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마 무신의 기억-206화 (206/298)

# 206

206. 바다에서 불어온 바람.

206.

레기온이라니? 로마군이었다면 군선을 보는 즉시 알아차렸을 것이다. 예상 밖의 광경에 카이사르는 의구심이 피어올랐지만 지금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저들이 레기온(군단병)이든 아우실리아(보조군, 속주병)이든 혹 정체불명의 집단이든 자신을 도와 해적들과 전투를 치른다는 사실로 충분했기 때문이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의문과 상관없이 자신이 본 광경을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카이사르는 목에 핏대가 설 정도 힘차게 소리쳤다.

“레기온! 로마의 레기온이다! 버텨라! 그러면 살 수 있다!”

로마군의 위상은 당연히 지중해 그 어떤 곳보다 막강하다. 군단병의 존재는 아군에게 전의와 사기를 불어넣고 해적들에게는 전의를 잃게 만들 것이다. 괜히 목청을 드높여 그 사실을 상기시킨 것이 아니었다.

“레기온!”

“로마의 레기온이다!”

“버텨라!”

“카이사르 님의 말씀대로 버티면 살 수 있다!”

“뭉쳐!!”

절망 앞에 인간은 좌절하고 무너지나 희망이 있다면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 해적들은 절망을 가져다줬지만 카이사르와 뒤늦게 나타난 레기온의 존재는 그 절망보다 큰 희망을 이들에게 불어넣었다.

“주.. 죽여라!”

“레기온이 별거냐? 바다에서는 우리가 최강이다!”

“모.. 모두 죽여라!”

해적들은 내심 두려웠지만 그것을 잠재우고자 고함을 질렀다.

“우와와와와와!”

그러나 불행하게도 저들이 맞닥뜨린 나디르의 병사들은 이미 수차례의 치열한 해전을 겪은 노련한 병사들이었다.

*

나디르는 원만하게 휘어진 검을 휘둘러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해적의 목을 베어버렸다.

촤아아악!

그와 동시에 몸을 회전시키며 양옆에서 칼을 내지르는 두 해적의 팔과 허벅지를 베었다.

“으아아아악!”

“크아아악!”

피 튀기는 살육의 시작이었다. 스쿠툼으로 진을 형성한 병사들을 해적들이 무슨 수로 상대한단 말인가? 신장과 체구가 우람한 켈타이족이나 갈리아족들마저 스쿠툼과 글라디우스 그리고 로마의 잘 짜인 전술과 전략 앞에 눈 녹듯이 녹아버렸다.

80명의 병사들은 다시 10개의 콘투베르니움으로 나뉘어 해적들을 전방위에서 압박했고 포위당한 해적들은 두려움에 고함을 지르고 날뛰다가 말없이 조용히 내질러진 차디찬 글라디우스의 검날 아래 단말마도 제대로 뱉지 못하고 죽어 나가기 일쑤였다.

촥! 촤아악!

어떤 기합도 없이 저들은 기계처럼 글라디우스를 내질렀고 검날이 해적들의 육체를 파고드는 질척한 소음만이 주변에 울려 퍼질 뿐이었다.

“사.. 살려.. 끄으으윽!”

“아.. 안돼! 크아아악!”

그 모습에 전의를 상실한 해적들이 바다로 뛰어가려고 했지만 이들은 그것마저도 용납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을 이끄는 나디르의 성품처럼 저들을 쫒는답시고 대열에서 벗어나거나 호승심에 취해 함부로 행동하지 않았다. 해적들이 도망도 치지 못하고 살육당한 것은 철저한 계산과 훈련 아래 이뤄진 산물일 뿐, 승기에 취한 어떤 무모함의 결과가 아니었다.

이들은 훈련받은 대로 방패를 세우고 검을 내지르고 진을 형성했을 뿐이다. 이들에게는 차라리 훈련 때의 모의전투가 더 치열하고 긴박했다.

겉으로 보기엔 피와 살점이 튀어오르는 치열한 전장이었지만 이들에게 있어서는 다소 무료한 전장에 불과했다.

“차근하게 그렇게 모조리 죽여라!”

나디르의 서슬퍼런 명령에 병사들은 방심하지 않고 더욱 냉철한 눈빛으로 살육을 이어갔다.

*

배 위에는 해적들의 시체가 즐비했다. 남은 온전한 1척의 해적선은 약탈을 포기하고 꽁지빠져라 도망쳤고 노잡이를 잃어 기동성을 잃은 3척의 배들 역시 부랴부랴 돛을 펴거나 새로이 돛을 달고 이 지역을 벗어났다.

나디르가 앞서 공격한 2척의 해적선과 조금 전까지 백병전을 치른 해적선은 전멸한 셈이기에 도망치고 말 것도 없었다. 7척의 해적선 중 무려 3척을 침몰시킨 셈이지만 해적 소탕이 목적이 아니었기에 나디르는 추격하지 않고 저들을 내버려 뒀다.

그러나 선상 위에 아직 어찌어찌 목숨을 연명하고 있는 해적들까지 살려둘 생각은 없었다. 하여 병사들에게 확인사살을 명한 나디르는 얼굴에 튄 피를 손으로 슬쩍 훔쳐내며 상선 위에서 저항하던 사람들을 바라봤다.

카이사르가 누군지는 이미 파악하고 있었을뿐더러 설혹 모르고 있었더라도 그가 누군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카이사르는 독보적이었다.

귀티가 흐르는 곱상한 얼굴과 번쩍거리는 갑옷, 무엇보다 총기와 냉철함이 번뜩이는 그의 두눈을 보면 카이사르가 누군지 모르더라도 그가 범상치 않은 사람임을 짐작할 수 있었을 테니 말이다.

나디르는 사람들이 카이사르를 대하는 태도를 보고 자신의 예상대로 저들을 전략적으로 행동하게 만든 사람이 카이사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이라 의문을 품지도 않았지만 말이다. 다른 이도 아니고 테세우스가 지켜보라 당부한 사람이다.

그보다 이쯤되면 무슨 예언가가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로도스 섬으로 향할 때 해적들의 습격이 있을 수 있으니 그때를 놓치지 말고 도와주라니······. 반신반의했지만 테세우스가 한 당부라 일단 그대로 따랐다. 이해할 수 없는 명령 뒤에 항상 기묘한 계책이 뒤따랐으니 말이다. 그런데 정말로 습격이 있을 줄이야. 이건 예측이 아니라 예언 수준이 아닌가?

속으로 혀를 내두르던 나디르는 검을 든 채로 카이사르에게 걸음을 옮겼다. 나디르가 다가서자 카이사르는 피묻은 글라디우스를 천으로 대충 닦아 검집에 집어넣으며 입을 열었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다. 그대의 표정을 보니 이미 내가 누군지 알고 있었던 모양이로군. 어디 레기오(군단) 소속인가?”

아우구스투스가 BC 31년에 단독 통치자가 되었을 때 그는 당시 존재했던 50개 이상의 군단중 약 절반을 해산시켰다. 남아 있는 28개의 군대는 초기 제국 군대의 중심이 되었고 이후 3세기 동안 지속되었다.

지금은 아우구스투스(BC63-AD14)가 태어나기도 전이니 대략 50개 정도의 군단이 존재한다고 보면 되었다. 각 군단은 로마 숫자를 붙여 군단을 분류했고 해당 군단이 해체되기 전에는 군단의 전통과 기치가 그대로 이어졌다.

다만 여러 군단이 같은 번호를 다른 군대와 공유했기 때문에 이 군단의 번호만으로 군단을 파악하기는 어려우며 제국 시절처럼 군단이 상시 존재하고 있는 것도 아니라 더더욱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트리뷰누스 라티클라비우스(넓은띠 대대장)에 임관했던 사람이며 코로나 그라미데아(풀잎관) 다음 가는 훈장인 코로나 키비카(시민관)를 수여 받은 사람이었다. 군단의 번호를 듣는 것만으로도 어디 소속인지는 파악할 역량이 충분했다.

나디르 역시 검집에 칼을 집어넣으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굳이 구분한다면 히스파니아 소속이라고 해야겠지요.”

“히스파니아? 히스파니아 쪽이라면 레기오 노벰(novem, 9) 소속인가? 음? 뭔가 아귀가 맞지 않는군. 히스파니아에 주둔하는 레기오 노벰(제 9군단)이 이곳까지 병사를 보낼리도 없을뿐더러 히스파니아의 상황은 병력을 다른 곳에 돌릴 정도로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니 말이야.”

“레기오 노벰 소속이라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는 퀸투스 세르토리우스 테세우스 님 휘하의 사람들입니다.”

“퀸투스 세르토리우스 테세우스? 카이킬리아 가문의 메텔루스 피우스를 패배시키고 살해한 히스파니아의 반란군 장군을 말하는 것인가?”

“이제는 아닙니다만?”

“아. 히스파니아를 바치는 대신 시민권과 신분을 요구했다고 했던가? 아울러 지난 과거도 청산하고 말이야. 그것 참 대단하군.”

“지금 비꼬시는 겁니까?”

“아니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이토록 훌륭한 수하들을 내버려 두고 홀로 영화를 찾아 떠난 것이 사실이 아닌가?”

“홀로 영화를 찾아 떠났다라······.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군요.”

사나운 기세를 발하던 나디르가 금세 진정하며 자신의 말을 곱씹자 카이사르는 이채서린 눈빛으로 그에게 말했다. 나디르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카이사르는 나디르의 말에서 테세우스를 향한 그의 신뢰를 느낄 수 있었다.

“대단한 실력이더군.”

“과찬이십니다. 테세우스 님에 비한다면 새발의 피도 되지 않습니다.”

“으흠.”

카이사르는 나디르의 답변에 테세우스에 대한 충성이 바위처럼 굳건하다는 것을 깨닫고 행동을 달리했다.

“생각보다 대단한 자였군. 당신같은 사내의 마음을 얻은 걸 보면 말이야. 사실 나라도 그렇게 했을 걸세. 항복하지 않았다면 결국 모두 죽게 되었을 거야. 메텔루스 피우스를 죽인 일이나 로마에 항복하며 거래를 청한 일이나 모두 매우 놀라울 정도로 적절한 판단이었다. 그 소식을 들을 때 소름이 끼칠 정도였지. 사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야.”

“무엇이 말입니까?”

“이토록 시의적절하게 나를 도울 수 있었다는 건 그간 나를 지켜봤다는 뜻으로 봐도 무방할 테지. 해적들의 습격마저 당신 상관의 수완이 아닐까 의심이 될 정도야.”

그 말에 나디르는 표정을 굳히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런 분은 아닙니다.”

테세우스가 지금껏 수많은 계책을 부렸고 또 충분히 그럴 만한 능력도 있다 여겨지지만 사람을 일부러 곤경에 밀어넣고 그를 구출함으로 환심을 얻는 부류는 결코 아니었다.

“물론 아니겠지. 그렇게 어리석은 수를 쓸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으니 말이야. 다만 차라리 그랬다면 내 마음이 편했겠군. 해적이 습격할 것을 미리 알아차렸다면 로마에서 이곳의 정세까지 파악하고 있다는 소리가 아닌가? 통찰력이든 정보력이든 그게 뭐든 간에 대단하다는 것에는 이견을 가질 수 없겠군.”

“음.”

“그나저나 이름이 뭔가?”

“나디르라고 합니다.”

“그래. 나디르. 테세우스가 나를 도운 일은 아마도 카이킬리아 가문과 얽힌 일 때문이겠지?”

로마 내부 사정에 대해 알지 못하는 나디르는 고개를 저으며 카이사르에게 대답했다.

“저는 아는 바가 없습니다. 해적의 습격이 있다면 카이사르 님을 도우라라는 명만 들었을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그 연후에도 원하신다면 목적지까지 호위하라는 명을 들었을 뿐입니다.”

“목적지까지 호위라고 했나?”

“예. 로도스 섬으로 가신다면 로도스 섬으로, 아테네로 돌아가신다면 아테네까지 호위하겠습니다.”

“파르티아, 아니 셀레우코스 지역은 어떤가?”

나디르는 잠시 멈칫거렸지만 이내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곳이 원하시는 곳이라면.”

추측에 불과했겠지만 나디르의 출신을 정확하게 짚어낸 카이사르의 통찰력은 가히 대단했다. 조금 전 나디르의 반응으로 카이사르의 추측은 확신에 가까워졌을 것이다. 카이사르는 빙그레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테세우스 휘하에 당신과 같은 이들이 많은가?”

나디르는 그렇다고 대답하려다가 카이사르의 날카로운 눈빛에 말을 바꿨다.

“그건 직접 확인하시면 될 일입니다.”

카이사르는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테세우스에 대해 생각했다. 로마의 군단병과 싸워도 전혀 손색이 없을 이들을 사병으로 거느리고 있는 자라······. 이 자의 태도를 미루어 짐작해볼 때 테세우스의 그림자 속에 숨은 병력은 로마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고 훨씬 더 위협적일 확률이 높았다. 병력도 병력이지만 유지할 수 있는 여력이 충분하다는 소리가 아닌가?

히스파니아의 항복을 얻어내? 그 사실만으로 희희낙락하고 있을 세네투스(원로원)를 떠올린 카이사르는 상당한 경각심을 느꼈다.

지금껏 자신을 주시하고 있던 테세우스라면 자신이 능히 그의 숨겨진 세력을 추측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 정도는 파악하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들을 자신에게 드러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카이사르는 그렇게 떠오르는 수많은 의문과 생각들을 뒤로 하고 나디르에게 입을 열었다.

“로마. 로마로 가야겠다. 하지만 그 전에 감히 나를 습격한 해적들의 뿌리를 뽑아버려야겠다. 나를 도울 텐가?”

뿌리를 뽑겠다는 카이사르의 말은 곧 로도스 섬 일대의 유지들을 설득하여 함대를 구축, 이 근방의 해적들을 모조리 소탕하겠다는 뜻으로 보였다. 나디르는 어렴풋이나마 카이사르의 의도를 짐작했지만 테세우스가 힘이 닿는 대로 그를 도와줄 것을 지시했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것이 당신이 뜻이라면 그리하겠습니다.”

“아울러 서신을 써줄 터이니 그것을 나의 가문과 테세우스에게 전하면 될 것이다. 하나 서신이 없더라도 카이킬리아 가문이 그를 도모할 명분은 사실상 없는 것 같군. 이는 결국 완벽한 힘의 우위를 가져가기 위함인가? 하하하. 놀라울 정도로 치밀한 사내로군. 테세우스와의 만남이 실로 기대되는군. 실로 기대가 돼. 다만 한 가지······.”

카이사르는 말을 멈춘 뒤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디르를 바라봤다.

“그는 로마인인가?”

“퀸투스 세르토리우스 테세우스. 테세우스 님은 그 이름을 소중하게 여기시는 분입니다.”

“그런가? 그 역시 후에 만나보면 알겠지.”

카이사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바다에서 불어온 바람을 온몸으로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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