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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무신의 기억-211화 (211/298)

# 211

211. 지혜로운 자.

211. 지혜로운 자.

지혜로운 자는 되도록 적을 만들지 않는다.

하나 탐욕을 따르는 자들은 탐욕에 지혜로울 뿐이다.

증인과 증거가 확실하지 않기에 법정에서 현재 어느쪽의 손을 들어 주더라도 키케로나 호르텐시우스가 요청했던 대로 시민권 박탈과 같은 중한 죄를 묻기 어렵다. 물론 무게추가 완전히 쏠린 상황이라면 무슨 죄인들 묻지 않겠느냐만은 전과 달리 테세우스도 권세가를 등에 업은 이상 삼자의 입장에선 양쪽 권력자의 미움을 사지 않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다.

비록 현재 테세우스측의 세가 강하다고는 하나 시시비비를 가리기 어려운 사건인만큼 데메트리우스에게 중죄를 물어서 권력자들의 심기를 상하게 할 이유가 없었다. 테세우스의 손을 들어주되 데메트리우스에게는 그저 벌금형과 같은 가벼운 형벌을 부여하면 될 일이다.

크라수스와 카이킬리아 가문이 이 사건에 손을 떼기는 했지만 이는 일을 이쯤에서 접자는 타협안이기도 했다. 고로 패소했다는 불명예 등을 피하기 위해 물러선 자들의 자존심까지 건드려서 좋을 것이 없었다. 얻을 것 얻고 버릴 건 버리는 것이 테세우스로서도 지혜로운 처세였다.

지금같은 상황에선 이런 식으로 판결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키케로는 물론 호르텐시우스도 잘 알았다. 이는 테세우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사건은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도 어렵고 시시비비를 가리더라도 자신이 원하는 수준의 형벌을 데메트리우스에게 부여할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당연히 테세우스는 그런 식의 판결을 원치 않았다. 하여 이 사건을 위장으로 놓고 테세우스는 데메트리우스의 비리를 파고들었다. 이를 테면 공공사업과 관련된 비리 말이다. 사업과 관련된 내용이니 만큼 보다 명확한 증거를 확보할 수 있을 테고 당연히 데메트리우스를 파멸에 몰아 넣을 수 있다.

다만 이 일 역시 권세가들이 연관되었을 거라는 점이다. 데메트리우스를 건드린다면 연관된 이들 역시 건드리게 될 테니 신중하게 판단해야 할 부분이었다. 조사하는 것조차 강력한 적의를 가지게 할 테니 조심스럽게 파헤치던 와중 테세우스는 면식이 있던 한 남자를 만났다.

그 남자의 이름은 자세르, 폼페이에서 테세우스를 탈출할 수 있게끔 결정적인 도움을 제공한 상인이었다. 자세르는 테세우스조차 전혀 예상하지 못한 증거와 증인을 가져왔다. 심지어 이번 사건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내용이었다.

그중 하나가 법정에 제출된 계약서였다. 테세우스는 이를 확보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당시 자신이 무슨 높은 명성을 지닌 것도 아니고 심지어 도둑으로 몰린 자의 계약서 따위를 그게 누구든간에 무슨 가치가 있다고 보관하겠는가? 하다 못해 계약이 남아있는 것도 아니고 완료되어 파기된 계약서를 말이다.

하나 자세르는 알았다. 데메트리우스가 테세우스에게 누명을 씌웠다는 것을, 이것이 언제 쓰일지 알 수 없는 일이나 적을 무너뜨릴 수 있는 비수가 된다면 얼마든지 투자할만한 일이었고 이 정도 일은 자세르에게 투자라고 부를 수도 없는 미미한 노력에 불과했다.

하여 그는 그 즉시 아무 가치없는 계약서가 영원히 사라지기 전에 확보했고 라니스타 페루사니 아래 있던 도크토레(검투사 훈련관) 쿠리오를 영입한 뒤 그의 과거마저 지웠다.

다른 자들은 몰라도 페루사니와 쿠리오는 이번 사건에 결정적인 증인이 되기에 충분한 자들이었다. 당연히 테세우스 역시 그들을 확보하고자 했으나 페루사니는 최근에 죽었고 쿠리오는 삼년 전 즈음, 종적을 감추고 사라진 것으로 확인했다. 페루사니를 죽인 자가 데메트리우스였을 테니 쿠리오 역시 그가 죽였다고만 생각했다.

하여 테세우스는 데메트리우스가 확보한 증인들을 매수할 뿐, 그의 비리에 대해 조사하는데 집중했다. 그랬었는데 자세르가 사라진 증거와 사라진 증인을 데리고 테세우스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이 증거와 증인은 이제 데메트리우스와 로마 시민들 앞에도 모습을 드러냈다.

키케로는 형형한 눈빛으로 자세르에게 질문을 던졌다.

“증인 자세르! 이 계약서를 확보한 경위에 대해서 밝혀주시오.”

자세르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데메트리우스를 비웃은 뒤 입을 열었다.

“어린 소년이 검투장에서 사자를 죽인 그날, 그리고 누명을 쓰고 달아나던 그날 밤, 저는 그와 계약한 페루사니에게 사람을 보내 계약서를 확보하게 했습니다.”

“원고측의 증인은 지금 거짓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라니스타 페루사니는 이미 죽었으니 이 일의 진위를 가릴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아울러 계약서가 진본이라는 것도 성립할 수 없습니다!”

날선 호르텐세우스에 반응에 키케로가 재판관에게 말했다.

“제 질문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재판관님!”

“인정한다! 피고측은 잠잠하라!”

호르텐시우스가 표정을 굳히며 자리에 앉아 키케로가 다시 말했다.

“계속하시오.”

“그리고 그날 밤, 제가 보낸 사람을 따라온 도크토레가 한 명 있었습니다. 목숨을 잃을까 두려우니 거두어달라 하더군요. 그래서 질문했습니다. 어째서 두려운 것이냐고?”

“무슨 내용이었습니까?”

“누명을 쓴 소년과 데메트리우스의 거래를 직접 본 사람이라 했습니다. 소년에게도 누명을 씌웠으니 거래를 직접 보고 들은 자신 역시 안위를 보장받기 힘들다고 자신을 거둬달라고 했습니다. 하여 거두었습니다.”

“그게 누구입니까?”

“도크토레 쿠리오. 저와 함께한 이가 바로 그 당사자입니다.”

키케로는 자세르에게 쿠리오에게 시선을 돌렸다. 키케로를 따라 법정의 모든 이들이 시선이 쿠리오에게 집중되었다.

“쿠리오! 그날 밤 왜 자세르에게 갔습니까?”

“자세르 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안위를 보장받기 위해서였습니다. 데메트리우스 저자라면 얼마든지 나를 검투장에서 처참하게 죽게 만들 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이를 테면 라니스타 페루사니와의 거래 등을 통해 말입니까?”

“예. 변호사 님. 다만 이제 제 이름은 쿠리오가 아니라 오키에라고 합니다. 자세르 님께서 제 과거를 완전히 지워주셨지요. 덕분에 아직까지 숨을 쉬고 있습니다.”

“좋습니다. 오키에! 그날 본 것을 증언해주십시오.”

“계약서를 보시면 알겠지만 계약은 검투장에서 세 번 싸우는 것으로 종결됩니다. 한데 데메트리우스는 테세우스가 사자와 전투를 치르겠다고 약조한다면 그것으로 계약을 종결하기로 했습니다.”

“계약종결 말입니까? 직접 보고 들은 내용이 확실합니까?”

“예. 목숨을 걸고 맹세합니다. 그게 아니라면 제가 도크토레로서의 안정된 직업까지 버리고 피신할 연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데메트리우스는 악랄하게도 어린 소년에게 별도의 무구도 없이 사자와 싸우라고 제안했습니다. 그것도 수사자와 말입니다. 이는 극도로 위험한 일로 성인 검투사에게 제안했어도 거부했을 제안이었습니다. 백 아우레우스를 받는다고 해도 말입니다. 심지어 그날 테세우스는 이미 표범과 전투를 치른 뒤였습니다.”

쿠리오 아니 오키에의 증언에 청중들이 웅성거리며 데메트리우스를 바라봤다. 키케로는 손을 들어 좌중을 조용히 시킨 다음 다시 질문했다.

“테세우스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습니까?”

“예. 제가 극구 만류했지만 마치 얼른 계약을 마치려는 사람처럼 그 말도 안 되는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수사자를 검신이 짧은 글라디우스로 한 자루만으로 잡아냈지요. 그 이후의 일은 아시는 대로입니다만 데메트리우스는 사람을 보내 저를 찾았습니다. 저를 왜 찾았겠습니까? 그리고 얼마 전엔 라니스타 페루사니가 죽었다더군요.”

키케로는 커다란 목소리로 주변을 향해 외쳤다.

“존경하는 재판관과 배심원, 그리고 시민 여러분! 검투사가 된 지 얼마 안 된 소년을 표범과 싸우게 하는 것은 둘째치고 표범과 싸운 소년을 다시금 사자와 싸우게 한다는 것은 극명한 살해의지가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 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그는 내기에서 이긴 원고에게 누명을 씌워 그의 목숨을 빼앗으려 했습니다. 그뿐입니까? 그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살인까지 저질렀고 허위 제보와 공문서 위조로 공권력을 기만했으며 수많은 비리를 저질러 부정축재를 해 온 작자입니다. 이에 본 변호인은 앞서 거론한 시민권 박탈과 더불어 그의 재산 전부를 몰수하며 그에게 사형을 언도할 것을 요청합니다!”

끝났다. 더 변론하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원고측은 데메트리우스의 비리에 대해서도 이미 면밀하게 파악하고 있을 것이고 그와 연관된 권세가들에게도 그 부분에 대해 넌지시 알렸을 것이다. 완전히 팽당한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의뢰인을 이대로 사형당하게 내버려 둘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호르텐시우스는 굳은 표정으로 미미하게 고개를 흔들다가 차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사형집행 권한은 법정에 속한 것이 아니라 민회에 속한 것입니다!”

그 말에 재판관이 호르텐시우스에게 말했다.

“피고측의 변론은 그것이 전부인가?”

“예. 이상입니다.”

호르텐시우스는 고개를 주억이며 그것으로 말을 맺었다.

“판결을 위해 잠시 휴정하겠다!”

이에 데메트리우스가 발작하려고 했지만 호르텐시우스가 삼엄한 표정으로 목숨이라도 부지하고 있으려면 가만히 있으라는 말에 부들부들 떨 뿐이었다.

잠시 뒤 당월 실무 집정관 마메르코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가 판결문을 들고 섰다. 재판관이 좌중을 조용히 시키자 레피두스가 오연하게 주변을 바라보다가 큰소리로 말했다.

“판결하겠다! 죄인 루키우스 데메트리우스 세쿤두스는 흉악한 범죄로 시민의 위상을 더럽혔으니 그의 시민권을 박탈, 그의 모든 권한을 몰수하고 그의 모든 재산 역시 몰수한다. 아울러 사형에 처해야 마땅하나 원고측의 자비로 말미암아 승패와 관계없이 검투사로서 세 번 싸워 살아남는다면 사형은 면하게 해주겠다. 단 그럴지라도 그의 신분은 노예로 고정한다! 원고에게 고마워해야 할 것이다. 네가 원고를 구해줬다는 그 사실이 오늘의 네 목숨을 살린 셈이니까. 그게 아니었다면 오늘이라도 당장 민회를 소집하여 네게 사형을 언도했을 것이다.”

“이.. 이럴 수는? 이럴 수는 없소! 이건 아니야! 내가 이대로 이대로 당할!”

그때 호르텐시우스가 발광하는 데메트리우스의 귀에 대고 뭐라고 속삭였고 데메트리우스는 그 즉시 사색이 되어 멍하니 풀린 눈으로 호르텐시우스를 바라봤다.

재판 전에 들은 말이 있던 호르텐시우스는 짧게 혀를 차며 그에게 다시 조용히 속삭였다.

“목숨을 부지하고 싶다면 잊어야 할 것이다. 모두. 어차피 로마의 누구도 이제 네 말을 믿지 않겠지만 말이야. 쯔쯔. 증거따윈 없다고 그토록 호언장담하더니······. 네놈 덕분에 나 역시 패소의 불명예를 떠안게 되었지 않나?”

“이럴 수는! 이럴 수는 없어! 이.. 이럴 수는!!”

망연자실하게 서 있는 데메트리우스를 향해 레피두스가 명령했다.

“즉시 집행하라!”

“예!”

“이.. 이건 아니야! 이건 아니라고!”

병사들에게 끌려가며 데메트리우스는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었다. 지금껏 재산을 어떻게 불려왔는데 그 막대한 재산을 송두리째 빼앗긴다고? 게다가 다시 노예? 데메트리우스는 손발이 벌벌 떨리며 작금의 상황이 현실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하나 엄연한 현실이었다. 막대한 재산은 송두리째 몰수당했고 자신은 노예로서 검투사로 싸워야만 했다. 데메트리우스는 그 사실이 미치도록 두려웠다.

누구도 그런 그를 동정하거나 불쌍하게 여기지 않았다. 도리어 저들은 데메트리우스에게 왜 생존할 수 있는 일말의 기회라도 부여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뿐이었다.

그건 키케로도 마찬가지였다. 마지막 휴정 중에 그렇게 질문하는 키케로에게 테세우스는 짧게 대답했었다.

“내 목숨값은 싸구려가 아니니까. 그뿐이오.”

자신의 목숨을 구했다는 그 사실 하나 때문에 기회를 줬다는 소리다. 데메트리우스가 했던 방식을 그대로 돌려주면서 말이다.

“그리고 내 손이 아니더라도 죽을 것이오. 저자는.”

원수라고 할지라도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자에게는 그만한 호의를 지불한다라······. 키케로는 그 말을 들으며 두려운 표정으로 테세우스를 바라봤었다.

어쨌든 데메트리우스가 처절한 울음을 터트리며 법정에서 끌려나간 뒤 레피두스가 다시 말했다.

“몰수한 데메트리우스의 재산은 원고인 테세우스에게 위로금 명목으로 지불한다. 하나 원고 테세우스는 이 위로금을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피우스를 잃은 가족에게 위로금으로 지불하고자 하니 법정은 이를 받아들여 루키우스 데메트리우스 세쿤두스의 모든 재산을 메텔루스 피우스의 정당한 상속자인 메텔루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의 재산으로 인정한다. 이상으로 폐정한다!”

쾅! 쾅! 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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