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8
208. 한 편의 연극.
208. 한편의 연극.
스키피오 나시카는 후드가 달린 망토를 대충 갈무리하여 탁자 위에 내려놓은 뒤 테세우스에게 말했다.
“못 볼 사람을 본 것처럼 쳐다보지 마시오. 아무렴 내가 검투사의 악몽이라 불리는 디오클레스를 단신으로 죽인 사내를 암살이라도 하고자 찾아왔겠습니까? 그것도 홀로 말입니다.”
테세우스는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내는 스키피오 나시카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키케로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자리를 비켜주셔야 할 듯합니다.”
테세우스는 스키피오 나시카의 표정과 말에서 독대를 원한다는 걸 느꼈다. 키케로 역시 그것을 느낀 모양인지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인 뒤 조용히 자리를 비켜줬다. 물론 그러는 와중 스키피오 나시카와 가벼운 인사를 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뜨거운 음료라도······.”
“되었습니다. 그보다 용건부터 밝히겠습니다. 그편이 더 편할 듯하군요.”
테세우스는 스키피오 나시카의 눈을 바라보며 고개를 주억거리자 스키피오 나시카가 말했다.
“언급했다시피 나는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피우스의 아들이오. 당신에게 사감(私感)은 없지만 가문의 원한을 갚아야 하는 것이 나의 본분이오.”
테세우스는 눈매를 좁히며 입을 열었다.
“선전포고라도 할 셈입니까? 저는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하나 카이킬리아 가문에서는 이번 일에 대해 손을 떼기로 이미 말을 전한 상황입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너의 본가가 휴전을 맺기로 작정한 상황인데 아버지의 원한을 갚기 위해서라고 해도 이리 독단적으로 선전포고를 해도 괜찮겠냐고 돌려 묻는 발언이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원한을 갚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하지 못할 것도 없습니다.”
스키피오 나시카(BC98–46)는 21살 된 젊은이답게 패기 넘치는 모습으로 테세우스에게 말을 던졌다. 황당한 일이지만 테세우스의 실제 육체 나이는 아직 15살은 되었을까? 그러나 그가 겪은 세월은 그것의 대여섯배를 훌쩍 뛰어넘었다. 항우, 리처드, 서후의 삶까지 겪은 그였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스키피오 나시카의 도발적이고 다소 무례한 태도에도 테세우스는 무덤덤하게 반응했다. 이러한 태도는 충분히 예측가능한 모습이었으니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었다.
“잘 알겠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원한을 갚겠다고 한다면 그것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나 역시 정당한 나의 권리를 주장한 것이며 혹 그것이 아니라 해도 당신 손에 내 목숨을 맡길 생각은 없습니다. 그럼······.”
무덤덤한 표정으로 축객령을 내리려는 테세우스의 모습에 스키피오 나시카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무턱대고 가문의 결정을 거스른다면 공중에 붕 떠버린 나의 양자된 신분마저 박탈당할 위험이 있고 무엇보다 카이킬리아 본가마저 난색을 표한 테세우스라는 존재를 나라는 한 사람이 무슨 수로 대적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아버지의 원수를 가만히 두고볼 수는 없는 노릇이니 참으로 난감한 상황입니다. 아니 그렇소?”
“음······.”
테세우스는 그저 침음을 흘릴 뿐이었다. 신세한탄이나 하자고 자신을 찾아왔을 리는 만무하고 무슨 연유로 이같은 이야기를 꺼내는 것인지 여전히 헤아리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물론 당신을 죽이고 실추된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시킬 수만 있다면 가문의 징계따위는 무시해도 상관없겠지만 쓰고 버리는 말따위로 전락할 생각이 내게 추호도 없다는 것이 문제겠지요.”
“쓰고 버리는 말?”
테세우스는 그 말을 되뇌이며 번뜩이는 눈빛으로 스키피오 나시카를 바라봤다.
“카이킬리아 가문이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피우스를 버렸듯이 저들에겐 나 역시 명분을 세우고 버릴 말에 불과하다는 소리요.”
테세우스는 스키피오 나시카를 가만히 주시했다. 그러자 스키피오 나시카가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다.
“으음. 데메트리우스가 찾아왔소이다. 당신을 어떻게든 죽여야 한다고 하더군. 말은 맞는 소리요. 당신만 사라지면 데메트리우스도 나도 편안한 로마 생활을 이어갈 수 있을 테니 말이오. 하나 불리한 전장에서 정정당당히 싸워 기어코 제 아버지의 원한을 갚은 사내를 뒤에서 암살한다?”
털썩!
그는 그제야 자리에 앉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어차피 이건 내세울 수 없는 일이오. 세인들은 메텔루스 피우스의 가문은 독살에 암살이나 일삼는 가문이라고 여길 테지. 이 일에는 그 어디에도 실추된 가문의 명예를 드높일 수 있는 길이 없소이다. 카이킬리아 가문은 그런 나를 내침으로 불명예스러운 소문을 끊어낼 확률이 높지. 하! 더 황당한 것은 당신을 어떻게해야 암살할 수 있을지 감도 오지 않는다는 점이오. 그런데 암살? 성공할 확률도 희박하고 성공해도 문제가 될 여지가 다분하지. 세인들은 당신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으니 말이오. 상황을 이렇게 반전시킨 당신의 수완에 혀를 내두를 뿐이오. 이러니 본가의 어른들도 손을 뗄 수밖에 없었겠지. 문제는!”
그렇게 운을 뗀 스키피오 나시카는 말을 잠시 멈췄다가 다시 말했다.
“이제 저들이 나를 압박할 것이란 말이오. 내가 당신 손에 죽든 내가 당신을 죽이든 저들로서는 손해볼 것이 없으니 말이오. 퀸투스 세르토리우스 테세우스! 할 수만 있다면 나는 당신을 죽일 것이오. 이건 내 진심이오. 자! 그러니 나를 죽이시겠소?”
“으흠.”
“그럴 수 없겠지. 지금의 상황을 주도한 것이 정말 테세우스 당신이라면 당신도 알겠지. 나를 죽이는 일이 얼마나 큰 파장을 불러올 것인지를 말이오.”
테세우스는 그제야 스키피오 나시카가 자신을 찾아온 연유를 알아차렸다.
“허······. 하······.”
지금의 만남이 어찌된 영문으로 이뤄진 것인지 전후사정을 짐작한 테세우스는 말을 잇지 못하고 그저 짧게 몇 번 탄식할 뿐이었다.
‘지독한 곳이다. 실로 지독하구나.’
메텔루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그가 언급했듯이 그와 자신은 원한관계가 명확하게 성립되어 있었다. 그걸 모르는 로마시민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지경, 그런 상황에서 그가 살해당한다면 가장 먼저 누가 의심을 받겠는가? 더 볼 것도 없이 테세우스 자신이다.
“그래서 거부한 것이오? 데메트리우스의 제안을?”
“나는 원한을 갚고 실추된 명예를 드높이고 싶은 거지 자살하고 싶은 생각은 없소이다. 내가 데메트리우스와 공조하여 당신을 암살할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겠지만 실패한다면 비단 당신의 손이 아니더라도 둘다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오. 물론 대외적으로는 무조건 당신이 한 일로 비춰지겠지.”
“그래서 나를 찾아왔군.”
그가 자신을 만나기 위해 야밤에 움직였다지만 세상에 완전한 비밀은 없다. 지금이든 나중이든 스키피오 나시카가 죽임을 당한다면 이 일은 자신을 음해하는 강력한 증거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스키피오 나시카는 일부러 자신을 찾아온 것이다. 자신을 보호할 수밖에 없게끔 말이다.
“맞소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를 살해할 가장 유력한 용의자가 가장 안전한 셈이니 말이오. 원수에게 목숨을 의탁하는 상황 역시 아이러니하지만 말했듯이 당신과 원한관계가 성립되기는 했으나 사감은 없소.”
“그러나 메텔루스 피우스의 아들로서의 본분은 지킬 테지.”
“물론이오.”
테세우스는 실소를 머금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지금 나를 죽이고자 하는 자를 보호해줘야 한다는 말이오?”
“그러지 않는다면 당신은 많은 것, 아니 모든 것을 잃을 테니까.”
테세우스는 스키피오 나시카를 쳐다보다가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재밌군. 상당히 재밌는 도시야. 로마라는 곳은.”
그는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
“하나 이 사실은 알아두시오. 당신의 사정이 어떠하던간에 나를 계속해서 적대한다면 반드시 죽게될 것이라는 걸 말이오.”
테세우스의 강렬한 살의에 압도당한 스키피오 나시카는 잠시 어떤 말도 뱉지 못했다. 그러나 호락호락한 사내가 아니라는 듯 이내 곧 신색을 바로한 뒤 테세우스에게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건 두고 보면 알겠지요.”
그 모습에 테세우스는 이채서린 눈으로 스키피오 나시카를 바라봤다.
“내게 개인적인 원한을 품고 있지 않은 것은 확실합니까?”
“내가 이 상황에서 당신에게 거짓을 말할 이유가 뭐가 있겠소? 누차 말했듯이 사감은 없소. 아마 로마의 누구도 나만큼 히스파니아의 전투를 상세히 알아본 사람도 드물 것이오. 당신은 정당한 의무를 수행했고 솔직히 그 일 자체에 대해서는 감탄하고 있소. 하나 이 일은 별개의 문제요. 의무를 수행하는데 있어서 사감은 불필요하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할 사람같지는 않은데?”
“그렇다면 굳이 나를 죽여서 그 의무를 완수할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음?”
스키피오 나시카가 반문하자 테세우스가 짤막하게 한 가문을 언급했다.
“아헤노바르부스.”
아헤노바르부스를 필두로 내전 당시에 몰락한 가문들이 집결하여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는 건 스키피오 나시카 역시 잘 알고 있는 소식이었다. 하지만 지금 아헤노바르부스를 언급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거요?”
“내가 보기에 당신이 원하는 건 의무도 명예도 아닌 출세요. 그럼에도 의무를 운운하는 것은 그 의무가 디그니타스와 결부된 부분이라 그런 것이고. 아니오?”
언급한 바 있지만 디그니타스는 로마 특유의 개념으로 개인의 고결함, 긍지, 가문, 말, 지성, 행동, 능력, 지식 등 사람으로서의 총체적인 가치를 말했다. 사적인 입지였지만 훌륭한 디그니타스는 공적인 입지를 크게 강화시켰다. 로마인들, 특히 로마귀족들은 이 디그니타스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었다.
굳은 표정으로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스키피오 나시카에게 테세우스가 다시 말했다.
“당신도 언급했다시피 내가 당신의 아버지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피우스를 살해한 일은 로마 시민들에게 정당한 행위라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치욕스럽게 그를 죽이지도 않았고 고문을 행한 것도 아니며 치열한 전투 중 일어난 일입니다. 물론 복수심이 없었다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반드시 그를 죽일 생각이었으니까.”
“그 일이 정당하든 아니든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오! 나는 그 일에 대해!”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아헤노바르부스 가문을 비롯한 로마 내전 중 당신 가문에 의해 멸문하거나 화를 입은 가문들 역시 핏값을 물어야만 할 것이오. 한 마디로 카이킬리아 가문의 사람들은 다 죽어야겠지. 하나 당신도 알고 있을 것이오. 지금 벌어지는 소송이 그런 식으로 진행되고 있지 않음을 말입니다. 물론 궤변에 가까운 발언이겠지.”
테세우스는 형형한 눈빛으로 스키피오 나시카를 바라봤다.
“정당하든 아니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 했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궤변이든 아니든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오. 사람들이 어찌 받아들이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아닌 말로 로마에 디그니타스라는 존엄한 단어에 부합하는 사람이 있기나 하오? 썩은 내와 흉한 몰골을 휘황찬란한 가면과 향수로 가리는 위선자들이 득실거릴 뿐이지. 그러니 의무니 하는 위선은 그만 집어치웁시다. 사실 아버지를 죽인 사람에게 사감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표현 자체가 어처구니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양아버지라고 해도 말이오.”
“으흠.”
“세인들이 당신의 명예를 인정하고 당신 역시 복수에 대한 의무를 총족시킬 수 있는 방안이 내게 있소. 대신 이 일로 지난 원한은 모두 종식 시키고 싶군. 메텔루스 피우스의 아들된 자가 일을 덮겠다고 한다면 다시는 이 일을 가지고 내가 왈가불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니······. 내게도 당신에게도 이로운 일이오. 서로를 죽이지 않고 상생 할 수 있는 방법이오. 받아들이겠소?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내 손을 더럽힐 필요도 없이 당신이 죽게 내버려 둘 것이오. 이 일로 나를 옭아맨다라······.”
잠시 헛웃음을 터트리던 테세우스는 웃음을 지으며 냉정한 표정으로 스키피오 나시카를 바라봤다.
“나를 옭아매고자 같은 가문의 사람마저 죽이는 가문이 카이킬리아 가문이라고 세상에 밝혀진다면 참으로 재밌는 일이 벌어지겠어.”
“······. 당신은 정말 무서운 사내로군. 그 방법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런 방법이 있다면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도 없소.”
테세우스는 손을 내밀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늘 나를 찾아온 일을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마른침을 삼키던 스키피오 나시카는 말없이 그의 팔을 맞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