥감을 포착했다.
그리곤 득달같이 달려들어 먹잇감의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그가 휘두른 창에 머리를 얻어맞은 전사는 그대로 픽하니 쓰러졌다. 그 모습만 봐서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하기 어려울 정도였지만 테세우스가 마지막 타격의 순간에 힘을 줄였기에 죽지는 않은 것으로 보였다.
성가시고 답답한 일이다. 저 스스로 목에 고삐를 채운 셈이니. 하지만 세심한 제어력과 절제력을 키울 수 있는 훈련이라 테세우스는 기꺼이 그것을 받아들였다. 몸을 덥히고 감각을 날카롭게 만드는데도 이만한 훈련이 없다고 여겼다. 다소 황당하지만 다시 말해 저들의 계략에 테세우스에게는 훈련대용에 불과했다는 소리였다.
붕부부붕 붕
현란하게 휘둘러지는 창대에 얻어맞은 전사들이 지푸라기 인형마냥 계속해서 해변에 픽픽 나자빠졌다.
하지만 그런 그를 기다렸다는 듯 창을 쥔 자들이 사방에서 한꺼번에 짓쳐 들었다. 테세우스는 일단 코앞까지 다가온 검전사에게 창대를 휘둘러 방패째로 저편으로 날려버린 다음 창전사들의 공격은 피하지도 않고 가만히 주시했다.
저들의 나무창이 몸에 닿으면 실제로 죽지는 않겠지만 스스로 세운 규칙상 죽은 목숨이기에 이 전투는 자신이 패배한 셈이 된다. 하긴 퍼포먼스는 이 정도면 충분했다. 슬쩍 살펴본 저들의 표정에는 놀람과 경탄이 가득했으니까.
그러나 테세우스는 아예 패배 자체를 염두에 두지 않았었다.
테세우스는 그대로 자신을 향해 내질러진 창들을 기기묘묘한 몸놀림으로 슬쩍슬쩍 피해내고 몇 개는 창으로 방향을 뒤튼 다음 한꺼번에 양 옆구리에 끼워 넣듯이 잡아챘다.
“으랴!”
그리곤 그대로 몸을 뒤틀어서 창을 잡고 있는 자들의 균형을 일거에 무너뜨렸다. 테세우스의 엄청난 힘에 오피다니 전사들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무슨 인간의 힘이 이렇게 대단하단 말인가? 그 모습을 겪고 지켜보던 오피다니 부족민들은 소문이 부족장들의 주장대로 거짓이 아니라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투가 잠시 소강상태에 빠져들자 테세우스가 허리춤의 검을 마저 뽑아 들며 전사들을 향해 일갈했다. 한 손에는 창, 한 손에는 검. 바로 항우가 주로 사용했던 전투형태였다.
“오피다니 연맹은 겁쟁이들만 모인 소굴인가? 죽을 위험이 현저하게 낮은 전장에서도 도망칠 기색이 역력하니 너희 수준을 알겠다. 축제의 여흥을 더하기는커녕 내 땀마저 식을 지경이라니!”
테세우스의 강한 도발에 주춤거리며 물러서던 전사들이 다시 사나운 기세를 품었다.
“그래야지. 그래야 훈련할 맛이 나지.”
훈련? 지금까지 자신들을 훈련대상으로 삼았단 말인가? 자존심이 크게 상한 저들은 눈에 불을 켜고 테세우스를 잡아먹을 것처럼 노려봤다.
“그렇게 쳐다보면 내가 쓰러지기라도 하나? 아니면 내 몸이 찢어지기라도 하나? 와라! 안 온다면 내가 직접 가지.”
테세우스는 그대로 해변을 질주해서 방패를 앞세우고 있는 자들을 후려쳤다.
콰아아앙
결단을 새롭게 한다고 없던 힘이 생기진 않는다. 저들의 전의를 다지고 심기일전하여 테세우스와 맞서 싸웠지만 그 결과는 종전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테세우스의 창은 방패와 방패를 쥔 사람까지 한꺼번에 뒤편으로 날려버렸다. 하지만 이번은 조금 달랐다. 날아가지 않는 자들도 있었던 것이다.
테세우스가 의아한 눈으로 그곳을 바라보자 그곳에는 방패를 쥔 자들 뒤편으로 그들을 지탱해주는 자들이 있었다. 하지만 무시무시한 충격을 고스란히 받아내야 했던 방패수들은 그 팔이 아작났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테세우스의 품으로 파고들 기회가 생긴만큼 전사들은 이를 악물고 테세우스를 향해 쇄도했다.
“와아아아아!”
“와아아!”
수십 명 아니 백 명에 달하는 인원이 무력화될 때까지 자신들은 무기로 그의 살갗조차 긁지 못했다. 치욕스러운 일이었다. 따라서 오피다니 전사들은 죽기 살기로 테세우스에게 달려들었다.
테세우스는 그런 그들은 무심한 눈으로 보며 생각에 잠겼다.
‘음. 확실히······. 보다 정확한 것은 이 전투가 끝나면 알 수 있겠지.’
여러 가지 이유가 많지만 개인적인 의문점을 확인해보기 위해 이번 전투를 계획한 것도 있었다.
한 번에 하나의 이득만 노리지 않는다. 그럼 적이 자신의 계략을 추측하기 너무 쉬워지지 않는가? 따라서 테세우스는 하나의 계략을 통해 최소 두 가지 이상의 이득을 취할 수 있도록 고려하는 편이었다. 이번 전투 역시 마찬가지였다.
적아(敵我)를 분명히 가르고 아군이 될 자들의 충성을 얻어낸다. 이것은 쓸데없는 피를 줄이고 아군의 힘을 부강하게 만들 것이다. 최소한의 피로 최대한의 효과를 얻는다. 죽일 자들은 죽이고 살릴 자들은 살린다.
이는 기반을 다지는 작업이다. 피가 더 흐르는 한이 있더라도 기반을 단단하게 다져놓아야 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 일이 끝난 후에는 대대적인 공사를 시작할 계획이었다. 일단 루시타니아와 이곳을 연결하는 가도를 정비하여 물류 흐름을 원활하게 만드는 것이 최우선, 해안에 위치한 이곳은 타 지역, 팅기스 등과 교류하는 일차 교역지점이 될 것이다.
당연히 교역지점에는 물자가 넘쳐난다. 그것을 뒷구멍을 빼돌리는 작자들이 나타나면 아군의 피해가 극심해진다. 제도적으로나 정책적으로 철저하게 완비되어 있다면 모를까? 이들을 무슨 수로 일일이 감시하겠는가?
따라서 충성과 불충성의 대가가 무엇인지 확실하게 각인시킬 필요가 있다. 그 가운데 무수히 많은 피가 흐르더라도 아군의 피를 줄이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감수한다.
테세우스는 이런 대외적인 이유 외에도 개인적으로 알아볼 것이 있어 이번 전투를 계획했다.
테세우스는 가까이 다가온 저들의 검을 왼손의 검으로 모조리 쳐냈다. 미처 막지 못한 검은 검을 휘두른 전사의 품으로 안기듯이 들어가 그대로 메쳐버렸다.
쿠우웅
오피다니 전사들은 득달같이 달려들어 테세우스를 공격했지만 저들의 검은 공연히 허공을 가르거나 번번이 테세우스의 무기에 막혀 무산되었을 뿐이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은 전사들이 전방에서 싸우는, 정확하게는 테세우스에게 얻어맞는 전사 뒤편에서 투창을 계속해서 날렸지만 심지어 그마저도 아무렇지 않게 걷어내고 자신들을 격퇴하는 테세우스의 모습에 완전히 기가 눌려버렸다.
*
뚝 뚝 뚝
피가 나무로 만든 창과 검을 타고 바닥에 흘렀다. 무기 표면에는 나무에 스며들지 못한 피들이 아무렇게나 엉켜있었다. 이리저리 부러진 창과 검을 들고 있던 테세우스는 바닥에 던져버렸다. 그의 힘을 이기지 못한 무기가 여러 번 박살났기 때문에 벌써 여러 번 교체했다.
하지만 널린 것이 무기였기에 무기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방패가 필요하다면 방패를 들어서 사용했고 투창할 필요가 있다면 역시 바닥에 있는 나무창을 들어서 날렸다.
결국 테세우스 주변으로는 이리저리 부서진 무기의 잔해와 450명에 달하는 전사들이 끙끙거리며 꿈틀거리고 있었다. 규칙마저 무시하고 움직일 수 있는 전사들은 일어나 테세우스를 상대했지만 그런 자들에게 더욱 가혹한 응징이 뒤따랐을 뿐이었다.
그 모든 광경을 오피다니 연맹이 쥐죽은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소문은 사실이었다. 오히려 소문이 축소된 것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오그미우스가 살아 돌아온다고 해도 이런 광경을 보여줄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 가운데 테세우스가 경악에 찬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오피다니 부족장들을 바라봤다.
“이제 내가 요구할 차례로군.”
저들은 테세우스의 목소리가 죽음의 신 안쿠가 속삭이는 것처럼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