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
197. 일득일실(一得一失).
197.
로마는 기원전 2세기경 카르타고의 한니발과 마케도니아의 필립 5세(용맹하여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비교되던 왕)를 격파, 진정한 지중해의 패자로 자리매김하면서 전성기를 맞이했다. 로마 사회에 와인 문화가 제대로 정착하기 시작한 것 역시 기원전 2세기경부터다.
지중해의 왕성한 무역은 물론 수많은 생산지를 손에 넣은 로마는 당연히 풍요로운 와인밭도 손에 넣었다.
기원전 2세기 전까지 로마인의 주식은 빵이 아니라 죽이었다. 하나 기원전 2세기를 지나며 포카치아와 같은 딱딱한 빵이 주식으로 변화했고 이에 곁들여 마실 음료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 시기 와인보다 뛰어난 음료를 찾기 어려운 데다가 양질의 와인생산지까지 손에 넣은 로마인의 선택이야 더 볼 것도 없었다.
그리스 시대에는 식사와 별도로 와인을 즐기는 문화였지만 로마 시대에 들어와 식사와 함께 즐기는 테이블와인의 개념이 정착되었다. 기호품이 아니라 필수품이 되었다는 소리다. 그러면서 와인을 마시는 것은 물론 신에게 바치는 것조차 금지되었던 여인들도 자유롭게 마실 수 있게 되었다.
이렇듯 로마인의 식탁에도 빠지지 않는 와인이 어찌 연회 중에 빠질 수 있으랴? 당연히 연회장 곳곳에 달콤한 포도주 향이 가득 흘러넘쳤다. 코끝을 은은하게 때로는 강하게 자극하는 주향을 느끼며 테세우스는 정중하게 입을 열었다.
“위대한 로마의 콘술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퀸투스 세르토리우스 테세우스라고 합니다.”
그러자 레피두스가 입을 열었다.
“마메르코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요. 오늘의 경기, 참으로 인상 깊게 보았소. 신화 속 헤르쿨레스를 떠오르게 만들더군.”
레피두스는 그러면서 손짓으로 노예를 불렀다. 노예가 급히 다가오자 레피두스는 간단하게 명령했다.
“심풀룸(simpulum)과 시아투스(cyatus)를 가져와라.”
자신의 명령을 이행하러 노예가 사라졌으나 레피두스는 노예에겐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다시 테세우스에게 말을 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명령을 내릴 때조차 시선은 테세우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히스파니아의 상황은 어떻소?”
“히스파니아 말입니까?”
테세우스는 신변잡기나 이야기할 줄 알았지 여기서 이런 이야기를 꺼낼 줄 예상하지 못했다. 다시 말해 콘술 포스테리오르, 레피두스는 상당히 직설적인 성격을 가진 남자로 보였다. 그러자 콘술 프라이오르, 브루투스가 입을 열었다.
“콘술의 뜻은 알겠지만 너무 이른 것같은 느낌이 있습니다.”
브루투스가 완연한 정치가의 모습을 지녔다면 레피두스는 강경한 군인의 모습을 연상케 만들었다. 실제로 그는 동맹시 전쟁(BC91-88) 당시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피우스 지휘 아래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장군이었다.
동맹시 전쟁 가운데 여러번 승리를 거두었지만 주목할만한 전공은 베누시아 습격중 마르시 장군, 퀸투스 포파이디우스 시로를 죽인 일이라 할 수 있었다.
언급한 바 있지만 동맹시 전쟁은 기원전 91년 호민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가 제출한 ‘전 이탈리아에 로마시민권 확대’ 법안을 귀족계급은 물론 시민권이 있는 무산자계급까지 극렬하게 반대하자 피첸토족, 베스티노족, 마루키노족, 파엘리노족, 마르시족, 프렌타노족등 8개 부족이 동맹시 반란을 주도하면서 시작되었다.(독자적인 수도와 화폐를 만들고 나라 이름을 이탈리아라고 명명)
물론 로마가 승리했고 전쟁의 원인 되었던 시민권 문제도 당시 집정관 루키우스 카이사르(시저의 백부)가 전 이탈리아로 확대하여 완전한 반도 통일을 구축한다.
어쨌든 메텔루스 피우스의 옛 부하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 레피두스였고 술라에게 어린 카이사르 문제를 중재할 정도로 술라파 내에서 영향력을 가진 사내이기도 했다.
그런 배경을 가진 사내다보니 테세우스에게 충분히 악감정을 가질만했으나 지금 테세우스를 대하는 모습을 보니 그런 기색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직설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보이니 딱히 감정을 속이고 테세우스를 대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이르다니? 히스파니아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장본인이 이 자리에 참석했는데 듣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소이까? 시간은 지금도 흐르고 있소. 모름지기 소식이라는 것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가치가 덜해지는 법이요.”
‘음?’
테세우스는 그의 말에서 왠지 모르게 자신을 향한 호감을 느낄 수 있었다. 테세우스가 그간 로마에 있으면서 콘술에 대한 기본사항도 파악하지 못했을 사람이 아니니 레피두스가 어떤 배경을 지녔는지 정도는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따라서 눈앞의 브루투스처럼 적의나 품지 않으면 다행일 것이라 여겼는데 외려 호감이라니? 의아한 감정이 드는 것이 사실이었다.
하나 자신에게 호감을 품은 일이 대체 무슨 문제가 되랴? 따라서 테세우스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메텔루스 가문과 연계를 맺은 브루투스로서는 테세우스와 친하게 지내려는 레피두스의 태도가 못마땅했지만 세인들의 이목이 집중된 이곳에서 집정관들끼리 반목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제 얼굴에 침을 뱉는 격이다. 더욱이 임기 하반기에 접어들어 권위가 약해지려는 시점이 아니던가? 이곳이 시시비비를 가리는 법정도 아니고 엄연히 축하연인 만큼 그는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이에 레피두스는 노예가 가져온 심풀룸으로 암포라에 담긴 와인을 떠서 시아투스에 담은 다음 테세우스에게 건넸다. 심풀룸은 포도주를 뜨는 국자였고 시아투스는 축배를 들 때 쓰는 잔이었다. 자신도 시아투스에 포도주를 담은 다음 테세우스에게 말했다.
“꽤 많은 전장을 전전했지만 오늘과 같은 무용을 보여주는 사내는 지금껏 본 적이 없소이다. 세르토리우스, 그 자도 매우 용맹한 사내였지만 그 아들은 아비마저 뛰어넘었군.”
“감사합니다. 하지만 실로 과찬이십니다. 어찌 아버지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테세우스를 지그시 바라보던 레피두스는 아주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며 입을 열었다.
“하하하! 좋아. 좋아. 아주 좋군. 자! 오늘 테세우스가 얻은 영광에 축배를 들도록 합시다.”
그러자 크라수스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레피두스에게 말했다.
“실례지만 레피두스 님. 암포라에서 포도주만 뜨셨습니다.”
“음? 이런. 이런. 내가 큰 결례를 범할 뻔 했군. 축배가 아니라 오명을 뒤집어쓰게 할 뻔 했어.”
그러면서 레피두스가 손짓하자 노예가 물을 가져왔다.
포도주 원액에 물을 타서 마시는 것은 고대의 보편화된 현상으로 로마인들 역시 물과 포도주를 대개 5대4 정도로 희석해서 마셨다. 포도주 원액을 마시는 자는 점잖치 못한 사람으로 평가받았기에 오명을 뒤집어쓰게 할 뻔 했다는 말은 바로 그래서 나온 말이었다.
레피두스는 심풀룸으로 물을 떠서 테세우스의 시아투스 잔에 적당하게 부어주고자 다가온 뒤 속삭이듯 말했다. 은은하지만 제법 큰 음악이 연회장에 울려 퍼지고 있었기에 주변의 다른 사람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정도의 목소리였다. 게다가 레피두스는 저들에게서 등을 보이고 있는 상황이었다.
“자네 아버지의 이야기를 좀 들어보고 싶군.”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를 테세우스가 아니었다. 정말로 세르토리우스의 이야기가 궁금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눈앞의 사내는 직설적인 성격을 지닌 사내다. 주류 술라파인 이상 세르토리우스와 친하지도 않았을 텐데 죽은 세르토리우스의 행적을 알아서 뭐할까? 그렇다고 넉살이 좋아 이 소식 저 소식을 캐묻고 다니는 사내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결국 이는 테세우스 자신과 개인적으로 만남을 가지고 싶다는 뜻이리라. 물을 타지 않았던 것도 어쩌면 계산된 행동이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쳐갔다. 어쨌거나 거부할 이유가 없었던 테세우스는 눈을 마주하며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레피두스는 주변을 둘러보며 큰 목소리로 호탕하게 외쳤다.
“달리 생각해보니 콘술, 브루투스의 말대로 내가 너무 섣불리 말을 꺼낸 것 같군. 오늘은 축배를 드는 것으로 만족해야겠어! 자! 위대한 로마의 번영과 로마에서 위대한 전사가 탄생한 것을 축하하며 축배를 듭시다!”
그러자 연회에 참석한 로마인들이 여기저기 잔을 들며 레피두스의 행동에 화답해줬다.
다른 나라보다 느슨한 감이 있지만 로마 역시 엄연한 계급사회였다. 그것은 이곳 연회장에서도 확연하게 드러났다.
크라수스가 마련한 연회장에 키르쿠스 막시무스 경기장에 참석했던 20만에 달하는 로마시민 모두가 참석했을까?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물론 크라수스는 오늘 하루 로마 전체가 먹고 마시며 즐길 수 있도록 많은 비용을 지출했으나 테세우스가 참석한 이곳 연회장에 참석한 이들은 로마 사회의 상류층을 점거하고 있는 시민들이었다.
상류층들이 대거 모인 연회장에서도 여러 집단으로 나눠졌는데 크라수스와 콘술이 위치한 이곳은 그야말로 최상류층들이 모여있는 집단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었다. 바로 그런 이들이 테세우스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고 있었다.
범인이라면 이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살이 떨렸겠지만 테세우스가 누군가? 자의는 아니지만 무려 두 번의 왕위를 겪었던 사내다. 게다가 수만에 달하는 병사들을 호령했고 적을 무찌른 장본인이기도 했다. 그런 이가 이 정도 시선에 주눅이 들 리가 만무하지 않은가? 테세우스는 아무렇지 않게 레피두스가 따라준 포도주를 음미했다.
태연한 모습으로 포도주를 음미하는 테세우스를 유심히 주시하던 로마의 세네토르이자 여섯 거두 중 하나인 칼두스가 입을 열었다. 이 자리에는 크라수스와 여섯 명의 원로원 의원, 그리고 두 명의 집정관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로마 권력의 중추가 이 자리에 모두 모인 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나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집단이 또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비록 메텔루스 가문의 사람들은 거의 참석하지 않았으나 율리우스, 유니우스, 코르넬리우스 등을 비롯한 로마 유수의 가문의 상당수가 오늘 연회장에 함께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따라서 연회장의 귀족들은 모습을 드러낸 테세우스에게 잠시 관심을 두었을 뿐, 저마다 이익을 위해 자리를 오가며 막후교섭을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런 기회는 흔한 기회가 아니었다. 행여 직접적인 이득을 얻지 못하더라도 유력가들과 안면을 틀 수 있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이득을 얻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던 것이다.
그리고 연회를 주최한 크라수스는 오늘의 연회에서 이득을 본 모두에게 호의를 얻는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이것은 곧 영향력의 강화로 이어질 것이다. 크라수스가 공연히 재물을 허공에 뿌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소리였다.
“팔레르노산 와인은 언제나 일품이지요. 히스파니아에도 좋은 포도주가 많이 생산되는 것으로 아는데 맛본 적이 있소?”
테세우스는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아니요. 그럴 여유가 없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지금 맛본 팔레르노 와인과 비교해보고 싶습니다.”
“클클클. 비교해보고 싶다라······.”
칼두스가 슬쩍 웃음을 터트리자 테세우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물론 오늘 맛본 와인의 향취를 따라갈 음료는 없을 것으로 보이지만 말입니다.”
“그런가? 나 역시 참으로 인상깊게 봤네. 헤르쿨레스가 눈앞에 있다면 그런 모습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대단한 무용이더군.”
“과찬이십니다.”
향긋한 꿀을 바른 코르넷토, 거위의 간, 타오르미나에서 잡아온 숭어 위에 가지런히 놓인 송로버섯과 그물버섯은 그 향취를 더하고 있었고 막 따온 것처럼 싱싱한 온갖 종류의 과일은 연회장을 더욱 달콤하게 만들었다. 그뿐이랴? 노릿하게 구워진 암퇘지와 살찐 영계가 뽀얀 제 살을 탐스럽게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나 테세우스는 그 달콤함을 오롯이 누릴 수 없었다. 자신에게 말을 건네 두 명의 사내도 온전한 호의를 가진 사람들이라 볼 수 없었고 남은 사람들은 말조차 건네지 않고 냉랭한 눈으로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냉랭함의 화룡점정은 크라수스의 축객령 아닌 축객령으로 끝을 맺었다. 물론 크라수스는 매우 부드럽고 정중하게 말했으나 그 안에 담긴 차가움을 느끼지 못할 테세우스가 아니었다.
“그대를 위한 연회이니 오늘의 연회를 마음껏 즐기시지요.”
“예. 감사합니다.”
테세우스는 지금으로서는 예를 갖춰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뒤로 물러서며 테세우스는 절로 생각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
‘영원한 적도 친구도 없는 곳이라지만 너무 빠르군. 확실히······.’
생각했던 것보다 저들의 준비가 과했다. 어쨌든 승리해야 했으니 승리를 얻었지만 결국 과한 승리를 얻을 수밖에 없었고 그로 인해 저들의 경계를 너무 빨리 불러일으켰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 법이라더니 쯔. 그러나 별 수 없는 노릇이다. 얻은 것에 집중하는 수밖에.’
잃은 것에 집중해봐야 무슨 영화가 있으랴? 있는 것에, 오늘 얻은 것에 집중하는 게 보다 현명한 태도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