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
115. 약육강식(弱肉强食).
115.
루푸스는 크라수스의 말에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
“으흠. 출병을 할 필요가 있기는 하지만 아시다시피 콘술 프라이오르는 레피두스요.”
크라수스는 루푸스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알아차렸다. 그는 반술라파다. 반술라파인 그가 군을 이끌고 반란을 진압한다면 당연히 그 공적으로 인해 위세가 더 막강해진다. 그러니 주저하는 것이리라.
물론 그 외에 골수 술라파인 또 다른 집정관 카툴루스가 있다. 정치적인 수완이 뛰어나다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나 병사를 다스리는 능력은 입증이 된 적도 없고 본인 스스로도 그 중임을 맡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혹 카툴루스를 설득시킬 수 있다고 해도 우선권이 있는 레피두스가 그 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 할 것이니 토벌군을 보낸다면 그를 보낼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원로원은 그 점이 우려스러워서 차일피일 결정을 미루고 있는 모양이었다.
“정 그것이 걱정된다면 아직 남아있는 프로 콘술이 있지 않습니까?”
술라 이전의 전임 집정관들은 술라의 독재 시절 대부분 죽임을 당했다. 하여 전임 집정관이라면 일단 3명이 존재한다. 그러나 작년의 두 집정관 중 바티아는 킬리키아 총독에, 풀처는 마케도니아 총독에 임명되어 모두 로마를 떠났다. 그러니 지금 크라수스가 언급하는 프로콘술은 재작년에 술라와 함께 집정관의 자리에 올랐던 그를 말하는 것이리라.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피우스 말입니까?”
루푸스의 태도에서 크라수스는 원로원이 메텔루스 피우스를 껄끄러워하고 있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했다. 그는 뛰어난 인물이다. 술라와 함께 수많은 전장에서 병사들을 이끌고 승전한 경험도 풍부했고 술라와 함께 집정관을 지내며 정치적인 술수에도 능해졌다. 확실히 그는 술라의 가장 뛰어난 부하 중 한 사람에 꼽힌다.
그런 그가 다시 반란토벌에 성과를 얻는다면 그 여파는 레피두스가 반란토벌에 성공하는 것보다 여파가 크면 컸지 적지 않을 것이다. 술라가 건재했을 때는 그가 완급을 조절했겠지만 술라는 죽었다. 마리우스파니 술라파니 아직까지야 감정의 골로 인해 나누어져 있기는 하지만 편의상 같은 편으로 묶여있는 것에 불과하다.
크라수스도 원로원이 메텔루스 피우스를 대안으로 내세우길 원해서 말을 꺼낸 것이 아니었다. 현재로서는 별 방법이 없다는 소리였다.
“으흠.”
“에트루리아가 로마로 진격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보다 최악은 없습니다. 그러니 현재로서는 차악이라도 택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메텔루스냐? 아니면 레피두스냐? 그야말로 차악이로군요. 하아.. 알겠습니다. 상의해보겠습니다.”
상의하고 말 것도 없이 원로원은 레피두스에게 에트루리아 정벌을 요청할 것이다. 하지만 크라수스는 내색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화려한 유피테르 신전 아래 펼쳐진 로마의 정경을 다시 한번 바라봤다.
이 화려한 로마에서 자신보다 부요(富饒)로운 사람은 없다. 하지만 로마 전체의 부에 일개인의 부를 비교할 수나 있을까? 그러니 로마를 얻으리라. 로마의 부를 모조리 자신의 것으로 만들리라.
하나 아직은. 아직은 때가 아니다. 적어도 아직은······. 크라수스는 뜨거운 태양처럼 끓어오르는 자신의 야심을 그림자 속에 애써 감췄다.
*
단단하게 포박당한 사내가 테세우스 앞에 끌려왔다. 테세우스가 그를 끌고 병사들에게 눈짓하자 병사들은 그의 포박을 풀어줬다.
그의 앞에 끌려온 자는 다름이 아니라 마메르코스였다.
“왜 나를 죽이지 않은 것이냐? 왜?”
“묻고 싶은 것이 있었으니까.”
마메르코스는 테세우스의 말에 반발하려다가 그만두었다. 폭풍처럼 달려와 자신은 물론 자신과 함께 쇄도하던 모든 자들을 거의 단번에 베어냈다. 피와 살점이 허공에 흩뿌려지는 모습은 직접 겪었음에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다만 눈앞의 테세우스가 갑주는 물론 얼굴에 튄 피조차 닦지 않았기에 그것이 어떤 착각이나 꿈이 아니라 확실한 현실이었음을 다시금 인지시켜주고 있었다.
마메르코스는 온몸을 옥죄고 있던 줄로 인해 팔이 저렸기에 어깨를 잡고 팔을 두어 번 돌리며 테세우스에게 질문했다.
죽었다고 생각했다. 강한 충격과 함께 모든 기억이 끊어졌으니까. 어떤 이유에서 자신을 베지 않았는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목숨을 부지하고 나니 생에 대한 집념이 훨씬 더 강렬해졌다.
“충실히 대답한다면 살려주는 건가?”
“당신이 내게 조건을 걸 상황은 아닌 것 같군.”
마메르코스는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가 다시 질문했다.
“베지 않은 자가 또 있나?”
“없다. 내가 저들을 베지 않을 이유라도 있나?”
마메르코스는 한 사람의 이름이 떠올랐다. 바렌스. 끝까지 자신에게 충성을 다한 바렌스가 떠올랐다. 기억났다. 자신이 본 피와 살점은 자신보다 먼저 테세우스와 상대한 바렌스의 것이었다. 안타까운 마음이 잠시 스쳐 갔지만 말 그대로 스쳐 갔을 뿐이다.
당연히 전투는 패배했을 것이다. 완전히 포위된 상황에 지휘부까지 무너졌으니 무슨 수로 이기겠는가? 하지만 주변을 살펴보니 이곳은 바에티카가 아니라 저들의 진영이었다. 이들은 바에티카 시로 진입하지 않았다. 그제야 마메르코스는 무엇을 묻고자 하는 것인지 어렴풋이 짐작했다. 하여 순순히 대답했다. 비밀이랄 것도 없었으니까.
“푸피디우스. 바에티카를 지키고 있는 장군은 아마도 푸피디우스일 거다.”
“푸피디우스?”
마메르코스를 대신해 바에티카를 지키고 있는 적장의 이름으로 보였다. 하지만 적장의 이름이 무슨 상관이랴? 2만 5천 중 그 절반 이상을 포로로 잡았으니 바에티카 성내의 병력이라고 해봐야 몇천이 전부일 것이다. 포로로 잡지 않은 자는 모두 죽었으니 그전에 항복을 청해올 수도 있는 노릇이고.
“그는 술라에게 조언을 건넬 정도로 술라와 친분이 있는 자였지만...”
테세우스는 마메르코스의 말을 끊었다. 불필요한 정보였다.
“무스타파. 그의 이름을 아나?”
무스타파 그가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바에티카에 들린 적이 있다면 마메르코스 정도 되는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라면 그를 알 것이라 여겼다.
“무스타파? 이집트 사람 같은데.. 그게 누구지?”
마메르코스는 지금 모르는 척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럴만한 이유도 딱히 없을 테고.
‘바에티카에는 들리지 않았거나 들렸어도 이곳의 권력자들은 만나지 않았다는 소리로군. 도무지 놈의 목적이 뭐였는지 알 수 없군. 이제 와선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닌데 계속 거슬려.’
이집트식 이름을 가진 자가 히스파니아에 와서 또 자신을 죽이려고 한 이유가 로마와 연관이 없다면? 대체 무슨 이유로?
‘어쩌면 죽은 술라와 연관이 있는지도. 그가 암살자를 파견한 것이라면? 뭐 이건 대충 이쯤 접어두고.’
하지만 마메르코스를 살려둔 이유가 단순히 무스타파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 위함이 아니었다. 이건 그저 부가적인 일에 불과했다.
“바에티카에 당장 성문을 열지 않는다면 네 목을 치겠다고 제안할 생각이다. 그 외에 다른 제안도 있지만 일단 이것에 대한 의견을 좀 들어보고 싶군.”
저들은 자신들이 내세운 장군을 죽음에 이르게 할 것인지 아니면 살릴 것인지 결정해야 할 것이다.
“뭐라? 이해할 수 없군. 그대로 공성을 시도해도 충분히 함락시킬 수 있을 텐데?”
“이왕이면 온전한 바에티카를 얻고 싶다. 피는 적게 흘릴수록 좋으니까.”
온몸에 피를 뒤집어쓰고 있는 테세우스, 저자가 할 말은 아니지 않은가? 마메르코스는 고개를 흔들며 테세우스에게 말했다.
“욕심이 과하군. 그렇다 할지라도 무의미한 제안이다. 내 예상대로 바에티카가 푸피디우스에게 병권을 이양했다면 그는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나의 정적이나 다름없는 작자였으니. 불리하기는 하나 바에티카의 성벽은 매우 단단한 편이니 수성을 한다면 버틸 수 있을 거라 여길 것이다. 딱히 틀린 생각도 아니고.”
“그래서 당신 생각은?”
하지만 그건 일반적인 군대를 맞닥뜨렸을 때를 뜻했다. 테세우스, 이 자가 나선다면 모르긴 몰라도 공성전 역시 빠르게 정리될 것이다. 병력마저 테세우스 쪽이 더 많지 않은가?
“당신 같은 괴물을 상대라면 많이 버텨야 반나절이겠군.”
테세우스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마메르코스에게 말했다.
“풀어주겠다.”
“뭐?”
그냥 이대로 풀어준다고? 마메르코스가 황당한 표정으로 테세우스를 바라봤다.
“반나절. 아니 그건 너무 짧군. 사흘의 기간을 주지. 그때까지 성문을 연다면 당신은 물론 당신과 뜻을 함께하는 자들은 살려줄 것이다. 열지 못한다면? 그때는 모조리 죽일 것이야.”
사흘이라면 간단한 공성무기를 조립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다. 전투로 인한 피로 역시 회복되기에 충분한 시간. 마메르코스는 질린 눈으로 테세우스를 바라봤다. 다시 말해 바에티카는 선택권이 없었다.
“이런 식으로 바에티카를 완전히 굴복시킬 셈인가?”
“왜 싫은가? 그게 싫다면 이 자리에서 죽으면 될 일이다. 그게 당신의 삶을 기리는 방식이라면 그 선택을 존중해주지.”
죽음을 달가워하는 자도 있던가? 하지만 괜한 반발심에 질문을 던졌다.
“······. 내가 돌아가서 수성을 시도한다면?”
“쓸데없는 질문을 하는군. 현재 병권을 장악한 푸피디우스가 정적이라고 본인 입으로 말하지 않았나?”
패전을 이유로 당장 죽이려고 들지나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테세우스는 다시 말을 이었다.
“마찬가지로 본인 스스로 성이 함락되는데 걸리는 시간이 길어야 반나절이라고 했다. 당신이 돌아가면 뭐라도 달라질 거라 여기는 건가? 그게 가능할지 의문이지만 할 수 있으면 어디 한번 해봐. 대신 더 많은 피가 흐르겠지.”
테세우스는 천으로 얼굴에 묻은 검붉은 피를 닦아내며 서늘한 눈빛으로 마메르코스를 바라봤다.
“한 가지만 기억하도록. 내가 공성을 펼치기로 마음먹는다면 포로로 잡은 바에티카 레기온을 한 사람도 남김없이 모조리 죽일 것이다. 착각하지 말도록. 당신의 가치가 대단하다고 생각해서 당신을 살려둔 게 아니야. 군단의 상징이 당신이니까 잠시 유예했을 뿐이야. 주제를 모르고 날뛴다면 모조리 죽이는 수밖에. 가봐.”
“······.”
그렇게 테세우스가 턱짓으로 가리키는 곳에는 한 마리 말이 준비되어있었다. 마메르코스는 고개를 숙인 채 침묵을 지키다가 말에게 다가가 그 위에 올라탔다. 그런 뒤 곧장 바에티카가 있는 곳으로 말을 달렸다.
*
그렇게 4개월이라는 시간이 다시 흘렀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그 시간 동안 테세우스는 바에티카를 완전히 점령했고 세르토리우스는 히베리아 족속을 굴복시켰다. 히스파니아는 더 이상 로마의 속주가 아니었다. 세르토리우스의 왕국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로마는 히스파니아만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먼저 크라수스가 염려한 대로 에트루리아인들이 대거 일어나 로마에 대해 반기를 들었다. 설상가상이라고 마치 기다렸다는 듯 달마티아의 일리리아인들도 로마에 반기를 들고 전쟁을 일으켰다.
이에 로마는 콘술 프라이오르, 레피두스를 토벌군의 장군으로 삼아 에트루리아의 도시들을 정벌하게 만들었고 코스코니우스를 달마티아 지역의 토벌군의 장군으로 임명했다.
마지막으로 히스파니아 지역의 세르토리우스를 토벌하기 위한 장군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지만 유력한 후보로 메텔루스 피우스가 거론되고 있었다.
날카롭게 생긴 사내가 적의를 감추지 않고 입을 열었다.
“이번 로마의 콘술께서는 담력이 두둑하신가 봅니다. 아니면 우리를 크게 얕보고 있던가?”
“그럴 리가? 함정을 파거나 그런 것은 없으니 안심하시오. 이미 모두 확인해보고 나타난 것 아닌가?”
헤르미니우스는 눈앞의 남자를 매섭게 노려봤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잡소리는 그만하고 용건이나 밝혀라! 왜 나를 보고자 했는지!”
헤르미니우스의 날선 기세에도 불구하고 레피두스는 미소를 지었다.
“원로원의 의원치고 에트루리아인을 수탈하지 않은 인물이 없지. 아무렴.”
헤르미니우스는 미간을 좁히며 입을 열었다.
“목숨을 두 개씩 가진 자는 아닐 테고. 내가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지?”
“모르는 건가? 아니면 모른 척하는 건가? 일부러 모른 척하는 거라면 그만두라고 말하고 싶군. 나는 멍청이와 함께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으니까. 나는 술라가 싫어. 당신도 술라를 싫어하지. 더 말이 필요한가?”
자신의 추측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받자 헤르미니우스는 다소 놀란 표정으로 레피두스에게 반문했다.
“당신은······. 현 로마의 콘술이다. 아닌가?”
레피두스는 이에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헤르미니우스를 바라봤다.
“그게 뭐? 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