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마 무신의 기억-183화 (183/298)

# 183

183. 친구.

183. 친구.

혹시 모를, 아니 거의 반드시 있을 술라의 진노를 피해 로마를 떠났던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아테네, 아나톨리아(소아시아)를 거쳐 로도스 섬에 다다랐다.

예전에 보이던 학자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노련한 여행자의 모습이 키케로를 뒤덮고 있었다. 허리춤에는 글라디우스로 보이는 검도 한 자루 보였다.

물론 키케로도 로마시민인 이상, 군복무를 아니하지 않았기에 어느 정도는 무기를 다룰 수 있었지만 적과 적극적으로 전투를 치르기 위한 도구가 아닌 말 그대로 최후의 보루였을 뿐이다.

그를 따르는 충실한 시종 티로가 입을 열었다.

“키케로 님! 로도스입니다!”

티로와 함께 배를 타고 이동 중이던 키케로도 그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항구의 입구에는 거대한 다리로 보이는 흉물스러운 조각상이 양측면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온전했다면 상당히 거대한 조각상이었을 것을 추측하게 만들었다.

“로도스의 거상이로군. 안티파트로스가 언급한 그 거상 말이야.”

기원전 2세기 경 그리스의 시인 안티파트로스는 세계 7대 불가사의로 제우스 좌상, 알렉산드리아의 등대, 기자의 대 피라미드, 로도스의 거상, 아르테미스의 신전, 마우솔로스의 영묘, 바빌론의 공중정원을 거론한다. 키케로는 이것을 가리켜 한 말이었다.

“하나 불품없군. 한 시대를 풍미했던 단단하고 거대한 조각상도 세월 앞에는 먼지처럼 변할 뿐이야.”

로도스의 거상은 로도스 도시 연합이 연합의 건재함을 드러내기 위해 합심하여 건축한 조각상이다. 착공한 지 12년만인 BC284년에 건축된 로도스의 거상의 크기는 34m에 달했고 대좌까지 합치면 50m에 달했다.

하나 BC224년 대지진이 이 일대를 강타하여 로도스 거상은 무릎 위쪽의 부서져 그 윗부분은 바닥에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다만 그 잔해조차도 관광상품이 되었는데 그 잔해의 흔적은 이제 찾아보기 어려웠고 무릎 윗부분이 거칠게 잘린 두 다리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보수가 전혀 이뤄지지 않는 모양인지 남은 부분조차 곧 부서질 것처럼 낡아 보였다.

“티로. 그렇지 않나?”

티로는 노예였지만 노멘클라토르(교육받은 노예)였기에 키케로가 단순히 로도스의 거상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란 것을 눈치챘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았다. 이 발언은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키케로 역시 위험하게 만들 수 있는 발언이었으니 말이다.

“제가 뭘 알겠습니까? 그저 살아갈 뿐이지요.”

“그저 살아갈 뿐이라······. 거참 묘한 대답이로군. 그렇지. 그저 살아갈 뿐이지. 물 위를 떠도는 나뭇잎이 제 스스로가 어디로 갈는지 알 수나 있으랴.”

키케로 역시 술라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술라의 영향력은 지금 이곳 로도스의 거상과 마찬가지로 그의 죽음과 동시에 두 다리가 잘려 몸통과 머리가 단번에 박살난 셈이다. 그러나 두 다리가 아직 남아 있었다. 로마에 뿌리를 내린 두 다리가 말이다. 하여 바로 돌아가지 않고 여행을 계속하며 견문을 넓혔다.

죽을 뻔한 위기도 여러 번 있었다. 많은 나라에서 몰려든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리고 다시 수많은 소식들을 접했다. 로도스 섬에는 거래를 위해 다시 각지의 사람들이 몰려드는 도시다. 따라서 이곳이라면 그간 접하지 못한 로마의 근황도 들을 수 있을 거라 여겼다.

여차저차 온 셈이다. 로도스 섬도 구경할 겸, 로마의 근황도 들을 겸 말이다. 어차피 급할 건 없었다. 로스키우스 사건을 변호하며 술라의 진노를 사긴 했지만 술라가 죽은 이상, 자신을 해할 자는 없었고 현 상황에서 자신이 잃어버릴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렇기에 더 신중해야 한다. 어떻게 로마에서 살아갈지에 대한 계획이 없이 로마에 발을 디딘다면 극심한 격랑에 휩싸여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 것이다.

지난 여행 중 키케로는 수없이 그것을 느꼈다. 로마시민? 술라에게 대적한 유능한 변호사? 여행 중 자신을 죽이려던 도적들은 애초에 그런 건 고려하지도 않았다. 내심 우쭐거리게 만들던 명예와 명성? 고작 그 정도인 거다. 고작 그 정도 말이다.

“하긴······.”

그 술라조차 벌써부터 이름이 흩어지고 없었다. 누구도 술라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고 그를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그의 수하였던 자들도 로마시민의 인기를 얻기 위해 술라가 제정한 잘못된 법안들을 뜯어고치려고 준비 중일 것이다.

이윽고 키케로 등이 탄 배가 로도스 항구에 정박했다. 단출한 짐을 챙겨 배에서 내린 키케로는 티로에게 말했다.

“시장하니 일단 배부터 채우자구나.”

“알겠습니다!”

키케로와 티로를 비롯한 일행은 로도스 섬에 위치한 한 주점 겸 식당에 들어가 자리에 앉아 음식을 주문했다. 잠시 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볶은 돼지고기를 가져오자 키케로는 말없이 그것을 먹었다.

“이제야 정신이 좀 맑아지는군. 티로.”

티로 역시 빠르게 식사를 마친 후였기에 입을 닦아내며 키케로에게 대답했다.

“예. 키케로 님.”

“가서 소문 좀 들어봐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말해 놓고.”

“알겠습니다.”

키케로가 그렇게 명령을 내릴 때 옆에서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히스파니아가 로마에 항복했다는군. 히스파니아 토벌을 성공시킨 폼페이우스는 달마티아 정벌을 위해서 다시 진격했다는 소식도 들었네.”

“폼페이우스? 메텔루스 피우스는 어쩌고? 본래 메텔루스 피우스가 히스파니아 토벌군 총사령관 아니었나?”

“테세우스라는 자한테 죽임을 당했다는데?”

“뭐? 죽어? 그 메텔루스 피우스가? 대체 테세우스 그자가 누군데?”

“나도 몰라. 거 뭐냐? 저 폼페이우스를 패퇴시켰던 세르토리우스의 아들이라는 소리가 있던데. 자세한 건 나도 몰라.”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피우스가 죽어? 키케로는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대화를 나누던 자들에게 다가갔다. 행색을 보아하니 로마 등지를 오가는 상인으로 보였다.

“실례지만 그 소식 자세하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대화를 나누던 상인이 키케로를 위아래로 훑어보다가 입을 열었다.

“댁은 누군데 그러시오?”

“로마시민입니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라 하지요.”

술라도 죽었고 메텔루스 피우스도 죽었다면 자신의 이름을 구태여 감출 필요도 없었고 무엇보다 더는 로마 밖을 떠돌 이유가 없었다. 자신이 염려하던 술라의 남은 두 다리가 바로 메텔루스 피우스였다. 그런데 그가 죽었다고 한다. 이런 종류의 소문은 당사자가 매우 민감해하는 소문이었기에 결코 함부로 퍼지지 않는다.

혓바닥이 잘리고 머리가 달아나고 싶지 않다면 권력자에 대한 소문은 입 밖으로 내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 술라의 사후에도 자신의 술라의 이름을 거론하며 그를 비판하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주정뱅이들이라면 몰라도 각지를 오가는 상인들이 이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다시 말해 메텔루스 피우스의 죽음은 진실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소리였다.

“음? 키케로? 키케로? 들어본 것도 같은데······.”

메텔루스 피우스의 죽음을 거론했던 상인이 머리를 갸우뚱거리자 그에게 로마에 대한 소식을 듣고 있던 상인이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로스키우스! 로스키우스를 변호한 그 변호사가 키케로였지 아마?”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잠시 가만히 있어봐봐. 아무튼 그게 당신이 맞소?”

전이라면 자신을 알아본다는 사실에 어깨가 으쓱 거렸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키케로는 쓰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또한 키케로는 알았다. 자신을 존경하거나 만나길 기대했기 때문에 이 자가 자신의 정체를 확인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아닌 말로 이익을 좇는 상인이 변호사를 존경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로스키우스를 변호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라면 본인이 맞습니다.”

“오······.”

키케로는 감탄사를 뱉는 상인의 눈빛에 탐욕이 어렸다가 빠르게 사라지는 것을 확인했다. 술라 생전에는 어떤 식으로든 보상을 받을 수 있었겠지만 술라도 죽고 메텔루스 피우스도 죽은 마당에 자신의 생사에 관심을 두는 권력자가 누가 있겠는가? 자신의 근황 따위는 이제는 돈이 되지 않는 정보였다.

빠르게 계산을 마친 상인은 키케로에게 말했다.

“이렇게 만날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예. 저를 알아봐 주시는 분이 있으니 저도 기쁘군요. 그나저나 그 소식 자세하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로마 소식을 전하던 상인이 키케로에게 말했다.

“무슨 소식 말이오? 메텔루스 피우스 말이오? 나도 더는 아는 것이 없소.”

“아는 소식만큼이라도 부탁드리겠습니다.”

상인은 동료상인을 바라보고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별 수 없다는 듯 그간 키케로가 듣지 못한 로마의 소문을 아는 대로 풀어냈다. 키케로는 세심하게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저들에게 감사인사를 표한 뒤 저들과 헤어져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테세우스. 테세우스라······. 이 자는 대체 누구지?”

홀로 중얼거리던 키케로는 이럴 때가 아니라는 듯 티로에게 말했다.

“티로!”

“예. 말씀하십시오.”

“로마로 가는 배편을 어서 알아봐라!”

“로마? 말입니까? 로도스 섬에 온지 하루도 되지 않았습니다만? 아니 그것보다 괜찮을까요?”

로마로 돌아가지 못하는 키케로의 두려움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꺼내는 말이었다. 키케로는 단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로마로 간다. 아니 가야한다.”

티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의 결정이 확고한 이상, 자신은 키케로의 결정에 따를 뿐이었다.

“알겠습니다. 준비하겠습니다.”

*

테세우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크라수스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데메트리우스에게 누명을 뒤집어 쓰고 도망쳤다가 이 모든 일을 겪은 셈이라 할 수 있군요. 심지어 최근에는 메텔루스 피우스와 그의 군대도 격파했고?”

폼페이에서 일어난 일을 간략하게 들은 크라수스가 다시 말했다.

“데메트리우스에게 구함받기 전의 과거는 기억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모릅니다. 이름조차도 모릅니다.”

모를 수밖에. 이 테세우스라는 이름도 태서후를 저들이 잘못 알아들어서 굳어진 이름이 아니었던가?

사실 테세우스도 의문이었다. 자신이 기억하기 이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아니면 말 그대로 하늘에 뚝 떨어져 내리듯 바다에 떨어져 표류 중이었는지 등을 말이다. 아무래도 후자는 현실가능성이 훨씬 적었기에 뭔가 알지 못하는 과거가 있으리라 추측할 뿐이다. 그러니까 태서후든 테세우스든 자신이 자신으로 존재하기 이전, 즉 대략 10살 이전에도 별도의 과거가 있을 거란 추측 말이다.

“으흠.”

데메트리우스라면 크라수스도 알고 있었다. 술라의 해방노예는 꽤 많았지만 그 중에서도 제 주인이었던 술라를 가장 많이 닮은 사내였다.

술라의 또 다른 해방노예 크리소고누스는 로스키우스 공판을 키케로라는 변호사에게 패배하고 술라에 의해 곰치 연못에서 곰치에 뜯겨 죽었지만 데메트리우스는 술라 사후에도 승승장구하고 있는 자였다. 자신도 안면이 있지만 폼페이우스와 더 연관이 깊었다. 폼페이우스의 자금줄 중 하나였으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이것 참 흥미롭군요. 하하하. 이것 참. 흥미롭기 그지없군요.”

크라수스가 드물게 자신의 감정을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정확히 뭘 어떻게 하려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테세우스 이 자는 지금 데메트리우스를 치려는 것이다. 데메트리우스의 정확한 이름이 루키우스 데메트리우스 세쿤두스였던가?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지금 이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어쨌든 저는 누명을 쓴 상황입니다. 폼페이에서 그것도 검투사에 불과했던 자가 누명 쓴 일이라 기록된 내용이 없을지도 모르는 일이나 그 점을 파고든다면 저는 상당히 불리한 지경에 처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예 정면승부를 하겠다? 좋습니다. 오늘 저를 여러 번 웃게 하셨으니 도움을 드려야지요. 무엇을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소문을 퍼트려주십시오.”

공신력 없는 자가 퍼트린다면 얼마든지 무마할 수 있는 능력이 데메트리우스나 폼페이우스 쪽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소문을 퍼트리는 자가 크라수스라면 말이 달라진다. 그것을 간파한 크라수스는 다시금 즐거운 웃음을 터트리며 흔쾌히 대답했다.

이런 잡음이 일어나는 것만으로도 폼페이우스의 명성에는 균열이 생긴다. 튼튼한 제방둑이 무너지는 것도 작은 균열이 커지고 커져서 결국 무너지는 법이다. 어찌 즐겁지 않으랴?

“하하하하. 테세우스. 당신! 정말로 영리한 사내로군요. 이를 어찌 거부하겠습니까? 좋습니다. 이 소식은 로마항에 정박한 배 밑바닥에 있는 자들까지도 들을 수 있도록 널리 퍼트려주겠습니다. 하나 여전히 축제와 무슨 연관이 있는지 모르겠군요.”

“크라수스 당신은 훌륭한 전차들도 많이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전차? 음? 설마?”

“소문의 끝에 모욕을 당하고 누명을 썼으나 이 일을 정식재판으로 끌고 가기 전에 전차경기에서 내게 승리한다면 넘어갈 것이고 그게 아니라면 반드시 파멸시키겠다고 선전포고해주십시오. 아마 이 일이 가져올 파급력은 크라수스 님도 예상할 수 있을 겁니다.”

“뭐라? 으하하하하하하!”

크라수스는 대소하며 즐거워했다. 이 소식은 폼페이우스의 달마티아 진군 소식을 뒤덮고 남을 소식이 될 것이다. 사실이든 아니든 일이 어찌되든 크라수스 자신은 잃을 것이 없었다. 재물이야 제법 사라지겠지만 폼페이우스는 그보다 많은 것을 잃게 될 것이다. 물론 이 일로 자신의 이름이 폼페이우스 이름 위에 놓이진 않겠지만 적어도 자신이 따라잡지 못할 정도로 폼페이우스의 위상이 커지는 일은 막을 수 있게 된다.

이번 콘수아리아 축제는 유례없이 성대한 축제가 될 것이 분명했다. 암 그래야지. 폼페이우스의 명성을 짓누를 수 있다면 더없이 큰 축제를 벌여야지. 크라수스는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큰소리로 테세우스에게 말했다.

“전차? 전차가 아닌 무엇이라고 해도 얼마든지 내어드리지요! 하하하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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