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6
186. 피의 전차.
186. 피의 전차.
탐욕에 젖은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아귀처럼 자신의 몸을 뜯어먹고자 달려드는 적들을 바라봤다. 항우는 양손에 나눠 쥐고 있던 초진창과 초천검을 휘둘러 적병을 절단냈다.
붉은 핏물이 검과 창의 궤적을 따라 길게 늘어지기 무섭게 또 다른 궤적이 그 뒤를 이었다.
“크아아악!”
“아아악!”
따르는 장수들은 죽거나 곁을 떠났고 마지막 28명의 수하들조차 적의 거센 공격 앞에 모두 고혼이 되어 사라졌다. 강동으로 후퇴했다면 권토중래(捲土重來, 흙먼지를 일으키며 다시 돌아온다)하여 천하를 다시 거머쥘 기회를 얻을 수 있을지 모르나 밭을 갈던 노인마저 길 잃은 자신에게 거짓을 말하고 속인 일은 천하의 민심이 자신을 떠났음을 깨닫게 만들었다.
“으아아아아아!!!”
항우는 적들의 살점과 찢고 뼈를 부수며 울부짖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살벌했는지 항우를 향해 달려들던 적들은 일정 거리 이상 감히 다가오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대체 홀로 몇 명의 적을 베어낸단 말인가?
항우를 죽이려는 자치고 무예에 자신이 없던 자가 있던가? 그러나 모조리 죽임을 당했다.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그의 주변으로는 이리저리 갈라진 시체들이 즐비했다. 항우의 눈빛은 사신의 눈빛을 방불케했고 그의 기세는 과연 천하를 진동케할만 했다.
항우가 지쳤다는 건 이 자리에 모든 이들이 안다. 하나 상처입은 맹수가 무섭다더니 지친 중에도 대체 몇 명의 목숨을 가져가는 것이란 말인가? 이들은 감히 다가서지 못했다.
항우는 무심한 눈빛으로 저들을 바라봤다.
적들이 자신을 향해 달려들지 않는 것은 기다리는 것이리라. 한신의 본대가 자신을 뒤덮기를.
하나 한신의 본대가 이르지 않더라도 자신이 이곳을 벗어나는 건 불가능하다. 오추마는 이미 자신의 곁을 떠났고 더 이상 초천검과 초진창을 휘두를 힘조차 없다.
강동으로 후퇴하여 훗날을 도모하라던 지휘관의 음성이 다시금 스쳐간다.
후퇴한들 무슨 영화가 있으랴? 자신을 따른 8천에 이르는 강동의 아들을 모두 죽이고 무슨 면목으로 강동의 부형들을 마주한단 말인가? 저들이 나를 불쌍히 여겨 나를 받아준다고 해도 그것은 그것대로 부끄러운 일이 될 것이다. 하늘이 나를 버렸고 민심도 나를 떠났으니 더 살아봐야 덧없는 피만 천하에 흐르게 할 뿐이다.
자신을 죽이려는 적장 가운데 익숙한 얼굴이 항우의 눈에 들어왔다.
“너는 나를 따르던 자가 아니냐?”
여마동이라는 자였다. 그가 항우의 눈을 마주하지 못하고 피하자 항우는 그저 하늘을 바라보며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어떻게 말로 형언할 수도 없는 몹쓸 씁쓸함을 감추고자, 잊어버리고자 더 크게 웃었다.
“으하하하하하!”
한바탕 웃음을 터트린 항우는 다시 큰 목소리로 적들을 향해 외쳤다.
“한왕이 내 목을 천금과 만호(萬戶)의 봉지로 산다고 하니 좋다! 내 그대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겠노라!”
항우는 살벌한 기세로 적병을 바라본 뒤 다시 하늘을 바라보고 초천검으로 자신의 목을 단번에 베어냈다.
섬뜩한 차가움과 예리함이 목에서 느껴짐과 동시에 핏물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촤아아악!
이것이 죽음인가? 모든 것이 꿈결처럼 사라졌다. 소싯적 가지고 놀던 장난감처럼 아니 그보다도 더 부질없는 것들에 불과했다. 그렇게 쓰러지는 항우의 희미한 눈동자에 아귀처럼 달려드는 적병이 눈에 들어왔다.
‘참으로 참으로 덧없는 죽음이로구나. 내 시신조차 탐욕의 대상일 뿐이니······. 참으로 덧없는 인생을 살았구나. 크크큭 그래. 참으로 덧없고 어리석은 인생이 아닌가?’
*
잠에서 깬 테세우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고 하늘을 바라봤다. 달빛이 환하게 떠있는 어두운 밤이었다.
“항우······.”
항우의 못다한 마지막 말이 무엇인지 테세우스는 알았다. 다시 살 수 있다면,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그 간절한 바램을 테세우스는 알았다. 하나 끝끝내 그 마음을 생각으로도 품지 않았던 것은 항우도 알았기 때문이리라.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일이란 드물고 더욱이 다시 사는 인생이란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런 점에서 자신은 참으로 기묘한 존재다. 물론 자신은 항우도, 리처드도 어쩌면 서후도 아니지만 죽은 자의 기억을, 그것도 세 명이나 되는 기억을 품고 있다는 건 참으로 기묘한 일이니까. 대체 자신은 뭐란 말인가?
하나 테세우스는 툴툴 털어버렸다.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주제이긴 하나 언제나 그렇듯 결론지을 수 없는 주제였으니 말이다.
어제, 크라수스가 자신을 찾아왔다. 그가 손수 자신을 찾아왔을 때 뭔가 상의되었던 것과 다른 일이 발생했다는 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검투경기라······.”
정확히 뭘 어떻게 한다는 이야기는 없었다. 다만 크라수스가 언급한 것은 데메트리우스가 검투경기를 제안했고 메텔루스 가문도 그것을 원하니 거부할 명분이 없다는 정도가 전부였다. 크라수스로서는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이 소식을 그가 직접 전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고.
크라수스가 어떤 마음과 어떤 계산으로 이리 행동했는지 모를 테세우스가 아니다. 하나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미 일은 벌어졌고 그것을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사실 아예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검투경기가 벌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검투경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전차경기 역시 단순히 누가 먼저 결승점에 도착하느냐의 승패를 가리는 경기가 아니라 훨씬 더 치열하고 잔혹한 경기가 될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피하고 싶었다. 더 치열하고 더 잔혹하다는 것은 곧 훨씬 더 많은 사상자가 생겨난다는 뜻이니까. 더 많은 피를 손에 묻혀야 한다는 소리니까. 가로막는 것은 무엇이든 망설이지 않고 분쇄하겠지만 되도록 피하고 싶었다.
하나 일이 이런 식으로 흘러간다면 자신도 별 수 없는 일이다. 저들은 저들의 목적을 위해 자신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달려가는 수밖에. 그 가운데 일어나는 일까지 고려할 여유는 언제나 그렇듯 존재하지 않았다.
테세우스는 답답한 마음에 튜니카를 걸친 차림으로 수부라 지구의 길거리로 나섰다.
테세우스는 수부라 지구에 거점을 마련하고 식량이 필요하다면 식량을, 의사가 필요하다면 의사를 지원해줬다. 본래는 자신이 얻은 집을 중심으로 축제를 벌일 생각이었지만 수부라 지구의 상황은 생각보다도 열악했고 따라서 보다 실질적인 도움을 베푸는 것이 우선이라 여겨서 이곳 사람들에게 그런 식으로 도움을 베풀고 있었다.
어제 방문한 크라수스는 대체 테세우스가 무엇을 하는 것인지 궁금해서 직접 찾아온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무지렁이들에게 은혜를 베풀어봐야 돌아올 것이 거의 없는데 대체 무얼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을 테니 말이다.
뭐 민심을 얻기 위해서라는 것쯤은 크라수스도 얼추 알았지만 그 민심이라는 건 바람과 같아서 언제고 변하는 것들 아닌가? 그런 불명확한 것에 신경을 쓰느니 보다 확실한 권력자와 관계를 맺는 것이 누가봐도 현명한 처사였다. 병든자와 굶주린 자를 입히고 먹여봐야 고개를 조아리며 감사합니다. 라는 말만 전할 것이 분명한 치들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테세우스는 크라수스의 눈에 깃든 실망감을 모르지 않았다. 또한 그가 자신의 행동이 현명했음을 확신하는 것 역시.
사실 테세우스도 동일한 생각이다. 권력자들과 손을 잡고 그들에게 이득을 제공하고 자신 역시 이권을 보장받고. 같은 시간과 재물을 쓰더라도 당장 내게 이득이 되는 자들에게 쓰는 것이 현명한 처사가 아니겠는가? 시간과 재물이 넉넉하지 않은 상황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역경과 고난은 그 사람이 진정 어떤 사람인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게 만든다. 상황이 여유롭고 풍족한 가운데 저들을 돕는다고 해도 민심을 얻을 수 있겠지만 성품을 대중에게 알리긴 상대적으로 어렵다.
역경에 처한 중에도 자신의 이득이 아니라 누군가를 돕는 일에 나선다면 그 사람의 성품이 정말로 어떠하든지는 둘째치고 세인들은 그를 신뢰하고 따르고 싶어진다.
게다가 저들과 같은 방식, 같은 방법으로는 저들을 넘어설 수 없다. 누군가를 속이고 담합하는 일을 로마인보다 잘한다는 보장도 없고 저들은 자신의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도와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메텔루스 가문과 대놓고 척을 진 자신과 친하게 지낸다? 저 크라수스조차 꺼리는 마당에?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시간과 재물만 헛되이 날릴 공산이 컸다.
그럴 바에야 정말 도움이 필요한 자들에게 도움을 베푼다. 일견하기엔 어리석은 일처럼 보이지만 현 상황에선 이것이 현명한 일이었다. 게다가 축제 기간 한정이지만 지금 베푸는 재물 또한 자신의 것이 아니라 크라수스의 재물이다.
그랬다. 테세우스가 수부라 지구에 거점을 마련한 것은 이러한 계산을 바탕으로 이뤄진 것이었다. 누구도 관심두지 않는 이곳에 축제를 벌이고 이들을 챙겨주는 모양새를 취하면 적어도 헛되이 시간과 재물을 쓰는 결과를 낳지는 않을 테니까. 더욱이 훗날, 이들의 호의는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다.
권력자들? 권력을 가지고 있으니 뭔가 있는 것처럼 보이긴 하나 저들 역시 부나방에 불과하다. 더 많은 권력과 더 많은 재물을 좇는 부나방 말이다. 저들이야 자신이 더 많은 명성을 얻으면 알아서 찾아온다. 저들과의 관계는 그때가서 해도 늦지 않는다.
그렇다. 약간의 재물과 시간을 투자하여 상대적 약자들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분명 그랬는데 서후의 기억이 가진 감성은 저들의 상황을 간과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세 기억, 그러니까 항우, 리처드, 서후의 기억 중 서후의 삶이 가장 초라하고 보잘 것 없다. 하나 세 명의 기억 중 가장 위대한 죽음을 선택하라면 더 볼 것도 없이 서후의 죽음이다. 항우나 리처드 모두 자신의 욕망과 야욕을 성취하기 위해 피 흘리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던 인물들이나 서후만은 아이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던졌다.
물론 서후는 이를 개죽음이라 여겼고 테세우스도 그 생각에 동의한다.
하나 서후가 가졌던 감성은 테세우스에게 이어졌다. 항우, 리처드, 서후 모두의 기억을 가진 테세우스에게 그 셋을 나누는 것은 무용한 일이지만 한 사람의 정체성을 내세워야 한다면 가장 초라한 삶을 살았다고 여겨지는 태서후 외에는 없었다.
토페트의 일도 그래서 분노했던 것이고 이는 이곳 수부라 지구에서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만 남들이 꺼리고 하지 않는 일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선한 일을 한다고 이득만 얻는다면 누군들 하지 않겠는가? 뭐 그래도 안 하는 자는 안 하겠지만 어쨌든 현실은 그렇지 않다. 좋은 일을 하면 이득이 아니라 오히려 손해를 봐야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다른 도시에 비하면 안전한 편이지만 로마의 밤거리는 역시 위험하다. 자경대조차 순찰하지 않는 수부라 지구야 더 말할 것도 없다. 이 지역을 홀로 걷는다는 건 강도 당하겠는 뜻이고 한편으로 죽겠다는 표현이나 다름없었다.
“저놈이 테세우스 맞냐?”
“맞아.”
“얼마 전부터 수부라 지구에서 재판관 노릇하던데 어디 우리도 재판해보지 그러냐?”
보이지 않는 불합리함은 모르는 일이다. 하나 테세우스는 자신의 눈앞에 일어나는 불합리한 일은 모조리 처리했다. 그게 금력이 됐든 무력이 되었든 쓸어버렸다. 수부라 지구를 장악하고 있던 뒷골목 패들에게 그 모습이 기꺼워 보일 리가 만무하지 않은가?
달빛에 번뜩이는 쇠붙이들이 테세우스의 눈에도 들어왔다. 반면 테세우스는 맨손에 걸치고 있는 옷이라고는 튜니카가 전부였다.
“크라수스와 친하게 지내길래 함부로 건드리지 못했는데 말이야. 더 알아보니 그것도 아니더란 말이지.”
“너 이 새끼. 그간 나대던게 영 꼴사나워 보였는데 말이야. 배때지에 칼침 맞고도 그리 나댈 수 있나 보자.”
테세우스는 무심한 눈빛으로 이들을 바라봤다.
탐욕에 가득한 눈빛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모습은 마치 항우를 바라보던 한왕, 곧 유방의 병사들과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하나 자신은 항우가 아니다. 또한 자신은 항우와 다르게 혼자도 아니었다.
“움직이지 않았다면 내버려 뒀을 텐데 아무래도 내버려 둘 수 없겠군.”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그러자 다른 사내가 거칠게 다시 말했다.
“아 됐고! 덩치 믿고 밤거리 무서운 줄도 모르고 쏘다니는 모양인데 일단 죽여!”
테세우스는 날카로운 단검을 들고 달려드는 사내들을 바라보다가 생각에 잠겼다. 자신이 피를 부르는 것인지 아니면 피가 흐르는 곳에 자신이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생각 말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제일 앞에서 달려오던 사내의 머리통을 잡아채 뒤에 달려오던 놈에게 던졌다.
“컥!”
“크아아악!!”
우당탕탕탕
테세우스의 강력한 힘에 이리저리 너부러진 사내들을 바라보다가 테세우스는 땅에 떨어진 단검을 주워들으며 혀를 차며 말했다. 그건 혼잣말이 아니라 마치 명령을 내리는 것처럼 들렸다.
“쯔. 쓸어버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