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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무신의 기억-212화 (212/298)

# 212

212. 지혜로운 자.

212.

메텔루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가 테세우스를 찾아온 그날 밤, 당연히 두 사람이 팔을 맞잡은 것만으로 대화가 끝나지 않았었다.

“그런 말은 재판에서 승소한 뒤에 꺼내야 하는 말이 아니오?”

스키피오 나시카가 고개를 흔들며 말을 꺼내자 테세우스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승소한 직후 바로 양도될 일이니 당사자가 몰라서야 제대로 성사될 수 없겠지요. 무엇보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행여라도 제가 패소한다면 무시하면 될 일입니다.”

“재판에서의 승패는 그렇다쳐도 데메트리우스의 재산을 내게 양도한다라······. 나 역시 자세히는 알지 못하나 그의 재산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을 거요. 지금 그 모든 것을 내게 양도하겠다는 소리요?”

“그쪽이 내 사정을 생각해 줄 필요는 없습니다. 당신은 그저 내 제안을 받아들일 것인지 아닌지만 결정하면 됩니다. 법정을 통해 선언된다면 당신은 혹시 모를 내 변심을 염려하지 않아도 될 테고 나 역시 메텔루스 피우스 사건에 더 이상 얽매이지 않아도 될 것이니 쌍방 모두에게 합리적인 거래가 되겠지요.”

테세우스는 말을 잠시 멈춘 뒤 잔에 물을 따라 스키피오 나시카에게 건네고 자신 역시 목을 축인 후 말을 이었다.

“내가 히스파니아의 주권을 로마에 넘기는 대가로 얻은 것이 무엇인지는 스키피오 나시카, 당신도 알 겁니다. 시민권, 신분, 그리고 과거에 대한 청산, 로마는 이를 받아들였고 따라서 나는 로마에 히스파니아의 주권을 불필요한 전쟁없이 넘겼습니다. 당연히 이는 공문화된 내용입니다. 그러니 누구도 내게 과거 일어난 로마와의 전쟁에 대해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설령 그것이 로마의 콘술이라고 할지라도······.”

테세우스는 잔을 내려놓으며 스키피오 나시카를 주시하며 다시 말했다.

“당신이 메텔루스 피우스의 아들이라고 할지라도 당신 역시 로마인인 이상 내게 그 일에 대해 책임을 묻지 못합니다. 카이킬리아 가문 역시 마찬가지, 하지만 내게 책임을 묻지 않는다면 디그니타스에 손상을 입을 가능성이 높고 그렇다고 내게 책임을 묻는다면 로마의 공식적인 입장을 무시하는 처사가 되니 내게 책임을 묻되 비공식적인 경로로 책임을 물어야만 했을 겁니다. 카이킬리아 가문이 데메트리우스를 내세워 나를 죽이려했던 것이 그 일환이겠지요.”

“으흠.”

“한데 그것마저 실패했고 재판의 향방 역시 내게 이로우니 카이킬리아 가문은 나를 도모하도록 당신을 압박했을 것입니다. 디그니타스와 깊은 연관이 있는 사안이니만큼 당신은 어떻게든 나를 도모해야 했을 것이고 결국 내 손에 죽었을 겁니다. 그리되면 카이킬리아 가문은 비공식적인 경로가 아니라 공식적인 경로로 나를 압박할 수단이 생기는 셈입니다. 세인들의 이목 역시 무시할 수 없겠지요. 카이킬리아 가문이 로마에서 공식적인 경로로 압박할 수단은 상당히 많겠지요. 아주 절묘한 계책입니다.”

“나를 모욕하고자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오?”

“왜 일어날 일을 짚어주면 그걸 모욕이라 여기는지 모르겠군요. 아직도 모르겠습니까? 이미 당신에게 선택권은 없습니다. 나로서도 당신이 어찌되든 간에 카이킬리아 가문의 계략을 이용하면 될일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편이 훨씬 효율적이고 간단한 일이지요.”

“으흠.”

“지금 저는 당신에게 호의를 베푸는 겁니다. 당신 가문도 베풀지 않은 호의를 말입니다. 그 이유라면 글쎄요. 내 복수가 당신의 파멸이 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라고 해두지요.”

“호의라······. 당신 대신 싸울 자를 세우는 일도 호의라고 받아들여야 하오?”

“내 의도야 어쨌든 그 일로 인해 당신의 목숨과 명예, 재산을 보장받을 수 있다면! 그게 당신에겐 호의 아니겠습니까? 언급했다시피 당신에게 선택권은 없습니다. 내 제안을 받아들이고 살든지 아니면 거부하고 죽든지 그게 당신에게 남은 유일한 선택권이겠지요.”

“······.”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스키피오 나시카는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 살아야겠지. 앞으로 내가 무엇을 하길 바라오?”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결국 나를 죽일 속셈이었나?”

“섣부르게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럼 어째서?”

“나로서는 내가 얻은 재산을 당신이 위로금 명목을 받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법정의 공식적인 선언이라면 더할 나위가 없지요. 그러니 당신이 얻은 그 재산으로 무엇을 할지 그리고 당신이 무엇을 할지 나로서는 신경쓸 이유가 없습니다.”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메텔루스 피우스와 얽힌 원한관계는 그것으로 종료된다는 소리다. 위로금 명목으로 재산이 양도된 후에도 이 일을 다시 거론한다면 카이킬리아 가문은 오명을 뒤집어써야 할 테니까.

“음. 그랬군. 위로금이라······. 정말로 그렇군.”

이 위로금을 가문과 상의하지 않고 그것도 자신이 냉큼 삼킨다면 가문의 다른 사람들은 자신을 좋지 않게 볼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그것에 대한 위로금이기도 한 셈이었다. 하나 그리된다면 자신은······.

“그러니 무엇을 하든 좋을대로 하십시오. 이 일로 당신을 강제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조언을 하자면······. 아헤노바르부스 가문을 떠올려보기를 바랍니다.”

“아헤노바르부스?”

갑자기 아헤노바르부스는 왜? 그렇게 생각하던 스키피오 나시카는 뭔가 번뜩 스쳐가는 생각에 헛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내가 오판했군. 이건 나를 위한 위로금이 아니었어. 대신 나는 목숨과 명예, 명성도 얻을 테니 결국 호의를 베푼 것이 맞군. 당신은 정말 무서운 사내로군.”

“그건 뭐 편할대로 생각하시지요.”

스키피오 나시카는 형형한 눈빛으로 테세우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상생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겠다고 했던가?

“승소를 기다리겠소. 아울러 이왕 호의를 베푼 거 아헤노바르부스 가문의 사람도 주선해주시오.”

테세우스는 의미심장한 눈으로 스키피오 나시카를 바라보다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뭐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알겠습니다.”

*

테세우스로부터 위로금 명목으로 데메트리우스의 막대한 재산을 넘겨받은 메텔루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는 아헤노바르부스 가문 등에게 그 재산을 다시 넘겼다.

“아버지의 핏값에 불과한 재물을 어찌 받겠느냐만은 가문의 과오를 바로잡기 위해 위로금을 승낙한다. 하니 그 재물은 아헤노바르부스 가문과 같이 지난 내전 중 카이킬리아 가문에 의해 피해를 입은 가문들에게 보상금 명목으로 지불할 것이다.”

이에 메텔루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는 로마에서 상당한 명성과 명예를 얻게 된다. 본래 사실이야 어쨌든 대의를 위해 사사로운 복수심도 뒤로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말이다. 이러한 명성은 훗날 그가 공직에 나아갈 때 상당한 배경이 될 것이며 언제 내쳐질지 모르던 카이킬리아 가문 내에서도 지난 날에 비할 수 없을 만큼 입지가 굳건해졌다.

키케로는 로스키우스 사건과 이번 테세우스 사건을 해결하고 중견 변호사이자 명성이 높은 호르텐시우스를 격파함으로 변호사로서의 명성이 하늘을 찔렀다. 정의를 수호하는 변호사라는 명예로운 명성이 그의 뒤를 따랐다.

율리아 가문 역시 과연 사람을 볼 줄 알고, 쓸 줄 아는 로마의 명문가라며 그 이름을 다시금 드높이고 있었다.

부르불리우스는 그런 율리아 가문과 키케로의 지지를 받으며 내년 콘술 선거의 당선을 확고하게 굳히고 있었다.

테세우스의 명성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키르쿠스 막시무스에서 보인 용맹함, 불리한 상황에서도 재판을 승소하게 만든 지혜로움, 원수에게도 호의를 베푼 자비심, 지금껏 자신과 함께한 모든 자를 승리자로 만드는 수완까지 남녀노소, 신분고하에 상관없이 그와 가까워지길 원했다.

심지어 테세우스가 로마에서 그런 명성을 얻는데 걸린 시간은 반년도 채 되지 않았다.

그러나 태양이 높이 뜨면 그림자도 짙어지는 법이다. 당연히 그런 그의 명성과 성공을 시기하거나 경계하는 이들 역시 점점 더 많아졌다.

과장해서 로마의 모든 이들이 테세우스의 일거수 일투족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을 시기에 웬걸 테세우스는 칩거 아닌 칩거에 들어갔다.

얻고자 했던 시민권과 신분, 그리고 이루고자 했던 복수를 모두 이룬 상황이었다. 금전적으로나 당면한 상황 역시 근래에 이르러 가장 평탄한 시절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고로 별다른 야심이 없는 테세우스로서는 이대로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테세우스는 알았다. 어디 도둑이 들기를 바래서 도둑질을 당하던가? 환란과 고난이 찾아오길 바래서 그와 같은 것들이 찾아오던가? 자신이 쌓은 명예와 명성을 빼앗기를 원하는 자들이 득달같이 찾아올 것이다.

외부적인 활동을 금하고 칩거 아닌 칩거에 들어간 이유 역시 그와 같은 일들을 대비하기 위한 일보후퇴의 시간이었다.

함께했던 키케로, 부르불리우스 역시 자신을 어느 정도 경계하는 기색을 보였다. 함께한 이들조차 그러하니 표면적으로든 어쨌든 적대했던 이들의 모습이야 더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재정적으로 크라수스가, 무력적으로 폼페이우스가 정치적으로 부르불리우스나 키케로 그리고 로마 유수의 가문들이 압박해온다면 자신이 쌓은 것이 무엇이든간에 모래성처럼 무너지고 말 것이다. 혹 무너지지 않더라도 상당히 어려운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은 너무나도 극명한 일. 하여 테세우스는 저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행보를 보였다.

로마에 위치한 대장간에 틀어박힌 것이다. 저들로서는 이해하지 못할 행보였지만 테세우스로서는 지난 날 이루지 못했던 또 하나의 바램을 이루기 위한 행보였다.

눈발이 흩날리는 멘시스 디켐베르 위킨티 두오(12월 22일)의 아침, 테세우스는 눈의 왕국처럼 하얗게 뒤덮인 주변과 별개로 번들거리는 땀으로 뒤덮인채 망치를 휘두르고 있었다.

깡! 까아앙! 깡!

그의 주변으로는 상당히 잘 만들어진 검들이 꽤 많았다. 대부분 글라디우스 형식을 갖추고 있었는데 다만 잘 만들어진 했으나 하나같이 이리저리 금이 가거나 이가 나간 검으로 실전에서는 사용할 수 없는 검으로 보였다.

치이이익!

달아오른 검을 기름으로 식히고 다시 두들기길 한참, 테세우스는 만들어진 검을 몇 번 휘두른다음 옆에 모루에 강하게 내려쳤다.

카아아아앙!

놀랍게도 막 만들어진 글라디우스는 모루에 부딪쳐 깨지지도 이가 나가지도 않았다. 테세우스는 다시 모루를 향해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까아아앙! 까아앙!

단단한 물체를 사정없이 내려쳤으니 검에 전해지는 반탄력도 상당할 터인데 테세우스는 인상 하나 찌푸리지 않고 그 일을 반복했다.

결국 만들어진 검은 예기를 잃어버리고 점차 고철로 변해갔다.

챙그랑!

그제야 테세우스는 검을 모루 저편에 던져 버리고 눈이 오는 대장간 밖으로 휘적휘적 걸음을 옮겼다.

“후우우우.”

깊게 한숨을 뱉은 테세우스는 조용히 뇌까렸다.

“찾았다.”

인도산 철괴를 얻어 근 한달에 이르는 시간 동안 대장간에 처박혀 망치질한 결과 드디어 찾을 수 있었다. 다마스쿠스 강철을 제련하는 법을 말이다.

다마스쿠스 강철의 비밀은 제련법의 문제보다 역시나 재료, 즉 인도산 철괴가 그 해답이었다. 인도산 철괴로 검으로 만들었던 첫날, 테세우스는 자신이 만들었던 그 어떤 검보다 단단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하나 테세우스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가장 강한 탄성과 가장 강한 경도를 가진 조합을 찾아내고자 밤낮을 가리지 않고 녹이고 두들기고 식히고를 반복했다. 그리고 결국 찾아냈다. 최적의 조합을 말이다. 테세우스의 세밀한 감각이 아니었다면 수년 어쩌면 그 이상도 걸렸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쇠가 쇠를 자르는 신검은 아니겠지만 이 시대의 제련술을 고려하면 신검을 제련하고도 남을 강력한 강철이다.’

이제 남은 건 자신이 알아낸 최적의 조합법을 따라 보아디케아 창을 대신할 전천후 형태의 극과 양손에 쥘 두 자루의 검, 상시 몸에 지니고 다닐 여러 자루의 비수 그리고 방어구 등을 제작하면 될 일이다. 그건 크게 오래 걸리는 일이 아니니 넉넉잡아 이 주일 정도만 대장간에서 보내면 충분히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가장 기본적인 개인 정비는 끝이 나는 셈이다. 테세우스는 흩날리는 눈을 바라보다가 다시 조용히 뇌까렸다.

“트리뷴(Tribune 호민관). 트리뷴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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