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마 무신의 기억-196화 (196/298)

# 196

196. 일득일실(一得一失).

196. 일득일실(一得一失).

데메트리우스는 사색이 된 표정으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런 미친!”

바티아투스 등의 준비가 미흡했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쯤은 데메트리우스 역시 모르지 않았다. 지금의 광경을 보고 어찌 준비가 미흡했기 때문에 테세우스가 살아남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테세우스가 아니라 그 누구도 승리할 수 없는 경기였다. 바티아투스가 헤르쿨레스라고 해도 살아남을 수 없다고 호언장담한 것이 결코 허풍이 아니라는 소리였다.

그런데 놈은 이 모든 역경과 난관을 격파하고 승리와 그에 따른 영광을 쟁취해내고야 말았다.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결과였고 이는 데메트리우스라고 다를 게 없었다.

데메트리우스는 테세우스가 대검을 버리고 유유히 경기장을 걸어가는 모습을 보며 속으로 끝없이 외쳤다. 놈을 죽이라고! 지금이라도 놈을 죽이라고! 어디 그렇게 되뇌는 것이 데메트리우스 한 사람뿐이었으랴?

자신들 옆으로 지나가는 테세우스를 바라보는 검투사들의 심정 역시 데메트리우스와 다르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테세우스를 죽이면 그가 쟁취한 모든 영광을 얻기는 어려워도 그 부스러기라도 얻을 수 있는데 왜 죽이고 싶지 않았을까?

하나 수중에 있던 무기마저 버리고 결승점을 향하는 테세우스의 대담함에 겁을 집어먹은 검투사들은 고양이를 눈앞에서 마주한 쥐처럼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아닌 말로 테세우스가 지금껏 뛰어난 무기가 있어서 자신들을 쳐죽인 건 아니지 않은가? 심지어 이 자는 무시무시한 디오클레스마저 홀로, 그것도 상처 하나 없이 죽여버린 괴물이다.

맨몸으로 맹수와 싸워 승리하면 그 승리가 더욱 값지다는 것을 모르는 검투사도 있던가? 하나 목숨이 두 개라고 해도 운이 따르지 않으면 목숨만 잃을 뿐이다. 지금의 경우는 더했다.

테세우스 이 자는 맨몸으로 사자의 아가리를 찢어 죽였고 변변찮은 무구도 갖추지 않고 수많은 검투사를 찢어 죽인 디오클레스와 싸워 승리한 장본인이었다. 이런 자를 죽이면 당연히 그 승리야 값지겠지만 대체 무슨 수로 죽인단 말인가?

테세우스는 대담한 태도를 취함으로 저들의 남아있던 일말의 투지마저 모조리 끊어냄과 동시에 아예 쐐기를 박아버렸다. 검투사들에게 생각할 여유를 줌으로 감정이 아니라 이성적으로 판단할 기회를 준 셈이기도 했다.

상황이 불리하고 죽을 것이 뻔하다고 해서 자신을 죽이려는 자에게 대항도 하지 않고 죽을 자들이 아니었으니까. 마찬가지로 아무 의미도 없는 죽음을 택할 정도로 어리석은 자들도 아니었다.

‘달려들면 죽는다.’ 결국 이것이 검투사들이 내린 판단이었고 명백한 사실이기도 했다. 테세우스는 능히 이곳의 모든 검투사를 죽일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불필요한 일이었다. 키르쿠스 막시무스에서 얻고자 하던 목표를 초과달성한 셈이었으니 말이다. 저들 모두를 도륙한다면 분명 오늘의 영광은 더욱 찬란하게 빛나겠지만 두려움은 빛나는 영광만큼 더 짙어진다. 그런 면에서 테세우스는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초과달성했기에 따르는 부작용이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기 마련이다. 이것은 테세우스뿐만 아니라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한 데메트리우스에게도 적용되었다.

멍하니 온갖 환호를 한 몸에 받으며 결승점으로 이동하는 테세우스를 바라보고 있는 그에게 부유하게 차려입은 한 사람이 다가왔다. 뒤늦게 그를 발견한 데메트리우스는 흠칫 놀라며 굳은 표정으로 사내를 바라봤다.

“메텔루스 가문에는 피해가 가지 않게.. 끄. 음?”

말을 꺼내던 데메트리우스는 매우 의아한 표정으로 멈추자 데메트리우스 앞에 다가온 사내가 입을 열었다.

“저를 기억하시는가 보군요.”

사내의 말대로 데메트리우스는 그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메텔루스 가문에서 보낸 사람인줄 알았는데 현 상황에서 전혀 예측할 수 없던 인물이 자신을 찾아오자 데메트리우스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채 입을 열었다.

“어찌 잊을까? 왜 그대 주인께서 나를 조롱하고자 아퀼라, 그대를 보낸 것인가?”

“아시지 않습니까? 제 주인께서는 그런 일을 딱히 즐기는 분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괜한 후환을 남겨두실 분도 아니시지요.”

그 말에 데메트리우스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설마 지금 나를?”

아퀼라, 이 자는 크라수스의 노멘클라토르(교육받은 노예)였다. 테세우스를 후원하던 사람이 바로 크라수스였으니 차후에 일어날 분란을 처리하기 위해 사람을 보내 자신을 죽이려 한 것이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흠칫 놀라던 데메트리우스는 아퀼라의 목에 걸려있어야 할 명패를 어디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제 주인께서는 치밀하신 분이시지요. 이런 상황에 그렇게 하실 리도 없지만 그랬다면 저를 보낼 이유도 없으셨겠지요. 확실히 많이 당황하셨나 봅니다. 하긴 저 역시 저런 무지막지한 사내와 원한을 맺었다면 제정신을 유지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아퀼라는 경기장이 떠나가라 연호되고 있는 이름의 주인공을 힐끗 바라본 뒤 다시 데메트리우스를 바라봤다.

“명패······. 시민권을 얻은 건가?”

데메트리우스의 말에 아퀼라는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바라마지 않는 일이지만 안타깝게도 그게 아직은 아닙니다. 시민권을 얻으나 얻지 못하나 제가 하는 일은 크게 달라지지 않겠지만 말입니다.”

“그럼 어째서 명패를······. 으흠.”

말을 꺼내던 데메트리우스는 심호흡을 하며 제멋대로 날뛰는 감정과 생각을 가라앉혔다. 당황한 나머지 자신을 죽이려 왔냐고 묻기는 했지만 크라수스가 어찌 이런 백주대낮에 살인을 교사하겠는가? 죽여도 이런 식으로 죽일 자가 아니었다.

노예라면 걸어야 할 명패를 걸지 않은 채 자신을 찾아왔다는 소리는 세인들이 제 주인, 곧 크라수스와 자신과의 연관성을 의심할 여지를 차단하겠다는 뜻이었고 그럼에도 별 볼일 없는 노예가 아니라 크라수스를 아는 자들에게 어느 정도 얼굴이나 이름이 알려진 아퀼라를 자신에게 보냈다는 것은 진정성을 드러내기 위함임을 눈치챘다.

주어진 정보를 나름 종합한 데메트리우스는 의아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질문을 던졌다.

“나를 만나기를 원하시는 건가? 어째서?”

“이제 좀 진정하셨나 봅니다. 이리 전하라 하셨습니다. 후원은 이 경기를 끝으로 끊어질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곧 있을 재판의 결과가 매우 궁금하다고 하셨습니다.”

“재판?”

데메트리우스는 막막하여 앞이 보이지 않던 상황에 한줄기 서광을 발견한 것 같았다. 크라수스가 자신과 테세우스의 재판에 흥미를 느낄 까닭이 대체 뭐가 있을까? 흥미를 느꼈더라도 테세우스에게 사람을 보낼 일이지 자신은 아니었다. 그러니 이것이 뭘 뜻하겠는가? 데메트리우스는 급히 고개를 주억이며 아퀼라에게 말했다.

“오늘 밤 조용히 찾아뵙는다고 전해주게나!”

“그리 전하겠습니다. 그럼!”

아퀼라가 사라지자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바티아투스가 다가왔다.

“메.. 메텔루스 가문의 사람입니까?”

데메트리우스는 내심 그를 비웃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크라수스의 노멘클라토르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자가 무슨 야욕을 품는단 말인가? 제법 능력이 있기는 하지만 이것이 이자의 한계이리라. 하긴 카푸아 촌놈이 뭘 알겠는가?

그러나 데메트리우스는 달리 내색하지 않고 바티아투스에게 말했다. 아마도 그의 도움은 이제 필요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를 일이다.

“메텔루스 가문의 사람은 아니오.”

“그럼?”

그 말에 데메트리우스가 인상을 찌푸리며 바티아투스에게 말했다.

“내가 모든 일을 일일이 그대에게 고할 의무라도 있는 것이오?”

“아.. 아니. 제 말은!”

“쯔. 혹여라도 해서 하는 말인데 메텔루스 가문에 피해 보상을 요구하는 얼토당토않은 짓은 하지 말기를 바라오. 죽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말이오.”

“그... 그.. 그럼?”

데메트리우스의 말에 바티아투스는 굳은 안색으로 반문했다. 라니스타들의 피해를 자신이 책임질 이유는 없다. 그들 역시 이익을 보고 자원한 것이니 말이다.

하나 자신이 오늘 입은 피해는 대체 어디서 보상받는단 말인가? 이 일은 불가항력이었다. 대체 누가 저 괴물 같은 자를 검투경기로 죽일 수 있단 말인가? 데메트리우스 이 자 역시 그것을 느꼈기 때문에 테세우스를 죽이지 못한 일로 자신을 추궁하지 않은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이제 와 독박이라도 쓰란 말인가?

“내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소? 상인이 투자를 하면 손해를 보고 이득을 보기도 하오. 모두 자신의 선택에 따른 결과이지. 그런데 그걸 지금 나보고 보상이라도 하라는 말이오? 내 상황이 어떤지 몰라서?”

바티아투스는 입을 다물었다. 달리 생각해보니 자신은 재산이지만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데메트리우스는 목숨이 달린 문제였다. 데메트리우스는 그런 바티아투스를 못마땅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비록 키르쿠스 막시무스 이곳에서는 놈에게 패배했지만 아직 재판이 남아있소. 내가 재판에서 승소한다면 상황을 봐서 그때는 당신의 손해를 벌충해줄 수도 있을 것 같군. 나를 계속해서 도울 것인지 아니면 이쯤에서 손을 뗄 것인지는 당신이 알아서 하시오.”

바티아투스는 데메트리우스의 말에 담긴 일말의 자신감을 읽을 수 있었지만 주변에 들려오는 환호 소리에 마음을 굳혔다. 보아하니 데메트리우스 이자가 테세우스에게 누명을 씌운 것이 진실 같은데 시민들의 환호를 얻은 테세우스를 대체 무슨 수로 이긴단 말인가?

하나 데메트리우스가 재판에서 이길 수도 있으니 그때를 대비할 필요도 있었다. 물론 상황을 봐서라는 단서를 붙인 것을 봐선 보상을 해주지 않을 확률이 높지만 승소한다면 이곳 로마에서 데메트리우스의 영향력이 그만큼 강하다는 소리도 되니 말이다.

“저 같은 라니스타가 재판에 대해 뭘 알겠습니까? 다만 시키실 일이 있으면 호위병력을 통해 언제든 전달해주십시오.”

자신은 빠지겠으나 도움을 요청하면 대가를 받고 언제든 돕겠다는 뜻이었다. 그 말에 데메트리우스는 불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어차피 현 상황에서 이 자의 도움이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다. 그러니 대충 이 정도 관계로 정리하면 될 일이었다.

“그야 편할 대로 하시오. 앞으로의 일이 바쁠 듯하니 먼저 가보겠소.”

찬바람이 휑하니 느껴질 정도 몸을 돌려선 데메트리우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바티아투스는 얼굴을 미미하게 찌푸렸다. 로마, 이 빌어먹을 로마에는 능구렁이 같은 작자들이 너무 많았다. 자신 정도는 한입에 삼켜버릴 거대한 능구렁이들이 말이다.

씁쓸한 표정을 짓던 바티아투스는 자리에 풀썩 주저앉아 머릿속으로 손익을 계산하다가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뭐. 그래도 디오클레스 이 괴물 같은 놈이 사라졌으니 완전한 손해는 아닌 셈인가?”

타인의 손해는 곧 나의 이득이라는 이상한 계산법에 따른 생각이었다.

*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목욕을 통해 피와 땀을 모두 씻어낸 테세우스는 마련된 토가를 걸치고 연회장으로 향했다.

크라수스의 도움으로 인해 시민권과 신분 문제를 수월하게 해결한 뒤였기에 대경기장에 들어서기 전에 이미 테세우스는 로마의 시민권자이자 세르토리우스의 아들임이 공인된 상황이었다.

테세우스가 딱히 지쳤을 것 같지도 않으나 심신 양면으로 지친 상황이라고 해도 오늘의 연회는 로마에서의 영향력을 증대시킬 수 있는 상당히 중요한 기회였다. 영향력까지는 아니더라도 인맥을 구축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할 수 있었다. 당연히 이런 기회를 마다할 테세우스가 아니었다.

테세우스가 크림색 토가를 걸치고 연회장에 들어서자 그와 대화를 나누고 싶은 로마의 시민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었다.

오늘 연회의 주최자는 크라수스였으나 오늘 연회의 주인공은 바로 테세우스였다. 테세우스는 그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크라수스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는 크라수스 주변으로 당금 로마의 권력을 주름잡고 있는 자들이 대거 포진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들과 딱히 적대할 생각은 없었다.

“오늘의 영웅이 드디어 나타나셨군요. 가히 놀라운 실력이었습니다.”

크라수스는 예의 정중한 태도로 자신을 맞이했지만 테세우스는 날카로운 감각으로 그가 전과 달리 자신을 크게 경계하고 있음을 눈치챘다. 하나 이미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다. 게다가 그가 경계한다고 꼭 그와 적대관계를 맺을 이유가 없었다.

“덕분에 승리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하하하! 내가 한 일이 무엇이 있다고! 내 이럴 것이 아니지. 오늘 테세우스 당신을 만나고자 하는 이들은 참 많겠지만 콘술에 비하는 위명을 가진 사람은 없을 것이오. 인사하시오. 로마의 콘술, 데시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님과 마메르코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님이오.”

놀랍게도 이 자리에는 BC 77년의 두 콘술, 브루투스와 레피두스도 자리하고 있었다. 오늘 테세우스가 치른 경기가 로마에 얼마나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는지 가늠할 수 있는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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