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
107. 증가하는 위협.
107.
금빛이 도는 구불구불한 머리카락에 강렬한 푸른 눈을 가진 사내가 탁자 위 고풍스럽게 생긴 황금잔을 바라봤다.
그 앞에 흰색 반원형 천에 4인치 폭의 자색 장식 선을 가진 토가를 멋들어지게 걸친 사내가 반달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이는 황제나 성직자, 집정관들이나 걸치는 토가 프라에텍스타였다. 이 시기 황제는 존재하지 않고 성직자처럼 보이지도 않으니 눈앞의 사내는 현 로마의 집정관이라는 소리였다.
“이집트에서 출토된 유물입니다.”
현대인으로서는 고대 로마나 고대 이집트나 별 차이가 없게 여겨질지 모르나 이집트는 기원전 4000년 그 이상부터 존재하던 나라다.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함께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진 나라로 이집트 연도상 이집트가 최강대국이었던 기간이 그렇지 않은 기간보다 길 정도로 고대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던 나라다.
물론 기원전 3100년경에 상하로 나눠진 이집트가 통일되고 그때부터 이집트 문명이 폭발적으로 번성하나 그것을 고려해도 현대와 로마의 시간 간격보다 로마와 이집트의 시간 간격이 더 크다.
다시 말해 로마인이 고대 이집트를 바라보는 시각은 현대인이 고대 로마를 바라보는 시각과 다를 바가 없었고 어떤 면에서는 더 기이하게 바라봤기에 이집트 골동품은 로마인에게 상당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이게 이집트 유물이라는 건 나도 알고 있소이다. 마찬가지로 상당히 귀한 선물을 받을 때는 그만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사실 역시 너무나 잘 알고 있소이다. 게다가 고작 잔 하나 건네자고 야밤에 나를 찾아왔을 리는 만무하니 말 돌리지 말고 용건부터 말해보시오.”
상대의 직설적인 화법에 반달웃음을 짓던 사내는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며 진중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술라 펠릭스, 그에게 국장(國葬)을 치러주고 마르스 광장에 묻고자 한다고 들었습니다. 그의 장례를 성대히 치르는 것까지는 막을 생각이 없지만 로마인을 무수하게 학살한 술라에게 국장을 치러준다니요? 게다가 마르스 광장에 묻어요? 폼페이우스. 부디 재고해주시오.”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오. 그는 그럴만한 공이 충분한 사람이오.”
“폼페이우스. 당신도 알다시피 술라는 내가 콘술에 오르는 것을 반대하던 사람이오. 당신의 전폭적인 지지가 아니었다면 콘술에 오르지도 못했겠지. 당신이 술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나를 추대한 이유가 무엇이오? 바로 술라의 정책에 못마땅해하는 점이 있기 때문이 아니오? 국장을 치르고 마르스 광장에 묻겠다는 건 결국 그의 정책을 인정한다는 것밖에 되지 않소이다.”
폼페이우스는 사나운 기세로 이번 해에 뽑힌 두 집정관 중 하나,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를 바라봤다.
“그것과 이것은 별개의 문제요. 술라는 마땅히 그런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소이다!”
“폼페이우스! 당신도 알다시피 술라는 트리뷴들의 입법 권한을 무효화시켰고 전직 트리뷴들은 다른 관직에 나아갈 수 없게끔 금하는 법안을 통과시켰소. 정무관들의 수를 대폭 늘려서 그들의 권한을 축소시켰소. 이는 로마의 헌법 자체에 위배 되는 행위로 불법이나 다름없소. 플레비안(평민) 의회가 그자로 인해 개판이 되었단 말이오. 비단 그것뿐이오? 그가 저지른 불법을 늘어놓자면 끝도 없으니!!”
“그만! 술라가 어떤 인물이었던 간에 망자를 더 모욕하지 마시오. 더 이상 그의 디그니타스를 더럽히는 건 나 폼페이우스가 용납하지 않겠소.”
“하! 폼페이우스! 잊은 모양인데 술라는 그의 다른 친구들에게는 유산과 아들에 대한 당부도 남겼지만 당신에겐 유산은 물론 어떤 일언반구도 남기지 않았소. 그게 술라가 당신을 대한 마지막이오. 그걸 잊은 것이오?”
폼페이우스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레피두스에게 대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런 장례를 맞이할 권리가 있소. 그러니 이 부분에 대해 더 말하지 마시오.”
레피두스는 그런 폼페이우스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탁자 위에 놓인 이집트 황금잔에 포도주를 따른 뒤 벌컥벌컥 마셨다. 그리곤 다시 포도주를 채워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그게 당신의 뜻이라면······. 휴식을 방해해서 미안하오. 아무쪼록 평안한 밤 되시오.”
레피두스가 떠나간 자리에는 탁자 위 황금잔에 담긴 붉은 포도주가 피처럼 요사스럽게 불빛에 찰랑거리고 있었다. 폼페이우스는 정치적 계산에 민감하지는 않지만 이 일로 인해 레피두스와의 관계가 크게 틀어졌음을 깨달았다.
정치적으로만 계산하면 매우 어리석은 판단에 가까웠다. 술라와 척을 지면서까지 만들어 두었던 아군을 죽은 술라의 편을 들자고 배척한 셈이니..
“결국 적만 만든 셈인가?”
폼페이우스는 쓴 미소를 지으며 황금잔에 담긴 포도주를 단숨에 마신 뒤 다시 탁자 위에 거세게 내려놓았다.
탁
술라의 정책은 지극히 귀족적이고 레피두스의 말대로 불법 그 자체다. 이점에 대해선 레피두스와 같은 마음을 품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별개의 문제다. 마찬가지로 그가 마지막에 폼페이우스 자신을 배척했다 할지라도 그것과 이것은 별개의 문제다.
“그렇다 할지라도! 나를 인정한 사내의 마지막 길이다.”
마그누스, 그 위대한 칭호는 술라가 인정했을 때 비로소 그 빛을 얻었으니까.
*
“술라가 죽었다라.”
정갈한 빗은 머리칼을 가진 사내가 서신을 보고 중얼거렸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였다. 레스보스섬의 미틸렌 전투에서 큰 활약을 펼쳐 코로나 키비카, 시민관을 수여 받은 카이사르는 니코메데스 4세의 함대를 지원받기 위해 비티니아의 왕궁에 기거하고 있었다.
함대를 지원받으러 온 것치고는 비티니아 왕궁에 너무 오랜 시간 기거하고 있었기에 니코메데스 4세와 동성애 관계가 아닌가 하는 추문이 은연중에 퍼지고 있었다.
그리스 문화를 자신의 두 뿌리 중 하나라 여기는 로마지만 동성애 문화만큼은 배타적으로 반응했는데 말한 바 있지만 동성애 관계 중 수동적 역할을 감당하는 자는 로마인이라고 할지라도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등 인간 취급도 하지 않았다.
소문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카이사르 본인만 아는 일이니 차치하고 어쨌든 매우 치명적인 소문이었기에 카이사르도 그 점이 심히 거슬렸다.
가장 좋은 것은 서둘러 비티니아 왕궁을 떠나는 것이지만 로마의 술라가 살아있는 한 로마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복무지인 아시아 지역으로 돌아가는 것도 고려해봤지만 위험하기만 하고 실속이 없는 지역에 가봐야 시간만 덧없이 축낼 뿐이다. 하여 차일피일 선택을 미루고 있던 차에 바라마지 않던 희소식이 들려왔다.
카이사르는 서신을 와락 구기면서 말했다.
“드디어······. 드디어 로마로 돌아갈 수 있겠군.”
자신이 마리우스의 처조카라고는 하나 그 사실을 염두에 두고 견제하는 이는 술라 펠릭스밖에 없었다. 오히려 마리우스의 처조카라는 사실은 평민들의 지지를 이끌어 내는 주요한 수단이자 자신의 든든한 뒷배경이었다. 다만 그 한 사람이 로마 그 자체였기에 감히 로마에 입성하지 못했지만 정말로 술라가 죽었다면 이 기회를 놓쳐서는 곤란하다.
“술라가 사망했으니 반드시 권력에 공백이 생긴다.”
이 기회를 안전을 이유로 이런 오지에서 덧없이 흘려보낸다면 그건 바보 천치나 다름없다고 여겼다. 따라서 카이사르는 곧장 서신을 가져온 노예에게 로마로 돌아갈 채비를 하라 명했다.
“로마로 갈 준비를 해라! 서둘러라!”
“로.. 로마 말씀이십니까?”
갑작스런 명령에 노예가 멍하니 반문하자 카이사르는 열정에 찬 표정으로 고함을 지르듯 대답했다.
“그래! 로마! 영원한 도시 로마 말이다!”
“아.. 알겠습니다. 바로 준비시키겠습니다.”
노예가 급히 밖으로 나가자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카이사르는 눈을 빛내며 생각에 잠겼다.
술라에 의해 모든 유산을 몰수당했지만 부는 명성과 명예를 얻으면 알아서 따라온다.
명성과 명예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야 다양하다. 가장 빠른 것은 시민의 인기를 사는 일이다. 비록 자신에게 부는 없지만 날카로운 이성과 시민의 귀와 마음을 현혹시킬 수 있는 혀가 있다. 게다가 현재 로마에는 자신의 제물로 삼을 사냥감 역시 넘쳐난다. 그들을 제물 삼아 명예를 얻고 권력의 중추에 도달하리라.
술라가 건재했다면 감히 시도도 하지 못할 일이다. 그는 자신의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고 있었으니까. 어떤 일을 벌이기도 전에 대번에 자신을 제거해 버릴 것이다. 술라가 자신을 꿰뚫어 봤듯 자신도 술라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는 반드시 그렇게 할 위인이다.
하지만 그 술라는 세월의 화살에 맞아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다.
“겉으로는 공화정을 위한다고는 했지만 돌이켜보시오. 당신의 행동은 독재자 그것과 다를 바가 없었소. 공화정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 아래 독재의 삶을 살다간 셈이지. 술라 펠릭스. 확실히 당신은 영리한 사람이오. 과연 이름 그대로 행운을 거머쥔 사람이오. 그러나 당신이 나를 알아봤듯 나도 당신을 알고 있소. 당신이 이루지 못한 야망은 나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이루고 말겠소. 플루토의 품에서 지켜보시오. 당신이 공화정을 지킨답시고 행한 것들을 내가 어떤 식으로 사용하는지 말이오.”
카이사르는 불꽃처럼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창밖을 바라봤다.
*
다그닥 다그닥.
“워 워.”
테세우스는 흑마를 멈춰 세우며 목을 두어 번 두들겼다. 그리곤 말에서 바로 내려섰다.
척 척
테세우스가 말에서 내리자 경계를 서고 있던 호위병들이 일제히 그에게 군례로 경의를 표했다.
테세우스 역시 군례를 표해 그들의 인사를 받은 다음 호위병을 이끄는 백부장에게 질문했다.
“센튜리온. 아버지께서는?”
백부장은 테세우스를 안내하듯 몸을 틀어 길을 열면서 말했다.
“이미 기다리고 계십니다.”
테세우스는 술라의 사망 소식을 듣자마자 곧장 세르토리우스가 있는 루시타니아 지역으로 말을 달렸다. 당연히 그를 호위하는 병력들도 함께였지만 가장 먼저 도착한 것은 바로 테세우스였다.
하지만 이것을 보고 테세우스가 방심한 것이라 볼 수는 없었다. 예전보다도 막강해진 그를 상대하려면 기본 일천 명의 병력으로 그를 포위하고 집중공격해야만 가능할 것이다. 그런 테세우스이니만큼 어떤 전장에서도 자신의 몸을 빼기에 부족함이 없었고 무엇보다 오피다니 지역과 루시타니아 지역은 세르토리우스와 테세우스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는 곳이다.
루시타니아인들은 충성을 바친 상관이 죽으면 따라 죽는 관습이 있었다. 현재 세르토리우스에게 그런 맹세를 한 전사가 수천에 달했으니 그 어느 곳보다 안전한 지역이 루시타니아 지역이라 할 수 있었다. 오피다니 지역은 말 그대로 테세우스의 영향력에 완전히 점령된 곳이니 더 말할 필요가 없고 말이다.
무엇보다 위험했다고 해도 최대한 빨리 루시타니아 지역에 당도했을 것이다. 술라의 죽음은 그만큼 중대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세르토리우스는 각 부대의 지휘관들과 상의하다가 테세우스를 발견하고 만면에 미소를 띠며 그를 환영했다.
“왔느냐?”
“예. 아버지. 그간 무탈하셨습니까?”
“무탈하고 말 것도 없다. 얼마 전에도 봤으니 안부 인사는 이쯤하고 넘어가자. 술라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더 확인해봤느냐?”
세르토리우스가 표정을 굳히며 말하자 테세우스가 입을 열었다.
“확실합니다. 아시다시피 폼페이우스가 술라와 반목하면서까지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라는 자를 콘술로 추대한 것을 고려하면 로마 내에서 술라의 영향력은 나날이 감소했다는 방증입니다. 그 주요 원인이 다름이 아니라 술라의 건강상태 때문이었다면······.”
“하긴 그 점은 이미 거론했던 내용이니 지금 술라의 사망에 대해 의심하는 건 의미가 없겠지. 사실 안 그래도 그 부분에 대해 상의하고 있었다. 네 생각을 듣고 싶구나.”
“단도직입적으로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바에티카를 비롯한 로마의 영향력이 미치는 세력은 모조리 쳐야 합니다.”
세르토리우스는 의외라는 표정으로 테세우스를 바라봤다.
“바에티카를 치는 건 예정된 수순이었다. 하지만 로마의 술라가 죽은 이때 로마와 전투를 치르는 것이 과연 현명한 선택인지 판단을 내리기 어렵구나.”
“그간 바에티카를 내버려 둔 것은 술라가 움직이지 않는 내심을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이 가장 큽니다. 그 원인이 사라진 셈이니 바에티카를 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자 세르토리우스가 동의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