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마 무신의 기억-190화 (190/298)

# 190

190. 달려라! 내 아우레우스를 위해!

190.

“저! 저! 저!!”

데메트리우스와 함께 경기를 지켜보던 자가 당황스러움과 분노 섞인 표정으로 소리쳤다. 테세우스의 활약을 매우 못마땅해하는 표정으로 보였다.

하나 정작 데메트리우스는 크라수스 등이 앉아있는 저편의 상석을 힐끗 바라봤을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에 데메트리우스에게 잘 보이고 싶은 로마인이 입을 열었다.

“벌써 6명이나 당했습니다. 뛰어나다고 하더니 고작 한 놈에게 모두 당해버리다니! 에잉!”

“글쎄요. 벌써 죽으면 섭섭하지요. 내가 그를 위해 준비한 이벤트가 아직도 많이 남아있는데 벌써 죽으면 곤란합니다. 윗분들도 곤란할 겁니다. 저자가 뛰어난 자일수록 나름 면목도 설 것이니 놈이 이 정도는 날뛰어줘야 계산에 맞지요. 암! 그래도 사자를 죽인 소년이었는데 이 정도는 해줘야지요.”

데메트리우스가 언급한 그 윗분들이란 바로 메텔루스 가문의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리라.

태연하다 못해 미미한 미소까지 짓는 데메트리우스의 모습에 할 말을 잃은 사내는 저도 모르게 짧은 반문을 던질 뿐이었다.

“예?”

그러자 주변에서 포도주를 홀짝거리며 마시고 있던 바티아투스가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입을 열었다.

“안심하시지요. 놈이 얼마나 날뛰던지 간에 결단코 살아남지 못할 것이니······. 그 어떤 영웅도 오늘의 전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을 겁니다. 뭐 그 전에 저자가 경기를 포기한다면 또 모르겠군요.”

데메트리우스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말을 이었다.

“경기를 포기? 하하하. 그건 생각해보지 못했군. 하나 놈은 결코 경기를 포기하지 않을 거요.”

그러자 바티아투스가 다시 말했다.

“흐흐흐. 그럼 더 볼 것도 없이 죽겠지요. 헤르쿨레스라고 해도 살아남기 어려운 전장입니다.”

“헤르쿨레스? 그것 참 재미있군.”

데메트리우스는 예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점성가 베루스가 마르스와 헤르쿨레스의 가호를 받는 사내라고 했던가? 하나 저 헤르쿨레스도 살아남기 어려운 전장이라는데 어디 이번에도 살아남을 수 있는지 확인해보도록 하지.

데메트리우스는 진한 미소를 지으며 과일 그릇을 들고 있던 여노예의 탐스러운 엉덩이를 움켜줬다.

“꺄악!”

과일 그릇을 들고 있던 여노예가 행여라도 과일을 쏟을까 몸을 낮추자 데메트리우스는 이번에는 여노예의 젖가슴을 거칠게 빨면서 다가올 달콤함을 음미했다.

예전에는 어찌 운 좋게 살아남았으나 이번에는 처참하게 내 아래에서 죽임을 당하게 되리라. 살육이 가져다줄 즐거움에 데메트리우스는 아랫도리가 뻣뻣하게 굳어오는 것을 느꼈다.

*

삶은 수많은 선택의 연속이다.

선택의 기준은 다양하지만 가장 크게 선악이 그 기준이 된다. 그리고 거의 모두가 선을 택하길 원한다.

하나 현상세계에서 일어나는 선택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지 않은가? 선악을 어찌 분류하는가는 차치하더라도 본인이 선이라 규정한 것조차 무시하고 악을 택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할까?

선택은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어떤 모호한 것들의 이상이 아니라 본인의 삶을 규정하는 강력한 매개체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선택을 할 때 선악의 기준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내게 이득이 된다면 그것이 악이라 해도 택하고 내게 손해가 되고 나아가 어떤 희생까지 해야 한다면 선이라고 해도 택하지 않는다. 애초에 선악이란 기준을 명확하게 두지도 않는다. 그것을 명확하게 두면 둘수록 더 많이 망설일 수밖에 없게 되고 어차피 자신은 그런 것에 관심도 없으니까.

그런 거다.

그러니 저들이 법을 왜 지키지 않는지, 규율을 왜 따르지 않는지 기이하게 여기거나 분노할 것도 없다. 그냥 그런 세상이다.

법을 어기더라도, 혹 살인을 저지르더라도 걸리지 않고 이득을 볼 수 있으면 현명한 선택인 자들에게 왜 규율을 지키지 않냐고 목소리를 높여봐야 아무 의미도 없다.

저들은 스스로의 선택으로 자신의 삶을 규정했다. 그러니 그걸 누구라고 바꿀 수 있으랴? 자비 역시 자비를 원하는 자에게 임하는 법이다. 마찬가지로 탐욕을 원하는 자에게 탐욕이, 살인을 원하는 자에게는 살인이 임할 뿐이다.

키르쿠스 막시무스에는 열광하는 관중들의 환호 아래 전차들이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그 열기를 더욱 과열시키고 있었다. 좁은길을 벗어나 넓은길을 달리던 전차들은 한 전차를 전복시키기 위해 계속해서 밀려 들었지만 그 전차의 주인은 매우 노련하게 가속하고 감속하여 도리어 저를 향해 짓쳐 들던 두 대의 전차를 서로 부딪치게 만들어 파괴시켰다.

서로 강하게 부딪혀 바퀴 한쪽을 나란히 잃어버린 두 대의 전차는 한쪽의 균형이 급격하게 무너지자 빠르게 달리던 속도로 인해 완전히 전복되었다.

콰과과광! 콰직!

전차는 회전하며 허공을 날았고 그 안에 타고 있던 기수들은 강하게 회전하는 전차의 잔해물에 목이나 배가 찍혀 피를 다시 경기장에 피를 흥건하게 흩뿌렸다. 관중들은 그 모습에 더욱 광란하며 고함을 터트렸다.

“우아아아아아!”

“죽여! 더 죽여!!”

자비? 적어도 이 자리에 모인 이들 가운데 자비를 원하는 자는 안타깝게도 아무도 없었다. 부러진 허연 뼈가 붉게 물든 살점과 함께 바닥에 철푸덕 떨어졌다. 이리저리 찍혀서 형태를 알아보기 어려웠지만 아마도 그건 누군가의 다리로 보였다. 이젠 뼈와 살 무더기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두두두두!

노면의 불량함이 전차의 바퀴를 타고 온몸을 진동시켰다. 채찍을 들고 말을 독려하던 테세우스는 서늘한 눈빛으로 곧 다가올 곡선길을 확인했다. 왼쪽으로 꺽인 길 양옆으로는 한눈에 보기에도 무시무시해 보이는 쇠로된 장침이 빼곡이 박혀 있었다.

코너링을 돌던 전차가 주행로를 자칫 이탈하기라도 하면 말과 전차가 그대로 길게 삐져나온 쇠못에 박혀 처참한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게다가 그 폭이 넓지도 않았다. 전차 세 대가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폭이었으니 혼자 이 길을 지나더라도 긴장하지 않는다면 말과 전차와 함께 쇠못에 박혀 경기장에 박제되고 말 것이다.

아니 숙련된 기수라고 해도 모든 커브길을 정해진 길로만 돌 수는 없는 노릇이다. 테세우스는 다가오는 죽음의 커브길을 심유한 눈빛으로 바라본 뒤, 앞뒤로 포진하고 있는 전차들을 빠르게 확인했다.

8대는 전부 테세우스 자신에 의해 파괴되었고 기수들 역시 살아남은 자가 없었으니 자신을 제외하고 달리는 전차의 수는 이제 11대, 그러니 총 12대의 전차가 이곳 키르쿠스 막시무스의 대지를 달리고 있었다. 자신의 앞에 4대, 자신의 뒤로 다시 4대, 그리고 양옆으로 3대가 달리는 상황이었다. 전차의 대열에서 테세우스가 위치한 지점은 중간 열 좌측 끝이라 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대로 커브길에 진입한다면 길게 삐져나온 쇠못에 전차를 이끄는 말의 머리가 참혹하게 갈려버릴 것이다. 단순히 그뿐이면 그나마 다행이겠지만 그뿐일 리가 없지 않은가?

“와아아아아!”

미친 듯이 울부짖는 관객의 고함이 테세우스의 귓가도 먹먹하게 만들었다. 그 정도로 열광의 도가니였다. 기수가 위험에 처하면 처할수록 관중들은 더욱더 열광했다. 곧 일어날 피의 향연을 기대한다는 듯이 말이다.

짜악!

“차! 차!”

테세우스는 채찍으로 말을 엉덩이를 후려치며 말을 더욱 가속 시켰다. 말들이 속도를 내자 테세우스의 전차는 우측에 붙어있는 말들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었다. 그 모습에 우측에 있던 자가 테세우스에게 채찍을 휘두르며 뭐라고 욕설을 퍼부었다.

그 언어는 라틴어가 아니었는데 저 멀리 파르티아 사람들이 쓰는 언어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얼핏 보니 복장도 그 지역 사람처럼 보였다. 하나 현재로서는 알 수 없었고 알 필요도 없었다.

테세우스는 몸을 젖혀 놈의 채찍을 가뿐하게 피해낸 다음 역시 놈에게 채찍을 휘둘렀다. 그러나 날아가는 궤적을 보니 결코 채찍을 휘두른 기수를 향해 날아가는 것이 아니었다. 테세우스가 채찍 하나 제대로 못 휘두를 위인이 아니라는 점을 생각하면 기이한 일이었다.

하나 그 이유는 바로 밝혀졌다.

촤라라락

테세우스의 채찍은 달리던 말의 안쪽 오른 뒷다리를 휘감았다. 어지간한 힘이 아니고서야 그 즉시 말이 달리는 대로 끌려가야 정상이지만 지금 채찍 끝을 잡은 자는 다름이 아니라 바로 테세우스였다.

“히이이이잉!”

테세우스는 채찍을 잡아당겼고 말은 그대로 거센 울음소리와 함께 달리던 속도 그대로 오른쪽으로 넘어질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오른쪽에서 달리던 다른 말과 전차 역시 순식간에 전복되었다.

콰아아아아앙!

“으아아아악!”

전혀 속도를 줄이지 못한 상태에서 넘어졌고 전복되었으니 이들은 죽음의 수레바퀴가 되어 오른쪽 사선 뒤로 구르고 또 굴렀다.

“어어어어!!”

“씨.. 씨바아아알!!”

그 여파로 뒤에서 달려오던 두 대의 전차가 휘말려 같이 굴렀다. 무려 세 대의 전차와 여섯 마리 말이 처참한 모습으로 대경기장 한편에 처박혔으니 그 위에 타고 있던 기수들의 생사야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와아아아아아!”

“미쳤다! 와!!!”

“달려! 더 죽여버려!”

“우아아아아아!”

“우워워. 방금 봤냐? 저 새끼 물건인데? 저놈 대체 누구야?”

“병신아! 지금껏 그것도 몰랐냐? 저놈이 바로 테세우스 아니냐?”

“오! 그래? 테세우스! 씨발 놈아! 더 달려라!”

“더 달려!”

“으아아아아 저 미친 새끼가 내 돈을 저 새끼들과 같이 갈아버렸어! 젠자아아아아앙!”

“으하하하하! 달려! 달려라!”

“크하하! 좋았어! 테세우스!! 내 아우레우스(금화)를 위해! 더 달려!!”

관중의 함성과 더불어 간간이 테세우스의 이름이 울려 퍼졌다. 20명의 기수 중 11명에 이르는 기수를 홀로 모조리 죽여버렸으니 테세우스의 이름은 들어봤어도 누가 테세우스인지 모르던 이들에게 자신의 모습과 이름을 각인시키기에 충분했다.

테세우스는 전차가 전복되는 순간에도 냉정함을 잃지 않고 오히려 말을 오른쪽으로 질주해 자신이 전복시킨 전차가 있던 지점을 차지했다.

희생된 말이 불쌍하느니 이딴 감정은 지금 끼어들 자리가 아니었다. 백번 양보해 그런 마음을 가질 여유가 있더라도 자신의 말이 먼저였다. 제 말이 머리부터 몸통까지 갈려 나가게 생겼는데 자신을 죽이려던 기수가 이끌던 말의 생사를 고려해서 대체 어디에 쓴단 말인가?

커브길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 다시 전차의 진형을 확인해보니 자신의 앞으로 4대, 옆으로 2대, 다시 뒤에 2대가 남은 상황이었다.

주변을 살피던 테세우스는 뒤를 힐끗 바라보고 고삐를 잡아당겨 말의 속도를 감속시켰다. 이에 테세우스는 양옆에서 달리던 전차들과 뒤에서 달려오던 전차들 사이에 위치하게 되었다.

이에 기수들은 긴장한 눈빛으로 테세우스를 주시했다. 테세우스를 경시하는 기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왜 아니겠는가? 자신을 죽이려는 19명의 틈 사이에서 도리어 11명의 기수를 죽인 사나운 놈인데 말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제놈도 별 수가 없으리라.

앞에서 달리던 네 대의 전차는 다투지 않고 차례차례 신중하게 커브길을 통과하기 시작했다. 매우 위험한 길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노련하게 쇠못이 가득한 길을 빠르게 빠져나갔다. 테세우스의 전방에서 달리던 두 대의 전차 역시 테세우스가 감속한 순간 빠르게 치고나가며 커브길에 접어들었다.

후방에서 달리던 두 대의 전차는 테세우스의 뒤를 바짝 쫓았지만 테세우스의 양옆으로 치고 올라오지는 않았다. 그런식으로 테세우스를 도모하기엔 상황이 촉박했고 테세우스를 가운데두고 이 위험천만한 길을 지나간다면 외려 테세우스의 방패벽이 될 뿐이다. 고의든 실수든 커브길에서 좌로든 우로든 밀치면 피를 보는 것은 반드시 자신들이 될 테니 말이다.

이에 테세우스는 별다른 견제를 받지 않고 커브길에 접어들었다. 전차를 모는 실력이 미숙하다면 양옆에 박힌 쇠못에 피와 살점을 흩뿌리겠지만 지금과 같은 전차를 몰지 않았을 뿐이지 마차를 몰았던 기억(항우나 리처드)도 있는 테세우스는 이미 노련한 기술을 가진 기수나 다름없었다.

촤아아아악

말이 왼쪽으로 방향을 틀자 전차는 원심력에 의해 오른쪽으로 벗어날 것처럼 요동쳤으나 테세우스는 완벽하게 제어하여 쇠못길을 빠르게 벗어났다.

“히이이이잉!”

하나 언제나 그렇듯 예상치 못한 일은 발생하는 법이다.

앞서 간 이들이 쇠질려를 바닥에 깔아놓았고 그것을 밟은 테세우스의 말들이 놀라 펄쩍 뛰었다. 물론 말들이 쇠질려를 밟기 전에 확인하긴 했으나 커브길을 돌아나오느라 시야가 가려졌기에 테세우스가 발견했을 때는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이에 테세우스의 전차는 좌우로 미친 듯이 요동쳤는데 금세라도 양옆에 촘촘하고 길게 늘어진 쇠못에 당장에라도 찔릴 것처럼 위태롭게 보였다.

그뿐이랴? 뒤편에서 비교적 천천히 진입하던 기수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속도를 줄이며 들고 있던 단창을 테세우스의 전차 바퀴에 던졌다. 테세우스의 전차가 워낙 급격하게 요동치고 있었기에 저들이 던진 것 중 하나의 단창은 운좋게 바닥에 꽂혔지만 하나의 단창은 결국 왼쪽 바퀴에 틀어박혀 바퀴살을 완전히 부러뜨렸다.

콰지지직!

언제고 굳건할 것 같던 테세우스의 전차가 반파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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