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마 무신의 기억-202화 (202/298)

# 202

202. 소문나지 않은 잔치.

202. 소문나지 않은 잔치.

부르불리우스의 능글맞으면서도 당당한 태도에 당초 자신의 예상과 달리 키케로가 경솔하게 말을 꺼낸 것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테세우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부르불리우스는 그를 안내하면서 쉴 새 없이 이말 저말을 던졌는데 대부분 쓸데없는 이야기에 불과했다. 이를테면 대경기장에서의 테세우스의 활약이 대단했고 옷이 어떻고 음식이 어떻고 등의 주변 잡기식의 이야기 말이다.

부르불리우스의 말주변이 좋아 딱히 지루하지는 않았으나 의미 없는 말의 나열이라 데면데면하게 받아치던 중 테세우스의 눈에 사람들이 부산스럽게 오가는 도무스 한 채가 보였다.

카피톨리누스 언덕 주변에 자리한 도무스에 비할 바는 아니나 꽤 고풍스러워 보이는 도무스였는데 그 주변으로도 여러 채의 도무스가 자리하고 있었다. 다만 테세우스의 눈을 사로잡은 도무스는 다른 도무스와는 확연히 다른 점이 있었다.

도무스의 집 밖은 월계수 나뭇가지, 담쟁이덩굴과 화관을 꽃줄에 묶어 장식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상당히 화려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또한 제각각 형형색색의 토가를 걸치고 화려한 보석과 같은 장신구를 걸친 로마인들이 도무스 안쪽에 마련된 잔치상에 모여 앉아 포도주를 마시며 상위에 풍성하게 펼쳐진 요리를 맛보고 왁자지껄하게 떠들고 있었다. 잔잔하지만 경쾌한 음악 역시 도무스 안에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히스파니아에서 왔다고 들었습니다. 혹 타르소에서 나는 섬세한 문양의 숄을 본 적이 있습니까? 자그마치 7천 데나리우스나 하는 천이지만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문양입니다. 질 좋은 리넨(마직류) 허리띠는 남성의 품격을 높여주기도 하지요. 물론 천 데나리우스 정도 하지만 그 정도야 품격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투자할 수 있는 가격 아니겠습니까?”

7천 데나리우스라면 상당한 금액이다. 언급한 바 있지만 1 데나리우스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으니 단순 계산으로 7,000일을 일해야 천 쪼가리 하나를 얻을 수 있다는 소리였다.

이는 부르불리우스가 지금껏 하던 이야기와 크게 다를 것이 없는 내용이라 별로 특별할 것도 없었지만 테세우스는 부르불리우스가 말을 꺼낼 때마다 자신의 반응을 유심히 살피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이에 테세우스가 대뜸 입을 열어 부르불리우스에게 말했다.

“그뿐이겠소? 사자털 색상을 지닌 고급 망토라면 1만 5천 데나리우스는 더 나갈 테지. 혹 그게 네메아의 사자털과 같다면 부르는 것이 값일 테고 말입니다.”

네메아의 사자는 바로 헤르쿨레스의 신화에 나오는 사자였다. 지금껏 고개를 끄덕이며 단답형 식으로만 대답하던 테세우스가 뜬금없이 신화 속 사자 이야기를 꺼내 들자 부르불리우스는 헛웃음을 터트리며 반문했다.

“하하. 네메아의 사자 말입니까? 하하 이를 말입니까? 부르는 것이 값이라고 해도 네메아의 사자를 닮은 망토라면 없어서 팔지 못할 겁니다. 그러고 보니 사자의 아가리를 찢어죽인 광경도 참으로 인상 깊었습니다. 대체 어떻게······.”

테세우스는 그의 말을 끊으며 입을 열었다.

“키케로에게 무슨 말을 어떻게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키케로에게 망토 하나 사주지 못할 정도는 아닙니다. 그러니 그쯤 하시지요. 그건 그렇고 보아하니 결혼 잔치가 벌어진 모양인데 포도주를 한 잔 마시자는 곳이 저곳은 아니겠지요?”

대화를 나누자더니 잔칫집에서 무슨 진솔한 대화가 오갈 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 미간을 좁힌 테세우스를 향해 웃음을 짓던 부르불리우스는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은 채 대답했다.

“왜 아니겠습니까? 로마의 모든 포도주가 오늘 이곳에서 개봉될 겁니다. 그러니 우리도 로마시민으로서 거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부르불리우스의 과장된 말과 행동에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눈매를 좁히며 그를 바라보던 테세우스는 이윽고 표정을 풀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결혼 잔치를 앞에 두고 포도주 한 잔 마시지 않고 가는 것도 예의는 아닐 테지. 좋습니다.”

정말로 결혼 잔치에 대한 예의 때문에? 아니다. 일단 테세우스는 부르불리우스가 이끄는 대로 움직이기로 마음먹었다. 주정뱅이로 여겼던 첫인상과 달리 자유분방함 속에 치밀함과 노련함이 숨어 있다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펠리키테르!”

“펠리키테르!!”

부르불리우스를 따라 결혼 잔치가 한창인 도무스로 들어서자 순백의 튜닉에 역시 아무 문양이 없는 크림색의 토가 비릴리스를 걸친 신랑과 로즈마리, 석류, 백합, 마요라나 등으로 이뤄진 화관을 쓰고 가볍고 투명한 플람메움(면사포)을 걸친 신부를 향해 하객들의 축하 인사가 끝없이 이어졌다.

이러한 인사나 축하는 석양이 내려앉고 저녁이 되어 신부가 거짓으로 납치되어 남편의 집에 이르는 행사가 거행되기 전까지 계속될 것이다. 이는 상징적인 의미로 로물루스의 남자들이 사비네스의 여인들을 납치하여 신부로 삼은 일은 기억하기 위한 행사였다.

다시 말해 이곳은 신부의 집이었다.

암포라에서 떠온 포도주 원액과 물을 배합해 테세우스에게 건네며 부르불리우스 역시 술잔을 높이 치켜들며 축하인사를 외쳤다.

“펠리키테르!!!”

그리곤 부르불리우스는 단숨에 포도주를 입에 털어 넣었다. 그리곤 오렌지를 입에 집어넣고 우물우물 씹으며 떠들썩한 하객들의 소음 가운데 나지막히 입을 열었다.

“서신을 받았습니다. 어찌나 급히 휘갈겨 썼는지 제대로 알아보기도 어려운 서신이더군요. 노예를 통해 서신을 받은 나는 결혼 잔치에 참석하기로 한 키케로가 참석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양해 서신인줄 알고 대강 살펴봤습니다. 그러다가 그게 아닌 걸 알았지요. 대체 무엇을 계획하고 있는 것이오?”

“펠리키테르!”

테세우스도 연회장 안쪽에서 웃음을 터트리고 있는 신랑 신부를 향해 축하인사를 던진 뒤 부르불리우스가 건넨 포도주를 들이켰다. 그리곤 역시나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알게 되면 그것을 통해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기에?”

나는 네가 누군지 모르고 믿을 수도 없으니 나의 계획을 왜 네게 알려줄까 라는 내용이 함축된 대답이었다.

부르불리우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테세우스의 시선을 따라 신랑 신부를 바라봤다.

“아름다운 광경이지 않습니까? 이미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보통 로마의 결혼식에는 ‘사랑’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가문과 가문, 권력과 권력의 결탁을 의미할 뿐입니다. 거의 모든 결혼이 정략결혼이라는 소리지요. 마찬가지로 아내는 ‘품위’를 위해 존재하지 ‘쾌락’을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많은 로마인들이 혼외정사를 벌이는 이유 중 하나라고 볼 수도 있겠지요.”

잠시 씁쓸한 미소를 짓던 부르불리우스는 다시 말을 이었다.

“다만 오늘의 결혼식만은 일반적인 로마의 결혼식과 동떨어져 있는 것 같군요. 배경이 사라진 후에야 사랑을 기반으로 한 결혼식이 성사되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배경? 가문을 말하는 건가?’

눈매를 좁힌 테세우스에게 부르불리우스가 계속해서 말했다.

“저기 신부가 보이십니까?”

짙은 화장과 풋풋한 웃음을 터트리는 소녀가 눈에 들어왔다. 로마의 결혼은 대부분 조혼이었기에 지금 축하를 받는 신랑과 신부 모두 나이가 어렸다.

테세우스가 얼마 전에 만난 키케로도 16살에 결혼했다. 신랑이 걸치고 있는 토가 비릴리스는 시민이 가지는 의무와 권리를 가지고 공적인 생활에 입문하는 것을 상징했다.

토가 비릴리스를 걸칠 수 있는 나이가 되면 법적으로 언제든 결혼할 수 있었고 로마인은 사춘기가 시작되는 시점에서부터 출세를 위해 달리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결혼 역시 그것의 방편이자 출발점에 불과했다.

단순히 신부를 보라는 의미로 한 말이 아닌 줄 알았지만 테세우스는 부르불리우스에게 장단을 맞췄다.

“예. 화사하게 웃는 소녀가 있군요.”

“카르보 가문의 마지막 계보를 이은 소녀입니다. 옆의 신랑은 콘술이었던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의 아들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이지요.”

폼페이우스에게 살해당한 도미티우스(BC96년 집정관)의 아들이라는 소리였다. 테세우스 본인이 만나고자 했던 아헤노바르부스 가문의 사람이기도 했고. 따라서 테세우스는 저도 모르게 침음을 뱉었다.

“음.”

카르보 가문 역시 BC 168년부터 꾸준히 콘술을 배출했던 가문이나 그나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세번의 콘술을 지냄)가 내전 중 마리우스의 편에서 술라와 반목하다가 폼페이우스 앞에서 쇠사슬에 묶여 죽은 후로는 그 명맥이 희미해졌다.

부르불리우스의 말따라 눈앞의 소녀가 카르보 가문의 마지막 계보를 이은 사람이라면(여자 역시 시민의 권리를 누릴 수는 있으나 정치에 참여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카르보 가문의 명맥은 완전히 끊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결혼식은 사제의 주관 아래 로마의 가장 오래된 결혼 형식인 콘파레아티오(confarreatio)로 엄숙하게 이뤄졌습니다. 오늘날에는 잘 하지 않는 방식이지요. 뭐 어쨌든 서신에 적혀 있기로 카르보 가문 역시 언급하셨던데 글쎄요. 카르보 가문과 아헤노바르부스 가문을 언급하셨던 분께서도 정작 두 가문의 경사(慶事)를 듣지 못하셨군요.”

테세우스에겐 부르불리우스의 말이 두 가문이 결합해도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이 현실이다. 두 가문을 결합시킨들 네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라는 날카로운 비판으로 들렸다.

“로마에 수많은 가문이 있지만 세 가문을 빼놓고 거론할 수는 없습니다. 율리아, 유니아, 코르넬리아 가문 말입니다. 물론 카이킬리아 가문도 빼놓을 수 없겠지요.”

가문이름을 사람 이름에 붙일 때는 가문명에 우스를 붙여서 율리우스, 유니우스. 카이킬리우스 이런 식으로 사용된다. 이는 다시 말해 가문의 본래 이름들이었다.

“카이킬리아 가문과는 원한 관계를 맺은 상황이고 당해의 콘술 데시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역시 뜻을 함께하고 있으니 유니아 가문의 조력을 역시 얻기 어려운 상황이오. 카이킬리아 가문을 견제할 수 있는 남은 두 가문 중 로마에서 가장 세가 강한 코르넬리아 가문은 술라와 메텔루스 피우스의 관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카이킬리아 가문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가문이오.”

코르넬리아 가문은 즉 술라의 본가는 로마의 가장 강력한 가문이라 할 수 있는데 공화국 내내 집정관을 최소 75명 이상이나 배출해낸 명가였다. 저들 모두가 적대 관계에 놓인 상황이라는 소리였다.

“남은 건 로마에서 가장 오래된 가문으로 여겨지는 율리아 가문밖에 없는데.. 글쎄. 로마에서 영향력이 막강한 세 가문이 연합하고 있는 구도 속에서 저들의 도움을 어떻게 이끌어낼지 도무지 감이 오지 않는구려. 서신에는 그런 내용까지 적혀 있지 않았으니 말이오. 물론 내 계산대로 답이 없어서 적지 않은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말이오.”

그제야 테세우스는 눈앞의 사내가 어떤 사내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 부르불리우스라고 했습니까? 그러나 나는 당신의 이름 말고는 그쪽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군요.”

“이제 대화할 마음이 생긴 모양이구려. 간단히 말하겠소. 술라 아래에서 그리스와 아시아를 오가며 전공을 세웠던 일개 군인 나부랭이에 불과하오. 다만 내년 콘술 선거에 나갈 마음을 품고 있기는 하오. 그리고 나는 선거를 후원할 후원자가 필요하지. 키케로의 서신에 의하면 재물이 부족한 사내는 아니라고 하던데? 맞습니까?”

테세우스가 눈매를 좁히며 고개를 끄덕이자 부르불리우스는 상 위에 닭고기를 찢어서 입에 넣으며 말했다.

“아무리 탐스러워 보이는 음식이라 할지라도 먹어서 탈이 난다면 먹지 않는 것보다 나을 것이 없지. 어떻습니까? 이제 당신의 계획을 내게도 알려줄 마음이 생겼을 것도 같은데······.”

‘내년 집정관 선거에 나설 마음 있다고?’

테세우스는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천천히 말문을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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