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마 무신의 기억-175화 (175/298)

# 175

175. 분열.

175.

크게 웃음을 터트리던 폼페이우스는 돌연 정색하며 테세우스에게 말했다.

“당신의 말이 맞다. 토벌목적이 완수된 이상 저들은 내게서 반드시 군권을 회수하려고 들 것이다. 군권 회수를 거부할 수는 없는 일. 그것이 적법한 절차인 이상, 내가 그것을 거부하면 로마의 반역자가 된다. 내 입으로 시인하기는 그렇지만 군권이 사라진 나는 엄밀히 말해 명성이 조금 높은 로마의 필부에 불과하다. 정치수완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크라수스처럼 재산이 넘쳐나서 로마의 인사들에게 뿌릴 수 있는 것도 아니야.”

폼페이우스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말했다.

“나라고 해도 세네투스와 척을 질 수는 없다. 테세우스 당신이 가진 재산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지만 로마의 크라수스에 비할 바는 아닐 것이다.”

크라수스, 폼페이우스, 카이사르 이렇게 삼두정치의 일인이었던 크라수스를 어찌 모르겠는가? 설혹 몰랐다고 해도 꾸준한 정보수집으로 당금 로마에서 권력을 행사하는 이들의 이름 정도는 파악하고 있는 테세우스였다. 당연히 주요 인사인 크라수스를 모를 수 없었다.

테세우스는 폼페이우스가 자신의 제안을 거절하고자 이런 말을 꺼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자신과 손을 잡으면 필연적으로 상대하게 될 주적에 대해 미리 설명하고 그를 어찌 상대할지에 대한 자신의 반응을 살펴보기 위함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스스로 정치 수완이 부족하다고는 하나 전장에서 단련된 생존본능은 무시할 것이 못 되었다. 테세우스는 번뜩이는 폼페이우스의 눈을 마주하며 차분하게 대답했다.

“당신의 말이 맞소. 로마의 부를 독차지했다고 여겨지는 크라수스에 비할 바는 아닐 것이오. 하지만 폼페이우스 당신의 이름으로 세네토르를 비롯한 여러 인사들에게 소소한 선물을 줄 수 있는 여력은 되오.”

“소소한 선물? 보다 화려하고, 보다 귀한 것이 수중에 들어오면 소소한 것 따위는 말 그대로 소소해질 뿐이오.”

설마 그 정도 뇌물 정도로 크라수스의 금력 공세를 넘어설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는 것이었다. 폼페이우스의 눈에는 실망한 기색이 스쳐갔다. 테세우스도 그것을 알았지만 무심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레가투스, 폼페이우스.”

잠시 말을 끊었던 테세우스는 다시 입을 열었다.

“아군이 공성전을 준비하기도 전부터 공성전을 대비하고 있는 적이 있다면 레가투스는 어찌할 겁니까?”

갑자기 왜 전쟁 이야기를 하는 것이 의문이었지만 군략이라면 나름 자신 있었기에 폼페이우스는 지체없이 대답했다.

“그런 전장에는 군을 이끌고 가지 않는 것이 상책. 꼭 싸워야 한다면 저들의 경계태세를 최대한 무너뜨린 후에 공성에 임해야겠지.”

고개를 끄덕인 테세우스는 폼페이우스에게 말했다.

“역시 제대로 알고 계시구려. 그러니 다를 게 무엇이겠소?”

“다를 게 무엇? 그게 무슨? 음?”

폼페이우스는 의아한 표정으로 반문하려다가 무엇을 깨달았는지 다시 말했다.

“뭔가 대안이 있나 보군. 보다 자세히 말해보시오.”

“크라수스에게 금력전을 펼친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오. 세네토르들에게 정치전을 거는 것 역시 현명한 처사가 될 수 없지. 사실상 정치전이라고 해봐야 대부분의 경우 뒤에서 오가는 재물의 양이 승패를 결정할 테니 저들의 방식으로 승패를 보고자 한다면 무조건 패배할 것이오. 도리어 적이 될 자들의 배만 든든하게 불려 준 꼴이 될 테지.”

테세우스의 말에 폼페이우스는 안색이 완전히 굳었다.

“정녕 답이 없다는 말인가?”

“폼페이우스, 당신은 당신의 싸움을 해야 하오. 승리할 수 있는 전장을 내버려 두고 패배할 것이 뻔한 전장에 싸울 이유가 무엇이겠소?”

“이해하기 어렵군. 당신의 말대로라면 앞으로 펼쳐질 상황은 내게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들뿐이라 예측되는데 내가 파악하지 못한 것이 있는 것이오?”

“군권을 버리고 로마에서 정치전을 벌일 생각이었다면 당신의 예상이 맞소.”

폼페이우스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짓다가 테세우스에게 불같이 화를 냈다.

“이런! 나보고 지금 로마의 반역자가 되길 자처하란 말인가? 그게 지금 무슨!!”

테세우스는 차분한 어조로 화를 내는 폼페이우스에게 말했다.

“진정하시오. 반란군에서 시민으로 복권되길 원한 자가 함께하는 자에게 반란군이 되라 종용할 까닭이 무엇이겠소? 지금 와서 그런 제안을 할 것이었다면 애당초 시민으로의 복권을 요청하기 전에 당신에게 로마에 반역할 것을 제안했을 것이오.”

테세우스의 논리 있는 말에 폼페이우스는 다소 화를 가라앉히며 입을 열었다.

“그럼 그딴 소리를 내뱉은 연유가 무엇인가? 군권 회수 거부가 로마에 대한 반역이라는 것을 몰라서 하는 소리는 아닐 것 아닌가?”

“이유가 없다면 반역이 되겠지.”

“이유라니?”

“스스로도 언급하지 않았나? 이대로 군권을 회수당하면 사실상 로마의 필부나 다름없어질 거라고. 폼페이우스, 당신도 느끼는 것이오. 이대로 군권을 회수당한다면 당신의 명성이 로마인들의 기억에서 사라질 때까지 더 이상 중임을 맡기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걸 말이오. 당신과 정적이라 할 수 있는 크라수스가 그렇게 만들고 말 것이오. 정적을 제거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 아니오? 더욱이 누차 언급했지만 폼페이우스 당신은 적법한 절차로 군권을 얻은 것도 아니지.”

“흠.”

“히스파나아 수복에 대한 공적이 로마인들의 기억에 남아있을 때는 크라수스와 얼마간 대립할 수 있을지언정 그 공적이 로마인들의 기억에서 사라진 후에 저들이 기억할 것은 한 가지뿐이오. 크라수스와 함께하면 재물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 말이오. 물론 대놓고 표현하지는 않겠지. 그저 저들의 기억 속에서 폼페이우스라는 이름이 점점 사라질 뿐.”

“으드득. 단순히 나를 모욕하기 위해서는 아닐 테고 말하고 싶은 게 뭔가?”

“이대로 로마로 금의환향한다고 해도 당신이 얻을 건 과거의 빛바랜 영광일 뿐이다. 그것을 곱씹으며 한때 자신과 경쟁했던 크라수스가 승승장구하는 것을 지켜봐야겠지.”

쾅!

폼페이우스는 탁자를 주먹을 내리치며 버럭 화를 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냐고 물었다!”

“당신은 전사고 장군이다. 술라의 눈에 들었던 것도 전장에서 전투를 통해서였고 당신이 로마를 떨칠 명예를 얻은 것도 전쟁을 통해서였다. 맹수보고 풀을 씹고 살라고 하면 그 풀을 소화나 시킬 수 있을까? 전장이야말로 당신이 빛나는 곳이다. 정치판에서 굴러봐야 그 빛을 바래게 할 뿐이야. 물론 결국엔 정치판에 서게 될 날이 오겠지만 그전에 당신은 당신의 무기를 더욱 날카롭게 갈고 닦을 필요가 있다. 로마인들에게 로마를 구할 장군이 누구냐라고 묻는다면 거의 반사적으로 폼페이우스, 당신의 이름이 튀어나올 수 있도록.”

“나를 패배시킨 세르토리우스의 아들이 전장이야말로 내가 빛나는 곳이라 말하니 낯 뜨겁군. 엄연히 말해 너도 나를 패배시킨 것이나 다름없지 않나? 네가 말했듯이 계속해서 전투를 치렀다면 너는 나를 패배시켰거나 승패조차 보지 못하게 본국으로 송환되게 만들었겠지.”

테세우스와 대련을 하고자 했던 것은 대련에서 승리함으로 자신의 패배감을 조금이나마 무마시키기 위함이었다.

하나 폼페이우스는 알지 못했다. 테세우스가 전에 말했던 외부의 시선 등을 염려함 때문이 아니라 폼페이우스와의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거부했다는 것을 말이다.

폼페이우스가 대단한 장군이긴 하나 개인의 무용으로 명성을 얻은 것은 아니었으니 항우나 리처드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심지어 항우와 리처드가 나타나 그 둘을 상대하게 될지라도 이겨낼 자신이 있는 테세우스였다.

이건 테세우스의 근거 없는 확신이나 자만심 따위가 아니라 경험으로 인한 확신에 가까웠다. 그러니 테세우스가 폼페이우스가 대련했다면 그 결과는 더 볼 것도 없었다.

폼페이우스는 분을 가라앉히며 테세우스에게 말했다.

“하지만 네 말이 틀린 말은 아니다. 무슨 말인지 충분히 이해했으니 잡설은 이쯤에서 집어치우고 말해봐라. 그 이유에 대해서.”

“달마티아 전쟁!”

폼페이우스는 눈매를 좁히며 테세우스에게 반문했다.

“달마티아?”

“히스파니아 반란은 물론 달마티아의 일리리아인들도 로마에 대해 반역을 일으켰다. 들은 소식에 의하면 일리리아인들의 저항이 극심해서 정벌을 임명받은 코스코니우스의 군대가 사투를 벌이고 있다는군.”

테세우스의 말에 폼페이우스는 잠시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레피두스 반란군을 격퇴하고 로마의 명령이 없었음에도 히스파니아로 진격한 것은 지금의 기회가 자신에게 더 없을 천금같은 기회라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레피두스에 이어 히스파니아 정벌을 마무리짓는데 일조한다면 누구도 자신의 아성을 넘보지 못할 것이라 판단했다. 하나 생각지도 못한 복병, 세르토리우스에게 철저하게 유린당하며 도리어 이제껏 쌓은 공적마저 와르르 무너질 위기에 처했었다.

다행히 히스파니아의 일이 협상으로 마무리되어 자신의 위치를 지킬 수 있었지만 폼페이우스 자신의 명성을 날리기엔 뭔가 어정쩡한 결말이었다.

“달마티아. 달마티아라······. 묘수. 묘수로군.”

이미 히스파니아 정벌을 돕는다는 명목하에 군을 움직였으니 달마티아 정벌이라고 하지 못할 건 없었다. 더욱이 달마티아 정벌을 완수하거나 일조한다면 자신은 무려 세 지역, 에트루리아, 히스파니아, 달마티아의 반란을 종결한 장군이 된다. 폼페이우스는 테세우스가 왜 이런 제안을 했는지 바로 알아차렸다.

“재물은 많은 것을 가능하게 하지만 재물이 전공이나 명성까지 얻게할 수는 없지. 어느 정도는 가능할지라도 결코 넘어설 수 없는 부분이 있어. 일이 이렇게 종결되면 디그니타스를 중시하는 로마시민의 특성상 폼페이우스라는 이름은 매번 크라수스 이름 위에 놓이겠지. 그 점은 대부분의 불리함을 상쇄하고도 남을 거요.”

디그나타스는 로마 특유의 개념으로 개인의 고결함, 긍지, 가문, 말, 지성, 행동, 능력, 지식 등 사람으로서의 총체적인 가치를 말했다. 당연히 재물만으로는 이 같은 가치를 충족시키는 것에 한계가 있었다.

사실 폼페이우스가 로마에 이대로 입성해도 크라수스에게 턱없이 밀리는 일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편이 폼페이우스에게도 테세우스 본인에게도 이로웠다.

‘폼페이우스와 함께 로마에 입성하는 건 득보다 실이 많다고 할 수 있다. 지금은 그의 이름만 등에 업으면 된다. 그러려면 폼페이우스의 이름이 더 커지는 것이 내게도 이득이다.’

폼페이우스는 테세우스의 말에 수긍했지만 걸리는 부분이 남아있었다.

“6만 2천에 달하는 군대를 유지할 수도 없을뿐더러 본국에서도 받아들이지 않을 가능성이 높소.”

6만 2천에 달하는 군대를 수송할 함선을 조달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기에 로마까지 육로로 이동하게 된다. 달마티아는 로마에서 더 동편으로 이동해야 존재하는 곳이다. 본국의 허락을 떠나 보급품 자체가 부족하다.

“달마티아를 정벌하는데 1만, 1만이면 충분하지 않소?”

폼페이우스는 눈을 크게 뜨며 반문하다가 감탄하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음? 대단하군. 대단해. 그렇게하면 내가 달마티아에서 어처구니없이 패배하지 않는 한 본국에서 나를 추궁할 거리가 완전히 사라지겠군.”

테세우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맞는 말이오. 5만 2천의 병력을 본국으로 송환시키면 세네투스도 당신을 반역자로 몰 수 없소. 1만의 병력만으로는 로마를 도모하기 어려울 테니.. 더욱이 로마로 진군 중에 더 조직화될 1만 병사라면 달마티아를 무너뜨리기에 충분할 거요. 달마티아에는 이미 전쟁을 치르고 있는 코스코니우스 군이 있으니. 내 제안에 동의한다면 본국에 따로 요청할 필요도 없이 달마티아 토벌에 부족한 보급품은 해상을 통해 원하는 위치에 보급해주겠소.”

“보급품까지?”

폼페이우스는 테세우스의 철두철미한 모습에 오싹함을 느꼈다. 아군은 육로로 이동하니 해상으로 수송한다면 히스파니아의 가데스에서 직접 출발해도 보급품을 준비하고도 남는다.

“이 일이 알려진다면 로마시민들은 폼페이우스 당신의 이름을 드높이겠지. 세네투스가 당신을 음해하려고 해도 시민들이 두려워 감히 입을 열지 못할 것이오. 아울러 나는 로마로 돌아가 당신의 이름으로 소소한 선물을 저들에게 전하도록 하겠소.”

“소소한 선물이라······.”

소소하다는 의미를 자신이 잘못 알고 있었던가? 깜깜하던 앞길이 훤히 열린 상황이니 웃음이라도 터트려야 했지만 폼페이우스는 굳은 표정으로 테세우스를 바라봤다.

“모르진 않았지만 생각보다 훨씬 더 무서운 사내였군. 약속하지. 시민권과 신분 문제는 나 폼페이우스의 이름을 걸고 해결하겠네. 잡음따위는 없을 걸세. 대신!”

“앞서 거론한 일들은 그대로 이뤄질 것이오.”

테세우스의 단호한 말에 폼페이우스는 꺼내려던 말을 그치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적어도 아직은. 그런 마음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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