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1
171. 영웅은 없다.
171. 영웅은 없다.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이 있고 거기에 따른 수많은 생각과 계산이 있다. 더욱이 일치되지 않은 문화와 사상을 가진 각기 다른 족속이야 더 말할 필요도 없다.
테세우스가 폼페이우스에게 제안한 것은 좋게 봐서 제안인 것이지 엄밀히 말해 로마에 종속되겠다는 항복 요청이나 다름없었다.
테세우스의 결정을 이해하고 현명한 판단이었다고 찬성하는 자, 이해할 수 없음에도 맹목적으로 충성하는 자도 많았지만 그의 결정에 반대하는 자들은 더 많았다. 어떤 도표로 명확하게 나타낼 수는 없겠지만 그 비율을 따질 필요도 없이 반대하는 자의 숫자가 훨씬 더 많았다.
대관절 어떤 군주가 싸워보지도 않고 자신의 영토와 주권을 적국이라 할 수 있는 곳에 양보하는가? 더욱이 그 대가로 얻는 것이 적국의 요직도 아니라면 누가 그 결정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전황이 불리하다고는 하나 심지어 패배한 것도 아니다. 테세우스의 신산귀계(神算鬼計)와 신화를 방불케 하는 무시무시한 무용, 그리고 그를 따르는 용맹한 전사들이라면 히스파니아의 로마군을 무찌르는 것은 어떤 공상 따위가 아니다.
비단 히스파니아뿐이랴? 강대한 로마라고 해도 테세우스의 발 아래 놓이게 될 터, 그 가능성은 야망을 가진 자들을 테세우스 아래 집결하게 만들 것이다.
물론 그 가운데 무수히 많은 피가 산천 곳곳에 물들겠지만 새로운 역사를 써가는데 그만한 희생이야 응당 따르는 법이다. 저들의 희생을 제물 삼아 새로운 기회를 잡으려는 자들의 야망은 더욱 견고해질 테고 종국엔 저 로마마저 넘어설지도 모른다.
바로 세계를 호령하는 것이 저 로마가 아니라 테세우스와 자신들이 되는 것이다. 불 속에 뛰어드는 부나방 꼴이 되더라도 이만하면 생을 불태울 만하지 않은가?
도박이라고 한다면 이보다 더 큰 판이 어디 있단 말인가? 야망을 가진 자라면 모든 것을 걸고 달려야 할 시점이다. 테세우스처럼 가진 것을 모두 내어주고 적국의 아량 따위를 기대할 것이 아니라······. 따라서 반대하는 대부분은 테세우스의 결정을 이해할 수 없었고 이해하기도 싫었다.
테세우스는 폼페이우스와 만남을 가지기 전 사비누스, 나디르, 에고르, 프레디에 등에게 자신의 결정을 미리 알렸다. 호라티우스는 그 생사조차 불분명한 상황이라 당연히 함께 할 수 없었다.
“저희 게툴리족은 테세우스 님과 함께할 겁니다.”
프레디에의 말에 테세우스가 고개를 저으며 주변을 돌아보며 말했다.
“내가 이 같은 결정을 내린 것은 나와 함께하는 사람들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다.”
“말씀드렸듯이 목숨으로 따를 것입니다.”
켈타이족 에고르의 단호한 대답에 테세우스가 다시 말했다.
“부귀영화도 죽으면 다 무슨 소용이랴? 영웅이고 충신이고 간에 죽으면 그게 다 무슨 의미가 있나? 나의 야망을 이루기 위해 나를 따른다는 자들을 피의 수레바퀴에 모조리 갈아버리고 홀로 피 묻은 왕좌 위에 앉아 세상을 호령한들 그게 또 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좌중이 조용해진 가운데 테세우스가 단언했다.
“없다. 비릿한 붉은 피와 무덤 같은 공허만이 남아 나를 갉아먹을 뿐. 그 끝은 죽음뿐이다.”
침묵을 지키고 있던 나디르가 입을 열었다.
“테세우스 님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이미 뜻이 정해졌다면 저희가 그 뜻을 어찌 바꿀 수 있겠습니까? 다만 저들은 테세우스 님을 이용할 겁니다.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자들입니다.”
테세우스는 고개를 주억이며 나디르에게 대답했다.
“그렇겠지.”
짧게 대답한 테세우스는 다시 말했다.
“하나 내가 살아있는 한, 히스파니아에서 내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이곳의 주권을 내어주기는 하나 그 주권을 행사하는 것은 저들이 알아서 해야 할 일.”
“으흠.”
그 말에 사비누스가 침음을 뱉은 뒤 테세우스에게 말했다.
“대체 어디까지 보고 계신 겁니까? 실로······. 대단하십니다.”
사비누스의 말에 프레디에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왜 그게 대단한 일이란 말인가?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이어진 테세우스의 말에 그 의미를 조금이나마 파악할 수 있었다.
“로마와 히스파니아의 거리는 상당히 멀다. 훗날 거버너를 보낼지라도 그 거버너(총독)가 세네투스(원로원)의 의도대로 움직여준다는 보장도 없고 영향력을 행사할 방법도 없다. 프로빈키아(속주)에서 거버너의 권한은 절대적이고 기본적으로 세네투스는 권력을 행사하는 기관이 아니야. 심지어 스스로 자신들의 권위도 훼손시킨 상황이니 당대는 물론 후대의 콘술 등이 저들이 뜻대로 움직여준다는 보장도 없지. 히스파니아? 이곳의 일이 얼추 마무리되면 더는 이곳에 신경 쓸 겨를도 없을 거다. 로마에서의 입지가 위태롭긴 저들 또한 마찬가지일 테니.”
BC 77년 집정관은 데시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와 마메르코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였다. 참고로 반란을 일으킨 자는 BC 78년 콘술 프라이오르,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다. 그를 폼페이우스가 BC 78년 콘술 포스테리오르,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와 함께 토벌했다.
나디르가 고개를 저으며 테세우스에게 말했다.
“그럴 바엔 종속하기를 요청한 테세우스 님을 인정하고 일종의 대항마로 사용하려 할 가능성이 높겠군요. 적어도 로마나 히스파니아의 상황이 안정을 찾기 전까진 말입니다.”
사비누스가 나디르의 말을 받았다.
“전쟁을 지속할 수 있음에도 종속을 요청한 셈이고 그 대가라고는 저들의 기득권에는 별반 영향을 미치지 않는 시민권 문제이니 확실히 세네투스는 테세우스 님을 자신들의 손에 쥐고 부리기에 좋다고 생각하겠습니다.”
프레디에는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내 라틴어 실력에 문제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내 이해력이 떨어져서 그런 것인지는 분간하기 어렵지만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은 확실히 알겠군. 그래서 결국 로마에 항복하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프레디에는 게툴리족은 이 일에 동의할 수 없다는 기세를 계속해서 흘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테세우스는 가볍게 혀를 찬 뒤 입을 열었다.
“배를 내어줄 테니 게툴리안으로 돌아가라. 전리품을 충분히 얻은 전사는 전투에 나서기보다 그 전리품을 누리고 싶은 법이다. 프레디에 너는 영리한 사내다. 이곳의 전쟁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너희 게툴리족이 얻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모르지 않을 텐데? 설혹 아군이 승리할지라도 너희는 이 이상의 전리품을 얻기 힘들다. 더 욕심을 부린다면 내가 말한대로 그 끝은 죽음뿐이겠지.”
틀린 말이 아니다. 테세우스군이 승전을 거듭할지라도 게툴리족의 입지는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다. 전쟁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전사들의 피해가 커질 것이고 그 수가 줄어드면 들수록 야욕을 가지고 합류한 자들에게 밀려 종국엔 발언권마저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혹 테세우스는 승리하고 그 승리에 따른 전리품을 누릴지라도 게툴리족이 얻을 건 타지에서의 죽음뿐이다.
또한 테세우스는 게툴리족 전사들의 마음을 정확하게 꿰고 있었다. 토레툼에서 늘어지도록 술을 마시고 즐거워하던 전사들의 모습이 그 증거가 될 것이다. 프레디에 자신도 우려한 그 일을 전사 중의 전사라 인정하는 저 테세우스가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
더 말을 잇지 못하는 프레디에에게 다시 말했다.
“돌아가. 게툴리족은 호전적인 족속이지. 이게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은 건 아니겠지?”
게툴리안을 비운 시간이 길면 길수록 테세우스 본인의 영향력은 감소할 것이고 그에 따라 그와 함께한 게툴리 부족들 역시 위험해질 가능성이 높았다. 따라서 프레디에의 눈빛이 다소 사나워졌다.
테세우스는 그런 프레디에를 바라보며 냉소하며 말했다.
“나는 모든 것을 놓은 것이 아니야. 그런 일이 없었으면 하는 것이 내 바램이나 저들의 목덜미를 물어뜯기 위해서 잠시 물러섰을 뿐, 정녕 나와 함께 하고 싶은 것이라면 돌아가서 힘을 비축해라. 그런 후에도 나와 함께하고 싶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테세우스의 차가운 미소를 마주하며 프레디에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테세우스는 그런 그를 뒤로하고 에고르를 바라봤다.
“나와 함께한 켈타이 연맹은 이득을 봤을 것이다. 영토로나 영향력으로나 그 점만 기억해줬으면 좋겠군.”
에고르는 펄쩍 뛰며 말했다.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저희는 테세우스 님을 지지할 겁니다.”
“에고르 너와 나를 아는 자들이라면 그렇겠지. 하지만 상황은 변하는 법이야. 그러니 나를 무조건 지지할 필요는 없다. 다만..”
에고르는 테세우스의 말을 끊으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맹세를 저버린다면 신들이 저를 저주할 겁니다. 저 또한 그럴 생각이 없습니다.”
테세우스는 더 말을 않고 가볍게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사비누스가 입을 열었다.
“히스파니아의 레기온. 아니 아우실리아는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로마로 돌아갈 자들은 나와 같이 간다. 히스파니아 남아있을 자들은 있는다. 마찬가지로 고향으로 돌아갈 자는 고향으로 간다. 저들 마음에 좋은 대로 자유롭게 거처를 정하게 하라.”
레기온이었던 자들은 로마로 히스파니아나 마우레타니아 등지에서 모집된 병사들은 이곳에 남는다는 소리였다.
“해산시킬 생각이십니까?”
사비누스의 질문에 테세우스는 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해산? 글쎄. 그건 두고 보면 알겠지.”
그러자 나디르가 입을 열었다.
“자유무역지대는 앞으로 어찌 되는 겁니까?”
“그건 달라질 것이 없다. 아니 도리어 더 활성화되겠지. 내가 로마시민이 될 테니까.”
“음? 으흠.”
나디르는 침음을 흘리며 테세우스 말에 담긴 뜻이 무엇인지 생각했다. 그렇게 잠시 침묵이 흐른 뒤 테세우스가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나는 승리할 수 없는 전투는 애초에 나서지 않는다. 그러니 헛된 야욕으로 헛소리를 지껄이는 자는 누구든 참할 것이다. 이것이 나의 결정이고 나의 계획을 어그러뜨리려는 자는 그게 누구든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나?”
협상 후 반대 여론이 거세지고 자신의 뜻과 전혀 다른 흐름이 내부에서 발생한다면 관련자들 전부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겠다는 엄포임을 모르지 않았다. 또 이 결정을 먼저 자신들에게 말하는 이유 역시 말이다.
테세우스가 그렇게 결정한 이상, 싫든 좋든 따라야 했다. 무엇보다 테세우스의 말을 들어보니 모두가 살 수 있는 묘안에 가까웠다. 그저 자신의 모든 권한을 너무나 간단하게 내려놓은 테세우스가 이해가 되지 않을 뿐이었다.
“알겠습니다.”
“따르겠습니다.”
*
폼페이우스와 성공적으로 협상을 타결한 테세우스는 병력을 이끌고 노바 카르타고로 향했다. 사실상 휴전이자 종전이나 로마 본국의 확답을 듣기 전까지는 전시였고 그 확답을 위해서라도 아군의 위세를 간접적으로나마 과시할 필요가 있었다.
바로 그 때문에 노바 카르타고에 군을 주둔시켜 서쪽 토레툼과 남쪽 노바 카르타고 양면에서 폼페이우스군을 포위하는 형세를 취하고자 했다.
테세우스는 노바 카르타고로 향하는 가운데 발렌티아가 잿더미로 된 것을 두눈으로 직접 확인했다.
폼페이우스는 도시를 재건하게 되어도 발렌티아라는 이름 대신 세르토라는 이름을 쓸 것이라 언급하며 자신의 패배시킨 장군에 대한 예우라고 덧붙였다. 폼페이우스가 자신의 호의를 사기 위해 하는 말이라는 걸 모를 정도로 어리숙한 사람이 아니었다.
다만 테세우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호라티우스의 신병인도를 요청했다. 폼페이우스가 그를 죽이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그를 회유할 요량이었던 모양인데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었고 알 필요도 없었다.
그렇게 풀려난 호라티우스에게 테세우스는 별말을 건네지 않았는데 그건 호라티우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호라티우스는 잿더미가 된 세르토의 모습을 망연히 바라보다가 그 지역을 지난 후에야 간신히 입을 열었다.
“세로토의 거주민들은 뿔뿔이 흩어짐을 당했고 맡겨주신 병사들은······.”
호라티우스는 끝까지 항전하던 휘하 병사들을 떠올렸다. 호라티우스는 억눌린 음성으로 한 마디 말밖에 뱉을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치열하게 싸웠다. 병사들은 끝까지 잘 싸웠다. 하지만 폼페이우스군의 공성준비는 기이할 정도로 빠르고 병사들은 매우 노련했다. 무엇보다 폼페이우스 그 자의 통솔력은 모든 부분에서 자신을 상회했다.
그 때문인지 살아있는 것 자체가 무거운 짐이 되어 호라티우스를 짓눌렀다. 마치 자신 때문에 죽지 않아도 될 병사들이 죽은 것만 같았다. 자신 때문에 테세우스가 믿고 맡긴 세르토가 잿더미가 된 것 같았다. 로마와의 협상소식 역시 들었다. 이조차도 자신의 패배때문으로 여겨졌다.
“나 역시 예상치 못한 행보였다. 그러니 너를 탓하는 것은 곧 나를 질책하는 것이다.”
어찌 그렇게 된단 말인가? 호라티우스는 무거운 눈으로 테세우스를 바라봤다. 테세우스는 흑마를 적당한 속도로 유지하면서 다시 말했다.
“메텔루스 피우스는 1만 병력을 폼페이우스에게 양도했다. 공을 양보할 것도 아닌 메텔루스 피우스가 그리할 수밖에 없던 건 결국 보급문제 때문이었을 것이다. 물자소모를 줄이기 위해 폼페이우스에게 병력을 양도했지만 곧 전투를 치를 생각이었으니 비전투 인원을 위주로 넘겼겠지. 당시엔 그게 현명한 선택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상대적으로 물자가 넉넉했던 폼페이우스는 어쨌든 가용 인원이 늘어나는 셈이니 받았을 것이고. 그런데 그것이 큰 차이를 가져왔군. 나 역시 그 점을 간과하고 있었다. 그러니 세르토의 패배는 곧 나의 패배다. 나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한 너는 실패한 것이 없다. 그것을 감안하지 못한 나의 실책이다.”
메텔루스의 토레툼 공성준비는 상대적으로 느려졌고 폼페이우스의 발렌티아 공성준비는 상대적으로 빨라졌다. 별 것 아닌 차이라 여길 수 있지만 드러난 결과는 명확할 정도로 큰 격차가 있었다.
“······.”
호라티우스는 뭐라 말을 이으려 했지만 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이기고 지는 것은 전장에서 흔한 일이다. 또한 이 일은 승패를 떠나 어차피 그렇게 될 일이었다.”
다각 다각
앞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칼을 흩날리던 테세우스는 차분한 어조로 다시 말을 이었다.
“영웅은 없다. 영웅이 될 필요도 없다. 살았으면 된 거다. 내겐 그것만 중요하다.”
그 말에 호라티우스는 울컥 치밀어오르는 감정을 애써 억누르며 눈을 질끈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