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마 무신의 기억-155화 (155/298)

# 155

155. 헤르쿨레스.

155. 헤르쿨레스.

공성전을 수행하는 방법으로 크게 네 가지 정도로 요약된다.

첫째, 성벽을 넘어 공격한다. 액면 그대로 사다리를 걸치고 성을 넘거나 공성 병기를 이용하거나 아예 성벽 높이만큼 흙을 메워 길을 만든 후 성벽을 넘는 방법이 있다.

후자로 갈수록 시간과 물자가 많이 소용되지만 그만큼 병사들의 피해가 적어지는 장점이 있다.

둘째, 성 자체를 공략한다. 성의 기초를 파괴해 성벽을 무너뜨리거나 성의 유일한 출입로인 성문을 공략하거나 불과 물과 같은 매개체로 성 자체를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리는 공략법이 있다.

셋째, 첩자나 기습, 기만책을 이용한다. 소수정예로 야음을 틈타 성벽을 넘어 성문을 열거나 첩자를 이용해 성에 공작을 펼치거나 땅굴을 파거나 트로이의 목마와 같은 적을 기만하는 술책으로 성을 공략하는 방법이 있다.

넷째,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성은 수비군에 매우 유리하다. 영국의 코르페 성의 경우에는 5명이 300명을 막았을 정도로 성은 수비 쪽에 확실한 이점을 부여한다. 당연히 성을 공략하는 쪽의 병사가 훨씬 더 많은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 공략하려는 성이 천혜의 요새와 같은 곳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이러한 경우에 적의 보급을 끊고 포위한 후에 적이 말라죽기를 기다리는 방법이 있다. 다만 시간과 물자가 많이 소용된다. 또한 성 안의 적과 성 밖의 적에게 도리어 포위되는 상황에 처할 수 있으며 수성측에서 수성준비를 철저하게 한 상황이라면 도리어 역공을 당해 지리멸렬할 수 있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모든 공성 방법이 그렇다. 수성하는 자들이 공성하게끔 그대로 내버려 둘 리가 없으니 말이다. 결국 대부분의 전투가 그렇겠지만 공성전 역시 어느 쪽이 더 많이 준비가 되었는지, 어느 쪽이 더 노련한지에 따라 승패가 나뉜다고 봐야 했다.

현 상황에서 테세우스가 발렌티아를 안전하게 공략할 수 있는 방법은 바로 마지막 방법, 적의 보급을 끊고 포위하고 기다리는 방법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보급 물자가 아군에 비해 현저하게 부족할 확률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배신자 측에는 불행한 일이고 테세우스 측에는 다행스럽게도 세르토리우스군의 보급은 바로 사비누스의 지휘 아래 이뤄졌다. 다만 모든 보급이 가데스로부터 직접 운용되는 것이 아니라 중간 보급기지가 있어서 그곳에서 보급이 이뤄지는 방식을 취했지만(보급선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위험한 상황에 처할 수 있기에) 어쨌든 보급의 대부분은 사비누스를 통해 이뤄졌다.

물론 가데스로부터 보급이 끊긴다고 하여 발렌티아에 당장 문제가 생길 정도로 보급이 빈약하게 이뤄진 것도 아니고 자생력이 없는 곳도 아니나 앞으로 발렌티아는 자체적으로 보급을 충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걸 테세우스는 빠른 진격으로 원천봉쇄했다. 현재 발렌티아에 집결한 적의 예상병력은 최대 2만 가량이라 봐야 했다. 이조차도 시간이 지체되면 지체될수록 늘어났을 것이다. 그렇게 물자와 병력의 수급이 안정되면 히스파니아의 도시들도 흔들리게 될 것이다.

켈타이인들은 테세우스의 진면목을 그나마 알았지만 동쪽 해안선의 도시들 곧 히스파니아의 로마인이나 이베리아족은 테세우스에 대해 잘 알지 못했고 그에 대한 소문도 신뢰하지 않았다.

소문이랄 것이 상식을 벗어난 소문이 대다수였고 그 출처가 대개 켈타이족이다보니 더더욱 그런 점도 있었다. 다시 말해 세르토리우스의 죽음은 시간이 지날수록 빠르게 감소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애초에 저들은 세르토리우스의 영향력을 우려해 배신한 셈이니 그건 기정사실과 같았다.

그 모든 것을 테세우스는 빠른 진격으로 미봉책으로나마 차단한 셈이다. 감정적인 요소가 이번 진격에 영향을 미치지 않은 것은 아니나 단순히 복수에 눈이 돌아가 무조건 진격을 외친 것이 아니라는 소리였다.

‘발렌티아는 메텔루스 피우스가 점령하다가 후퇴한 도시라 물자랄 것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곳을 아군이 재점령한 셈이다. 보급물자라고는 그 후에 아군이 충당한 것이 전부인 상황이니 포위하고 기다린다면 발렌티아를 안전하게 함락시킬 수 있다. 하지만 아버지의 죽음에······. 북쪽의 토벌군은 기다렸다는 듯이 남하할 가능성이 매우 높고 히스파니아의 도시들 역시 발렌티아를 원조할 가능성이 높다. 무엇보다······.’

발렌티아는 본보기로 삼을 곳이다.

‘발렌티아의 물자가 부족하다지만 서너 달은 버틸만한 보급품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지체되면 그간 아버지가 죄어왔던 토벌군의 숨통이 트인다.’

숨통 정도로 뭘 그러냐고 반문한다면 토벌군의 병력은 세르토리우스군이 건재할 때도 배 이상이나 되었다. 그 병력조차 이리저리 갈라진 상황에서 토벌군의 숨통이 트인다면 그 흐름은 테세우스라고 해도 막을 수 없다.

아직까지 호의를 보이던 도시나 국가들마저 단번에 등을 돌리게 될 터, 병력에 이어 물자의 수급마저 로마에게 압도당하면 그때는 정말 처절한 싸움을 이어갈 수밖에 없다.

‘저들이 어리석은 자들이 아니라면 굳이 성문을 열고 대회전을 벌일 이유도 없을 터, 아군으로서는 병력 피해를 감수하고 공성전을 수행하는 수밖에 없다.’

그래도 승리한다. 이길 수 없기에 고심하는 것이 아니다. 병력 손실이 많아지면 그만큼 토벌군을 상대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에 하는 고민이었다. 발렌티아를 함락시키기도 전에 테세우스는 함락 이후의 일을 고심하고 있었다.

세르토리우스가 이렇게 죽을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사실 원래 역사에서도 세르토리우스는 페르페르나와 그 수하들에게 암살을 당하고 그로 인해 메텔루스 피우스와 폼페이우스가 히스파니아 점령에 성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테세우스는 세르토리우스가 누군지도 몰랐던 사람이다. 그가 어떤 식으로 죽는지 어찌 알 수 있었을까? 세르토리우스는 스스로를 절제할 줄 알았고 병법에 탁월했으며 부하들에게 인정받는 상관이었다. 그런 그가 암살당할 줄 누가 예상할 수 있었으랴?

세르토리우스가 가진 영향력도 영향력이지만 아버지로서 든든하게 서 있던 세르토리우스가 벌써부터 그리워졌다. 온전히 믿고 맡길 수 있는 가장 든든한 아군이었다. 1만 기병을 얻지 못하더라도 세르토리우스 곁에 돌아왔어야 했다. 나누지 못한 대화가 많고 나누지 못한 기쁨이 많은데 어찌 이리도 빨리 곁을 떠났단 말인가?

테세우스는 깊은 한탄과 함께 자신이 마주해야 할 현실에 대해 두려움을 느꼈다. 헤아리기 힘든 깊은 슬픔이 테세우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 그 슬픔은 발렌티아를 가루로 만들고 페르페르나와 그 일당, 전부를 찢어 죽여도 사라지지 않는다. 테세우스에게 세르토리우스는 그들 모두를 합친 것보다 큰 사람이었으니까.

‘아버지처럼 자비와 관용으로 도시를 포용할 여유가 없다. 그러니 가장 파괴적이고 빠른 방법, 피와 죽음을 통한 공포로 저들의 움직임을 봉쇄한다.’

테세우스는 발렌티아의 성벽 위에서 긴장한 표정으로 경계하고 있는 페르페르나 군을 무심한 눈으로 바라봤다. 그와 함께한 1만 기병은 성 주위를 둘러싼 채로 테세우스의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

만리우스는 저 멀리 기병을 이끌고 서 있는 테세우스를 바라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어디서 이런 대규모의 기병을 대동하고 나타났단 말인가? 어중이떠중이를 데려다 놓은 것이 아니라는 것은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었다.

제각각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았다. 언제든 명령이 떨어지면 일제히 성을 향해 달려갈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다는 것을 못 알아볼 만리우스가 아니었다. 세르토리우스를 배신해서 그렇지 만리우스는 꽤 유능한 장수였기 때문이다. 행색을 봐서는 어디 유목민이라도 데려온 모양인데 언제 저렇게까지 훈련을 시켰단 말인가?

만리우스는 전투에 들어가기도 전에 저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오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세르토리우스도 대단한 인물이었지만 테세우스는 그야말로 괴물 같은 놈이다. 거의 홀로 켈타이족을 굴복시켰을뿐더러 기상천외한 계략을 끊임없이 펼치는 무서운 사내다.

그가 이집트로 떠나 돌아오지 않아 죽었다고 여겼고 돌아온다고 해도 그 전에 모든 일을 마무리 지으면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 여겼는데 1만에 달하는 병력, 그것도 숙련된 기병을 자신의 병력으로 만들어서 돌아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세르토리우스의 마지막 말, 테세우스가 돌아온다는 말이 왜 그리도 불길하게 들렸는지 테세우스가 군을 이끌고 온 모습을 보는 순간 알아차렸다.

“이거 난감하게 되었군요. 당신의 말대로 범상치 않은 사내는 맞는가 보오. 이렇게나 빨리 진격할 줄이야. 게다가 기병이라니······. 지원이나 탈출은 꿈도 꾸지 못하겠군요.”

그라키누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만리우스에게 입을 열었다.

모든 것이 예상과 달랐다. 세르토리우스가 죽으면 그의 군대는 당연히 자신들에게 투항할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병사들은 격렬하게 대항했으며 페르페르나가 본래 이끌고 온 병력 7천 외에 약 5천가량만 발렌티아에 투항했을 뿐, 나머지 병력은 근방의 보급기지에 자리 잡고 결사항전의 각오로 자신들에게 대항하고 있었다.

이에 보급물자 확보도 난감한 상황이었는데 거기에 더해 1만의 기병이 짓쳐 들다니 그라키누스는 어두운 안색으로 만리우스를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

“테세우스 그는 어떤 사내요?”

“헛소문이나 퍼트리는 놈이겠지. 애송이 주제에 감히 이곳을 가루로 만들어?”

페르페르나가 분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만리우스는 그를 힐끗 보다가 심각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예측할 수 없는 사내입니다.”

“흥! 그래 봐야 애송이다. 이대로 수성하면 제 풀에 나가떨어질 것들에 불과해. 공성병기 하나 없이 기병으로 무엇을 하겠다고.”

페르페르나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만리우스는 표정을 굳히며 다시 말했다.

“상황이 저희가 예상한 대로 흘러가지 않았기 때문에 흩어진 세르토리우스군의 병력이 테세우스에게 합류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보급문제도 그렇고 시간은 아군의 편이 아닙니다.”

이리저리 흩어진 세르토리우스 병력이 못해도 2만은 된다.

왜 테세우스를 잊었단 말인가? 투항하지 않은 대부분의 병사들은 테세우스의 귀환을 기대했기 때문으로 보였다. 그가 돌아온 이상 저들은 반드시 테세우스에게 합류한다.

그 2만의 병력이 테세우스의 지휘아래 놓인다고 생각하니 만리우스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기병 1만에, 세르토리우스의 사후에도 충성을 맹세한 병사 2만이라······. 발렌티아를 가루로 만들어버린다고 했던 테세우스의 공언은 결코 허풍 따위가 아니었다.

만리우스의 말에 아우피디우스가 입을 열었다.

“당신의 말은 흩어진 세르토리우스군의 잔당이 저 무도한 자에게 합류하기 전에 격퇴해야 한다는 뜻입니까?”

“그렇습니다. 하지만 저희가 병력을 이끌고 성밖으로 나서야 한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페르페르나는 만리우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북쪽의 메텔루스 피우스가 전갈을 받았으니 아마 곧 폼페이우스가 남하할 것이다. 그때까지만 버티면 된다. 그때까지 버티다가 저들끼리 상잔하는 것을 노려서 몰아치면 된다.”

그 말에 아우피디우스가 입을 열었다.

“폼페이우스가 말입니까? 흐음.”

만리우스는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럴만한 병력이 없었다. 아니 그 전에 테세우스의 공세를 버텨낼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마음에 화인처럼 새겨진 세르토리우스의 어리석은 놈이라는 말이 다시금 떠올랐다.

“게다가 흩어진 병력이 테세우스에게? 적어도 발렌티아의 전투가 끝나기 전에는 그럴 일이 없다. 당초 계획과 달라진 부분은 있긴 하지만 원래 계획에서 틀어진 건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 애송이의 허풍따위에 휘둘리지 말도록!”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만리우스가 의아한 표정으로 반문할 때 테세우스가 흑마를 탄 채 홀로 앞으로 나섰다. 활이 닿을만한 거리까지 서슴없이 나아오는 모습을 인상을 찌푸르며 바라보던 페르페르나가 만리우스에게 말했다.

“저 애송이가 테세우스인가?”

만리우스는 자신의 의문을 뒤로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만리우스의 대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페르페르가 궁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쏴라!”

“그게 무슨?”

이 무슨 경우없는 행동이란 말인가? 알카이오스가 페르페르나를 만류하려고 했지만 이미 그의 명령을 받은 궁수들의 화살이 하늘을 빼곡하게 뒤덮으며 테세우스를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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