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8
108. 새로운 시대.
108. 새로운 시대.
“마리우스와 첨예한 대립각을 세우던 술라가 죽었다. 그런 술라가 죽은 이상 저들과 타협할 수 있는 길이 열린 셈이다. 바에티카를 치는 건 동의하지만 로마의 영향력 안에 놓인 모든 곳을 친다라······.”
세르토리우스의 말에 테세우스가 대답했다.
“아버지께서는 바에티카를 점령함으로 히스파니아 내에서 힘의 우위만 취하고 다른 지역은 남겨둠으로 저들에게 아군이 타협할 여지가 있음을 남겨두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바로 보았다.”
“바에티카를 점령하는 것도 점령이 목적이 아니라 타협을 위한 수단으로 보입니다. 혹 로마에 다시 돌려줄 마음을 품고 계신 겁니까?”
“필요하다면 그렇게 할 생각이다.”
세르토리우스를 지그시 바라보던 테세우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최소한의 피로 원하는 바를 확실하게 얻을 수 있는 현명한 방책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하신 건 우려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까?”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하던 세르토리우스가 표정을 굳히며 대답했다.
“네 생각을 말해봐라.”
테세우스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아버지의 우려대로 저들은 타협 의사 자체가 없습니다. 이미 예상하고 계신 대로 그 첫 번째 증거는 술라의 죽음이 불러올 권력의 공백과 그로 인해 발생할 수많은 혼란입니다. 노회한 원로원은 내부결속을 다지기 위해 아군을 그 제물로 삼을 겁니다.”
“음..”
“으흠.”
테세우스의 말에 주변의 지휘관들이 침음을 흘리며 저마다 생각에 잠겼다. 잠시 말을 멈췄던 테세우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또한 타협의 대상은 당연히 술라파에 속한 자들이 아니라 마리우스파에 속한 자들이 그 대상이었을 겁니다.”
세르토리우스가 가만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버지도 아시다시피 술라는 노련한 사람입니다. 위협이 될만한 마리우스의 계보를 이은 자들은 죽이거나 그 힘을 쓰지 못하게 봉쇄한 지 오래입니다.”
“로마에 남은 마리우스파는 쭉정이들뿐일 것이다?”
“로마를 그토록 사랑하는 아버지께서 히스파니아까지 오게 된 연유가 무엇입니까?”
술라의 마수에서 목숨을 보전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테세우스는 그 점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다. 사실이라고는 하나 그 사실 자체가 세르토리우스의 권위를 손상시키는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정말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한 사람의 영광스럽지 못한 과거는 되도록 입에 담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 대상이 된 자를 비꼬거나 비판해서 본인이 그 우위에 서려는 어떤 저열한 의도가 아니라면.
“으흠.”
세르토리우스가 침음을 삼키며 말을 아꼈다.
“위협이 될만한 자들은 이미 모두 추방하거나 죽였습니다. 혹여 로마에 마리우스파가 남아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더 이상 마리우스파도 술라파도 아닌 자들입니다. 그 증거로 마리우스도 술라도 모두 죽었습니다.”
“마리우스도 술라도 모두 죽었다라······.”
세르토리우스는 왜 테세우스가 바에티카뿐만 아니라 로마의 영향력 아래 있는 모든 것을 점령하라고 제안했는지 알아차렸다.
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두 거인이 모두 세상을 떠났다. 이제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이고 그들이 사라진 자리에는 새로운 사람들이 채워질 것이다. 새로운 시대의 사람들은 더 이상 과거의 이름에 사로잡히지 않을 것을 명시하고 있었다.
“확실히 마리우스파라고 해서 술라파와 손을 잡지 않을 이유가 없겠군. 반대 역시 마찬가지.”
“그렇습니다. 무엇보다 저들은 저들이 차지할 자리에 힘을 가진 또 다른 누군가가 끼어들기를 원치 않을 겁니다. 비단 술라가 아니더라도 아버지는 저들에게 위협적인 공동의 적이 되기에 충분한 여건을 두루 갖추고 있습니다. 아니 지나간 시대를 대표하던 술라가 죽었기 때문에 과거의 악연은 뒤로하고 저들의 이익을 위해 훨씬 더 자유롭게 손을 잡을 겁니다. 지난 1년간 아이러니하게도 최악의 적이 최고의 아군이었던 셈입니다.”
“흠. 아군이 저들에게 외부의 위협적인 존재라는 점과 더불어 히스파니아의 풍부한 물자 역시 저들의 야욕을 부추기에 충분하겠군. 저들이 결탁한다면 술라가 아군을 견제할 때보다 심하면 심했지 덜 하지는 않겠어.”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 일이 단기간 안에 이뤄지지는 않을 겁니다.”
“바에티카를 점령한다면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줄을 끊은 셈이 되겠지. 저들이 결속하기 전에 히스파니아 내의 위협요소를 최대한 제거해야 한다는 뜻이 맞느냐?”
테세우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전쟁을 피할 수 없다면 승리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로마와 이곳까지의 거리를 고려하면 이미 저들은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을 겁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아군의 히스파니아 점령을 막을 군대를 편성할 정도는 아니겠지.”
“물론입니다. 아울러 술라는 딕타토르 시절, 아니 그 이전 시절부터 권력을 이용해 불법을 많이 저질렀습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 네 말은 로마 내에서 반란이 일어날 것이다? 이 말이냐?”
세르토리우스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테세우스를 바라봤다.
“내외적으로 반란이 일어날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훗날 그들과 연계할 수 있다면 연계하면 좋겠지만 아직까지 로마를 압박할 정도로 거센 움직임은 포착한 적이 없으므로 아마 그 전에 지리멸렬할 확률이 높으니 지금 거론할 부분은 아니겠군요.”
“아군도 거기에 포함되느냐?”
“히스파니아를 온전히 장악한다면 부족하긴 하지만 그래도 아군은 로마를 상대로 버틸 수 있는 근간을 확보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하지만 로마와 전면전을 말하는 것이라면 그럴지라도 한없이 부족합니다.”
“로마와 전면전이라······. 거기까지는 생각해보지 못했군. 그전에 원만하게 타협이 된다면 좋겠어. 어쨌든 네 말대로 그건 나중 일이고 일단은 히스파니아를 점령하는 것에 중점을 둬야겠군. 어디까지 내다보고 있느냐?”
“히스파니아 내의 모든 족속을 굴복시킬 수 있다면 최선이겠지만 현재로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득보다 실이 큰일이 될 것이니 굴복하기를 청하지 않았던 자들은 내버려 두고 이미 굴복한 전력이 있는 자들을 대상으로 점령전을 펼치면 될 것으로 보입니다.”
“네 말은 로마도 손대지 않은 지역의 켈타이 연맹은 내버려 두고 로마와 연관이 있었던 켈타이 연맹이나 히베리아 족이 점령하고 있는 땅을 위주로 점령하라는 뜻이느냐?”
“예. 일단 바에티카를 성공적으로 점령하고 나면 히베리아 족은 알아서 고개를 숙여올 겁니다.”
“정리하자면 네 말인즉 지금의 호기를 놓치지 말고 히스파니아 동편 해안선 어느 지역을 침공해오더라도 반응할 수 있는 체계를 구축하라는 뜻이렷다?”
“그렇습니다. 아울러 북쪽의 피레네 산맥을 틀어막는다면 로마군이 대대적인 공세를 펼친다 하더라도 히스파니아 내에서는 결단코 패배하지 않을 겁니다.”
세르토리우스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한 가지 문제에 봉착했다.
“음.. 다만 해군력이 문제로군. 배를 건조하는 기술력은 로마가 월등하게 뛰어나니.. 하긴 한 번에 모든 것을 이룰 수는 없는 노릇이니······. 좋다. 지금 즉시 바에티카는 물론 로마와 연관된 모든 지역을 치겠다. 테세우스, 네가 선봉에 서겠느냐?”
세르토리우스의 말에 테세우스가 그에게 군례를 표하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전쟁을 주청한 자가 피 흘리기를 마다하겠습니까? 다만 소자는 바에티카를 친 뒤에 이집트로 가볼까 합니다.”
“이집트를? 으흠. 이집트는 로마의 곡창인 셈이지. 혹여 그것 때문이냐?”
“겸사겸사입니다. 로마의 지원군이 없다고 확정된 상황이니 바에티카를 점령하는 일은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습니다. 여타 다른 지역이야 아버지께서 점령하시고 치리하실 것이니 조금도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집트로 가보겠다? 하지만 아무리 너라고 해도 이집트와 로마의 관계를 끊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닌 말로 네가 프톨레마이우스 왕조와 인연이 있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 혹 인연이 있다고 해도 수많은 이윤 관계가 얽힌 국가의 일은 일개 개인이 뒤틀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네가 로마와 이집트의 관계를 뒤틀거나 역전시킨다면 로마는 큰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다. 로마인에게 고통만 안길 뿐, 그게 아군에게도 효과적인 계책이 된다는 보장도 없으니 만에 하나 성공시킬 수 있다고 해도 그 일은 허락할 수 없다.”
현재 적이라 할 수 있는 로마를 염려하는 발언에 테세우스는 세르토리우스가 뼛속까지 로마인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럴 계획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아버지께서 그리 명하신다면 없던 것으로 하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집트에 가려는 것은 아군의 교역을 위한 것으로 앞서 말씀하셨던 것은 부차적인 계획에 불과합니다.”
“교역?”
“이미 히스파니아, 마우레타니아, 피티우사 제도를 연결하는 거대한 무역망이 형성되었습니다. 사람의 일을 어찌 모두 장담하겠느냐만은 이대로 이집트의 풍부한 물자와 히스파니아의 풍부한 물류가 연결된다면 그 무역 효과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커질 겁니다.”
세르토리우스는 고개를 저으며 테세우스에게 말했다.
“네가 간과한 것이 있다. 물류는 물류일 뿐이다. 물류가 풍부해지면 사회가 풍요로워질 것이라 여기지만 과하게 풍부한 것은 도리어 저 밑바닥부터 썩게 만들 뿐이다. 무엇보다 히스파니아 지역에는 그 풍부한 물류를 다룰 만한 인재가 부족하다.”
“교육이 부족하다면 가르치면 될 일이고 인재가 부족하다는 것을 알면 저들이 알아서 찾아올 겁니다. 마찬가지로 밑바닥에 썩는다면 밑창을 드러내 부숴버리면 될 일입니다.”
“하하하하. 어려운 것을 쉽게 정리해버리는구나. 글쎄다. 마찬가지로 굳이 네가 이집트까지 갈 필요가 있나 싶지만 네 말처럼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 들어보니 시도해볼 이유는 충분하다. 어디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봐라.”
세르토리우스의 신뢰가 담긴 발언에 테세우스는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
착착
마른 근육질의 사내가 부드러운 모래를 손에 담아 자신 앞에 벌거벗은 남자의 몸에 고르게 펴서 발랐다. 참고로 이 부드러운 모래는 기름과 땀을 흡수하는데 탁월한 효과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 뒤 그는 작은 낫처럼 생겼지만 날이 있는 자리에 구부러진 홈이 패인 도구를 들고 정성스럽게 벌거벗은 사내의 피부를 밀었다.
“으음.”
노예의 세심한 손길에 피부에 흡착되어 있던 부드러운 모래는 찌꺼기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낫처럼 생긴 도구에 밀려 제거됐다. 벌거벗은 사내,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는 몸의 기름과 땀이 얽힌 때가 말끔하게 떨어져 나가는 시원함에 기분 좋은 음성을 뱉었다.
크라수스의 반응에 마른 근육질의 노예는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땀을 뻘뻘 흘리며 연신 그의 몸에 흡착된 부드러운 모래를 제거했다.
잠시 뒤 노예가 부드러운 모래를 제거하자 대기하고 있던 다른 노예들이 향수를 그의 몸에 펴 발랐다. 그 와중에 마사지는 덤이었다.
그렇게 모든 과정을 마친 노예들이 시립하고 있자 크라수스는 한 노예가 공손하게 내미는 수건을 받아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을 닦아내며 가벼운 손짓으로 저들을 물러가게 만들었다.
크라수스는 막대한 재력을 가진 재력가였다.
물려받은 재산도 3백 탈렌트(1 탈렌트 = 6천 데나리우스, 1 데나리우스 = 하루 품삯)에 달했지만 술라의 오른팔로 활약하며 반 술파의 재산을 가차 없이 갈취하여 그것의 수십 배에 달하는 재산을 얻었다.
그뿐만 아니라 당시 불타고 허물어진 로마의 주택을 매우 값싼 가격으로 구매하여 그 부를 늘렸고 수많은 은광과 기름진 토지도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은광과 토지에서 나오는 수익조차 노예를 통해 얻어지는 수익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수준으로 크라수스는 은세공기술, 경리, 시 낭독이나 속기를 할 수 있는 능력 등을 노예에게 배양시켜 자신의 부를 끝없이 늘렸다.
그야말로 갖가지 방법으로 부를 늘렸고 부를 늘리기 위해서라면 악랄한 방법도 마다하지 않았다. 결국 로마에서 가장 부요한 사람을 뽑으라면 크라수스 본인을 빼놓고는 말이 되지 않을 정도로 막대한 부를 쌓았지만 크라수스는 한 가지 불만이 있었다.
막대한 부를 얻는 것까지는 좋았지만 자신의 지난 행적으로 인해 정치적 평판이 매우 나빴기 때문이다. 물론 크라수스 앞에서는 굽신거렸다. 막대한 재력가인 크라수스에게 밉보여서 이로울 것이 없었으니까.
“폼페이우스.”
그의 명성을 뛰어넘기 위해, 민중의 환심을 사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람을 매수하고 뇌물을 뿌렸다.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술라 사후에 정계의 유력자 중 한 사람으로 부각될 정도의 영향력을 확보했으니까. 그 점은 만족한다.
하지만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라는 이름은 입안의 가시처럼 언제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깔끔하게 몸의 때를 긁어내고 최고급 향수를 몸에 바른 지금조차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