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마 무신의 기억-188화 (188/298)

# 188

188. 피의 전차.

188.

브루투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흔들자 트럼펫과 깃발 등이 요란하게 흔들렸다.

펄럭 펄럭

뿌우우우웅

그 소리에 열광하던 관중들은 잠시 열기를 가라앉히고 브루투스를 바라봤다. 관중들이 침묵하지 않는다면 천둥처럼 거대한 목소리를 지닌 자도 묻혀버릴 것이다. 그 정도로 엄청난 숫자의 관중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위대한 로마의 시민 여러분! 오늘의 축제를 마음껏 즐기시오! 아울러 성대한 축제를 열 수 있게 여러모로 후원한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와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가문에 감사드리는 바요.”

메텔루스 가문이 한 것이라고는 자신들의 위신을 세우기 위해 검투사 지원이나 한 것이 전부였기에 크라수스와 동등한 위치에 두고 치하할 일이 아니었다.

하나 브루투스는 메텔루스 피우스와 제법 깊은 관계를 맺고 있던 사람이었다. 단상 위에 앉은 자들 중 브루투스가 왜 메텔루스 가문의 이름을 거론했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한껏 차린 상에 숟가락이나 올린 셈이지만 크라수스는 사람 좋은 미소를 띠며 넘어갔다. 자신이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자신을 위협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자들과는 되도록 척을 지지 않는 것이 크라수스의 처세술이었다.

크라수스는 오늘의 모든 영광을 가져가지 않아도 충분했다. 자신의 목적은 폼페이우스의 득세를 저지하고 자신의 이름을 시민들에게 다시금 각인시키는 것이었는데 그 목적은 이미 충분히 성취된 셈이다.

오늘 양보한 일을 가지고 훗날 양보를 구해도 될 일.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가 그 정도도 계산하지 못할 가문이 아니었다.

브루투스의 말은 음성이 멀리 퍼지게끔 고안된 구조물을 타고 경기장에 울려 퍼졌지만 모든 이들이 듣기엔 아무래도 어려운 점이 있었다. 이에 그의 릭토르들이 일제히 그의 말을 재창하려고 했지만 이는 브루투스의 손짓에 의해 저지되었다.

브루투스는 크라수스에게 말을 꺼냈다.

“자! 오늘의 경기에 대해 설명도 할 겸, 시민들에게 한 말씀하시지요.”

크라수스는 정중하게 브루투스에게 인사한 뒤 브루투스가 섰던 자리 위에서 크게 외쳤다.

“로마는 지금껏 수많은 영웅들을 배출해냈습니다. 영웅은 시련과 고난을 제물 삼아 타오르는 불과 같습니다. 오늘 위대한 로마의 시민 여러분은 20명의 위대한 영웅들을 보게 될 것이오! 자! 보시오! 고난과 역경을 뚫고 나갈 20명의 영웅들을!”

크라수스가 절절하게 목이 터질 것처럼 외치자 경기장에 입장하는 자들이 있었다. 크라수스가 언급했던 대로 20명에 달하는 자들이었고 모두 두 마리의 말이 이끄는 전차를 몰고 경기선 위에 정렬하기 시작했다.

관중들의 환호가 미친 듯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와아아아아아아!!”

“와아아아아아!!”

크라수스가 경기를 진행하는 사회자로 보이는 자에게 손짓하자 단상 밑에서 대기 중이던 사회자는 관중들의 환호 속에서 큰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전자음향장치가 이 시대에 존재하지 않았기에 사회자의 목소리는 묻힐 수밖에 없었지만 우렁찬 목소리를 가진 자들이 일제히 외치는 소리는 관중의 환호를 뚫고 경기장에 울려 퍼졌다.

“경기 방식은 이러합니다. 총 3 바퀴를 돌게 될 것이고 가장 먼저 결승점에 도달한 영웅이 승리하게 됩니다. 여기까지는 기존의 전차 경기와 동일하나 경기장을 보시면 알겠지만 모형 숲길과 장애물 등을 많이 만들어 두었습니다. 또한 마지막 세 바퀴째에는 전차를 버리고 영웅이 직접 달려서 결승점에 도달해야 합니다. 물론 그 전에 전차가 부서진 영웅은 다른 전차를 빼앗거나 결승점까지 두 다리로 달려야겠지요. 영웅들에게 주어지는 무기는 레기온의 푸지오(짧고 폭이 넓은 단검) 한 자루가 전부입니다. 자! 이제 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시민들이여!! 환호하라!!!”

“와아아아아아아!!!”

“와아아아아!!”

“모두 죽여라!”

“오늘의 경기만 기다렸다!”

“우와아아아!”

키르쿠스 막시무스가 관중들의 함성에 의해 무너지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열광적인 함성이 터져나왔다.

*

푸르르륵.

전차에 묶인 검고 붉은 두 마리의 말을 바라보던 테세우스는 흉흉한 기세로 자신을 노려보는 나머지 19명의 기수들을 바라봤다. 테세우스를 비롯해 이들이 걸치고 있는 것이라고는 튜니카가 전부였다.

정상적인 복장은 아니었다. 또한 자신 하나만 견제할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견제해야 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기전의 모습이다. 하나 이들 모두가 자신을 견제하고 있었고 방어구는 튜니카 한 벌로 한정했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겠는가? 경기 결과와 상관없이 반드시 자신을 죽이고 말겠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게다가 마지막 바퀴는 도보로 직접 이동해야 한다라······. 데메트리우스와 메텔루스 가문이 머리를 많이 썼군. 머리를 많이 썼어.’

경기장의 모든 자가 적이었다. 어떤 면에서 보면 관중 또한 적이었다. 크라수스가 아니었다면 자신이 타고 있는 말과 전차에도 수작질을 부렸을 것이다. 하나 그렇게 되면 크라수스의 명예를 더럽히는 행위가 될 수 있으니 아마도 저들이 그런 짓까지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미 많은 양보를 한 크라수스의 심기를 상하게 할 이유를 못 느꼈을 테고 그것이 아니라도 충분히 자신을 죽일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을 테니 말이다. 테세우스가 보기에도 전차나 말의 상태는 상급에 달했다.

다만 경기장을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이라 단 한번도 전차를 몰아보지 못했다는 점이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였다. 하나 테세우스는 이 역시 데메트리우스 등의 계책임을 모르지 않았고 별로 개의치도 않았다.

꾸우욱

길어 늘어뜨려진 고삐를 손에 휘휘 감아쥐며 테세우스는 전방을 바라봤다. 시련과 고난이라고 했던가? 화로의 화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더 정련된 철을 얻기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오늘의 광경이 역동적일수록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갈수록 자신의 이름은 로마인들에게 각인되기 쉬워진다. 어떤 면에서 보면 공평하지 않은가? 오늘의 시련과 고난이 강해질수록 훗날의 일이 더욱 수월해진다는 건.

‘그러니 상관없다. 무엇이 다가오든 부숴버리면 될 뿐이다.’

테세우스는 자신을 노려보는 자들의 살기어린 눈빛으로 예의 무심한 눈빛으로 받아냈다. 묘한 긴장감이 감도는 그때 우렁찬 트럼펫과 뿔나팔 소리와 동시에 각양각색의 깃발이 펄럭이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경기장 중앙에 위치한 물고기 모양의 종이 아래로 내려가며 1바퀴 째가 시작되었음을 알려줬다.

“와아아아아아!!”

관중들의 환호성은 기대감으로 더욱 크게 울려 퍼졌다.

“차!”

테세우스는 채찍으로 말을 엉덩이 때려서 전차를 가속시켰다.

두두두두둥 쿠구궁

경기장이라 반듯하게 평평한 노면이라고는 하나 흙바닥에 불과한 곳이니 노면 상태가 울퉁불퉁할 수밖에 없었고 전차에 무슨 충격완화장치 같은 것이 있을 리 만무했으니 그 여파는 고스란히 다리를 타고 온몸에 전해졌다.

말을 타고 달릴 때와는 다른 종류의 속도감과 짜릿함을 느낄 수 있었다. 테세우스는 자신이 처한 상황의 불리함과 앞으로 벌어질 일을 예상함에도 불구하고 입가에 미소가 서리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의 안에는 항우와 리처드의 거침없는 투쟁본능 역시 자리하고 있었으니까.

몸을 이리저리 흔드는 거친 환경과 불리한 상황들은 두려움을 자극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테세우스의 안에 투쟁심을 일깨우는 감초 역할을 할 뿐이었다.

“차! 차!”

20척에 달하는 전차가 저마다 선두의 자리를 차지하고자 나란히 질주하기 시작했다. 보통은 커브길에 다다랐을 때 그 격차가 선명하게 갈라지지만 지금의 경주는 그럴 수가 없었다.

20척에 달하는 전차가 일제히 양옆으로 달릴 수 있는 폭도 아니었을뿐더러 앞으로 펼쳐진 길은 기껏해야 전차 두 세대가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폭이 좁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테세우스는 앞으로 치고 나가고자 채찍으로 말을 독려했으나 20척의 전차 역시 테세우스의 그것과 비교해 전혀 급이 떨어지는 전차들이 아니었다. 전차의 성능은 좋게 봐야 동급이다.

더욱이 테세우스는 유달리 큰 체구로 인해 일반적인 기수보다 체중이 더 나간다고 할 수 있는 상황. 이대로라면 절대 선두로 치고 나갈 수 없고 선두로 치고 나간다고 하더라도 뒤처질 수밖에 없었다.

두두두두

‘선두로 치고 나갈 수 없다면!’

테세우스는 급히 말고삐를 잡아당겨 말의 속도를 줄였다. 그와 동시에 자신이 있던 자리를 치고 들어오는 전차 두 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조금만 늦었다면 전차의 양쪽 바퀴살이 다 박살나서 전차를 더 몰지 못하는 상황에 처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자신을 향해 짓쳐 들었던 기수들은 안타깝다는 표정과 동시에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그들의 비웃음따위에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두두두두두

뒤에서 귓가를 요란하게 자극하는 말발굽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테세우스가 힐끗 고개를 돌려 뒤를 살피자 속도를 줄이는 자신을 전차로 그대로 깔아뭉개갰다는 듯 미친 듯이 말의 속도를 높이고 있는 기수가 보였다.

이미 속도를 줄이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다시 속도를 낸다고 해도 충돌을 면치 못할 것이고 앞에 있는 기수들이 자신이 속도를 내게끔 내버려 두지도 않을 것이 분명했다.

설상가상으로 그 틈을 노려 다른 기수들이 다시 양옆에서 자신을 향해 밀고 들어오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보아디케아. 아니 긴 막대기라도 있으면 지지대로 삼아 전차를 전복시켜 버리겠지만 기수에게 허용된 것은 푸지오 하나가 전부였다.

‘쯔. 네 기수를 탓하거라!’

테세우스는 별수 없다는 듯 혀를 찬 다음 허리춤에 있던 푸지오를 꺼내 들었다. 말의 속도는 여전히 줄이고 있는 상황이었다.

두두두두두

말발굽이 마치 자신과 전차의 뒷부분을 당장에라도 짓이겨 버릴 것처럼 다가온 순간, 테세우스는 푸지오를 휘둘러 말의 두 미간을 베어냈다. 깊게 베어내 목숨을 끊을 수도 있었지만 굳이 그럴 필요까진 느끼지 못했다.

따라서 테세우스는 푸지오로 미간의 가죽만 슬쩍 베어냈다. 말은 겁이 매우 많은 동물이기에 전마도 아닌 말을 대상으로는 충분하고도 남았다.

스아아앗

“히이이이잉!”

머리에 섬뜩한 고통을 느낀 두 마리의 말은 놀라 깜짝 놀라 양옆으로 비틀거리며 갑작스레 속도를 줄였다.

“으허허헉!”

당연히 그 뒤에 연결되어 있던 전차는 역동작에 걸려 뒷부분이 크게 들렸고 그 위에 있던 기수는 두려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허공에 날아올랐다.

하나 제법 노련한 기수인지 경황 중에도 고삐는 여전히 잡아채고 있었다. 다만 목숨을 부지할려면 어쩔 수 없이 붙잡아야 했을 테니 딱히 노련한 기수라고 붙잡고 있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쿠당탕탕탕!

좌우로 움직이며 경기장 안쪽 벽에 전차가 처박혀 바퀴가 완전히 부서져 버렸다. 그 움직임에 휘말리지 않으려고 주변의 전차들이 멀찌감치 떨어졌음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 여파로 테세우스를 향해 다가오던 기수들도 화들짝 놀라 분분히 멀어졌다.

하나 테세우스는 전차의 흔들리는 궤적을 계산하며 계속해서 아무렇지 않게 전차를 몰았다.

두두두두

그리곤 다시 전방을 바라봤다. 두 세대의 전차만 지나갈 수 있는 길이 정말 얼마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테세우스는 급히 다시 채찍질을 가했다.

다른 전차들이 분분히 흩어진 이때 질주하여 공간을 확보해야 했다. 아직 한 바퀴도 돌지 못한 상황에서 전차를 잃어버린다면 이번 경기에서 승리하는 건 결코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한 바퀴가 다 뭔가? 이제 막 출발선을 떠난 시점이 아닌가? 반의반도 달리지 못했다.

“차! 차!”

속도를 줄이던 테세우스의 말은 다시금 경기장을 박차고 질주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기수들이 테세우스를 견제하려고 짓쳐들었으나 이미 타이밍을 놓친 상황이었기에 한 대의 전차만이 테세우스의 옆에 따라 붙을 수 있었다.

두두두두

테세우스 옆에 붙은 기수는 말에게 휘둘러야 하는 채찍을 테세우스를 향해 휘둘렀다.

짜아아악

찢어지는 소음과 함께 채찍이 날아오는 것을 확인한 테세우스는 손으로 그것을 잡아채려다가 흠칫 놀라며 급히 몸을 숙여 채찍을 피했다.

일반적인 채찍이 아니었다. 채찍을 손을 잡아채려고 했다가는 채찍 사이사이에 박힌 철가시에 의해 손이 갈가리 찢어졌거나 손가락을 잃어버릴 수도 있었다. 누차 말했지만 테세우스의 육체 역시 무슨 강철로 이뤄진 것이 아니기에 검에 찔리면 살이 찢기고 철퇴에 맞으면 뼈가 바스러진다.

그제야 이들이 무기를 전차에 숨겨두었음을 알아차렸다. 말에게 저런 채찍을 휘둘렀다면 어찌 말이 무사할 수 있었을까? 그러니 자신을 공격하려 꺼낸 채찍이라고 봐야했다. 명예롭지 못한 행동이고 그것을 확인한 관중도 있을 것이다.

하나 자신을 죽이기만 하면 모든 것이 무마될 테니 관중의 시선따위 신경 쓸 게 다 뭐랴?

테세우스는 서늘한 눈빛으로 빗나간 채찍을 거두어들이는 기수를 바라봤다. 그런 테세우스를 비웃던 기수는 회수한 채찍을 다시 테세우스에게 날렸다.

부우우웅

이에 다시 허공을 찢는 섬뜩한 파공음이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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