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2
162. 능구렁이.
162.
테세우스 의외라는 표정으로 히르톨레이우스에게 말했다.
“생각보다 순순히 인정하는군.”
물증이랄 것은 거의 없고 심증만 내세운 상황인데 의외로 순순히 자신의 죄를 인정했다. 물론 심증이라고는하나 자기변호를 전혀 하지 못했으니 그가 인정을 하든 안하든 결백하든 결백하지 않든 배신자로 낙인찍히기에 충분한 상황이었다.
테세우스는 페르페르나의 문서들을 훑다가 히르톨레이우스에 대해 기록한 내용을 발견했다. 상세한 내용까진 아니고 슬쩍 짚고 가는 정도였지만 어쨌든 히르톨레이우스가 방조했다는 내용이었다. 이미 히르톨레이우스에 대해 미심쩍은 마음을 품고 있던 테세우스는 그 사실을 보다 심층적으로 파고들었다.
페르페르나의 이름은 히르톨레이우스를 움직일 수 없다. 조력이든 방관이든 그에게 세르토리우스를 배반하는 행동을 하게 하려면 그에 따른 확실한 보상이 있어야 한다. 세르토리우스를 배반하게 하고 그에 따른 보상을 지급할만한 세력이 히스파니아에서 토벌군 외에 또 있던가?
앞서 테세우스가 언급한 이유로 폼페이우스는 제외, 메텔루스 피우스가 유력한데 폼페이우스라면 몰라도 메텔루스 피우스의 약속을 믿기엔 히르톨레이우스는 신중한 사람이었다.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결론 내리기엔 배신의 정황이 문서상으로 드러난 상황이니 제안을 받아들였다는 소리다. 이에 테세우스는 메텔루스 피우스가 폼페이우스의 이름으로 제안했음을 유추한다. 폼페이우스 본인일 가능성도 아예 배제하진 않았지만 전자의 가능성보다는 월등하게 희박했으니 더 생각하지 않았다.
일의 내막을 파악한 테세우스는 자신이 추측한 사실을 토대로 히르톨레이우스의 행동을 예측했다. 계획에 전혀 없던 테세우스 본인으로 인해 히르톨레이우스는 끈 떨어진 연 신세나 다름없게 되었으니 자신의 쓸모를 잃지 않기 위해 군에 합류할 것을 확신한다.
심증이 전부였으나 모든 정황이 자신이 추측한 내용과 정확히 맞아떨어졌기에 확신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대부분의 정황을 파악한 테세우스였으나 그는 잠잠히 기다렸다. 섣불리 그를 배신자로 규정한다면 군을 이끌고 토벌군에 가담할 수도 있는 일이니 제 발로 걸어들어오길 기다린 것이다.
그 후에 히르톨레이우스에게 스스로를 변호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정확하게는 스스로를 변호하지 못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자리를 마련했다.
확신했음에도 스스로를 변호할 기회를 준 것은 테세우스, 본인이 틀렸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모든 사람이 알리바이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결백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행적과 행동을 입증하지 못할 수 있다.
물론 그가 결백하다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 일은 히르톨레이우스를 무너뜨리기 위해서도 필요했다. 테세우스는 모든 정황을 이용해 그를 압박하고 그가 신뢰하고 있는 근간을 무너뜨렸다.
“모든 일이 테세우스, 당신으로 인해 낱낱이 밝혀졌고 내가 믿고 있던 약속조차 허상임이 밝혀졌는데 더 발뺌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소. 게다가 이런 상황이라면 내가 결백하다고 한들 살아남기 어려울 것 같군.”
히르톨레이우스는 적의와 살의, 그리고 배신감에 불타는 눈빛으로 자신을 노려보며 외치는 군단을 바라봤다. 테세우스를 만나기 전까지 자신은 인정받고 존경받는 상관이었다. 자신의 명령이라면 죽음까지 불사할 병사들이었다.
그런 저들을 테세우스는 무력 하나 쓰지 않고 세치 혀만으로 자신에게 모두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히르톨레이우스는 아군마저 적으로 돌변하게 만든 테세우스의 수완에 혀를 내둘렀다. 어쩌면 자신의 배신이 스스로에게 돌아온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품었다.
테세우스는 무심한 눈으로 히르톨레이우스를 바라봤다.
잘못한 것을 알아도 끝까지 변명하고 발뺌하며 분명 본인의 죄로 처벌을 받아도 남탓 또는 세상을 저주하는 것이 순리를 거스르는 자들의 특성이다.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거세된 자들은 결코 본인의 죄를 인정하지 않는다. 언제고 자신은 옳을 뿐이다. 잘못을 저질러도, 피해를 끼쳐도, 사람을 죽여도,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 그냥 재수가 없었을 뿐이다. 어쨌든 뭔가 일이 잘못되었으니 책임전가가 필요하지 않나? 남탓, 세상탓, 본인은 언제나 피해자고 잘못한 것이 없다. 자신의 죄 앞에서도 아주 당당하다. 내 잘못 아니니까. 악인의 특성이다.
테세우스는 히르톨레이우스의 모습에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고 있음을 깨달았다. 배신에 발을 담그긴 했으나 슬쩍 담근 수준이라 할 수 있었으니 심성 자체가 두고 못볼 악인도 아니었다. 하나 그에게 주어진 시간과 기회는 이미 모두 지나갔다. 한발을 담궜든 슬쩍 스치고 갔든 배신은 배신이다.
털썩.
테세우스의 눈을 마주한 히르톨레이우스는 무릎을 꿇으며 자신의 목덜미를 찌를 수 있게끔 갑옷과 옷을 헤집어 맨살을 드러냈다.
“죽이시오.”
회한이 뒤섞인 음성으로 힘겹게 말을 뱉는 히르톨레이우스를 주시하던 테세우스는 보아디케아를 쥐고 그의 앞으로 나아갔다. 테세우스가 움직이자 소란스럽게 외치고 떠들던 소리가 쥐 죽은 듯이 사라졌다.
저벅 저벅
죽음은 죽음이다. 공포를 쥐어짜기 위해 더 처참하게 죽이는 행위는 기본적으로 테세우스의 방식이 아니었다. 따라서 테세우스는 보아디케아를 들어 단번에 그의 목을 쳐냈다.
부우웅
촤아아아악
히르톨레이우스의 머리는 보아디케아에 의해 깔끔하게 잘려 허공으로 치솟았다가 바닥에 떨어졌다.
수많은 선택의 기회가 있지만 모든 선택이 돌아갈 길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선택은 돌아가고 싶어도 영원히 돌아갈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게 만든다. 다행스러우면서도 안타까운 것은 그런 선택은 스스로를 부끄럽게하는 선택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꽈직
테세우스는 떨어진 히르톨레이우스의 머리통을 발로 밟아 으스러뜨렸다. 피와 뇌수가 흥건하게 튀어올랐다. 그 섬뜩한 모습에 병사들은 마른침을 삼키며 테세우스를 바라봤다. 특히 히르톨레이우스와 연관이 있는 지휘관이나 병사들은 더욱 그랬다.
“히르톨레이우스가 본인의 죄를 인정하고 죽음을 맞이했으니 이 일은 이것으로 덮겠다. 단! 오늘 일어난 일 역시 새어나가지 않도록 모두 입을 다물도록! 알겠나?”
“알겠습니다!”
히르톨레이우스의 명예를 위해서? 그럴 리가? 히르톨레이우스를 아군의 등 뒤를 찌를 비수로 쓰려고 했으니 자신은 그를 미끼로 쓰리라. 좋다고 달려들 토벌군을 낚을 먹음직스러운 미끼로 말이다. 머리를 부순 것 역시 이유가 있었다.
테세우스는 눈을 번뜩이며 병사들에게 말했다.
“갑옷 등은 모두 벗겨서 챙기고 시체는 들판에 던져둬라! 들개들이 와서 파먹도록!”
“명하신 대로 수행하겠습니다.”
상황을 정리한 테세우스는 게툴리족 기병 1만에, 다시 1만의 레기온을 합류시켜 총 2만 가량의 군대를 이끌고 토레툼으로 빠르게 향했다.
*
토레툼에는 사비누스 휘하 5천과 루시타니아, 오피다니, 베토네스 연맹에서 각기 5천의 전사를 보내 총 2만에 달하는 군대가 결집해 있었다. 세르토리우스에게 격파당한 켈티시 연맹이나 바에티카의 로마군에게 점령당했던 투르둘리 연맹의 켈타이인들도 천여 명가량 합류했다.
사실상 세르토리우스 영향권 아래 놓여있던 모든 켈타이인이 테세우스 편에서 싸우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거기에 다시 테세우스가 2만의 군대를 끌고 합류했으니 토레툼에는 도합 4만에 달하는 병력이 자리하고 있었다.
테세우스는 히르톨레이우스의 잔당들을 은근히 압박하여 스스로 찾아오게끔 만들었고 그들을 이용해 마치 히르톨레이우스가 아직 살아있는 것처럼 가장했다. 완전한 비밀은 어디에도 없는 법, 결국은 들통나겠지만 그때쯤이면 히르톨레이우스의 이름도 쓸모를 다했을 것이니 상관없었다.
“척후대의 보고에 의하면 메텔루스 피우스가 5만에 달하는 군대를 이끌고 토레툼으로 빠르게 진격하고 있다고 합니다.”
사비누스가 눈을 빛내며 테세우스에게 말했다.
“저들은 아군의 병력이 2만 정도라 생각하고 있을 것이고 그마저도 1만은 히르톨레이우스의 휘하에 놓여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지휘부가 일치되어 있지 않다고 여길 테고 속전속결로 아군을 쓸어버리고자 단번에 몰아칠 터, 아군은 그 허를 찌른다.”
테세우스는 물론이거니와 메텔루스 피우스도 전쟁을 길게 가져갈 수 없는 상황이다. 전쟁이 길어지면 보급에 문제가 생긴다. 테세우스군은 4만에 이르는 대군을 오랫동안 운용할 능력을 보유하지 못했다. 로마의 토벌군은 그것이 가능하지만 테세우스의 공작 등으로 인해 저들 역시 보급물자가 부족하기는 매한가지.
“저들이 아군에 대해 오판하고 있을 때 저들을 궤멸시킨다!”
테세우스는 서늘한 눈빛으로 오피다니 연맹의 대표들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솔리치족의 족장 마에도크와 전사 오넨구스는 물론 테세우스에게 해체당한 치스몬타니를 제외한 카브라우게니기, 기구리, 란키엔시스, 로게이, 오리나키, 슈퍼라티이, 수사리, 티부리오피다니 족장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치스몬타니 대신 솔리치족이 그 자리를 대신해 아홉 부족이 되었다고 보면 되었다.
“오피다니 연맹은 병력을 이끌고 토레툼의 동편으로 이동한다. 행여라도 교전하는 일이 없도록 본대는 먼 거리에 두고 척후대만 동원해 상황을 간간이 파악하도록!”
“알겠습니다.”
이윽고 테세우스는 루시타니아 연맹을 바라봤다. 아라비, 아라비젠시스, 코엘라니, 인터람니엔시스, 란시스, 트란쿠스다니, 오세렌시스, 메이두브리젠시스, 패수리, 칼론티엔스, 코렌시스, 엘보코리, 이게디타니, 타포리, 패수리, 타루레스, 베아미니코리의 족장들 전부가 전사들을 대동하고 이 자리에 서 있었다. 그들과 눈을 마주친 테세우스는 다시 명령을 내렸다.
“내용은 같다. 루시타니아 연맹은 서편으로 이동하여 경계한다. 은신하여 대기하도록!”
“알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켈티시, 투르둘리, 베토네스 연맹은 사비누스군과 함께 토레툼을 방어한다.”
“반드시 지켜내겠습니다.”
그리되면 동편과 서편에 각기 5천씩 매복하게 되고 남쪽에는 켈티시, 투르둘리 연맹 1천에 베토네스 5천, 사비누스 5천에 테세우스에게 합류한 1만 군단병까지 총 2만 천의 병력이 결집하게 된다.
“토레툼으로 진격하여 놈들이 공세를 퍼부을 때까지 놈들을 발견해도 전투를 치르지 마라! 사비누스!”
“예. 말씀하십시오.”
“나는 게툴리족과 함께 놈들의 뒤를 칠 것이다. 그러니 그전까지 수성에 모든 역량을 쏟아붓고 아군의 총지휘를 맡아라. 사비누스! 당연한 말이지만 내가 당도하기 전에 토레툼이 뚫려서는 매우 곤란하다.”
“염려 마십시오. 이미 만반의 준비를 마쳤습니다. 승리하지는 못할망정 단번에 토레툼이 점령당하는 일은 결단코 없을 겁니다.”
테세우스는 그런 사비누스를 신뢰하는 눈빛으로 바라본 뒤 켈타이족을 바라보며 다시 명령을 내렸다.
“토벌군을 섬멸하고자 무리하지 마라. 놈들이 토레툼에 공격을 가하기 시작하면 차근히 거리를 좁혀서 놈들이 도망치거나 경거망동하지 못하게 진형만 잡아라. 감정에 휩싸여 섣불리 공격하지 말라는 소리다. 알겠나?”
켈타이족이 용맹하다지만 집단전에서 로마군의 무서움은 상상 그 이상이다. 토벌군의 숫자는 무려 4만, 자칫 잘못하면 5천의 켈타이족은 토벌군의 공세 아래 순식간에 녹아버릴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따라서 테세우스는 서슬 퍼런 눈빛으로 다시 한번 명령을 내렸다.
“총공세는 내가 놈들의 뒤를 쳐부수고 저들을 진형을 갈가리 찢어놓았을 때! 그때가 바로 총공세가 될 것이다. 그러니 그때까지 기다려라. 내가 놈들을 찢어놓을 때까지 말이다. 알겠나?”
“명심하겠습니다.”
테세우스는 이 자리에 모인 주요 지휘관들을 다시 훑어본 다음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메텔루스 피우스는 스스로의 계략에 걸려 넘어져 죽임을 당할 것이다. 나 테세우스가 반드시 그렇게 만들 것이다. 가라! 지체하지 말고 명을 이행하라!”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명을 이행하러 모든 사람들이 포룸 카스트룸이라 할 수 있는 지휘부를 떠났지만 사비누스와 테세우스는 남아있었다.
“사비누스.”
“예. 말씀하십시오.”
“보급의 현황은 어떤가?”
“썩 좋지는 않습니다. 전쟁이 길어짐에 따라 상황이 갈수록 나빠지고 있습니다. 물론 토벌군의 상황이 저희보다 안 좋기는 하지만 그건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합니다. 전쟁이 길어져서 아군에게 이로울 것이 없습니다.”
“서둘러 전쟁을 일단락지어야겠군.”
사비누스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 퀸투스 세르토리우스 테세우스가 이 전쟁을 끝낼 것이다. 패배가 아니라 승리로 아버지의 이름을 드높이겠다.”
그 모습에 사비누스는 뜨거운 눈빛으로 테세우스에게 외쳤다.
“목숨으로 따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