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마 무신의 기억-99화 (99/298)

# 99

99. 마지막 기회.

99.

두려움에 찬 족장 가운데 한 사람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무.. 무슨 요구 말이오?”

“내게는 약조를 지키라 그토록 부르짖었으면서 나와 맺은 약속을 잊으면 곤란하지. 약속을 잊으면 곤란해. 응하지 않아도 되는 요구에 응했으니 너희도 나의 요구에 응할 것이라 동의하지 않았나?”

부족장들은 불안한 눈빛으로 눈알을 굴리다가 테세우스 앞에 넙죽 엎드렸다.

“저희의 무례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용서하여 주소서.”

“원하시는 대로 무조건 행하겠으니 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저들의 충성이 사실이라면 살려주지 못할 것도 없다. 이왕이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아는 자들이 책임자의 자리에 앉아있는 것이 여러모로 편할 테고 다른 자라고 이들과 뭐 얼마나 다르겠는가?

하지만 벌써 두 번째다. 이들은 세르토리우스 때와 마찬가지로 그저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엎드렸을 뿐이다. 저들 스스로 행한 일은 기억하지 않고 도리어 자신이 모욕당했다고 생각하고 분노를 품을 것이다. 살려줘도 그 은혜는 기억하지 않을 것이 뻔하고 제 능력이 뛰어나서, 그러니까 위험천만한 순간, 스스로 기지(機智)를 발휘해 위기를 잘 모면했다라고 여길 것이 분명하다.

“언제 내가 너희에게 400명의 메투리치족을 베었다고 말했던가? 그러나 너희는 그 소문을 나보고 증명하라고 했다. 나로서는 할 필요가 없는 일이지만 너희가 그토록 원한다니 손수 증명했다. 이 부분은 더 말할 필요가 없고. 그러니 이제는 너희가 너희 스스로를 증명해라.”

그러자 부족장들은 머리를 바닥에 조아리며 말했다.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목숨을 걸고 따르겠습니다.”

저들의 부르짖는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던 테세우스는 얼굴에 튄 피를 대충 손을 닦아내며 입을 열었다.

“충성이라.. 마침 갑주와 무기를 완벽하게 갖추고 있군.”

테세우스의 어조와 눈빛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은 저들은 급히 변명했다. 족장들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테세우스의 위용을 두 눈으로 목격한 오피다니 연맹의 누구도 그를 거스르라는 명령에 따를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테세우스가 지금 당장 검을 빼서 자신들을 죽이라고 한다면 그것에 따를만한 상황이었다.

“그.. 그것은 대결에 임하는 전사의 예의이자 테세우스님에 대한 예우로서!”

테세우스는 들을 필요가 없다는 듯 그들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테세우스는 그들 앞에서 팔을 벌리고 몸을 천천히 돌렸다.

“보다시피 몸에 상처 하나 없군. 보다시피 말이야. 이만하면 내 소문을 증명한 셈인가?”

“그.. 그렇습니다.”

“무.. 물론입니다.”

정말로 400명에 달하는 자들을 상대할 수 있는 전사라니.. 심지어 400명도 아니고 450명이었다. 이런 일을 상상도 하지 못했던 저들로서는 당혹스러운 감정을 감추지 못하고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테세우스는 서늘한 눈빛으로 그들에게 말했다.

“무기를 뽑아라. 이건 너희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다. 그 검으로 내 몸에 상처라도 남길 수 있다면 너희 가치를 내게 증명한 것이라 여기고 살려줄 것이로되 그러지 못한다면 감히 나를 시험한 죄를 물어 너희를 모조리 참할 것이다.”

이번 대결이 이뤄지기 전에 들었다면 희희낙락하며 받아들였겠지만 테세우스의 실체를 두 눈으로 확인한 후였기에 사형선고가 떨어진 기분이었다. 아니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무기를 가져와라.”

그러자 호라티우스가 지금껏 저들이 보지 못한 형태의 창을 가져왔다. 파이살과 함께 만든 ‘보아디케아’라는 이름을 부여받은 바로 그 창이었다. 거무튀튀한 색상에 물결치는 문양이 인상적인 창이었다. 양손으로 휘두르려면 못 휘두를 것도 없지만 상당한 무게를 자랑하고 있었기에 호라티우스는 실전성이 떨어지는 창이라 생각했다.

부우우웅

테세우스는 그것을 한 손으로 잡고 너무나 수월하게 허공에 휘둘렀다. 나무창과는 근원적으로 다른 육중한 파공음이 허공에 울려 퍼졌다.

호라티우스는 그런 테세우스의 모습에 다시 한번 놀랐다. 지금보다 어렸을 때 이미 완성된 전사라 느꼈는데 이제는 전사 정도가 아니라 신화 속의 존재로 변해가고 있다고 느껴질 지경이었다.

부족장들은 거부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자신들이 주장한 대결이고 자신들의 명령에 의해 싸운 전사들 450명이 바닥에 쓰러져 신음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테세우스의 명령을 거부한다면 이미 그것으로 끝이다. 이제 자신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희망은 오직 하나, 테세우스의 말대로 그의 몸에 상처를 남기거나 그를 죽이는 일뿐이다.

저들끼리 눈을 마주친 오피다니 연맹의 부족장들은 저마다 무기를 쥐고 결연한 표정으로 테세우스 앞에 섰다.

“으아아아아!!”

“와아아아!”

그리곤 고함을 지르며 테세우스에게 달려들었다.

서걱

그것이 그들의 마지막이었다. 저들은 테세우스의 지척에 다다르기도 전에 보아디케아의 창날에 모조리 갈려 나갔다.

창의 궤적을 따라 저들의 피와 신체가 솟구쳤고 사선으로 길게 이어지듯 베어진 저들의 신체는 하나같이 해변에 떨어져 모래에 더럽혀졌다. 마찬가지로 저들의 피로 인해 주변이 질척하게 변한 지 오래였다.

털썩 털썩

부우웅

후두두둑

허공에 창을 휘둘러 창날에 묻은 피를 털어낸 테세우스가 쥐죽은 듯이 침묵을 지키며 자신을 바라보는 오피다니 부족민들을 바라봤다.

“너희에게 묻겠다. 나의 살육이 부당한가?”

테세우스의 외침에 잠시 웅성거리던 오피다니 부족민들이 대답했다.

“아닙니다.”

“죽을 자들이 죽었을 뿐이니 부당하지 않습니다.”

테세우스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소리쳤다.

“그럼 다시 묻겠다. 이들의 뒤를 따르겠느냐? 아니면 나 테세우스를 따르겠느냐?”

“맹세는 맹세이니 맹세대로 지켜질 것입니다.”

“저들은 저들 스스로 맹세를 저버린 것이나 다름없으니 우리가 저들의 뒤를 따를 이유가 없습니다.”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테세우스는 보아디케아를 해변에 박아 세워놓고 다시 외쳤다.

“저들의 머리를 잘라서 삼나무 기름을 발라서 오래도록 전시해라. 맹세를 솜털처럼 가볍게 여긴 자들의 최후가 어떠한지 지켜보는 모두의 본보기가 되도록!”

“알겠습니다!”

“그리하겠습니다!”

“이제 너희에게 첫 번째 명령을 내리겠다.”

“하명하십시오.”

“명하십시오.”

모든 자들이 테세우스에게 무릎을 꿇으며 머리를 조아렸다. 그들을 오시하던 테세우스가 힘찬 목소리로 외쳤다.

“먹고 마시고 밤새도록 즐겨라! 이것이 너희에게 내리는 첫 번째 명령이다!”

“와아아아아”

“와아아아아아아!”

“테세우스!”

“테세우스!”

“테세우스!!”

“와아아아아아아!”

솔리치족의 족장, 마에도크와 장로인 카오므와 누아란, 전사 오넨구스 등은 그런 테세우스의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일이야 어쨌든 단 아홉만 죽이고 적이 될 자들을 오히려 강력한 우군으로 만들어버렸다. 어찌 놀랍지 않은가? 모두가 전투를 대비해야 한다고 했을 때 그가 태연하게 내버려 두라 한 이유가 밝히 드러난 순간 저들은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건 테세우스를 보다 오래 지켜본 호라티우스나 나디르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무용은 이미 하늘에 닿았고 계책과 계략이 화수분처럼 끊이지 않고 솟아나니 누군들 그와 싸워서 이길 수 있을까? 이미 많이 놀랐다고 생각했지만 또다시 경탄을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피다니 연맹에 들어서고 단 일주일 만에 고작 아홉의 목숨을 거두는 것으로 오피다니 연맹 전체를 완전히 장악해버렸다. 450명을 상대한 그의 무력도 무력이지만 그 치밀한 심계는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두려움을 느끼게 만들었다.

적은 적대로 처치하고 아군의 충성심은 충성심대로 끌어올렸으니 누군들 그에게 대항할 마음을 품을 수 있을까?

하지만 이것조차도 그가 계획한 일의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짐작한 호라티우스와 나디르는 그저 깊이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

그렇게 광란의 축제가 끝나고 부족민들은 저마다 자신의 지역으로 돌아갔다. 오피다니의 모든 부족민이 이우리아 해변으로 왔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오피다니 연맹의 부족장들은 테세우스와 싸울 목적으로 저들을 대동하고 왔다. 당연히 부족 내 영향력이 강한 자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자들이 돌아가 일어난 일을 전했으니 테세우스의 이름이 오파다니 부족민 전부에게 각인되는 것은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테세우스는 축제 중 각 부족의 임시 대표자들을 만나 족장을 다시 뽑으라 명했다. 당연히 이런 일련의 과정 가운데 죽은 족장들의 이름이 남아있을 자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테세우스 역시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지 않았고 애초에 알고 있지도 않았다.

다그닥 다그닥

테세우스는 자신의 이름과 더불어 얼굴을 각인시킬 요량으로 병사들과 함께 오피다니 지역을 순시하고 있었다. 각 부족의 상황이 어떤지, 또한 예전 부족장들의 영향력이 얼마나 남아있는지 등을 확인하기 위한 작업이기도 했다.

어차피 저들 스스로 새 부족장, 다시 말해 지역 관리자를 뽑아 오기 전까지는 대규모 공사를 벌이기 어려운 상황이니 오피다니 연맹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고 직접 두 눈으로 부족의 실태를 파악하고자 길을 나섰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테세우스는 깊은 생각에 잠겨있었다.

‘목숨을 빼앗지 않고 싸우기만 할 때는 기력이 줄어들었는데 목숨을 빼앗는 순간..’

살육으로 인한 흥분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족장들의 목숨을 빼앗는 순간 미미하게나마 기력이 회복되는 것을 느꼈다. 450 명의 전사들의 목숨을 빼앗지 않고 싸우기만 할 때는 기력이 회복되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계속해서 격렬하게 움직이는데 기력이 떨어지기는커녕 회복된다면 그거야말로 기이한 일이 아닌가?

놀랍게도 테세우스는 족장들의 목숨을 빼앗은 순간 아주 미미하지만 활력을 느꼈다. 전에도 기묘함을 느끼긴 했지만 거의 차이가 없어서 착각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기력이 떨어진 후에 일어난 일이라 전보다 보다 선명하게 그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따라서 단순히 착각이라고 치부하기도 어려웠다.

‘이건 또 무슨 현상이지?’

자신에게 일어난 현상 자체가 기이한 것이라 외면했던 일이 다시금 부상되었다. 이건 또 무슨 기묘한 일이란 말인가? 사람의 생명을 취하면 미미하게나마 기력을 회복한다고?

‘설마 그래서 카르타고의 토페트에서도 그 여린 몸으로도 지치지 않고 싸울 수 있었던 건가? 기력이 미미하게나마 보충되었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혼란스러웠지만 아이러니하게 한편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지금의 삶에 도움이 되면 되었지 악영향을 미칠만한 일은 아니라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꺼림칙하지 않을 수 없었기에 생명을 취하는 일에 더욱 주의를 귀 기울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말을 타고 오피다니 연맹을 살펴보던 가운데 치스몬타니 부족 마을에 들어선 순간, 한 노파가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보다 정확하게는 그의 앞길에 넙죽 엎드려 있었다.

히이이잉

급히 말을 멈춰 세우자 함께 한 병사들이 버럭 호통을 쳤다.

“정녕 죽고 싶은 것이냐? 대로 위에서 이게 뭐 하는 짓거리냐?”

“무례함을 용서하십시오. 다만 저를 죽이셔도 좋습니다만 부디 제 원통함을 풀어주십시오.”

고개를 든 노파가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었다.

병사가 다시 뭐라고 호통을 치려고 했지만 테세우스가 손을 들어 그들을 제지한 다음 말 위에서 질문을 던졌다.

“무슨 일인데 그러시오?”

“말씀을 낮춰 주십시오.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뭐..”

테세우스는 별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든 다음 입을 열었다.

“묻는 것에 답변부터 하라!”

단호한 질문에 노파는 울음부터 터트렸다.

“흐으으윽. 흐으으으으윽!”

노파의 울음은 보는 사람까지 가슴이 미어질 만한 사연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보이는 것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 테세우스는 거기에 흔들리지 않고 냉정한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말하라! 목숨까지 걸고 나의 앞길을 막은 연유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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