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마 무신의 기억-103화 (103/298)

# 103

103. 악독(惡毒).

103. 악독(惡毒).

악의와 악독이 가득한 세상이다. 실로 그러하다.

도무지 선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렵다. 선한 자는 오지 않고 온 자는 선하지 않다고 했던가? 실로 그러한 세상이다.

테세우스는 무심한 표정으로 치스몬타니 장로들을 바라보다 가만히 눈을 감았다.

결국 노파, 루기는 죽었다. 연이은 충격으로 심신이 쇠약질 대로 쇠약해진 상황에 화살까지 맞아 중한 상처를 입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나 다름없었다.

아들 루이게치의 누명도 벗기지 못했고 아들을 비롯해 며느리 네우스와 그 손주들이 왜 죽었는지도 알지 못한 채 그렇게 허망하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실로 덧없는 죽음이오. 한 많은 여인의 억울한 죽음이다. 하나 그녀의 죽음은 흔하디흔한 날벌레 울음소리조차 막지 못했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불고 그렇게 세상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흘러간다. 누군가에게도 기억되지 않는 억울한 가족의 사연이었을 뿐이다. 심지어 그 억울했다는 사실조차 영원 저편으로 뺨을 스쳐 간 바람처럼 사라지리라.

악인들은 자신들의 계략이 성공했음에 저마다 축배를 들고 희생자의 피를 마시며 웃음을 터트리리라.

‘오늘도 나는 살아남았다. 나를 위해서 아무 거리낌도 없이 속이고 약탈하고 도적질하고 살인하며 원하는 바를 쟁취했다. 저들은 약자이니 강자인 내 손에 죽은 것이고 저들은 게을러 배우지 못해 어리석은 것이니 내가 저들을 속여 먹는 것도 정당하다.’라고 자위하며 그것이 진리인 양 떠들어댈 것이다. 뭐라 지껄이든 반박할 힘을 가진 자가 없지 않은가?

하긴 힘이 있는데 왜 사용하지 않겠는가? 약탈할 수 있는데, 약탈해도 보복할 힘조차 없는 나약하고 어리석은 것들인데 왜 약탈하지 않겠는가? 내 마음껏 압제하고 폭력을 휘둘러도 저들은 내 앞에 버러지처럼 기어 다닐 것들에 불과하다.

악의가 넘실거리는 세상에 그 악의에 당했다고 나약한 자들이 아무리 아우성친들 그들의 비명이 들리기나 하겠는가? 도리어 저들의 비명을 즐기리라. 나는 저들 버러지와 같지 않고 존귀한 자라는 저열한 우월감을 느낄 테니 도리어 비명은 감미로운 음악 소리와 같으리라.

테세우스는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며 입을 열었다.

“이 일에 대해 해명하라.”

“저.. 저희는 이 일에 대해 해명할 것이 없습니다.”

“그.. 그렇습니다.”

“해명할 것이 없다?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나는 지금 너희에게 부탁을 하고 있는 게 아니야.”

그러자 치스몬타니 장로들이 다시 외쳤다.

“그렇게 말씀하셔도 저희는 이 일과 어떤 연관도 없습니다.”

테세우스는 미간을 좁히며 저들을 바라봤다.

“연관이 없어? 현재 치스몬타니 지역을 관할하고 있는 자들이 너희 말고 또 다른 자들이 있던가?”

저들이 입을 다물자 테세우스가 다시 말했다.

“그 치스몬타니 지역에서 습격을 당했는데 너희가 연관이 없어? 어처구니가 없군. 뭐 좋아. 그러니 해명을 해보란 말이다. 너희의 결백을.”

“그러니까 저희는 이 일에 대해 말할 것이!”

말을 꺼내던 장로는 테세우스의 서늘한 눈빛을 마주하고 말을 더 이을 수 없었다. 테세우스가 허리춤에 차고 있는 검이 당장 자신의 목으로 날아들 것 같은 공포를 느꼈기 때문이다.

“해명하지 않겠다면 이 일에 대한 책임을 너희 모두에게 묻지. 가장 간단하고 확실한 방법으로.”

“테.. 테세우스님!”

“테세우스님. 고.. 고정하시고.”

데구르르

테세우스는 발치에 놓여있던 무스타파의 머리를 장로들을 향해 걷어찼다. 무스타파의 커다란 머리는 팽그르르 돌면서 장로들 앞으로 굴러갔다.

장로들은 그 모습에 흠칫 놀라며 몸을 뒤로 뺐다. 그 가운데 테세우스가 비꼬듯이 말했다.

“누군지 알잖아. 이 새끼가 누군지.”

테세우스는 솟구치는 살심은 간신히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

폭력과 살인은 즉각적이고 가장 파괴적이다. 하나 그것에 길들어지면 우회 방법 자체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모두 비효율적인 해결방법이라 여길 테니까. 뒤틀리면 죽이고 의심이 들면 죽이고 문제가 발생하면 죽이고 내 뜻과 내 마음에 들지 않는 모든 것을 죽이거나 파괴하는 것으로만 문제를 해결하려 들 것이다.

‘항우가 그리했듯이. 나 또한 그렇게 될 것이다.’

자신이라고 다를 것 같은가? 악한 마음은 악한 행동을 낳지만 악한 행동 역시 악한 마음을 낳는다. 어쩔 수 없었어. 내 상황에서는 이럴 수밖에 없었어. 그게 한 번이 되고 두 번이 되고 그렇게 습관이 되면 어쩔 수 없다 자위하던 부끄러운 모습이 곧 모든 것을 대표하는 속성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모조리 찢어 죽이고 싶은 마음이 불쑥불쑥 치밀어 올랐지만 테세우스는 참았다. 자신을 죽이려던 일에 동참했기 때문에 화가 난 것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노파, 루기의 죽음이 테세우스의 마음에 거센 불을 지폈다.

“이자를 바라보던 너희의 표정도 내가 읽지 못했을 거라 여기는 건가? 꿇려라!”

“컥!”

“커커컥!”

“크흑”

테세우스의 명이 떨어지자 장로들 뒤편에 시립하고 있던 군단병이 그들의 오금을 쳐서 단번에 무릎을 꿇게 만들었다.

치스몬타니 장로들이 무릎을 꿇은 곳은 치스몬타니 마을의 광장에 해당하는 곳이었다. 당연히 치스몬타니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어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 오해십니다. 저희는 결코 테세우스님께 대항할 마음이!”

“그.. 그렇습니다. 이우리아 해변의 광경을 직접 목격한 자들이 버젓이 존재하는데 감히 저희가 테세우스님을 거역하려 들겠습니까?”

“무엇보다 신들께 테세우스님에 대해 충성하기로 맹세했으니 저희가 어찌 이를 거스르려 하겠습니까?”

테세우스가 고개를 주억이며 대답했다.

“맞아. 맞는 말이야. 그런데 일은 이렇게 벌어졌지. 그러니 더 이상 잡소리는 집어치우고 너희 스스로를 변론해봐. 내가 너희 모두를 죽이지 않을 이유 말이다.”

그제야 장로들은 테세우스가 단순히 일을 추궁하기 위해 자신들을 불러모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자신들을 광장에 불러모은 것은 추궁이 목적이 아니라 공개처형이 목적이라는 것을 인지한 장로들은 저마다 목소리를 높였다.

“부.. 부당합니다!”

“그.. 그렇습니다! 증거도 없이 이렇게 저희를 매도하시다니요!”

테세우스는 속에서 부글거리는 감정을 억누르며 병사에게 말했다.

“끌고 와.”

병사들에 의해 상처 입은 전사 두 명이 포박된 채로 끌려 나왔다. 그들을 알아본 치스몬타니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저들은?”

“사라진 사람들 아니야?”

“맞아. 족장이 사냥 중에 악어나 표범에게 당했다고 했었는데 살아있었나?”

저들이 누군지 마을 사람들도 알아보는 판국에 장로들이 못 알아볼 리 만무했다. 모르쇠로 일관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도 남겠지만 현재 칼자루를 잡은 건 테세우스다. 그가 경고한 대로 잡소리를 더 늘어놓았다가는 매서운 칼날이 단번에 자신들의 명줄을 끊어놓을 것이다.

이윽고 병사들이 포박당한 두 명의 전사를 테세우스 앞에 무릎을 꿇리자 장로들이 급히 입을 열었다.

“루.. 루페 족장의 사람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족장 루페와 관계된 자들이니 저희와는 무관합니다.”

“충분히 오해하실 수 있는 상황이지만 루페가 어떤 자인지는 테세우스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루페는 치스몬타니의 족장이었던 자로 당연히 오피다니 연맹 소속의 다른 족장들과 마찬가지로 테세우스의 손에 죽음을 맞이했다.

테세우스는 병사들이 사로잡은 전사들을 확인하던 중에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무스타파와 치스몬타니가 협력했다는 추측은 뭐 너무나 당연한 추측이니 치스몬타니 전사가 그들 가운데 발견된 것은 새로울 것이 없었다. 문제가 된 점은 다른 부족의 전사들도 함께 뒤섞여 있었다는 점이었다.

드러난 증거만으로 확신하는 건 위험한 일이기에 판단을 유보하고 있었는데 장로들의 말을 듣는 순간, 자신의 추측이 과하거나 오해한 것이 아니라 사실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치스몬타니 전사만 무스타파 저자를 따르고 있던 것이 아니더군. 그러니 묻겠다. 내가 추측한 것이 맞나?”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무스타파 저자와 안면이 아예 없지는 않습니다. 루페 족장과 만남을 가지는 것을 본 적은 있습니다. 하지만 저자가 테세우스님을 노릴 줄은 저희도 상상하지 못한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무스타파 저자가 루페 족장과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도 저희는 알지 못합니다. 그렇게까지 깊은 관심을 가질 정도로 족장이 오랜 기간 만난 것도 아닌지라..”

“그렇습니다. 저희가 저자를 기억하는 건 대단한 전사처럼 보였기 때문이지 저자와 어떤 연관이 있기 때문이 아님을 알아주십시오.”

“테세우스님께서 습격을 당한 시점에 저자와 알고 있다는 것처럼 비추어지면 괜한 오해를 살까 두려워 말을 아꼈을 뿐이니 부디 저희의 사정을 헤아려주십시오.”

“치스몬타니 지역에서 테세우스님께서 습격당한 책임을 져야겠다면 당연히 그리할 것이나 저희가 테세우스님을 죽이려 한 것이 아니라는 것만은 알아주십시오.”

달변가들이 따로 없었다. 이들의 말만 들으면 테세우스가 이 일을 트집 잡아 장로들 전체를 죽이려는 것으로 보일 지경이다. 사실 틀린 말도 아니다. 대부분 사실을 기반으로 말을 전하고 있었고 미심쩍은 부분은 죽은 족장 루페에게 뒤집어씌우면 될 일이니 테세우스가 일을 가지고 장로들을 일종의 경질은 할 수 있을지언정 사형을 언도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이곳의 최고권력자라 할 수 있는 테세우스가 죽이려면 왜 못 죽이겠냐 만은 상황이 그러하다는 소리였다.

장로들을 가만히 주시하던 테세우스가 병사들에게 손짓하자 병사들은 그 자리에서 포박한 전사들을 참수했다.

촤아아악

털썩 털썩

붉은 피가 광장의 흙바닥을 적셨으나 장로들의 얼굴엔 도리어 핏기가 사라져 창백해졌다. 자신들이 뭐라 지껄이든 자신들 모두를 죽일 수 있는 절대권력이 테세우스에게 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닫는 순간, 전사들의 죽음은 얼마 뒤 벌어질 자신들의 미래로 보였기 때문이다. 추상적이던 죽음이 성큼 다가와 문을 두들기고 있는 느낌이랄까?

이대로 다시 여름이 지나고 낙엽이 떨어진들 그게 뭐 새로운 일이겠는가? 타인의 죽음도 그러할 뿐이다. 하지만 그 죽음이 자신의 죽음이라면 떨어지는 낙엽에도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사람이다. 하물며 자신의 미래를 암시하는 전사들의 죽음을 바라보는 장로들의 심정이야 더 말해 무엇하랴.

고요한 침묵만이 광장에 감돌았다. 모든 신경은 테세우스의 일거수일투족에 쏠려있었다. 그 가운데 테세우스가 입을 열었다.

“나를 암살하려던 일은 루페 족장과 관련된 일이다?”

“그.. 그렇습니다.”

“누차 말씀드리지만 저희가 그럴 이유가..”

테세우스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으려는 장로를 바라보자 그는 흠칫 놀라며 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렇겠지. 족장들과 관련된 일은 족장들의 죽음으로 넘어가기로 결정했으니 이 부분은 넘어가겠다.”

장로들은 죽었다 살아난 심정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테세우스에게 대답했다.

“가.. 감사합니다.”

“현명한 테세우스님께 모든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테세우스는 저들을 차가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저들의 말을 끊었다.

“하지만!”

테세우스는 말을 멈추고 장로들과 이곳에 모인 사람들을 스윽 훑어보며 말했다.

“너희와 관련된 일은 너희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다.”

그러자 장로들이 다시 말했다.

“그..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저희는 이 일과 연관이..”

“내가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어. 나 혼자 듣고 있기엔 너무 흥미진진한 이야기라 여기서 조금 풀어보려고 한다. 모두가 듣고 싶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내기는 어려운 그런 이야기 말이야.”

거기까지 말한 테세우스는 장로 한 사람을 지목하며 질문을 던졌다.

“이름이 뭐지?”

지목당한 장로는 흠칫 놀라며 테세우스에게 대답했다.

“세.. 세넬이라 합니다.”

“좋아. 세넬. 내가 이야기를 전하기에 앞서 청중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몇 가지만 질문할 거다. 충분히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을 던질 테니 잘 대답하길 바란다.”

테세우스는 미소를 지으며 말하고 있었지만 그의 눈은 날카로운 검과 같이 자신을 찌르고 있었기에 세넬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무.. 물론입니다.”

“과부 루기의 아들, 루이게치는 어떤 사람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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