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마 무신의 기억-117화 (117/298)

# 117

117. 이집트.

117. 이집트.

시원한 바닷바람이 뺨을 간지럽혔다. 날렵하게 빠진 전투형 3단 갤리, 트라이림 위에서 수평선을 지켜보던 나디르가 곁에 서 있던 테세우스에게 말을 건넸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는데······. 참 많은 것이 바뀌었습니다.”

테세우스는 아마포로 된 조금 뻣뻣한 재질의 옷을 걸치고 있었다. 아마포는 열전도율이 높기에 여름철에 입으면 매우 시원하다. 또한 튼튼하고 질긴 섬유질에 흡수력 또한 뛰어나기에 이런 무더운 여름날 입기에 꽤 유용한 옷이었다.

다만 질감 자체가 뻣뻣하기에 구겨짐이 심하기에 그만큼 까끌까끌한 느낌을 살갗에 남길 수밖에 없었다. 비단으로 된 옷을 입는다면 그 부드러움이야 한껏 누릴 수 있겠지만 이런 무더운 여름날이라면 금의(錦衣)라고 해봐야 지금 입은 아마포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사실 비단은 보기에 좋고 착용성이 탁월해서 그렇지 건강에 그리 좋은 천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비단은 저 멀리 동방의 한나라에서나 수입되는 특산품이었다. 비단의 수요는 많은데 공급량은 떨어지니 그 가격은 천정부지로 뛸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금의를 걸친다는 건 부의 상징이나 다름없었다. 여력이야 충분하다.

하지만 로마도 아니고 히스파니아에서 온 사람이 금의를 걸치고 있다면? 그 자체로 이목을 집중시킬 것이다. 체구가 상당히 커졌기에 안 그래도 이목을 집중시킬 것이 분명한데 거기에 금의까지 더해진다면 금세 유명인사가 될 확률이 높았다. 유명인사까지는 아니더라도 이목을 집중시킨다는 것에는 이견을 가질 수 없다.

눈치가 빠른 자들은 특정 정보, 몇 가지만으로도 자신의 존재를 추론해낼 것이다. 거대한 체구, 비단을 몸에 두를 만한 재력과 배경, 히스파니아에서 온 사람 등이 조합된다면 테세우스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자는 대번에 알아볼 것이다.

딱히 숨길 이유는 없지만 드러낼 이유는 더더욱 없다. 더욱이 실용성도 떨어지는 옷을 테세우스가 알량한 부를 드러내고자 고집할 리가 없었다.

오히려 그가 걸친 아마포 옷은 아마포 옷 중에서도 허름한 옷에 가까웠다.

테세우스는 나디르의 말에 고개를 주억이며 생각에 잠겼다.

“2년······. 아니 3년인가?”

테세우스가 기묘한 경험과 함께 이곳에 도달한 것이 BC 80년, 현재 BC 77년이니 3년 정도 된 것이 맞았다.

“아마 그쯤 되었을 겁니다.”

“폼페이의 자세르는 잘 있나?”

히스파니아와 로마는 상당히 떨어진 지역이다. 당연히 나디르라고 뭘 알겠느냐만은 해상무역을 주도하는 주역 중 하나였으니 혹 아는 내용이 있을까 던진 질문에 불과했다.

“잘 있을 겁니다. 테세우스님께는 호의를 베풀었지만 기본적으로 그는 노예상입니다.”

테세우스는 나디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았다. 노예상이라면 당연히 노예를 다루기 위한 병력을 보유하고 있다.

“무엇보다 자세르는 눈치가 비상한 사람입니다. 그보다는 촉이 좋다라고 해야 할까요? 당장 테세우스님께 도움을 준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 아닙니까?”

“뭐······. 하긴.”

그때 자신은 어렸고 비천한 신분이었다. 자세르는 폼페이 자경단에게 자신을 넘길 수도 있었다. 물론 그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리고 약했지만 자세르와 나디르를 베고 도망칠 여력은 있었으니까.

어쨌든 자세르는 자신을 도왔다. 그리고 언제가 되든 그것에 대해 보답할 마음을 품고 있었다. 그랬기에 자세르의 안위에 대한 질문을 던진 것이었고.

그가 잔혹한 노예상인지 아닌지는 둘째 문제, 도움을 받은 일에 상응하는, 아니 그것을 넘어서는 보답을 하는 것이 테세우스의 계산법이었다. 뭐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냐고 묻는다면 이는 과거에 대한 보답이자 미래를 위한 투자이다.

가장 먼저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볼 것 아닌가? 저자는 도움을 받으면 반드시 보답하는구나. 나의 도움에 보상을 주는 자로구나. 확인할 것 아닌가? 다시 도움이 필요한 순간이 온다면? 자연히 도움을 주게 된다. 단순히 손해를 보는 일이 아니니까.

물론 순수한 마음에서 돕는 자들도 있을 것이고 자신이 보상하는 것을 주변인들이 모를 수도 있지만 일관된 태도는 그만큼의 방향성과 위력을 가진다. 그게 자신의 성품을 만들고 자신의 특성이 된다. 그 특성은 당연히 주변과 상황에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그 결과는 결국 다시 자신에게 돌아온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자세르가 나를 돕지 않았다면 상당히 곤란한 상황에 처했거나 결국 죽었겠지.’

지금은 그때와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강해졌다. 하지만 이런 육체와 무예로도 과거의 상황에 처한다면 정면돌파가 아니라 피하는 것을 택했을 것이다. 지금이야 세르토리우스라는 배경과 세력을 등에 업었지만 그때는 그야말로 혈혈단신이었다. 자세르가 돕지 않았다면 십중팔구 죽었을 것이다.

나디르는 주변에서 바삐 움직이는 선원들을 힐끗 바라보다가 다시 말했다.

“그나저나 전부터 묻고 싶은 게 있었습니다. 히스파니아의 상황이 안정되었고 로마 역시 당분간은 히스파니아에 대해 신경 쓰기 어려운 상황이라고는 하지만······.”

“왜 이집트로 가냐고?”

나디르가 고개를 주억이자 테세우스가 씩 웃으면서 말했다.

“호사가들이 말하는 햇빛을 받아 하얗게 번쩍거리는 피라미드가 보고 싶어서라고 해두지.”

이집트의 문명을 떠올리면 사막의 모래색과 같은 칙칙한 빛깔의 어떤 무언가를 떠올리기 쉽지만 결코 그렇지 않았다. 건물 내부와 외부는 온갖 화려한 색상으로 치장되어 있었고 흔히 떠올리기 쉬운 모래색의 피라미드나 스핑크스 역시 세월의 흔적과 사람들로 인해 외장재가 벗겨져서 그렇지 본래는 흰색으로 번쩍거리는 형태를 지니고 있었다.

독사의 독보다 무서운 계략을 품고 있는 저 테세우스가 단순히 관광을 목적으로 이집트로 향한다고? 로마의 상황이 어지럽기는 하지만 그게 히스파니아의 절대적 안전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그걸 모를 사람이 아닌데 관광을 목적으로? 테세우스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이건 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말씀하기 어려운 것으로 알겠습니다.”

테세우스는 웃음을 거두며 나디르에게 말했다.

“거짓을 말하거나 돌려 말한 건 아니다. 다만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다라고 말하기엔 이집트에 대한 정보가 너무 부족해. 부족하기 때문에 어떤 것도 그 목적이 될 수 있겠지. 관광이 목적이라고 해도 거짓은 아니란 소리다. 실제로 어떤 모습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나디르는 그게 무슨 말인가 하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테세우스를 바라봤다.

“그런 눈으로 볼 것 없어. 대체 어떤 사람이 모든 것을 계획하고 그 계획대로만 움직일 수 있을까.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다. 다만······.”

테세우스가 말을 멈추고 수평선을 바라보자 나디르 역시 그의 시선을 따라 너울거리는 바다의 물결을 바라봤다.

“지식인이 부족해.”

“예?”

갑자기 무슨 소리란 말인가?

“히스파니아에 많은 사람이 몰려오고 있고 앞으로도 그렇겠지만 그 가운데 핵심기술이나 지식을 가진 자들은 미미해. 그럴 수밖에. 그런 자들이 이미 로마든, 이집트든, 그리스든, 그 어디든 이미 자리를 잡고 대우받고 있을 테니 말이야.”

나디르는 그 말에 느껴지는 바가 있어서 질문을 던졌다.

“그들을 회유하실 생각이십니까?”

“회유?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게 가능할까? 히스파니아가 풍부한 곳이긴 하지만 이집트는 그야말로 세계의 중심지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곳이다. 화려한 문명을 맛보고 살아가던 자들이 오지라 할 수 있는 히스파니아로? 대체 무슨 대가를 지불해야 저들을 회유할 수 있을지 감이 오지 않는군.”

“음······.”

나디르가 침음과 함께 침묵을 지키자 테세우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히스파니아에 몰려오는 로마인들. 나름의 재력과 능력을 갖춘 자들이다. 술라의 손길을 피해 히스파니아로 몸을 피신한 자들이니 저들을 무시하지는 않아. 그러나 부족해. 터무니없이 부족하지. 사실 저들은 문명을 누리던 자들이지 문명을 완성해가는 자들은 아니니까. 오히려 저들이 지닌 야심과 야망은 히스파니아에게 독으로 작용할 수 있겠지.”

“잘 모르겠지만 그들이 독이 된다면 지금이라도 내치면 될 일 아닙니까?”

테세우스는 의아한 눈빛으로 나디르를 바라봤다. 호라티우스라면 모르겠지만 나디르는 제법 식견이 뛰어났다. 그런데 이런 소리를 하니 의아할 수밖에.

“로마인들을? 진심으로 하는 소리인가?”

그러자 나디르가 눈을 빛내며 테세우스에게 말했다.

“물론 세르토리우스님 앞에서라면 이런 말을 꺼내지 않았겠지만 테세우스님은 로마에 깊은 애정을 지닌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아닌 말로 로마인들을 몰아내고 히스파니아에 켈타이인들을 주축으로 하는 왕국을 세워도 될 겁니다. 실제로 로마인들보다 켈타이인들이 테세우스님께 더 큰 충성을 바치고 있지 않습니까?”

다른 로마인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군단병들조차 테세우스에 대한 충성은 오피다니 연맹이나 솔리치 부족의 그것만 못했다.

“레기온을 보고 말하는 모양인데 그들의 충성은 개인에게 향한 것이 아니라 군단에, 나아가 로마에 대한 것이다. 나 역시 이게 더 바람직하다고 여기고 있고.”

로마의 군단병은 사병이 아니다. 법적으로 사병화할 수도 없다. 그게 마리우스로 인해 무너지기 시작했지만 어쨌든 일단은 그랬다.

“게다가 왕국이라. 세우려면 못 세울 것도 없겠지. 아버지에 대한 켈타이인들의 충성을 믿지 못할 것도 아니고. 하지만 왕국을 세운다고 하더라도 지금은 아니야. 왕국을 세우려 한다면 안팎으로 공격당할 것이다. 첫째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로마의 강한 압박을, 둘째는 주변에 왕국이 출현함으로 위기감을 느낀 켈타이 연맹의 연합공격이 되겠지. 최악의 경우, 그 둘이 연합할 수도 있는 노릇이다. 마우레타니아 왕국 역시 등을 돌릴 여지가 크다. 로마의 공화정 제도와 왕정제도는 엄연한 차이가 있으니 왕정제도를 수립한 히스파니아는 잠재적인 적이 아니라 실증적인 적으로 부상하겠지. 당연히 무역도 불안정해진다. 단순히 켈타이인들의 내부충성도가 높다고 택할 수 있는 선택이 아니야. 일단 그렇게 물자가 부족해지면 그들의 충성심마저 흔들리겠지.”

“으흠.”

“사기를 위해 거론한 적은 없다만 아군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강하지 않아. 약해. 매우 약하지. 툭 치면 와르르 무너져 버릴 세력에 불과해. 조심스러운 말이긴 하나 일례로 아버지께서 사망하시기라도 한다면? 세력은 금세 와해 되고 말 것이다.”

“테세우스님께서!”

“아버지와 내가 지닌 영향력은 질적으로 다르다. 아버지가 가진 영향력을 넘어서기엔 한참 부족해. 게다가 최근 아버지는 마리우스가 남긴 그 영향력마저 조금씩 등에 업고 있지. 나? 나는 그런 혜택을 거의 볼 수 없어. 내 이름은 히스파니아에서나 이제 조금씩 알려진 수준에 불과하다. 당장 로마의 로마인들을 붙잡고 내 이름을 묻는다면 그것에 대해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야. 보다 알기 쉽게 설명한다면 저 멀리 야만족들끼리 싸워서 이긴 장수의 이름 따위 로마인이 신경 쓸 까닭이 무엇일까? 내 영향력은 고작 그 정도다. 아버지와는 다르지.”

“하오나 아직 세상이 알지 못할 뿐입니다.”

“나를 믿어주는 건 고맙지만 억지는 부리지 말도록. 그게 현실이라는 소리다. 반면 로마? 그들은 잘라내고 잘라내도 다시 솟아나는. 그래 저들은 마치 헤르쿨레스가 싸웠다는 신화 속의 히드라와 같다. 아군은 아버지, 곧 세르토리우스가 끝이지만, 뭐 내가 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어쨌든 저들은 머리가 수없이 많아. 끝없이 끝없이 솟아나지. 병사들의 충성이 단순히 일개인에게 집중된 것이 아니라 로마라는 공통 가치에 근원을 두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로마인은 죽일 수 있을지 모르나 로마를 멸망시키는 건 극히 어려운 일이다.”

테세우스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말했다.

“무엇보다 히스파니아에 왕국을 세우겠다는 건 로마인으로서 가질 수 있는 이점을 모조리 단절시키는 행위가 된다. 로마인을 품에 품는 건 아군에게 독이 될 여지가 다분하지만 그렇기에 저들을 내칠 수는 없는 거다. 로마인이 거주하고 많은 로마인이 지지하면 그곳 또한 로마의 일부이자 또 다른 로마가 될 수 있으니까. 곧 로마의 영향력을 아군의 것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소리다.”

나디르는 고개를 숙이며 테세우스에게 말했다.

“음. 제가 괜한 소리를 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아니. 그럴 필요는 없다. 일리가 없는 말도 아니고. 당금 히스파니아에 몰려드는 로마인들의 면면을 보면.. 후우······. 그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나 역시 하고 있으니까.”

나디르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이집트로 향하시는 건 그래서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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