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1
131. 재와 먼지.
131.
테세우스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아흐모세를 주시하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보다도 사치와 낭비벽이 심하다고 했으니 음주가무에 빠져 정사(政事)를 돌볼 여력조차 없을 확률이 높겠군.”
아모시스를 비롯한 아흐모세 역시 프톨레마이우스의 왕위가 이어지길 바라는 자들이니 이와 같은 발언은 그리 좋은 발언이라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아모시스를 만나기 전에 우연히 만난 아흐모세는 프톨레마이우스 왕조에 반감을 품고 있는 이로 보였다. 때문에 테세우스는 거침없이 입을 열었다.
“······.”
아흐모세는 입을 굳게 다문채 침묵했다.
‘역시 그랬나?’
테세우스는 그런 아흐모세의 모습에 눈매를 좁히며 그에게 다시 말했다.
“프톨레마이우스 그자가 정녕 그런 자라면 당신들이 처리하려는 친로마주의자 즉 극로마주의자들이 주장하는대로 이집트에 공화정이 서는 것이 낫지 않소? 그 속에서도 얼마든지 이집트 문화와 문명을 녹여낼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오.”
“그건······. 아모시스님께서도 말했듯이 이집트는 신권통치라..”
“허! 그런 어줍잖은 이야기는 집어치워. 신권통치든 아니든 결국 다스림을 행하는 주체는 인간이 아닌가? 그리고 그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이해득실관계에 영향을 받기 마련이지. 프톨레마이우스에게 맹목적으로 충성하지도 않는 자들로 보이는데 그 왕이 건실하지 못함에도 그를 끝까지 옹립(擁立)한다? 둘 중 하나지. 받들어 모시는 자들이 사리판단이 안 되거나 왕이 건실하지 못한 모습으로 가장하고 있거나. 한데 아모시스나 당신 모두 사리판단이 서지 않는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는단 말이야. 그럼 내가 내릴 결론이 뭐라고 생각하나?”
앞서 프톨레마이우스를 까내린 건 아흐모세의 반응을 통해 미심쩍은 부분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물론 저들의 말대로 프톨레마이우스가 정말 개차반일 수 있었다. 하지만 아모시스와 아흐모세 등의 면면을 살피면 정작 프톨레마이우스의 진면목은 그렇지 않을 확률이 상당히 높았다. 그것을 확인한 테세우스는 더 이상 아흐모세에게 예를 차리지 않았다.
“······.”
아흐모세는 어떤 말도 뱉을 수 없었다.
“이제 뭔가 확연하게 눈에 들어오는군. 왕은 사치와 낭비벽이 심한 망나니 왕으로 가장하고 있고 그를 따르는 충성스러운 신하들은 왕으로부터 권력을 부여받기는커녕 도리어 외면당하고 있다라? 이게 뜻하는 바가 뭘까?”
“그.. 그건.”
“이집트의 실권자가 따로 존재하고 그 실권자는 프톨레마이우스와 그를 따르는 신하들을 쓸어버릴 수 있는 권세를 가진 자라는 뜻이 되겠지. 그게 아니라면 왕이 망나니처럼 가장할 이유도 없고 자신을 축출하려는 이들에게 권력을 실어줄 이유도 없었을 터, 내 말이 틀린가?”
아흐모세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테세우스에게 대답했다.
“맞.. 맞습니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그건 외부적으로 볼 때 그러한 것이고, 분명 당신들에게도 병력이 있을 거야. 최악의 경우 왕성을 뒤엎을 생각도 하고 있었을 테니 암살자들 역시 많이 양성했겠지. 하지만 함부로 움직일 수는 없었을 거야. 당신들이 가진 힘은 저들의 급소에 비수를 찔러넣을 수 있을 정도에 불과할 테니 저들을 기만하고 저들의 숨통을 끊을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겠지. 한데 마침 아주 유용한 패가 나타났단 말이지.”
아흐모세는 경직된 표정으로 테세우스를 지켜보는 것만이 그가 현재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이집트내의 친로마주의자들과 극로마주의자를 모조리 쓸어버려도 로마와 얼굴을 붉히지 않을 수 있는 아주 유용한 패가 말이야. 로마와 대적 중인 히스파니아의 세르토리우스의 아들이 저들을 처리했다고 발뺌한다면 내부의 위협을 안전하게 제거할 수 있음은 물론 외부의 위협 역시 방지할 수 있겠지.”
테세우스는 거기까지 말한 다음 아흐모세를 냉정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단 로마인이 죽는다면 말이 달라지지. 그러니 로마인이 아닌 이집트인으로 한정할 필요가 있었을 거야. 결국 내가 성공하든 실패하든 버리는 패로 사용할 예정이었겠지. 어차피 히스파니아와 로마의 전투가 벌어지면 어떤 식으로든 이집트의 일에 신경쓰기 어려울 것이라 여겼을 테고. 당연히 나와의 약속 역시 지킬 생각이 없었겠지. 당신들은 애초에 로마와 적대할 생각이 없었다. 그저 이집트 내의 기득권층을 타파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 그들이 사라지면 그들을 대신해서 로마와 결탁했겠지. 어쩌면 결국 그렇게 쓸모없어진 내 육체는 열사(熱砂)의 사막 위에 말라비틀어지는 꼴을 당했을 지도 모르겠군.”
테세우스는 낮은 목소리로 아흐모세에게 말했다. 그 모습은 마치 극히 사나운 맹수가 그르렁거리는 것처럼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이것이 당신들의 거래방식인가?”
“지.. 진정하시고.”
“진정? 황당한 소리를 하는군.”
테세우스는 분노를 가라앉히고 냉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를 속이려고 하지 말았어야 했어. 그랬다면 나는 당신들이 원하는 것 이상의 몫을 감당해줬을 거야. 그러나 나를 속이려고 한 이상, 그 대가는 반드시 치르게 될 거다.”
이미 많은 계획이 틀어졌다. 하지만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대신 그 방법은 훨씬 더 많은 피를 부르게 될 것이다.
테세우스는 아흐모세의 집밖으로 나서려다가 걸음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그는 아흐모세를 향해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이 일로 일부러 보복하지는 않는다. 비효율적이니까. 하지만 경고 하나만 하지. 내 앞길을 막아선다면 그게 누구든 모조리 벨 것이다.”
그 압도적인 기세에 아흐모세는 질린 나머지 어떤 말도 뱉지 못하다가 테세우스가 문을 열고 나서자 그제야 다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고작 한 명이다. 자신들의 세력에 비하면 한 명에 불과하다. 그 한 명에게 왜 이렇게까지 압박감을 느껴야 하는지 본인조차 의아했지만 아흐모세는 이것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유야 어쨌든 압박을 느끼고 있는 것이 현실이었으니까.
“우.. 우리와 적이 되겠다는 뜻입니까?”
“글쎄. 오늘 일은 그냥 넘어가겠지만 말했다시피 그건 앞으로 당신들하기 나름이겠지.”
어제의 적이 오늘의 아군이 될지, 어제의 아군이 오늘의 적이 될지 누가 알 수 있겠는가? 그런 세상이 아닌가? 이들과 틀어지긴 했지만 공동의 적을 두고 있으니 문을 닫을 필요는 느끼지 못했다. 하나 말했듯이 자신을 막아서려고 든다면 그게 무엇이든 베어버릴 것이다.
테세우스는 무심한 눈빛으로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강한 햇살이 테세우스를 내리쬐었고 그 모습에 아주 미미하게나마 현기증을 느꼈다. 그건 햇살로 인한 것이라기 보다는 어떤 허탈한 감정에서 비롯된 어지러움이었다. 저들과 틀어진 이상 앞날에 대한 계획을 일일이 세워야 하기에 그것에 대한 우려도 일정부분 섞여있었다.
테세우스라고 해서 강철로 만들어진 무쇠인간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그가 문을 열고 나서는 찰나의 순간에 벌어진 일에 불과했다. 테세우스는 멀찌감치 떨어져 아흐모세의 집을 주시하는 한 사내를 발견했다. 그가 자신의 팔을 붙잡고 허물어지듯 오열하던 중년사내라는 것을 파악하는 것은 결코 어렵지 않았다.
테세우스가 중년사내, 바트로스에게 다가가며 입을 열었다.
“이름이 뭡니까?”
여러 가지 질문이 있었다. 삶으로 돌아가라고 했는데 왜 돌아가지 않았냐? 사연이 무엇이냐? 무엇 때문에 이곳에 남아있었던 것이냐 등등 말이다. 하지만 거두절미하고 테세우스는 그의 이름부터 질문했다.
“바트로스. 바트로스입니다. 무엇이든 하게 해주십시오.”
테세우스는 여전히 바트로스의 눈빛에서 꺼지지 않는 불길을 보았다.
“그 끝이 당신의 죽음이라고 해도?”
테세우스의 질문에 바트로스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제 가족들이 죽을 때 저는 이미 죽었습니다.”
새로운 가족을 만들면 되지 않나? 어째서 비극 속으로 자신을 밀어넣으려는 것이냐 라는 말은 뱉지 않았다. 그의 선택이다. 무엇보다 테세우스는 그의 눈빛에서 절박함을 봤다. 자신의 가족을 지키지 못했다는 책임감에 짓눌린 사내의 절박함을 말이다.
테세우스는 잠시 침묵을 지키며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 근방에 도적, 산적, 해적 누구라도 좋다. 그들이 많이 출몰하는 지역으로 나를 안내해라.”
갑자기 도적들은 왜? 바트로스 살짝 의아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곧 털어버리고 급히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퀸투스 세르토리우스 테세우스 라는 이름을 숨기고자 했지만 이제는 상관없다.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 이상 경고를 했다고 저들이 자신을 이용하지 않으리라는 법이 어디있나? 그럴 바에는 판을 키우겠다. 테세우스는 무심한 눈빛으로 도시를 녹일 것처럼 내리쬐는 햇살을 바라봤다.
*
구불구불한 금발의 우람한 체형을 가진 사내가 푸른 눈을 빛내며 우렁차게 소리쳤다.
“토벌을 명령받은 간악한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가 도리어 에트루리아의 헤르미니우스와 손을 잡고 로마로 진격하려고 한다. 이를 두고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와아아! 놈들을 죽여버리자!”
“나를 따르라. 내가 놈들을 밀 까부스듯 박살내버릴 것이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마그누스!”
“와아아아!”
그는 바로 폼페이우스였다. 폼페이우스는 저명한 로마 가문의 자제가 아니다. 그의 선조 중 갈리아인의 피가 섞였는지 그의 외모나 체형 역시 일반적인 로마인의 체형이라기보다는 갈리아 지역의 체구가 큰 전사들의 모습을 많이 닮아 있었다.
사실 지금의 토벌군은 콘술 포스테리오르였던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가 이끌어야 적법했다. 하지만 카툴루스는 내정형 인재로 군재는 전혀 없었다. 에트루리아는 이탈리아 본국에 속한 곳이니만큼 로마와 매우 근접한 곳이다. 아울러 저들을 토벌하러 갔다가 도리어 반란군과 합류한 레피두스의 군대는 로마의 군단병들이었다.
상당히 위험한 상황이고 매우 중요한 전투였다. 그런 전쟁을 이끌 자를 군재나 군 경험도 미미한 카툴루스에게 맡길 수 없었다. 칸나에 전투의 비극을 로마에서 재현할 생각이 없었던 원로원은 급히 회의를 열어 저들에 대한 토벌을 폼페이우스에게 맡기기로 만장일치로 결의한다.
사실 이 결정은 로마법 상 위헌이나 다름없었다.
지금의 폼페이우스는 집정관은커녕 별도의 관직을 지낸 적도 없었다. 그런 자를 토벌군의 총사령관으로 삼았다는 건 작금의 원로원이 얼마나 주먹구구식으로 로마를 운영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방증이었다. 원리원칙이 사라진지 오래였고 돈과 권력에 따라, 혹은 자신의 안위를 보전하기 위해 나라가 움직이는 상황이었다.
사실 원로원으로서는 똥줄이 탈 수밖에 없었다. 레피두스를 위시로 한 에트루리아를 막아내지 못한다면 원로원의 의원들은 거의 대부분 잔혹하게 살해당하고 말 것이다. 그런 상황이니 로마의 법이 어떤지 눈에나 들어오겠는가? 저들이 보기에 가장 믿음직한 장군, 폼페이우스에게 토벌군을 맡기는 건 정해진 수준이었다.
이러한 결정에 콘술 포스테리오르, 카툴루스조차 반대하지 않았으니 이 점을 로마의 누구도 문제삼지 않았다. 있다면 권력자들을 거침없이 비방하던 카이사르 한 사람이었는데 이미 그는 몸을 피해 로마를 떠나고 없었다.
물론 레피두스나 카툴루스 모두 BC78년의 집정관들로 BC77년 현재의 집정관은 데시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와 마메르코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였다. 다만 레피두스가 반란에 합류한 해가 작년이었기에 폼페이우스가 발빠르게 총사령관으로 선출되었다. 저들이 있었어도 폼페이우스가 선출되었을 확률이 높기는 했지만 말이다.
폼페이우스가 이끄는 토벌군은 에트루리아 지역에 이르러 레피두스와 헤르미니우스의 군대와 대치중에 있었다.
*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는 긴장한 표정으로 폼페이우스의 군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카툴루스를 보낼 줄 알았다. 그랬어야 했다. 법적으로 당시 토벌군 장군으로 삼을 수 있는 자는 카툴루스가 유일했으니까. 그런데 원로원 이자들이 법을 무시하고 폼페이우스를 토벌군 장수로 삼을 줄이야.
“뭘 그렇게 긴장하고 그러시오? 폼페이우스의 명성이라고 해봐야 허명 아니오?”
“허명? 허.”
얼핏 듣기엔 헤르미니우스의 말이 자신감넘치는 말로 들릴 수 있었지만 레피두스는 그가 쓸데없는 객기를 부리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아예 틀린 말도 아니었다. 겁을 집어먹든 아니든 어차피 폼페이우스와 싸워야 하는 상황이 아닌가? 따라서 레피두스는 헤르미니우스의 태도에 대해 어떤 말도 뱉지 않았다.
“수적으로도 우리가 유리하오. 지형 역시 우리가 유리하고. 폼페이우스를 보고 마그누스. 마그누스. 이러는데 오늘 그 이름에서 마그누스를 뜯어버릴 것이오.”
폼페이우스 역시 술라 휘하에서 에트루리아를 수탈한 인물 중 하나다. 따라서 헤르미니우스는 그에 대한 적개심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레피두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뜯어내든 씹어먹든 폼페이우스를 쓰러뜨릴 수만 있다면 로마는 우리 것이다. 이번 전투는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
그러자 레피두스를 따라 전투에 참전하고 있는 마르쿠스 페르페르나가 입을 열었다.
“맡겨 주십시오. 반드시 승리로 이끌겠습니다.”
이에 질세라 헤르미니우스 휘하의 알카이오스 역시 외쳤다.
“저를 선봉으로 세워주시면 적의 예봉을 꺾어보겠습니다.”
그 말에 레피두스가 신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선봉? 아니 그럴 필요 없다. 모든 상황이 아군이 유리하니 시간을 끌면서 적을 고사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