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
199. 승리할 수 없는 전투.
199. 승리할 수 없는 전투.
테세우스는 카피톨리누스 언덕 주변으로 솟은 작은 두 언덕 중 북쪽의 아륵스 언덕을 지나 베누스 빅트릭스(승리의 비너스) 신전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토가를 걸친 날카로운 눈빛을 가진 사내가 주변을 바라보고 있었다. 테세우스가 사내에게 다가가자 테세우스를 발견한 사내가 대뜸 입을 열었다.
“당신이 헤르쿨레스로 여겨지는 테세우스가 틀림이 없겠군.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라고 하오.”
테세우스는 정중하게 그를 맞이하며 입을 열었다.
“이렇게 만나뵐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키케로는 테세우스의 응대에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테세우스를 고쳐봤다.
“허. 이거 예상외로군요.”
“무엇이 말입니까?”
“검투사의 악몽이라 불리는 디오클레스를 단신으로 처치하고 수백의 검투사를 물리친 사람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광경이 있지 않겠소? 더욱이 그 전에는 메텔루스 피우스를 패퇴시키고 살해하기까지 했으며 히스파니아의 켈타이족에게 공포로 군림하는 사내의 모습을 내가 어떤 식으로 연상했을 것 같소?”
“확인되지 않은 정보는 죽은 정보에 불과하지요.”
테세우스가 그리 말하자 키케로는 눈을 빛내며 테세우스에게 말했다.
“적군이 아니라 아군이 잘못 쏜 화살로 인해 죽을 수도 있소이다. 그리 간단히 무시할 계제는 아니라오.”
테세우스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모습을 보이자 그를 유심히 지켜보던 키케로가 다시 말했다.
“테세우스, 당신을 만나보고 싶긴 했지만 이렇게 로마에 돌아오자마자 당신을 만나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소.”
아닌 말이 아니라 키케로는 어제 아침에 로마에 돌아왔다. 그리고 오늘 아침, 테세우스가 보낸 사람이 자신을 찾아왔다. 당연히 키케로는 긴 여행으로 쌓인 여독을 푸느라 아무런 발자취도 남기지 않은 상황이었다. 발자취를 남기고자 해도 하루도 되지 않은 시간동안 뭘 할 수 있었을까?
혹 키케로가 유명인이니 항구에서 일하는 자들이 알아봤을 거라 판단했다면 오판이다. 키케로의 이름은 아주 잠깐 이슈가 되었을 뿐이다. 더 자극적이고 흥미로운 이슈가 넘쳐나는 로마에서 키케로의 이름은 로마인들의 머릿속에서 일찌감치 사라진지 오래였다. 다시 말해 테세우스, 그가 자신을 찾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면 그토록 빨리 자신을 찾아왔을 리 만무했다.
“태양처럼 빛나는 명성의 주인공께서 나를 만나뵙고자 하신 연유를 듣고 싶소만?”
로마인들에게도 잊혀진 자신을 찾을 이유는 한 가지뿐이다. 여독을 푸느라 로마의 정황이나 테세우스에 대해 알아볼 시간이 사실상 전무했지만 키케로는 주어진 정황만으로 일이 어떤 식으로 흘러가고 있는지 유추할 능력이 충분히 있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키케로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테세우스에게 질문을 던졌다. 테세우스는 키케로의 두눈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 말에 키케로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나를 찾은 사람이니 내가 왜 로마를 떠나게 되었는지 정도는 알고 있을거요. 그리고 알다시피 나는 어제 겨우 로마땅을 다시 밟았소이다.”
키케로가 술라의 마수를 피해 도망쳤다가 술라가 죽은 이후에 돌아온 것을 테세우스가 어찌 모르겠는가?
테세우스가 고개를 주억이자 키케로가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이어질 내 대답도 알 것이라 여겨지오만?”
“나를 돕는다면 명성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러자 키케로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테세우스에게 말했다.
“생사의 위협을 여러번 겪다보니 명성이라는 것도 부질없더군. 그나마 전에는 나를 죽이려던 자가 한 명이었으니 어떻게 피할 수나 있었지. 이번 일은 한 명이 문제가 아니오.”
테세우스가 침묵을 지키자 키케로가 다시 말했다.
“내가 당신을 만나면 묻고 싶은 것이 하나 있었는데 대답해주시겠소?”
“말씀해보시지요.”
“당신이 죽인 메텔루스 피우스와 폼페이우스가 친족관계로 얽혀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소?”
“음?”
테세우스가 전혀 몰랐다는 듯 눈을 살짝 치켜뜨자 키케로는 실소를 흘리며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겠군.”
“친족관계라니 그게 무슨?”
“히스파니아에서 생활했다고 했으니 그의 아내되는 사람은 생각할 필요도 여유도 없을 테지. 충분히 이해하오. 정확히 어떤 연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을 보니 분노에 휩싸여 무분별하게 메텔루스 피우스를 죽인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겠구려. 뭐 그게 아니더라도 그를 죽인 일에 대해 가타부타 왈가불가할 생각은 없소. 이미 벌어진 일이니 말이오.”
‘친족관계라······. 폼페이우스의 아내가 메텔루스 가문의 사람이었나?’
“더 자세하게 들어보고 싶습니다.”
“당신이 추측한 사실이 맞소. 그녀의 이름은 무키아 테르티아. 그녀의 아버지는 콘술이었던 퀸투스 무키우스 스카에볼라 폰티펙스요. 그녀의 어머니는 리키니아 크라사로 그녀의 친부와 이혼하고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네포스와 결혼했지. 친부나 계부되는 자 모두 메텔루스 가문의 사람이라오.”
그녀의 친부 스카에볼라는 BC95년의 콘술이었고 그녀의 계부 네포스는 BC98년의 콘술이었다. 친부 스카에볼라는 82년 술라와 마리우스의 내전 중에 죽었지만 어쨌든 그녀는 메텔레스 가문의 유력한 계보를 이은 여인이었다.
술라는 폼페이우스의 충성심을 확보하기 위해 무키아 테르티아와 결혼을 성사시켰다. 물론 그 전에 자신의 딸 아이밀리아를 이혼시키고 폼페이우스도 이혼시키고 그와 결혼시켰으나 아이밀리아는 이혼 전 남편의 아이를 배고 있던 몸이라 1년을 채 넘기지 못하고 사망했다.
“폼페이우스와 무키아 사이에는 세 명의 자녀도 있다오.”
“음.”
“내가 이 이야기를 왜 거론하는지 알겠소? 메텔루스 가문은 말할 것도 없고 들어보니 크라수스도 당신에게 등을 돌린 것 같은데 이 다툼을 계속하게 되면 폼페이우스와도 척을 지게 된다는 말이오. 메텔루스 피우스가 득세하는 것을 원치 않았을 뿐이지 아내 친정의 힘이 무력화되는 건 그도 원하지 않을 테니 말이오.”
‘크라수스가 메텔루스 가문에 힘을 실어주지 않았던 이유 중 하나라고 할 수 있겠군.’
테세우스는 고개를 주억이다가 키케로에게 말했다.
“메텔루스 가문과 끝장을 볼 생각은 없습니다.”
유력 가문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공고히하기 위해 알음알음 연결된 경우가 태반이다. 메텔루스 가문과 같은 유력가문을 지우려고 한다면 연관된 유력가문을 같이 쓸어버려야 할 텐데 그건 곧 로마 귀족들 전부와 전쟁을 치르겠다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키케로가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 또한 같은 맥락이었다. 로스키우스 사건은 술라, 그것도 술라가 아니라 술라의 해방노예가 독단적으로 재산을 부풀리려다가 일어난 일이라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또 다르다.
메텔루스 가문, 크라수스, 폼페이우스까지 얽혀있는 이 일에 발을 잘못 담갔다가는 목숨도 목숨이지만 정계로 나가는 길이 영원히 막힐 수 있다. 독재자 술라에게 대항한 일도 금세 잊혀지는 것이 현실인데 명성을 얻으면 얼마나 얻겠고 그 명성이 길어야 얼마나 길게 이어지겠는가?
테세우스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말했다.
“내가 바로잡고 싶은 것은 한 가지, 로마에 정의를 세우는 일입니다.”
“정의를 세워? 하하하하!”
키케로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테세우스를 바라보다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다가 정색하며 말했다.
“크라수스보다 금력이 많소? 아니면 폼페이우스보다 군사가 많소? 그것도 아니면 로마의 세네토르들보다 권력이 강하길 하오?”
“천리길도 한걸음부터라는 말이 있습니다. 또한 로스키우스 사건과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술라가 아니라 크리소고누스에게 정의를 요구하는 일이었듯 데메트리우스에게 정의를 요구하면 될 일입니다.”
“허. 데메트리우스라······. 공교롭게도 둘 다 술라의 해방노예로군. 하나 로스키우스 사건과 이 일은 엄연히 다르오. 당신이 최근 로마에서 명성을 얻었다고는 하나 데메트리우스의 뒤를 봐주는 자들의 권세에 비하면 태양 앞의 달빛이나 다름없소. 무엇보다 증거가 없지 않소? 증인은 거론할 필요도 없소이다. 명확한 증거를 내세워도 배심원단을 설득할 확률이 낮은 판국에 무슨 수로? 패배할 것이 분명한 전투에 나서고 싶지도 않고 그런 전투에 나서서 저들의 맹렬한 분노를 당신과 나눠가질 생각 또한 내게는 없소이다.”
거절의사가 명확했음에도 테세우스는 별 반응없이 키케로를 바라봤다.
“로마로 급히 돌아온 연유가 무엇입니까? 그리고 나를 만나고자 했던 이유가 그것이 전부인 것입니까? 허풍이라 여겨도 좋습니다. 하나 나는 지금껏 전쟁에 나가 패배한 적이 없습니다. 키케로 당신 말대로 패배할 전투에는 애당초 나설 생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키케로는 그 말에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테세우스에게 말했다.
“놈을 겁박할 증거라도 있는 것이오?”
“그것을 얻기 위해 당신을 만나고자 한 것이 아닙니까?”
“뭐?”
키케로는 황당한 표정으로 테세우스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쉽지 않은 전투가 될 것이오. 공직자가 아니니 부패건으로 그를 겁박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뇌물을 주고받는 일이야 로마에서는 흠도 되지 않는 일이오. 그걸 걸고 넘어지려고 한다면 아마 로마 정무관들의 모든 적의를 감내해야만 할 거요. 술라의 해방노예였으니 세금과 공공예산을 횡령했을 확률도 높지만 그 일에 이리저리 얽힌 자들이 높은 자리에서 위세를 떨치고 있을 테니 그것을 파고드는 것도 현명한 일은 아니오. 결국 남은 건 사적으로든 공적으로든 재산을 갈취했다는 사실을 증명하여 데메트리우스의 부도덕성을 공개적으로 증명하는 수밖에 없는데 그건 정황 증거가 될 수 있을 뿐, 누명 사건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가 될 수 없소. 반면 저들은 그 일에 대한 직접적인 증언을 할 증인들을 확보할 텐데 당연히 승리할 수 있는 싸움이 아니오.”
키케로는 표정을 굳히며 다시 말을 이었다.
“혹여 나의 언변에 대한 기대로 나를 법정에 세우려했다면 큰 오산이라고 말해주고 싶소. 로스키우스 사건은 누구도 해결할 수 없는 난제가 아니었소. 하려면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그 문제를 풀면 목숨을 잃을까 두려워하여 나서지 않은 것에 불과하오. 그러나 이 사건은? 나서기만 하면 권력자들의 호의를 두루 얻을 수 있는 사건이오. 설혹 내가 법정에서 논리적으로 웅장하게 말을 늘어놓아도 저들은 아예 변호인단을 꾸려서 법정에 나올 텐데 무슨 수로 저들을 상대하겠소?”
그러자 테세우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하나만 물어보겠습니다. 누군가 칼을 들고 당신의 목숨을 빼앗으려고 한다면 그 칼에 고이 목숨을 내어줄 겁니까?”
“내 비록 검을 잘 다루지는 못하나 나 역시 시민으로서 군에 몸을 담았던 사람이오. 그냥 죽어줄 이유가 없지 않소?”
“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겠습니다. 데메트리우스에게 사과를 받고 보상을 일정부분 받고 마치거나 아니면 저들의 뜻대로 몸을 낮추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닙니까?”
고개를 끄덕이자 테세우스가 말했다.
“혹 내가 그리 한다고 한들 저들이 날 내버려두겠습니까? 무엇보다 나는 그럴 마음이 조금도 없습니다. 법정이 쓰레기로 뒤덮여 무엇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도 구분하지 못한다면 모조리 쓸어버리면 될 일입니다.”
“지금 그 말은?”
키케로는 다소 당황한 음성으로 언성을 높이다가 금세 신색을 바로하고 테세우스에게 서늘하게 말했다.
“그럼 그렇게 하면 될 일이지. 나를 왜 찾은 건가? 로마를 전복시키는 일에 나를 가담시킬 생각이라면 나는 절대 가담할 생각이 없으니 오늘의 대화는 없던 것으로 하겠네.”
키케로가 단호하게 몸을 돌리려고 하는 그때 테세우스가 말했다.
“당신에게 법정에서의 승리를 가져다 달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요구할 생각으로 당신을 만나고자 한 것도 아닙니다.”
“그게 무슨?”
키케로가 몸을 돌려 다시 황당하다는 듯 반문하자 테세우스가 키케로의 두눈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