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0
170. 모순인지 순리인지.
170.
타라코 앞에 펼쳐진 넓은 들판 위로 각 진형을 나타내는 깃발을 나부끼고 있었다. 수많은 병사들이 들판 주위에 포진해 있었지만 폭풍의 눈은 언제나 고요한 법이라고 했던가? 도리어 중앙으로 갈수록 병력의 숫자는 적어졌고 이윽고 그 숫자는 단 두 명의 사내로 축약되었다.
구불구불한 금발에 탄탄하고 우람한 체구를 가진 사내가 형형한 푸른 눈동자로 테세우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바로 폼페이우스였다.
사비누스와의 만남 후 2주 정도 흘렀을까? 퀸틸리스(7월)의 절반이 훌쩍 넘은 시점에 타라코에서 폼페이우스는 테세우스와 만남을 가지고 있었다. 사비누스와 만났을 때처럼 독대는 아니었다. 독대를 하기엔 너무 많은 위험을 감수해야 했으니 말이다.
따라서 타라코 외부에 마련된 막사 주위로는 양군의 호위병들이 서로를 당장에라도 죽일 것처럼 노려보고 있었다. 탁자를 두고 마주 앉아있던 폼페이우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로마 혈통은 아니로군.”
테세우스의 체구는 지금껏 폼페이우스가 맞닥뜨린 그 어떤 야만인보다 거대해 보였다. 그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적인 기세는 담대한 폼페이우스마저 자연히 긴장하게 만들었다. 본래 로마인은 체구가 크지 않다. 신장이나 체형 모두 다른 이민족에 비하면 왜소한 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니 눈앞의 테세우스는 로마인의 피를 온전히 이어받은 자라고 보기는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
테세우스는 단순히 자신의 체형을 일컫는 말이 아니라는 걸 단번에 알아차렸다. 본격적으로 협상하기에 앞서 혈통문제를 거론하여 기선을 제압하려는 의도를 말이다. 하나 테세우스는 간단하게 응수했다.
“당신 역시.”
폼페이우스 역시 온전한 로마 혈통이라 보기 어려운 점이 많았다. 우람한 체격과 굵직굵직한 골격, 푸른 눈에 구불구불한 금발 등은 로마인보다는 갈리아와 같은 이방 민족에게서 나타나는 특성이었기 때문이다.
폼페이우스는 눈매를 좁히며 테세우스를 바라봤다.
“세르토리우스의 아들이라고 자처한다고 들었다.”
“자처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인정하신 부분이다. 증인들도 있고.”
폼페이우스는 테세우스를 비웃으며 말했다.
“증인? 로마의 법정에서 증언할 수 있는 자들도 아닌 바에야.”
“왜 설 수 없지? 시민권을 가진 로마시민이라면 법정에서 증언할 권한을 보장될 텐데?”
그러자 폼페이우스가 다소 언성을 높이며 테세우스를 압박했다.
“일반적인 로마시민이라면! 로마에 반란군으로 규정된 자들이 아니라면 그렇겠지.”
테세우스는 폼페이우스가 왜 자꾸 이 부분을 거론하는 것인지 모르지 않았다. 세르토리우스의 아들이라는 것이 확립되지 않는다면 협상을 하기도 전에 많은 부분을 폼페이우스에게 내어주고 들어가야 한다. 전면전을 벌인다면 상관없는 내용이지만 전면전을 벌일 생각이었다면 이렇게 협상에 나설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테세우스는 차분한 목소리로 폼페이우스에게 말했다.
“정녕 그렇게 할 참인가?”
“무엇을?”
“모름지기 협상이라는 것은 주고받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양자가 비등하지 않다면 애초에 그건 협상이 아니라 강자의 요청에 지나지 않지.”
“그런데?”
계속해서 폼페이우스가 모르겠다는 듯이 응수하자 테세우스는 서늘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착각하지 마라. 내가 전쟁을 꺼리는 것은 폼페이우스 당신과 그 군대를 까부수지 못할 것 같아서 요청한 것이 아니다.”
그 말에 폼페이우스는 물론 그 말을 들은 지휘관들이 발끈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감히 나서지는 못했다. 이 자리에 함부로 나선다는 것은 폼페이우스의 권한을 훼손하는 일이 될 테니 말이다. 그 정도 계산도 하지 못할 위인들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폼페이우스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당신이 오늘의 협상을 받아들인 것또한 그것을 알기 때문이지.”
폼페이우스는 테세우스의 말에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착각하고 있는 건 테세우스, 네가 아닌가? 무용이 대단하다는 건 소문으로 들어서 알고 있다. 직접보니 근거없는 터무니없는 소문이 아니란 것쯤은 알겠어. 그러나 나 폼페이우스에게 승전을 거둔다? 어처구니없군. 네 아버지 세르토리우스가 거둔 승전이 너의 것이라 착각이라도 하는 것이냐? 상황이 달라졌다. 세르토리우스라고 해도 이런 상황에선 내게 승리를 가져갈 수 없을 것이다. 너를 까부수는 건 시간문제에 불과해. 그것을 알기 때문에 네 측에서 먼저 협상을 요청한 것 아닌가?”
테세우스는 의외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
“확실히 시간이 흐를수록 아군이 불리해지겠지. 인정하긴 싫지만 모든 방법을 동원해도 로마에 패배할 가능성이 높겠지. 맞아 그게 현실이야.”
로마와 전면전이 벌어지면 로마를 멸망시키느냐 아니면 테세우스, 본인이 죽느냐의 기로에 설 테니 테세우스는 피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만에 하나 그 험준하고 좁은 길을 넘어서서 로마를 패망시킨다고 해도 테세우스에게 남은 건 피밖에 없다.
지중해 지역의 절대강자로 부상하는 로마를 박살냈으니 당연히 대혼란이 발생하게 될 터, 그 혼란은 춘추전국시대를 방불케 할 것이다. 로마를 무너뜨렸다고 로마의 영향력마저 흡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게 가능했다면 로마를 침범한 게르만족 등이 로마 제국만큼의 영향력을 발휘했겠지. 알다시피 저들은 시대의 흐름을 따라 혼란을 일으킨 주범이었을 뿐, 시대를 이끌어가는 주역이 되지는 못했다. 당연히 그럴 역량도 없었고. 무슨 시대의 주역이 될 생각은 아니었지만 안 그래도 혼란한 이 시대에 대혼란을 이끌어오는 주범이 되고 싶은 마음은 더더욱 없었다.
역량 역시 마찬가지, 로마를 무너뜨린다는 건 곧 테세우스, 일인체제로 로마를 침탈한다는 말인데 로마 전체의 역량과 비교할 정도의 일개인이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채워주지 못하는 로마의 빈자리는 더 말할 것도 없이 극심한 혼란으로 채워질 것이다. 물론 언젠가는 다시 질서가 잡히겠지. 하지만 그게 십년일지, 백년일지, 천년일지 누가 알겠는가?
왕좌가 하나뿐이라면 그 자리에 오르고자 하는 탐욕은 더욱 극심해질 터, 그 왕좌에 앉아있는 테세우스는 자연히 피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고 그 피에 익사할 수도 있는 노릇이다.
당연히 테세우스로서는 최대한 피하고 싶은 결론이었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그 기회가 남아있었다. 단순히 이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목적이 무엇인가가 더 중요하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는 모순적인 말에 담긴 지혜를 본받을 필요가 있었다.
어쨌거나 이런 테세우스의 발언에 폼페이우스는 입을 다물고 미심쩍은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런데 로마를 끝장내는 건 어려워도 폼페이우스 당신을 끝장내는 건 어려울 것이 없지. 비단 내 손이 아니더라도 말이야.”
폼페이우스는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것이냐?”
테세우스는 주변을 돌아보며 폼페이우스에게 말했다. 테세우스가 주변을 돌아보는 순간, 언질되어있던 것인지 테세우스를 호위하고 있던 병력이 뒤로 멀찌감치 떨어지기 시작했다.
“계속 이렇게 대화할 건가? 나는 로마가 아니라 폼페이우스 당신과 대화를 하고 싶다.”
테세우스 호위병들이 물러나는 모습만 봐도 무슨 뜻인지 모르지 않았기에 폼페이우스 역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호위를 뒤로 물렸다. 폼페이우스를 호위하던 지휘관은 염려섞인 표정으로 폼페이우스를 바라봤지만 일언반구도 없이 조용히 병력을 뒤로 물렸다.
그것을 지켜보던 테세우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본국에서 당신의 입지는 예전만큼도 되지 않을 것이다. 히스파니아에서의 패전, 그리고 메텔루스 피우스의 대패는 당신의 입지를 더욱 약화시킬 테지.”
폼페이우스는 자신의 입지를 약화시킨 장본인이라 할 수 있는 자의 입에서 그런 말이 흘러나오자 다소 황당한 표정으로 테세우스를 바라봤다. 폼페이우스는 그런 기색을 지워내며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메텔루스 피우스는 왜 죽인 것이지? 2만 명에 달하는 포로를 잡을 수 있었다면 그 역시 포로로 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가 살아있었다면 오늘의 대화도 없었겠지. 신뢰할 수도 없었을 것이고.”
달리 말하면 폼페이우스 자신은 신뢰한다는 말이었기에 그는 침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음.”
“히스파니아에서 어렵사리 승리를 거두더라도 폼페이우스 당신은 적법한 절차로 군을 이끌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당연히 군을 해산해야 할 테고 승전을 거뒀다 할지라도 큰 피해를 입힌 당신은 경질될 수밖에 없지. 아니 그 전에 군을 끝까지 이끌 수 있을지부터 의문이군.”
“나를 협박하는 건가?”
“내 제안을 거부했을 때 일어나는 일들을 나열하는 것에 지나지 않아. 반드시 그렇게 될 테니까. 보다 현명한 판단을 내리길 바라는 측면에서 말을 꺼내는 것이다. 그편이 내게도 이로우니까.”
“네게도 이롭다?”
폼페이우스는 그 말에 날카로운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무엇을 원하지?”
“원하는 것을 말하기에 앞서 내 측에서 당신과 로마에게 제공할 것들에 대해 거론하는 것이 먼저인 것 같군.”
잠시 말을 멈춘 테세우스가 입을 열었다.
“사로잡은 포로, 2만 레기온의 무사귀환. 그들을 인계받는 자는 당연히 폼페이우스 당신이 되겠지. 아울러 로마는 히스파니아에 대한 주권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다.”
폼페이우스는 드물게 놀란 표정으로 테세우스에게 말했다.
“설마 그건 로마에 항복하겠다는 뜻인가?”
폼페이우스로서는 이해되지 않는 말이었다. 히스파니아에 대한 주권을 포기한다는 것은 손에 쥔 모든 것을 놓겠다는 뜻이나 다름없지 않나?
“항복이라······. 항복이라면 항복이군.”
폼페이우스는 놀란 마음을 뒤로 하고 눈매를 좁히며 테세우스에게 말했다.
“그에 대한 대가로 요구할 것이 뭐지? 나로선 짐작이 되지 않는군. 아니 그 전에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것은 맞나?”
폼페이우스는 그 말을 하면서 이 일이 자신에게 가져다 줄 이득과 손해에 대해 치열하게 계산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장 도출되는 결론이 없었다. 그러면서 폼페이우스는 자신은 이런 일에 익숙하지 않다는 것을 다시금 느꼈다.
“먼저 과거의 잔재를 청산하는 것으로 충분하겠군.”
“과거의 잔재라면? 음.”
“네가 추측한 것이 맞다. 내 아버지 세르토리우스를 죽이려고 들었던 건 다름아닌 술라였다. 술라는 독재를 강화하기 위해 마리우스와 연관된 모든 이들을 반란군으로 규정하여 죽였지. 내 아버지, 세르토리우스 역시 그 여파로 히스파니아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말해 오늘날 아군이 히스파니아에 자리잡고 로마에 대항하게 된 시초가 술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그 술라는 이미 죽었지. 마리우스와 연관된 대부분의 사람들도 술라의 손에 죽었다. 알다시피 내 아버지 세르토리우스는 마리우스에 속한 자가 아니라 킨나 휘하에 있던 사람이었다. 오히려 마리우스의 노예군이 로마에서 패악질을 부릴 때 그들을 막아선 사람이기도 하다. 당금 로마에서 그 일을 기억하는 사람이 없지는 않을 터,”
“로마시민으로서의 회복을 원한다? 그러니까 모든 과거를 없던 것처럼 덮자?”
테세우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폼페이우스에게 다시 말했다.
“아울러 내 신분을 로마에서 인정해주길 원한다. 이 두 가지 사실을 보장해준다면 더 이상의 피흘림없이 로마는 로마가 원하는 것을 취할 수 있을 것이다. 메텔루스 피우스가 사망한 이상, 이 모든 공은 당연히 폼페이우스 당신에게 돌아갈 터, 비록 패한 일에 대한 일은 왕왕 떠돌지는 모르나 적어도 히스파니아의 일이 당신의 발목을 잡는 일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당신은 이일로 다른 종류의 평판 역시 얻게 되겠지.”
인간백정이라 불렸던 자신의 과거를 짚어 말하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기이하게도 딱히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폼페이우스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제안에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네가 얻는 것이 뭐지?”
“로마시민이자 장군인 세르토리우스의 아들이라는 신분.”
“히스파니아는 풍요로운 곳이다. 그런 곳을..”
“그것이 아깝지 않냐고 묻는 것이냐면 글쎄. 어차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 알갱이 같은 것들에 불과하다. 또한 그 정도 대가가 아니고서야 로마를 설득시킬 수 없겠지.”
“너는 로마가 인정한 로마의 장군 메텔루스 피우스를 죽인 장본인이다!”
“그러니까 말하지 않았나? 협상 타결 이전의 일은 모두 없던 일로 하자고.”
“황당한 제안이지만 영리하군. 하지만 만약 내가, 그리고 로마가 거부한다면?”
“더 말할 것이 있나? 당신도 로마도 나도 피의 전쟁 속에서 나뒹굴게 되겠지. 하나 나는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야. 설혹 로마를 불태우는 한이 있더라도! 메텔루스 피우스의 일은 시작에 불과할 것이다. 내 장담하지.”
테세우스의 섬뜩한 눈빛에 폼페이우스는 표정을 굳혔다. 5만 레기온을 패퇴시키고 거의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힌 테세우스다. 단순히 치기어린 허풍따위로 볼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실현가능성이 매우 높은 제안이었다. 5만 레기온을 패퇴시킨 히스파니아와 일전을 거듭하느니 테세우스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편이 훨씬 효율적이라 판단할 테니까.
타국의 시선에 구애받을 필요는 없는 것이 반란군으로 규정하기는 했으나 세르토리우스는 본디 로마의 장군이었다. 그러니 그 부분은 크게 문제될 것이 없었다.
폼페이우스는 적의를 털어버렸다. 아군으로 삼을 수 있는 자를 적으로 만들 필요는 없다. 적으로 삼기에 부담스러운 자라면 더욱더 거론할 필요가 없었다.
“확실히. 확실히 그럴 듯한 제안이지만 로마가 그러니까 세네투스(원로원)가 이 제안을 받아들일지는 장담할 수 없다.”
폼페이우스가 입을 열자 테세우스 역시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렇다면 남은 건 전쟁 뿐이군. 그 전쟁 가운데 폼페이우스 당신은 볼 수 없겠지만 말이야.”
폼페이우스는 미간을 좁히며 테세우스를 노려보다가 이내 곧 호탕하게 웃으며 테세우스에게 말했다.
“하하하하하. 으하하하하. 제대로 한방 먹었군. 하지만 기분 좋은 한방이야. 나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이름을 걸고 이번 제안이 성사되도록 힘써 보겠다. 기대해도 좋아.”
폼페이우스는 그 말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팔을 내밀었다. 테세우스 역시 고개를 한번 끄덕인 뒤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팔을 맞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