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마 무신의 기억-120화 (120/298)

# 120

120. 사람의 마음.

120. 사람의 마음.

77년이 이르기 전, 비가 축축하게 내리는 어느 겨울날 아침.

샤파트는 비린내는 메노르카의 마혼 항구의 바라보고 있었다. 몸을 눅눅하게 만드는 비도 몸을 움츠리게 만드는 추위도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바로 이 마혼 항구의 풍경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고 있었다. 번영해가고 있다면 왜 마음에 들지 않을까? 반대로 나날이 쇠락해가고 있었다. 당연히 마혼을 찾는 이들의 발걸음도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메노르카와 거래해야 할 자들이 마이오리카나 에부수스로 발걸음을 돌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샤파트는 인상을 왈칵 구기며 나무로 된 잔을 집어던졌다.

와당탕탕탕

마이오리카나 에부수스를 치면 되지 않냐고? 저들이 메노르카를 침공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할 판국에 침공을?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뽑는 행위나 다름없었다.

그야말로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샤파트는 자신 위에 그림자가 드리우는 것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그곳엔 후드를 눌러쓰고 얼굴 전체를 천으로 가린 사내가 서 있었다. 샤파트가 미간을 좁히며 그를 바라볼 때 그가 입을 열었다.

“당신이 샤파트인가?”

“그런데?”

샤파트는 몸을 일으켜 자세를 똑바로 하며 검 자루에 손을 가져가며 사납게 반문했다. 얼굴을 가린 사내는 두 손을 펴서 그에게 적의가 없음을 보이며 말을 이었다.

“진정하도록. 당신을 죽일 생각이었다면 이렇게 대화를 건네지도 않았을 것이니.”

하지만 샤파트는 여전히 검 자루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그를 바라봤다. 저 복색은 셀레우코스 제국의 것이다. 보다 정확하게는 셀레우코스 제국 당시 암살자들이 입었던 복색에 가까웠다. 셀레우코스 제국이 망조의 길을 걷는 마당에 그곳에서 자신과 같은 해적 두목을 죽이고자 사람을 보내지 않았겠지만 저들이 얼마나 위험한 자들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셀레우코스 제국은 쇠락했어도 저들에 대한 악명은 여전했다. 이곳저곳을 오가며 들은 것이 많은 샤파트로서는 당연히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복색만 갖추었다고 그들이라 단정할 수는 없지만 기세라는 것이 있었다. 그것을 느끼지 못할 샤파트가 아니었고 그런 면에서 눈앞의 사내는 진짜였다. 그게 아니라면 자신이 긴장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셀레우코스 제국인가?”

“그럴 리가 없다는 건 당신도 짐작하고 있을 텐데?”

이 이름 없는 자들이 셀레우코스와 연관성이 옅어졌다는 건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이들의 지난 행보만 짚어봐도 추측할 수 있는 사실이었으니까.

“그럼?”

“내가 누군지 아는 건 중요하지 않아. 내가 왜 당신한테 왔는지가 중요하지. 먼저도 말했지만 당신을 죽이려고 온 건 아니다. 그러니 쓸데없는 대화는 이쯤하도록 하지.”

샤파트는 사나운 기세를 발하며 그에게 말했다. 그의 몸에 새겨진 수많은 흉터들이 근육을 따라 꿈틀거리며 그 기세를 더했다.

“나를 죽일 수는 있고?”

얼굴은 가린 사내는 눈매를 좁히며 샤파트를 노려보다가 천천히 말했다.

“마이오리카, 에부수스.”

샤파트가 눈을 치켜떴으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마사에실리족, 나날이 조직화 되는 상인연맹. 그리고 그 근원이 되는 세르토리우스까지. 감당할 수 있나? 감당할 수 없겠지. 그러니 이렇게 술이나 퍼마시고 있는 것일 테고.”

“감히!”

샤파트는 상처 입은 맹수처럼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대로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고사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분노하기는 했지만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다.

“내가 너를 궁지로 몰은 게 아니다. 테세우스, 그자가 너를 궁지로 몰았지. 아닌가?”

“테세우스······.”

어찌 모르겠는가? 카다스 해협, 알보란해, 지중해 저 멀리 대서양까지도 해적들의 손아귀 아래 놓여있었다. 그것을 테세우스라는 놈이 모조리 바꿔버렸다.

자유무역지대이란 희한한 것을 형성하더니 이윽고 견고한 무역체계를 이뤄냈다. 약탈물이 많아지는 것이니 거기까지는 괜찮았는데 문제는 이 자유무역체계를 형성한 자들이 막강한 해군력과 더불어 대다수 상인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는 점이다.

무력으로도 약탈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렇게 한다면 공공의 적이 되어 즉시 토벌당하고 말 것이다. 아니 자신들은 이미 저들의 공공의 적이었다.

“해적을 토벌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심지어 토벌해도 해적이 또다시 형성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고 동맹의 결속을 위해 메노르카의 해적들을 토벌하지 않고 내버려 둔 것일 테지. 그게 너희의 현주소다.”

아픈 곳을 정확하게 찔러오자 샤파트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살기를 발했다.

“정녕 죽고 싶은 것이냐?”

반면 복면의 사내는 미소를 짓는 모양인지 눈매가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진정해. 쓸데없이 너를 도발하고자 이곳까지 온 것이 아니니까.”

샤파트가 자신을 헛걸음하게 만든다면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할 참이었지만 그걸 구태여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그는 샤파트가 뭐라 대답하기 전에 바로 말을 이었다.

“저들의 동맹은 아직 그리 견고하지 않아. 간단히 테세우스, 당장 테세우스 그자만 사라지면 저들은 균형을 잃어버리겠지.”

“그걸 누가 모를 것 같으냐? 세르토리우스의 아들인 그를 무슨 수로 죽인단 말이냐?”

사내는 샤파트를 똑바로 바라보며 질문했다.

“테세우스를 죽이고 싶은 건가?”

“당연한 소리를 하는군. 하지만 그랬다가는 우리도 같이 패망한다.”

“그건 염려할 필요가 없어. 세르토리우스의 분노는 아마도 카르타고의 그림자회가 감당하게 될 테니 말이야.”

“그림자회? 넌 그림자회의 의뢰를 받고 움직인 것이냐?”

카르타고의 그림자회라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두목이 죽고 그 세가 급격하게 약해진 것으로 아는데 그들이 옛 셀레우코스 제국의 암살자들을 움직였다고? 뭔가 미심쩍었다.

“아아. 자세한 것은 네가 알 필요도 없고 알려줄 생각도 없어. 너는 네 이익만 챙기면 되지 않나? 테세우스를 죽일 수만 있으면 되는 거 아닌가?”

“으흠.”

침음을 뱉으며 생각에 잠겼던 샤파트가 질문을 던졌다.

“그림자회는 어떤 이유로 그를 죽이려고 하는 거지?”

“그림자회의 두목 히밀코가 그의 손에 죽었고 무엇보다 그는 바알과 타니트 신상을 훼손했다. 더 말이 필요한가?”

“신상을 훼손해?”

샤파트의 반문에 사내는 즐겁다는 듯 이죽거리며 말했다. 물론 그 표정은 천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지만 윤곽만으로도 그가 웃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주 박살을 냈지.”

“뭐?”

그런 이유라면 납득하지 못할 것도 없다. 하지만 말하는 것을 봤을 때 눈앞의 이 사내는 그림자회와 별 연관이 없는 사내로 보였다. 하여 의심이 들었다.

“그런 이유라면 그림자회는 믿을 수 있겠다. 하지만 내가 널 어떻게 믿지? 너는 왜 테세우스를 죽이려고 하는 거냐?”

“덩치에 걸맞지 않게 소심하군.”

“신중한 거다. 게다가 한 가지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우리는 해군이 아니야. 단순히 테세우스를 죽이는 것만으로 움직일 수는 없다. 나는 남 좋은 일만 하는 자가 아니야.”

당장 떨어지는 이득이 없다면 자신의 위치가 더 위태로워진다. 후임자나 좋을 짓을 뭣하러 한단 말인가? 때에 따라 다를 수는 있겠지만 일주일 뒤에 말라죽더라도 당장 오늘 죽는 것보단 낫다.

철럭

그러자 그는 탁자 위에 묵직한 주머니를 던졌다. 샤파트가 그것을 열어보고 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사내를 바라봤다. 그곳엔 꽤 많은 아우레우스가 담겨있었다. 이건 과한 금액이었다. 이런 금액을 아무렇게나 던진다? 샤파트는 머릿속에 경고음이 울리는 것 같았다.

“충분한 금액일 거다. 아닌가?”

“그.. 그렇소. 하지만 대체 왜 우리를 통해? 직접 처리하면 될 일 아니오?”

당장 눈앞의 사내만 해도 악명높은 셀레우코스의 암살자들. 그러니까 이름 없는 자들로 불리는 단체의 일원으로 보였다. 해적 따위에 맡기는 것보다야 직접하는 게 더 빠르고 확실하지 않겠는가?

“호오. 눈치도 제법 빠르군. 하지만 너무 많은 것을 알려고 하지 말도록.”

서늘한 그의 눈빛에 샤파트가 표정을 굳히며 대답했다.

“무슨 뜻인지 알겠소.”

“다만 한 가지만 대답해주지. 세상의 모든 모기를 때려잡을 수는 없다. 하지만 한 모기가 내 살을 계속 파먹으려고 들면 그건 말이 달라지지.”

모기? 자신은 감히 건드릴 엄두도 나지 않는 대상이 모기에 불과하다고? 눈앞의 사내가 어떤 자인지는 모르겠지만 저자의 말이 허풍이 아니라면 이들에게 자신은 태풍 앞의 조각배만도 못한 존재에 불과할 것이다.

“······. 뜻에 따르겠소.”

잠시 침묵을 지키던 샤파트가 긴장한 표정으로 대답하자 사내 역시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좋아 다시 연락하지. 그전까지 모든 준비를 마치도록.”

*

77년 봄날, 알보란해와 지중해가 갈라지는 어느 해역에서.

“테세우스? 네놈이 테세우스냐?”

“감히 바알의 신상을 파괴해?”

“그것 모자라 타니트 여신의 신상을 더럽히다니 신성모독죄로 그 몸을 갈가리 찢어서 어떤 것은 불태우고 어떤 것은 물에 던지고 어떤 것은 개먹이로 주고 어떤 것은 땅에 흩어버릴 것이다. 너는 영원히 쉼을 얻지 못하리라!”

“죽여라!”

“놈이 테세우스다!”

“죽여버려!”

“와아아아아아!”

제각각 무장을 한 사내들이 광기어린 표정을 하고 테세우스에게 짓쳐 들었다.

“걱정 마라. 나는 그냥 깔끔하게 베어서 죽일 테니.”

테세우스는 그렇게 나지막이 외친다음, 보아디케아를 자신을 향해 짓쳐드는 자들을 향해 반원을 그리듯 휘둘렀다.

촤아아악

허리가 갈라지며 그 안의 창자나 허연 뼈가 타오르는 불빛에 일렁이며 그 모습을 드러냈다. 다량의 피가 선상 가득 흩뿌려졌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파득 파득

잘려진 다리와 팔등이 선상 위에 몇 번씩 꿈틀거렸는데 공교롭게도 테세우스에게 베어진 자의 머리와 다리가 엇갈려 맞닿은 것도 있었다.

“어어어?”

그에게 달려들던 모든 사람이 한꺼번에 베어질 줄은 몰랐던지라 저들은 당황한 나머지 잠시나마 주춤거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왜 그렇지 않은가? 상상할 수 없던 일이 벌어지면 넋을 놓고 바라보게 되는 그런 일 말이다.

하지만 그건 그들에게나 놀라운 일에 불과했다. 그들이 정신을 차릴 때까지 기다릴 이유가 없었던 테세우스는 보아디케아를 다시 휘둘러 저들의 목이며 팔을 무참하게 베어냈다.

“크아아아악!”

“으아아악!”

다시 이어지는 끔찍한 비명에 부랴부랴 정신을 차리고 테세우스에게 달려 들었지만 그 모습 불꽃으로 뛰어드는 부나방처럼 보일 뿐이었다.

“죽.. 죽어라!”

한 사내가 자신의 뒤에서 검을 들고 달려오자 테세우스는 휘두르던 창을 그대로 다시 뒤로 찔렀다.

촤아아악

도약해서 테세우스의 등을 찌르려던 사내는 창두에 머리가 찍혀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테세우스는 그대로 다시 창을 휘둘렀고 창두에 꽂혀있던 사내는 아무렇게 날아가 처박혔다. 하필 처박힌 곳이 동료의 품이었기에 동료는 기겁하며 그를 떨쳐냈다.

“히이이익!”

“어린아이 인신공희나 받는 너희 잡신에게 가서 말해라. 나를 죽이려면 너희 같은 자들은 열 배 그 이상은 더 데려와야 가능할 것이라고. 너희 따위가 무슨 정의를 실현한답시고 원한을 품었단 말이냐? 신성모독? 그런 게 신이라면 오냐 백번 천번도 더 해주겠다. 와라! 나 테세우스가 네놈들의 모가지를 모조리 씹어줄 테니.”

고작 몇 번의 전투에 불과했다. 그가 벤 것은 아직 열 명도 채 되지 않았다. 하지만 200명도 넘는 자들이 테세우스의 광기에 압도당했다.

으드득

테세우스는 갑자기 저 밑바닥에서부터 분노가 치밀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너희 같은 새끼들 때문에! 내가 씨발!”

테세우스는 보아디케아를 들고 주춤거리며 물러서는 저들을 향해 달려갔다. 저들의 무기는 검류가 대부분이었다. 선상과 같이 좁은 공간에서 창과 같은 무기는 그리 효율적인 무기가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테세우스를 막으려면 사정거리가 긴 무기로 견제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도 그를 저지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데 심지어 저들은 로마의 군단병처럼 스쿠툼 비슷한 것도 들고 있지도 않았다. 방패 자체를 들고 있지 않은 경우가 태반이라는 소리다.

푸우욱

근육을 뚫고 뼈를 부수는 진동이 창신을 타고 생생하게 전달되었다.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테세우스는 창을 뺄 생각도 않고 그대로 창을 들어서 주변의 적을 향해 휘둘렀다.

“아아아아아!”

창에 몸이 꿰뚫리기는 했지만 아직 살아있던 자가 비명을 지르며 테세우스가 휘두르는 대로 동료의 몸을 후려쳤다.

우두두둑

동료의 몸에 머리를 박아넣은 사내는 섬뜩한 소음과 함께 목뼈가 부러져 죽었고 그 강력한 힘에 받힌 동료는 피를 토하며 뒤로 날아갔다. 가슴에 조금 들어간 것이 아무래도 갈비뼈가 대거 나간 것으로 보였다. 피를 토하는 것을 감안하면 그 뼈가 내부장기를 찌른 모양이니 즉사는 면했어도 죽음은 면치 못할 것으로 보였다.

“미.. 미친!”

“이.. 인간의 힘이 아니다.”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테세우스를 죽이려고 하는 자들이 그걸 이제 알았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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