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3
203. 소문나지 않은 잔치.
203.
키케로가 부르불리우스에게 뭐라고 서신을 전했는지 궁금했기 때문에 그것을 물어볼 요량이었다.
“그 전에 키케로가 당신에게 뭐라고 말을 전했는지 알고 싶습니다.”
“별 다른 내용은 없었습니다. 다만 당신을 도와주면 쿠에스토르(재무관), 쿠에스토르 선거를 도와주겠다는 내용만이 짤막하게 적혀 있었을 뿐입니다.”
‘내가 키케로를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그가 이 자에게 말을 꺼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쓸데없이 경솔하게 말을 전하지는 않았을 터, 음.. 잠깐만! 부르불리우스 이 자가 내년 콘술 선거에 나선다고 했던가?’
키케로의 행동에 대해 짚어보던 테세우스는 부르불리우스의 발언이 떠오르는 순간 그 이유를 추측할 수 있었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던 테세우스가 부르불리우스에게 말했다.
“당선될 자신은 있는 겁니까?”
“키케로를 당선시킬 자신은 있는 것이고?”
“재판에 승소한다면 당선되지 않는 것이 이상할 겁니다.”
“그럼 나도 당선되겠군요.”
부르불리우스의 말에 테세우스는 키케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키케로는 확실히 영리한 사내다.
‘술라에게 대항했다가 귀향길 아닌 귀향길에 올랐던 경험이 그에게 신중함을 불어넣었는지도 모르지. 어쨌든 내게도 키케로에게도 그리고 이 자 부르불리우스에게도 해가 되는 일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현명한 판단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키케로는 그 짧은 순간에 섣불리 영광을 취하기보다는 나중에 떨어지는 콩고물을 주워 먹기로 마음을 돌린 것이리라.
무슨 말인고 하면 재판에서 어찌 승소할지는 일단 뒤로 하고 승소했을 때 키케로는 많은 명성을 얻게 될 것이다. 기억 속에 잊혀진 로스키우스 사건이 재조명 받게 되며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게 될 테고 승소한 테세우스 역시 그 이름을 로마인들에게 다시금 새겨넣는 기회가 될 테니 그의 전폭적인 후원을 얻는다면 쿠에스토르 당선은 따 놓은 당상이나 다름없었다.
그것으로 해피엔딩을 맺는다면 더 고민할 것도 없다.
하나 메텔루스 가문의 심기를 거스른 대가는 무엇으로 치른단 말인가? 정계에 나서는 것은 키케로의 염원 중 하나지만 메텔루스 가문을 거스른다면 상당히 험난한 길을 헤쳐가야만 할 것이다. 독이 든 성배나 다름없다는 소리다.
‘부르불리우스 이 자가 얼마나 대단한 영향력을 지녔는지는 모르나 당선 가능성이 전무한 자가 선거에 나서려고 하지는 않을 터, 당금 로마에서 키케로보다 강한 영향력을 지닌 사내임은 틀림없는 사실일 것이다.’
재판의 승소 결과를 키케로 본인의 쿠에스토르 선거에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부르불리우스를 지지하는 것에 사용한다면? 역시 명성을 얻은 테세우스 역시 부르불리우스를 지지한다면? 준비는커녕 쿠에스토르 선거에 대해 고심하고 있지도 않던 키케로 본인과 달리 부르불리우스는 콘술 당선을 위해 이미 막후교섭 등을 통해 당선 가능성을 높이고 있었을 것이다.
고로 이 일들이 부르불리우스에게 사용된다면 오히려 키케로 본인의 쿠에스토르 당선 가능성보다 부르불리우스의 콘술 당선 가능성이 더 높을 것이다. 또한 일이 그렇게 진행된다면 메텔루스 가문의 적의를 상당 부분 부르불리우스가 가져가는 결과를 낳는다.
‘부르불리우스가 당선된 후에는 그의 견인 아래 편안하게 정계에 발을 디디면 될 일이다. 영광을 잠시 뒤로 함으로 위험을 크게 낮추었으니 이는 상당히 현명한 선택이다. 다시 말해 부르불리우스 이 자를 설득하지 못하면 키케로 역시 나서지 않을 것이다. 키케로에게 부르불리우스는 안전보험이나 다름없을 테니까. 하나 그는 이미······.’
부르불리우스의 두 눈을 마주하던 테세우스는 고개를 주억이며 입을 열었다.
“아예 탈이 없다고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건 내가 판단하도록 하지요. 적어도 먹고 죽는 음식을 내게 대접하지는 않을 것 아니오?”
‘이 자 부르불리우스의 도움은 내게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내가 재판에서 이겨야만 본인 역시 더 큰 과실을 얻을 수 있다는 것쯤은 인지하고 있을 터이니 그의 협조를 얻는다면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겠지.’
테세우스는 포도주를 따라 한 잔 더 마신 다음 천천히 입을 열었다.
“원한은 은혜로 갚으면 됩니다.”
“원한을 은혜로? 원한은 바위에 새기고 은혜는 흐르는 물에 새기는 것이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는 모양이군요. 게다가 카이킬리아 가문에 무슨 수로 은혜를 베푼다는 겁니까? 그건 내가 콘술이 되어도 어려운 일일 겁니다.”
“그 가문이 카이킬리아라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더더욱 이해하기 어렵군요. 그 말은 카이킬리아 가문과 척을 질 만한 은혜를 앞서 거론한 세 가문들에게 미친다는 건데 그만한 은혜를 대체 무슨 수로?”
강대한 가문들에게 은혜를 미칠 정도의 힘을 가진 자라면 키케로나 자신과 이렇게 대화할 이유가 없었다. 그 전에 카이킬리아 가문이 감히 적의를 보이지 못했을 터, 부르불리우스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테세우스를 바라봤다.
“꼭 척을 질 만한 은혜가 필요하겠습니까? 모름지기 죽은 사람은 잊혀지기 마련인 것을······.”
“죽은 사람은 잊혀진다라······. 뭔가 방법이 있기는 확실히 있는 모양이로군요. 좋습니다. 말뿐인 방책은 아무 의미도 없는 법이니 듣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우선 그 방책이라는 것을 먼저 보여보시지요. 그러면 전폭적으로 당신을 도울 것입니다.”
부르불리우스는 그 말을 하며 오른팔을 테세우스에게 내밀었다.
‘내가 대책을 세운다고 해도 카이킬리아 가문과 척을 지는 건 현명한 태도가 아니다. 그럼에도 카이킬리아, 즉 메텔루스 가문의 사람과 대담하게 척을 지려는 이유는 아마도 내년 콘술 선거에 메텔루스 가문의 사람이 나서는 모양이로군. 어차피 척을 지는 것이라면 당선 가능성을 높이는 일에 주력하는 것이 더 효율적인 판단이라 여겼겠지. 그뿐이랴? 내가 부각되면 될수록 메텔루스 피우스의 패배, 곧 메텔루스 가문의 패배가 돋보이게 된다. 고로 그는 이미 나를 도울 생각이었다. 다만 내가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고 싶었을 뿐. 단단해 보이던 껍질의 틈이 보이기 시작하는군. 아울러 내게 호의를 보인다면 더 큰 호의로 보답해줘야겠지.’
테세우스는 역시 미미한 미소를 지으며 부르불리우스의 팔을 맞잡았다.
“염려마시지요. 아울러 이번 선거에서 정의를 수호한 사람으로 유세할 수 있을 겁니다.”
“정의라? 하하하. 좋습니다. 정당하지 않은 것은 바로 잡아야 하는 법이지요. 잔치를 즐기다가 저녁이 되면 신부를 납치하여 아헤노바르부스 가문으로 같이 가봅시다.”
신랑은 신부를 하객들이 신부를 거짓납치하기 전에 신랑의 집으로 돌아간다. 신부를 납치해서 신랑을 집으로 데려가는 일은 바로 초대된 손님들이 하는 일이었다. 부르불리우스는 그것을 언급하는 것이었다.
‘아헤노바르부스, 술라에 의해 몰락한 가문이자 카이킬리아 가문과 크라수스에게 울분을 품고 있는 가문. 이들은 시작일 뿐이다. 이런 가문의 힘을 한 데 모으고 쐐기를 박을 명문가의 조력을 얻는다면 재판 그 자체로만 승부를 봐야할 것이다.’
재판은 지금으로부터 세 달 뒤 멘시스 노벰베르(mensis November, 11월)에 열리게 될 것이다. 11월 4일에서 17일 사이에 열리는 평민들을 위한 축제, 루디 플레비(Ludi Plebeii)를 제외하고는 별다른 축제가 없는 달로 1년 중 축제나 행사가 가장 적은 달이기도 했다. 그런고로 어쩌면 이 달에 열릴 재판은 또 하나의 볼 거리가 될 가능성이 상당히 높았다.
‘방심하고 있을 때 적의 턱 밑까지 칼을 들이민다. 세 달이면 충분하고도 남는다.’
모든 일은 보이지 않는 것에서 시작하여 보이는 곳에 이르는 법이다. 마찬가지로 오늘의 소문나지 않은 잔치를 통해 승리라는 영광을 쟁취할 것인 즉, 테세우스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부르불리우스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주억이며 그가 건네는 포도주를 받아들었다.
*
바다를 지나오며 서늘해진 미풍이 얼굴을 간지럽혔다.
아테네에서 로도스 섬으로 가는 배 위에 몸을 실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머리칼을 휘날리며 넘실거리는 파도와 끝없이 이어진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테네에서 아리스토텔레스 학파인 소요학파와 플라톤 학파인 아카데메이아파 등을 따르는 많은 철학자들과 대담(對談)을 나눴지만 카이사르의 마음을 사로잡는 내용은 그 어디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현기로운 말들이 섞여있음은 부인할 수 없었지만 카이사르 본인이 느끼기엔 그저 뜬구름 잡는 말의 향연에 불과했다. 지적유희를 즐기기엔 그만한 것도 없겠지만 카이사르는 그런 지적유희나 즐기자고 로마에서 아테네까지 걸음을 옮긴 것이 아니었다.
다만 저들과의 대화를 통해 얻은 것이 있다면 자신의 웅변과 변론 실력이 더욱 예리하게 변모했다는 점이리라. 그런 유익도 없었다면 카이사르는 마음 속에서 치밀어오르는 불을 참아낼 길이 없었을 것이다.
“로도스.. 로도스.”
로도스는 각양각색의 문화를 지닌 사람들이 무수하게 몰려드는 도시였다. 그곳이라면 자신의 갈급함을 채워줄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을 거라 여겼다. 당장에라도 로마에 돌아가고 싶지만 지난 자신의 방법은 실패했다. 어떻게 보면 처참하게 말이다.
권력자들을 고소한 일은 하층 계급의 시민들의 환호는 얻었지만 중상층 계급의 사람들에게는 외면당했다. 물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행했을 뿐이다. 아무도 아니던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라는 이름을 한 터럭이나마 로마에 남길 수 있었으니까.
“하나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카이사르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바다를 바라봤다. 마음을 숨길 이유도 필요도 없었다.
하나 끝없이 이어진 바다는 자신의 사나운 눈빛에도 불구하고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넘실거리는 파도가 계속해서 뱃전을 때리고 있었으니 미동도 하지 않았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겠지만 카이사르는 그 바다 앞에 초라한 자신의 모습을 자각했다.
그렇게 바다를 바라보는 카이사르에 눈에 작은 점 같은 것들이 들어왔다. 그와 동시에 돛대 위 꼭대기에서 바다를 살펴보던 선원이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키... 킬리키아다! 킬리키아 해적선이다!”
“뭐.. 뭣이!”
“키.. 킬리키아 해적이라고?”
“으아아! 젠장! 젠장!”
카이사르가 타고 있는 배는 군선이 아니라 상선에 가까운 배였다. 로도스 섬으로 오가며 무역을 행하는 상선들이 승객을 태우곤 했는데 카이사르가 탄 배가 바로 그러했다.
“서둘러! 전속력으로! 전속력으로 이동한다!”
“전속력으로 이곳을 빠져나간다!”
“서둘러라! 조금만 더 가면 로도스 섬을 순회하는 군선의 도움을 얻을 수도 있다!”
“서둘러라!”
둥둥둥둥둥!
커다란 북소리와 함께 다급한 선장의 명령이 울려 퍼지자 선원들이 당황한 가운데서도 급히 자신의 자리를 찾아갔다. 그 와중에는 검이나 활과 같은 무기를 꺼내는 사람들도 있었고 당황하거나 겁에 질려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대부분이 후자의 경우였다. 이들은 군인이 아니라 일반인들이었기 때문이다.
카이사르 역시 굳은 표정으로 다가오는 해적선을 바라보다가 검의 손잡이에 손을 가져갔다.
그러나 이내 곧 손을 뗐다.
배에 물자를 가득 실은 상선이 빠르게 짓쳐드는 해적선을 따돌릴 수 있을 리 만무하고 그렇다고 상선 안에 해적들과 싸울 만한 별도의 병력이 존재하지도 않았다. 무기를 차고 있기는 하나 치열한 전장을 겪었던 카이사르의 눈에는 모두 애송이들에 불과했다.
해적들은 산전수전 다 겪어서 노련한 이들일 텐데 저런 이들과 전투를 치른다면 개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카이사르의 무예실력 역시 나쁘지 않았고 어쩌면 상선에 탄 이들 가운데 자신의 무예실력이 제일일지도 모르지만 혼자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아닌 말로 무예가 뛰어난 자들부터 죽임을 당하고 말 것이다.
무기에서 손을 뗀 연유는 바로 그래서였다.
“해적. 해적이라······. 로마의 큰 도적놈들을 피해 도망쳤더니 이제는 이름도 없는 작은 도적놈들에게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했구나.”
잠시 허탈한 웃음을 터트리던 카이사르는 이내 곧 냉정한 눈빛으로 나지막이 말했다.
“그러나 이대로 죽을 내가 아니다. 이대로 고이 죽어주지는 않을 것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