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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무신의 기억-149화 (149/298)

# 149

149. 무엇이 중한가?

149. 무엇이 중한가?

테세우스는 햇빛을 받아 푸른빛으로 넘실거리는 바다를 바라봤다. 바다 위에는 무수히 많은 배가 유유히 떠다니고 있었고 그의 뒤에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게툴리족의 기병들이 함께하고 있었다.

“배에 승선하라!”

테세우스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게툴리족의 전사들은 곧바로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는 배에 오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테세우스는 머리를 가볍게 옆으로 흔들었다.

한 달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게툴리족이 거부할만한 제안은 거의 없었으니까.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석 달이나 넘는 시간이 걸렸다. 이집트에서 지내던 시간보다 메마른 황야에서 게툴리족과 보낸 시간이 배 이상이나 많게 될 줄은 테세우스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테세우스는 미간을 좁히며 경탄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나디르에게 말했다.

“히스파니아의 상황은? 아니 그보다 아버지께서는?”

“염려 마십시오. 세르토리우스 님은 무사하십니다. 단순히 무사하신 정도가 아니라 상세한 소식은 알지 못하지만 제가 떠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연일 토벌군을 압도하고 계셨습니다. 저 명성 높은 폼페이우스조차 세르토리우스 님에게 번번이 패배했으니 적어도 테세우스 님께서 히스파니아에 당도하기 전까지는 별문제 없을 겁니다.”

늦지 않았다. 라는 안도감이 테세우스의 마음에 스며들었다. 하지만 아직 마음을 놓기엔 너무 이르다. 적을 패퇴시키긴 했으나 일시적인 후퇴일 뿐이다. 승리의 쐐기를 박아넣기엔 히스파니아의 전력이 토벌군에 비해 많이 미약했다. 무리하다간 어렵게 잡은 승기가 도리어 토벌군에게 넘어갈 수 있었다.

많은 승리를 거뒀다지만 세르토리우스의 전략은 정면대결보다 저들의 기반을 무너뜨리는 것에 집중했을 테니 여전히 토벌군과 전력을 비교하기 무색할 정도로 큰 격차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히스파니아에 당도하면 말이 달라지리라.

‘늦었다. 내 예상보다 훨씬 더. 그러나 늦지 않았다.’

테세우스는 마음을 추스르며 자신이 석 달 이상이나 게툴리족의 영토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던 이유를 상기했다.

*

테세우스는 자신을 둘러싼 게툴리족의 대표들을 바라봤다.

“네 제안이 뭐라고? 다시 말해봐라.”

“나와 함께 싸우자. 너희에게 이득을 보장해주겠다.”

“그것 말고 네가 보장해 줄 수 있는 이득이 뭐냐고 묻는 거다.”

“나와 함께하는 부족에게는 식량과 물자지원. 또한 향후 히스파니아와 함께 경제적 이득을 도모할 수 있는 동맹 관계를 구축할 수 있다. 물론 이 점은 히스파니아가 로마의 영향에서 지금보다 훨씬 자유로워진 다음에야 상세하게 거론할 부분이니 지금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 같군. 나와 함께하지 않을 자들이 들을 만한 내용도 아니고 말이야.”

“흥미로운 제안이다. 흥미로운 제안이고 네놈의 담력도 인정하겠다. 홀로 우리 게툴리족의 영토를 거닐 생각을 하다니 어지간한 담력으로는 힘든 일이지.”

처음 자신이 제안했을 때 이들의 태도는 대부분 호의적인 모습을 보였다. 호전적인 성향이야 이들의 문화가 그러하니 차치하고 어쨌든 이들은 자신의 제안을 수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한데 저들끼리 회의하며 무슨 대화가 오간 것인지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아까와는 미묘하게 달라졌다. 테세우스는 그 미묘한 분위기를 즉각 파악했다.

프레디에는 자신의 부족은 물론 게툴리안이라 불리는 영토에 위치한 영향력과 세력이 큰 부락의 게툴리족에 모두 연락해 테세우스에게 자리를 마련해줬다. 테세우스가 요청했던 요구를 프레디에로서는 충실히 이행해 준 셈이었다.

이들을 설득시키고 이들 가운데서 함께 할 전사를 얻는 것은 테세우스 자신에게 달렸다. 따라서 테세우스는 일단 마음을 가다듬고 이들이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예의 경청했다.

“식량지원과 물자지원이라 좋은 말이야. 하지만 우리는 굳이 네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아도 그것을 얻어낼 수 있는 아주 좋은 방법을 떠올렸어. 그게 뭔지 짐작하겠나?”

자신의 담력을 칭찬한 다음 곧이어 좋은 방법이라? 모를 수 없었다. 하지만 테세우스는 침묵을 지켰다.

“······.”

“바로 네놈을 인질로 삼는 일 말이다. 아주 구미가 당기는 일이 아닌가? 네놈이 그토록 대단한 놈이라면 네놈을 인질로 삼았다는 것만으로도 우리 게툴리족의 위상은 높아진다. 히스파니아의 켈타이인들이 너를 두려워한다지? 소문이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너를 두려워하던 적들은 곧 우리를 두려워하게 될 터, 아주 구미가 당기는 방법이지. 너는 이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테세우스는 서늘한 눈빛으로 게툴리족의 족장들을 바라봤다.

“조금 황당하군. 고작 모여서 회의한다는 게 그딴 저급한 책략뿐이었나? 일단 너희가 손해볼 것은 없을 텐데? 각 부족? 아니 각 부족까지 갈 것도 없이 열개 부족에서 남는 전사 오백씩만 지원해도 내가 원한 기병 오천은 채우고도 남는다. 모든 부족이 합심해서 지원한다면 나는 그것에 따른 충분한 보상을 지원할 것이다. 이 일은 적어도 올해에 전쟁을 일으킬 원인을 대부분 해소하는 일이 될 것이야. 그런데도 나를 인질로 삼겠다?”

“오해하지 말도록. 네 제안이 매력적이지 않다는 이야기가 아니야. 하지만 우리는 우리 게툴리족만 신경쓸 부분이 아니거든.”

그 말에 테세우스는 이름도 알 수 없는 게툴리족 족장을 바라보며 반문했다.

“그게 무슨 소리지?”

“가라만테스 놈들이 우리 게툴리족 영토를 계속 침범해서 말이야. 저들을 상대하려면 전사가 필요해.”

게툴리족이 말한 가라만테스(Garamantes BC500~ AD700)는 제법 정교한 지하 관개 시스템을 사용했으며 사하라 사막, 페잔 지역에 부유한 왕국이나 도시 국가를 세웠다. 크게 8개의 도시를 이룬 것으로 보이는데 게툴리족이 활동하는 지역 아래에 위치하고 있었다. 수도는 ‘가라마’라는 곳이었다.

테세우스도 가라만테스라는 나라에 대해 들어봤다. 하지만 깊게 신경쓰지는 않았다. 현재 이런 나라까지 신경쓰기엔 산재한 일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게툴리족을 상대하면서 그들 주변에 어떤 나라와 적이 있는지는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테세우스는 게툴리족과 가라만테스의 관계를 어느 정도는 꿰고 있었다.

“이상한 소리를 하는군. 가라만테스가 너희를 침탈하려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가라만테스를 침략하려는 것이 아닌가? 물자와 식량이 확보되면 그것을 군량 삼아 가라만테스를 침공할 계획을 세웠군. 쯔. 어처구니가 없군.”

테세우스는 고개를 가볍게 흔들었다. 자신이 너무 쉽게 생각했다. 흔히 이성적인 사람이나 상식적인 사람이 하는 실수 중 하나가 무엇이냐면 자신이 이성적이나 상식적으로 옳게 대하면 상대방도 이성적이나 상식적으로 나올 것이라는 착각이다.

그렇지 않다. 그랬다면 세상이 이렇게 개판일 리도 없었다. 선을 행하면 악인은 그 선을 어떻게든 더 큰 악을 행하기 위해 사용하려고 든다. 그런 이들이 판을 치면 칠수록 선을 행하는 사람들은 점점 적어지고 종국엔 악인밖에 세상에 남지 않는다. 그럼에도 선행을 꿋꿋이 행하는 의인이 있겠지만 글쎄. 그 비율이 얼마나 될 것인가? 비극이지만 이게 현실이었다.

게툴리족은 테세우스를 따라 전투를 치르면 많은 이득을 얻는다. 물론 피가 흐르고 살점이 떨어나가는 참혹한 전장에 서야겠지만 그게 싫다면 거부하면 된다. 테세우스가 군대를 이끌고 와서 이들을 강압적으로 징집하는 것도 아니고 이들은 자유롭게 자신들에게 이득이 되는 방향을 선택하면 되었다.

‘약탈하고 침략하는 것을 생활로 삼는 이들에게 내가 너무 많은 것을 기대했군.’

테세우스는 차가운 눈빛으로 게툴리족을 바라봤다. 주변을 살펴보니 이미 무기에 손을 가져간 게툴리족이 상당히 많았다.

“이것이 너희의 선택인가? 다시 한번 기회를 주도록 하지. 내 제안이 싫다면 거부하면 되는 일이다.”

“크크크큭. 왜 네 예상과 전혀 다른 상황이라 이제 겁이라도 나는 것이냐? 소위 지식을 쌓았다는 놈들은 이래서 멍청하다니까? 쉽고 빠른 방법이 있는데 왜 돌아간단 말이냐? 네놈을 인질로 잡고 식량과 물자를 요구할 것이다. 히스파니아는 저 로마와 싸우느라 정신없을 테니 우리에게 병력을 보내는 미친 짓은 할 여력도 없을 테고. 얼마든지 와보라고 해라. 황야를 살아가는 우리 게툴리족의 무서움을 목숨으로 느끼게 해줄 테니까.”

테세우스에게 말을 꺼낸 자는 게툴리 부족 가운데 가장 큰 세를 자랑하는 부족의 족장이었다. 그의 이름은 비랄로 육체에 새겨진 많은 상처가 그가 지나온 험난한 세월을 추측케했다. 그것을 험난하다고 해야 할지 잔혹하다고 해야 할지 분간하기 어려웠지만 말이다.

테세우스는 한쪽에 세워두었던 보아디케아를 들었다. 그는 창을 잡으며 주변을 향해 일갈했다.

“너희가 압제와 탄압과 그에 따른 살육을 원한다면 나 역시 너희에게 압제와 탄압과 살육을 가져다줄 것이다. 내가 온전한 제안을 했음에도 너희 욕심을 따라 불의한 일을 내게 행하려 했으니 나는 너희 족속을 노예로 삼아 너희가 그토록 좋아하는 살육을 맛보게 할 것이다. 이 일을 결정하기 전에 한번쯤 더 생각해봤어야 했다.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제안하는 자가 홀로 위험을 감수했을 때는 그만한 대안이 있지 않을까를 말이야.”

“대안? 크크크크. 무슨. 어디 너를 구원할 군대라도 숨겨두었단 말이냐?”

비랄이 테세우스를 비웃으며 소리치자 이곳에 모인 거의 모든 게툴리족이 그를 비웃으며 낄낄거렸다.

그럼에도 테세우스는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내 제안을 받아들일 족속은 무기를 내려라. 그들에겐 앞서 말한 보상을 지급할 것이다.”

“크하하하. 이거 완전 미친 놈이었군. 잘 살펴봐라. 어떤 멍청한 놈이 무기를 내리는지를 말이야.”

“우하하하하. 허풍 하나는 천하제일이로군!”

테세우스의 말에 따르는 족속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테세우스는 차가운 눈빛으로 마지막 말을 뱉었다.

“노예라도 목숨을 부지하고 싶은 자는 무기를 버리고 내게 머리를 조아려라. 조아리지 않는 자는 나 테세우스가 모조리 참해 버릴 것이니.”

테세우스의 기세가 흉흉하게 퍼져나가자 그를 비웃던 게툴리족이 짐짓 놀란 체를 하며 소리쳤다.

“오호.. 그래도 한 가닥 하는 놈이다 이건가? 어리석은 놈. 아무리 강한 전사도 혼자는 살아남을 수 없다. 먹을 것과 입을 것 상처를 입었을 때 상처를 돌봐줄 사람, 혹 잠이 들었을 때 지켜줄 사람 등이 필요한 법이다. 제아무리 강한 맹수도 저보다 약한 무리를 지은 맹수를 만나면 도망치는 법이거늘, 네놈은 어찌 된 놈이길래 그리도 기고만장한 것이냐?”

테세우스는 짤막하게 답변했다.

“그게 일반론이다.”

일반론은 테세우스에게 통용되지 않는다. 그리고 세상에선 왕왕 그런 일이 발생하기도 하는 법이다. 그것이 기존의 상식을 완전히 파괴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예외란 존재하기 마련이니까. 그러니 모든 것을 알지 못하는 이상, 나는 모른다고 답하고 그에 따라 신중하게 행하는 것이 현명한 태도이리라.

“뭔 개소리야. 일반 뭐? 쯔. 됐다. 뭐하냐? 쳐라! 상처를 입히는 건 좋은데 되도록 죽이지 말도록.”

비랄의 명령이 떨어지자 제일 먼저 그의 부족 전사들부터 기괴한 함성을 지르며 테세우스에게 짓쳐들었다.

테세우스는 가만히 서서 그들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가 달려오는 저들을 보아디케아로 단번에 베어버렸다.

촤아아악 촤아악

털썩. 털썩.

세 명에 달하는 전사가 너무나 수월하게 반으로 갈라지는 모습에 그때까지도 테세우스를 비웃던 게툴리족의 표정이 완전히 굳어버렸다. 그 가운데 테세우스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한번만 더 말하도록 하지. 무기를 버리고 머리를 조아려라. 그러면 살 수 있다.”

“이.. 이 새끼가. 지금!”

그 모습에 크게 분노한 족장들이 저마다 고함을 지르며 테세우스를 공격할 것을 명령했다.

“팔다리를 잘라도 상관없으니까 일단 처리해!”

“건방진 새끼. 여기가 어디라고. 순순히 인질로 잡힐 것이지!”

“뭐해! 몰아쳐!”

게툴리족은 거센파도처럼 테세우스를 향해 밀려들어왔다. 하지만 테세우스는 우뚝 솟은 고목처럼 두 다리를 땅에 굳건히 박은 채 저들을 형형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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