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1
181. 카피톨리누스에서.
181.
로마는 일곱 언덕 위에 지어진 도시다. 따라서 도시를 거미줄처럼 덮고 있는 가도는 울퉁불퉁한 오르막길과 구불구불한 수많은 경사로로 이루어져 있었다.
일곱 언덕의 면면은 이러하니 카일리우스, 에스퀼리누스, 비미날리스, 퀴리날리스, 카피톨리누스, 팔라티누스, 아벤티누스 언덕이다. 다만 일곱 언덕 모두 가파를 정도의 경사를 가진 산이 아니라 완만한 구릉지에 가까웠다.
또한 가장 대표적인 언덕이 일곱 개인 것이고 무키알리스, 키스피우스, 오피우스 언덕 등과 같이 그보다 작은 언덕들도 로마시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대표적인 일곱 언덕에는 대개 전설과 기원이 있지만 테세우스가 오르고 있는 카피톨리누스 언덕에 대해서만 짚어보자면 이곳은 예전부터 유피테르에게 바쳐진 언덕으로 사투르니우스 언덕이라 불렸다. 다만 후에 이곳에 유피테르와 유노의 신전이 세워졌고 이를 통틀어 카피툴리움(Capitolium)이라 불렀는데 차차 이 언덕 전체를 카피톨리누스라 명명하게 되었다.
카피툴리누스 언덕은 일곱 언덕 중 가장 높은 언덕이었는데 일곱 언덕 중 유일하게 종교건물 및 공공건물로 제한된 구역이었다. 다만 마리우스 시절 이후로 카피툴리누스 언덕의 낮은 비탈 지역엔 로마에서 가장 비싼 집들이 건축되었다. 정상부엔 당연히 신전이나 공공건물이 자리하고 있었다.
당금 로마에서 제일가는 재력가의 집이 이곳에 없다면 대체 어디에 있겠는가? 당연하게도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의 도무스(거대저택)도 이곳에 있었다.
적당한 걸음으로 카피톨리누스 언덕을 오르던 테세우스는 로마를 둘러싸고 있는 세르비우스 성벽을 힐끗 바라봤다.
병사들이 삼엄하게 경계를 서고 있는 세르비우스 성벽은 일곱 언덕을 모두 감싸고 있었다. 로마인들은 이 성벽이 세르비우스 툴리우스 재위 시절 축조된 성벽으로 믿었지만 실제로는 BC 390년 경 브렌누스가 이끄는 갈리아족이 로마를 점령한 사건 이후 로마의 방비를 튼튼히 하기 위해 세워졌을 가능성이 높았다.
경계선, 즉 포메리움(pomerium, 신성경계선)은 키피(cippi)라는 하얀돌로 표시되었는데 대부분의 경우 이 세르비우스 성벽과 일치했지만 아벤티누스(로마의 기원과 연관있는 언덕)와 카피톨리누스 언덕과 같이 신성경계선에 포함되지 않는 곳도 있었다.
로마의 전통에 따르면 로마의 영토를 크게 확장한 사람만이 신성경계선을 넓힐 수 있었고 종교적인 관점에서 로마는 신성경계선 안쪽만이 로마였고 외부는 로마에 속하는 영토였을 뿐이다. 어쨌든 신성경계선 안으로는 어떤 무장도 허용되지 않았고 모든 임페리움이 소멸되었다.(단, 개선식을 허가받은 임페라토르는 개선식에 한해 제한적으로 임페리움이 허용됨.)
따라서 성벽 안쪽으로는 확인할 수 있는 모든 사람이 비무장한 모습, 즉 토가나 튜니카 등의 차림으로 다니고 있었다.
이는 로마의 콘술이라고 해도 다를 것이 없었다. 집정관의 수행관원이자 호위병사인 릭토르들조차 파스케스(도끼날을 나무가지 가운데에 심어놓은 무기)를 들고 다니며 호위할 수 있을 뿐, 로마 내에서 완전무장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물론 단검류를 몰래 소지할 수는 경우는 있을 수 있으나 법으로 금지되었다는 사실은 변치 않으며 그 책임은 당사자가 져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테세우스가 무기를 반입해 로마를 전복시키려 한다면 이 신성법을 전적으로 부정해버리는 행위가 되어버린다. 모든 로마시민들의 극심한 분노를 사게 될 것이니 현명한 판단이라 볼 수 없었다.
이윽고 유피테르 신전에 다다른 테세우스는 크라수스로 보이는 인물이 제사장을 통해 유피테르에게 제사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사프란 꽃이 제화(祭火)에 태워지며 피어오른 오묘한 향이 코끝을 자극했다. 지금껏 로마에서 맡았던 그 어떤 냄새보다 좋은 냄새였다. 그도 그럴 것이 수많은 사람이 모인 곳이 로마다 보니 도시의 냄새가 좋을 수 없었다. 그간 맡았던 악취가 사프란 꽃이 태워지며 퍼진 향취에 조금이나마 정화가 되는 기분이었다.
제사가 막바지였던지 금세 제사를 마친 제사장과 두런두런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던 크라수스가 몸을 돌려 신전 밖으로 나왔다.
크라수스는 밖으로 나서다가 테세우스를 바라보고 걸음을 멈춰 세웠다. 단순히 테세우스의 체격을 보고 걸음을 멈춘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테세우스. 당신이 테세우스인가 봅니다. 맞습니까?”
크라수스는 테세우스를 단번에 알아봤다. 마치 테세우스가 자신을 언제고 한번은 찾아올 줄 예상하고 기다린 것처럼 말이다.
테세우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크라수스에게 말했다.
“맞습니다. 정확하게는 퀸투스 세르토리우스 테세우스. 그게 제 이름입니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자신의 모든 이름을 밝히는 것이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크라수스는 테세우스가 단순히 그런 이유 때문에 모든 이름을 밝힌 것이 아니란 것을 눈치챘다.
크라수스는 사람 좋은 미소를 띠며 테세우스에게 말을 건넸다.
“퀸투스 세르토리우스는 호인이자 뛰어난 장군이었습니다. 그만한 장군을 잃은 건 로마의 뼈아픈 손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욱이 마리우스의 노예병들이 로마에서 온갖 패악질을 벌일 때 그들을 처단한 것도 춘부장이셨지요. 그분의 아드님을 뵐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더욱이 지금껏 쌓인 오해가 좋게 풀렸으니 춘부장께서는 물론이거니와 테세우스 당신의 신분도 곧 복권될 겁니다.”
‘역시 예상대로인가?’
테세우스는 크라수스의 말에서 시민권과 신분 문제를 협약대로 이행할 것을 확신했다. 물론 이 일 자체는 좋은 일이지만 대표적으로 메텔루스 가문이 그것을 좌시하지 않을 텐데 어떤 잡음도 없이 그대로 넘어간다면 반드시 다른 노림수가 있다고 봐야 했다.
테세우스가 별말 없이 크라수스를 바라보자 그는 예의 사람 좋은 미소를 띠며 다시 말했다.
“그나저나 제 소개를 하지 않았군요. 저는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라고 합니다. 신전에 볼 일이 있으신 모양인데 다망하신 분의 시간을 더는 뺏지 않겠습니다. 만나 뵐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테세우스는 크라수스의 태도에서 정치적 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 폼페이우스와 손을 잡은 것이 분명한 사람이 나와 무슨 이야기를 하고자 이곳까지 찾아온 것이냐? 조금이라도 나와 대화하고 싶다면 네가 숙이고 들어와라 라는 의도 말이다.
테세우스는 돌려 말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도에 지나치는 일만 아니라면 숙이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랴? 유방의 대장군으로서 항우의 군대를 격파한 한신은 소싯적 건달의 가랑이 사이를 지나가는 치욕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건 치욕의 끄트머리도 되지 못한다.
“유피테르 신전에 볼 일이 있는 것이 아니라 크라수스. 당신을 만나러 왔습니다.”
테세우스를 지나쳐 가려던 크라수스는 발걸음을 멈추고 그에게 말했다.
“그거 이상한 일이군요. 히스파니아에서 오셔서 아직 모르시는 모양인데 로마에서 클리엔테스를 무시하면 그 끝이 결코 좋지 않을 겁니다.”
‘질문 하나 하나가 날카롭기 그지없군.’
크라수스는 이 질문 하나로 폼페이우스와 자신이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얼추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정보를 제공하지 않고자 대답하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대답하지 않는다면 크라수스와 대화를 할 이유 자체가 사라지는 셈이니까.
“파트로누스(보호자)와 클리엔스(피호민)으로 이뤄진 관계, 즉 클리엔테스라면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나 폼페이우스와 저는 어떤 일방적인 도움을 받거나 주는 관계가 아닙니다.”
크라수스는 테세우스를 가만히 바라봤다. 언제고 자신을 찾아올 줄은 알고 있었다. 하나 시민권이나 신분이 박탈당할 상황에 놓였을 때나 자신을 찾아올 줄 알았는데 이렇듯 로마에 입성하자마자 자신을 찾을 줄은 크라수스도 전혀 생각하지 못한 일이다.
게다가 테세우스의 반응을 볼 때 시민권과 신분을 얻는 부분에 대해선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로마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해도 한 지역 그것도 히스파니아를 통치했던 사람이라면 자신을 향한 적대감 정도는 익히 파악하고 있을 것이 분명한데 어째서 그 부분에 대해 염려하지 않는지 의문이었다.
분명 처음 말을 꺼냈을 때는 시민권과 신분 문제에 대해 언급했는데······. 거기까지 생각이 이른 크라수스는 순간 냉수를 뒤집어 쓴 것마냥 머리가 차가워졌다. 테세우스 이 자가 지금 도리어 자신을 떠본 것이란 말인가?
크라수스는 테세우스에 대한 생각을 전면 수정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크라수스는 몸을 완전히 테세우스에게 돌린 다음 입을 열었다.
“그거 참 흥미롭군요. 다만 장소가 진솔한 대화를 나누기에 적절한 곳이 아닌 것으로 보이는데 제가 집으로 초대해도 괜찮겠습니까?”
간단히 나와 협력하는 모양새로 비춰질 텐데 이 소식이 폼페이우스에게 들어가도 괜찮겠냐고 반문하는 것이었다.
테세우스는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바로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유피테르 신전에 있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면 댁으로 직접 찾아갔을 겁니다.”
폼페이우스에게 약조한 것은 그대로 이뤄질 것이다. 사실 이미 그 약조는 이뤄진 것이나 다름없다. 폼페이우스가 달마티아 토벌을 성공시킨다면 자신이 무슨 공작을 벌일 필요도 없이 폼페이우스 진영에서 알아서 그의 공적을 내세울 테니까. 마찬가지로 그가 토벌에 성공할 때까지 충실하게 보급물자를 공급할 것이다. 다시 말해 폼페이우스는 시민의 열렬한 지지를 얻게 될 것이고 벌써부터 그 지지를 얻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니 폼페이우스는 오늘의 만남을 가지고 약조를 이행하지 않았다고 책 잡을 수 없다. 약조를 충실하지 이행하지 않은 건 엄밀히 말해 자신이 아니라 폼페이우스다. 정확하게는 폼페이우스 인사들이 자신을 사실상 토사구팽하려고 한 셈이지만 폼페이우스 역시 그 책임에서 자유롭지는 못하리라.
‘일이 매우 복잡해지는군. 흑백논리로 적아를 구분할 수 있으면 간단해지는데 그럴 수 없는 상황이니 감수하는 수밖에······.’
그 말에 크라수스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참으로 거침없으신 분이로군. 다행히 저희 집이 이곳에서 멀지 않으니 바로 이동합시다.”
*
전통적인 고대 양식으로 지어진 크라수스의 저택은 과연 화려하고 웅장했다. 로마시로부터 완전히 저택을 분리시키는 외벽과 그 안에 건축된 거대한 주택은 왜 크라수스가 재물로 이름이 높은지를 여실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테세우스는 크라수스의 가노를 따라 저택 중앙의 아트리움(중정)을 지나 음식이 마련된 정원으로 향했다.
정원 곳곳에는 분수가 설치되어 있었고 아름다운 조각품이 정원의 식물들과 한데 모여 신비로운 광경을 연출했다. 테세우스가 말없이 그것을 바라보고 있자 테세우스보다 조금 늦게 당도한 크라수스가 테세우스가 나온 방향과 다른 방향에서 정원에 이르러 말을 꺼냈다. 그 사이 토가를 갈아입었는지 아까와는 다른 토가를 걸치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가장 아끼는 장소 중 하나입니다. 날이 좋으니 연회장보다는 정원에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좋을 듯하여 이리 지시하였습니다. 드는 햇볕이 싫다면 지금이라도 다시 준비하라 이르지요.”
테세우스는 아트리움에서 본 다양한 색상과 기하학적인 무늬로 이뤄진 프레스코를 떠올리다가 크라수스에게 말했다.
“화려하고 웅장한 저택입니다만 제 생각보다는 덜 화려하군요.”
“음?”
크라수스 의아한 표정으로 반문하자 테세우스가 말을 이었다.
“듣기로 로마에서 제일가는 재력가라 들었는데 카피톨리누스에 자리한 주변 도무스들과 큰 차이가 없어 보여서 하는 말입니다.”
“아..”
크라수스는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말했다.
“저택은 저택일 뿐이지요.”
얼핏 보면 검소한 모습으로 비춰질 수 있지만 테세우스는 주변인들의 경계심을 덜기 위해 너무 과하게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저들이 예상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만 부를 과시할 뿐, 그것을 넘지 않는 크라수스의 신중함을 엿볼 수 있었다.
또한 애초에 검소한 것을 즐겨하는 위인이라면 타인의 불행을 기회삼아 자신의 재산을 기이할 정도로 증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테세우스는 크라수스 밑바닥에 숨어있는 본성 역시 꿰뚫어 봤다. 하나 모른 척 넘어갔다.
테세우스가 말없이 고개를 주억이자 크라수스가 입을 열었다.
“자. 이제 말씀해보시지요. 왜 나를 찾아 왔는지 말입니다.”
폼페이우스 진영의 인사들을 내버려 두고 그와 대척점에 있는 자신을 찾아온 연유를 묻고 있는 것이었다. 추측되는 부분이 없지는 않으나 크라수스는 왠지 이번에도 테세우스가 자신의 예상을 넘어서는 행동이나 발언을 할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그의 예상은 정확하게 적중했다.
“로마에서 머잖아 콘수아리아 축제가 열리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콘수아리아는 추수와 저장된 곡물의 수호신인 콘수스를 기리는 축제로 8월 21일에 열린다. 지금 축제에 신경 쓸 상황이 아니란 것쯤은 눈치챘을 텐데 갑자기 콘수아리아 축제는 왜 거론한단 말인가?
“콘수아리아? 콘수아리아 축제 말이오?”
크라수스는 다소 자신의 예상을 벗어나도 한참 벗어난 질문에 결국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고 반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