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마 무신의 기억-200화 (200/298)

# 200

200. 승리할 수 없는 전투.

200.

“쿠에스토르(재무관).”

갑자기 재무관은 왜 거론한단 말인가? 키케로는 더욱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테세우스를 바라봤다.

“쿠에스토르라니? 갑자기 쿠에스토르는 왜 언급하는 것이오?”

“내년이면 쿠르수스 호노룸(명예로운 경로)의 첫 계단을 밟을 수 있는 나이더군요. 맞습니까?”

키케로는 폼페이우스와 마찬가지로 BC 106년 출생이었다. BC 77년 현재 나이 29살이라고 할 수 있었다. 술라가 재정한 법에 의해 재무관은 30살부터 나설 수 있었으니 테세우스는 그것을 짚어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뜬금없이 쿠르수스 호노룸이든 쿠에스토르든 이 상황에 언급할 내용은 아니지 않은가? 키케로는 살짝 미간을 좁히다가 입을 열었다.

“도무지 무슨 소리를 하려는 것인지 감을 잡을 수 없군! 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는 것이오?”

테세우스는 언덕 아래로 바삐 오가는 로마의 시민들을 바라보며 키케로에게 대답했다.

“생각해보십시오. 적당한 기회가 아닙니까? 실로 완벽한 기회지요. 이 시기를 놓치면 글쎄요. 키케로 님은 밑바닥 저편부터 명성을 다시 끌어올려야 할 겁니다. 사라진 명성도 명성이고 재물도 재물이지만 공연히 흐를 세월이 아깝군요.”

테세우스는 다시 고개를 천천히 돌려 키케로의 눈을 마주봤다.

“나를 만나보고 싶었다고 했습니까? 직접 만나본 소감은 어떻습니까?”

“······.”

키케로는 침묵을 지켰으나 테세우스도 딱히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이 아닌 모양인지 계속해서 말했다.

“제가 애매한 질문을 던졌나 봅니다. 그럼 이 질문은 어떻습니까? 로마의 공화정이 얼마나 더 지속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뭐... 라? 그 무슨 망언을!”

키케로가 크게 일그러진 표정으로 사납게 테세우스를 노려봤으나 테세우스는 전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갔다.

“로마로 오면서 로마로 이어진 수도교를 참으로 인상 깊게 봤습니다. 어느 한곳 끊어지거나 막힌 곳이 없더군요. 실로 놀라운 건축물입니다. 튼튼한 수도교 위로 끊임없이 흐르는 물줄기는 그 자체로 장관이었습니다.”

키케로는 시종일관 변함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가는 테세우스를 바라보며 자신의 감정을 빠르게 추슬렸다. 하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테세우스를 바라보는 시선은 자연히 날카로워질 수밖에 없었다.

테세우스는 다시 로마를 둘러보며 천천히 말했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입니다. 반드시 썩기 마련이지요. 그런 면에서 로마의 수도교는 탁월합니다. 신선한 물을 공급함과 동시에 부패한 물은 다시 도시 밖으로 흘려보내고 있으니 말입니다.”

키케로는 바보가 아니다. 이 이야기가 단순히 수도교의 감탄을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듣는 순간 눈치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로마의 수도교는 망가졌습니다. 커다란 두 개의 바위가 도도히 흐르던 그 물길을 끊어지게 만들었죠.”

“마리우스와 술라······.”

키케로가 두 사람의 이름을 중얼거리자 테세우스는 마치 그 대답을 기다렸다는 듯 다시 말을 이었다.

“다행히 모든 수도교가 망가진 것은 아니라 아직까지는 신선한 물을 공급받고 오폐수를 방출할 수 있는 여력이 있지만 글쎄요. 키케로 님께서는 그 기간이 얼마나 갈 것이라 보십니까?”

“으흠.”

키케로가 침음을 삼키자 테세우스가 쐐기를 박듯이 단정적으로 말했다.

“수도교를 정비하려는 자가 없다면 내일 당장 로마에 오폐수가 흘러넘쳐도 이상한 일은 아닐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키케로가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하고 잠시 머뭇거리자 테세우스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더 큰 문제는 수도교를 정비해야 할 자들마저 신선한 물을 자신들의 대지에만 공급하게 만든 뒤 그 물을 아주 값비싸게 팔고 있다는 점이겠지요.”

테세우스는 거기까지 말을 마친 뒤 키케로를 강렬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다시 묻겠습니다. 앞으로 로마의 공화정이 얼마나 더 지속될 수 있을 거라 보십니까?”

조금 전과 동일한 질문이었지만 키케로는 전처럼 테세우스에게 분노를 표출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얼굴에는 깊은 근심이 자리 잡았다.

틀린 말이 아니다. 마리우스와 술라는 지금까지 금기시되던 암묵적인 약속을 모조리 뭉개버렸다. 약속을 어기는 것은 한 번이 어려운 법이다. 깨진 약속은 더 이상 어떤 효력도 지니지 못한다.

테세우스의 말따라 서둘러 공화정의 기치를 바로잡지 못한다면 제이 제삼의 마리우스와 술라가 나타날 것이다. 치열한 권력다툼 끝에 승리한 독재자가 공화정을 기치를 세운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그렇게 할 리도 만무하거니와 이미 전례를 따라 독재자의 길 위에 선 이가 공화정을 위하는 정책을 내놓아봐야 공화정의 종말을 더욱 가속시킬 뿐이고 재정립된 로마를 다시 더 큰 혼란에 빠뜨리는 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결국 공화정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은 권력의 적절한 배분이다. 권력을 배분시켜서 서로가 서로를 견제케하는 방법 외에는 딱히 방도가 없다.

하나 금기시되던 암묵적인 약속이 모두 깨진 상황이다. 권력자들 모두가 전례를 따라 권력을 독점하려고 들 텐데 이 일은 무슨 수로 가능하게 만든단 말인가?

미간을 좁히며 고심을 거듭하며 말을 아끼던 키케로는 이윽고 테세우스에게 입을 열었다.

“대관절 이 일이 당신의 재판이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지 모르겠군.”

테세우스는 차분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거짓이 진실이 되고 약속이 약속이 아니게 되며 명예가 더 이상 명예롭지 못할 때 개인은, 집단은, 나라는! 반드시 파멸을 맞이합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으흠.”

“패배할 전투에는 나서지 않는 것이 지극히 현명한 태도입니다. 패배할 것이 뻔한데도 전투에 나가 목숨을 잃을 까닭이 무엇일까요? 그런 자들이 있다면 실로 어리석은 자들이라 비웃어주겠습니다.”

테세우스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말했다.

“그러나! 패배할 것을 알고도 나아가야 할 때가 있습니다. 승리할 수 없는 전투가 분명함에도 나아가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이는 승패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전장에 나아가는 것 그 자체가 더 중요할 때 그러합니다. 바로 기본 가치를 수호하는 일이 바로 그러합니다. 간단히 예를 들어볼까요? 신념을 위해, 사랑을 위해 어떤 이들은 죽을 것을 알면서도 목숨을 바칩니다. 목숨 바치는 일이 비효율의 극치라 할지라도 저들은 나아갑니다. 승패와 상관없이 전투에 나아가는 것이 기본 가치를 증명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이루지 못해도 목숨으로 본인이 수호하고자 하는 가치를 증명해냅니다.”

테세우스는 키케로의 두 눈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무슨 연관이 있냐고 하셨습니까? 여기서는 간단히 ‘정의’라고만 한정하도록 하지요.”

테세우스의 눈빛을 마주하던 키케로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테세우스에게 말했다.

“뭔가 오해하고 있는 모양인데 내가 로스키우스 사건을 맡은 연유는..”

“동기가 무엇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선택의 결과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증명할 뿐이지요. 신념이든 야망이든 상관없습니다. 어쨌든 당신은 권력자의 횡포 아래에서 정의를 수호하는 입장에 선 사람이 아닙니까? 그거면 충분합니다.”

키케로는 자조섞인 미소를 지었다.

“충분하지 않소.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 역시 내가 원하는 것은 정의가 아니라 승리일 뿐이오. 씁쓸한 말이지만 로마에서 정의를 구현하겠다니 그 얼마나 허황된 이상이란 말인가? 지금껏 나선 전장에서 패배한 적이 없다고 했소? 그러니 당신은 모를 거요. 허망한 죽음같은 패배의 고통을. 정의를 위해 목숨을 버린다? 아주 솔깃한 슬로건이 될 수는 있겠소. 승리할 수만 있다면 당신 말따라 나의 경력를 드높이는 찬란한 명예가 될 수 있겠지. 하나 무슨 수로? 길게 대화를 나눴지만 별로 영양가 있는 대화는 아니었소.”

패배를 왜 모르겠는가? 항우와 리처드 이들 역시 큰 패배를 맛보았고 서후의 삶 역시 승리하는 삶과는 동떨어진 삶이었다. 그러니 테세우스가 패배를 어찌 모른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러나 테세우스는 그 부분에 대해서 딱히 언급할 마음은 없었다. 그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다시 걸음을 옮기려는 키케로에게 말했다.

“그래서 당신을 찾은 것입니다.”

키케로는 또 다시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기이한 일이다. 테세우스와 함께해서 이로울 것이 없는데도 키케로의 마음은 계속해서 테세우스에게 쏠리고 있었다. 테세우스가 세운 명성에 키케로 역시 휩쓸렸기 때문일까? 그럴리가? 테세우스에 대한 소문을 믿을 수가 있어야지. 대경기장에서 대단한 광경을 자아내긴 한 모양인데 키케로는 소문의 액면 그대로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런데 왜 이 자에게 마음이 끌린단 말인가? 키케로는 자신의 모순적인 마음에 짜증을 느꼈는지 매우 퉁명스럽게 테세우스에게 말했다.

“이보시오! 나는 이번 재판에 나설 생각이!”

“나는 재판에서 승소할 수 있게 만들 변호사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승소의 영광을 제대로 누릴 수 있는 자가 필요했을 뿐, 이를 테면 내가 얻을 승리를 재물에 팔아넘기는 자를 세워서는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명예로운 경력을 얻고 싶어하는 당신이라면 적어도 그럴 염려는 없겠지요.”

키케로는 짜증을 터트리다 말고 멍하니 테세우스를 바라봤다.

“······. 설마하니 재판에서 승소할 방법이 있기라도 하단 말이오?”

테세우스는 고개를 주억이며 키케로에게 말했다.

“나 혼자서는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키케로 당신과 함께라면 충분히 승산이 있어 보이는군요. 그게 아니라면 이 시국에 당신을 찾아와 장황하게 이야기를 늘어놓을 까닭이 있겠습니까?”

자신의 언변이나 웅변술을 높이 사고 있기 때문에? 하나 그 사실은 아까 키케로 본인이 짚고 넘어간 점이다. 다시 말해 테세우스 이 자는 법정에서의 어떤 기술이 필요하기 때문에 자신을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물론 재판에 나설 사람을 필요로 하는 일이라 불필요한 것은 당연히 아니겠지만 그보다는 키케로는 키케로라는 이름, 즉 자신의 명성이 필요하기 때문이라는 걸 바로 눈치챘다.

“대체 어떤 식으로 사용할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로스키우스 사건을 변호한 내 명성이 필요한 것이로군.”

그렇게 말을 꺼내던 키케로는 테세우스가 공화정을 운운했던 것을 기억해내고 굳은 표정으로 테세우스에게 말했다.

“재판이 끝이 아니로군. 그 너머를 바라보고 있어. 대체 어디까지 계산하고 있는 것이오?”

“이미 이 재판은 데메트리우스와 나와의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니 재판 그 자체만 생각할 일은 아니지요. 그나저나 이제 저와 보다 진솔한 대화를 나눌 준비가 되신 것 같군요.”

키케로는 뭐라 말을 꺼내려다가 그만두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영광에 이르는 길이든 아니면 파멸에 이르는 길이든 일단은 더 들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

키케로와 만남을 가진 후 테세우스는 팔라티누스 언덕으로 향했다. 언급한 바 있지만 팔라티누스 언덕은 부유층과 사회적 출세를 원하는 자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개인저택이나 집세가 비싼 인술라가 자리하고 있는 구역이다.

햇볕의 뜨거움에 대리석이 일렁거리는 열기를 연신 토해내고 있었다. 그 뜨거움이 가죽 신발을 타고 전해졌지만 테세우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공화정을 수호한다고는 하나 키케로 이 자는 술라와 마찬가지로 귀족정을 지향하는 자가 분명하다.’

로마의 공화정 자체가 사실상 귀족정이나 다름없었기에 기존의 공화정을 지지하는 자들은 귀족정을 지지하는 자들이라고 봐야했다.

테세우스는 계속해서 걸음을 옮기며 생각을 정리했다.

‘기존의 기득권층이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또 다른 돌파구를 생각하는 수밖에. 내가 승소한다면 데메트리우스를 쳐내는 일에 그치겠지만 승소를 적절하게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을 내세운다면? 그리고 키케로가 내 사건을 전담한다는 소식과 더불어 로스키우스 사건을 다시금 홍보한다면? 아주 재밌는 일이 발생할 거다. 그러니 일단은 법정을 쓸어버릴 준비부터 착실히 해야겠지.’

테세우스는 눈을 빛내며 저 멀리 카피톨리누스 언덕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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