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4
214. 지혜로운 자.
214.
사비누스는 담담하게 말하는 테세우스를 바라봤다.
“이미 결정하셨군요.”
고개를 한차례 끄덕인 테세우스가 입을 열었다.
“딱히 원하지는 않지만······. 지금 상황에서 트리뷴을 거부하는 건 하책이다. 내가 부르불리우스의 제안을 거부한다면 이 소식은 그의 반대파에도 전해질 테니 이 일은 그를 물어뜯는 선거도구가 되기에 충분하다. 나 역시 좋은 평을 듣지 못할 것이다. 역경과 고난이 지나자마자 도와준 사람에게 등을 돌린 모습으로 비춰질 테니······.”
“세인들의 평을 염려하시는 겁니까?”
“염려가 아예 없다면 거짓말이다. 하나 그뿐이라면 가차 없이 무시했겠지. 트리뷴에 오르길 원하는 자나 원하지 않는 자나 모두 아군은 아니지만 그나마 적의를 보이지 않는 쪽은 부르불리우스를 비롯한 트리뷴에 오르길 원하는 진영이다. 그런데 만약 내가 거부를 한다면? 나는 양측 모두와 적이 된다. 그건 내가 만들어놓은 활로를 스스로 폐기하는 것과 진배없는 행동이다. 이번 일에 대한 가부가 생사의 문제를 결정짓지는 않겠지만 거부한다면 어쨌든 아군을 저버리고 적군을 도와주는 배도 행위가 되니 결코 현명한 처사라 말할 수 없다.”
“으음. 양쪽 모두 완전한 아군이 아니라면 중립노선을 타는 것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중립은 없다. 아군이 아니면 적군인 셈이다. 아니면 모두 아군이거나······. 단 적아로 나눠진 극명한 세계에서 모두와 아군이 되려면 그만한 힘을 갖춰야겠지. 힘이 없다면 양쪽 모두에게 갈가리 찢겨나갈 테고 모두와 아군이 되는 것도 불가능하니 결국 중립이란 건 존재않는 허상에 불과하다. 적절한 줄타기는 필요하겠지만 저들을 얕잡아보면 곤란해.”
가장 좋은 건 양측 모두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인데 어느 한편을 택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니 잠재적 적군이자 표면적 아군인 자들의 손을 잡겠다는 말이었다. 그편이 적으로 굳어진 자들의 손을 들어주는 것보다 나으니까.
“으흠. 말씀하셨던 트리뷴의 특수성과 테세우스 님과 얽힌 악연을 생각하면 당신을 반대하는 자들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하나 트리뷴에 오르길 원하는 자들은 대체 무슨 유익이 있어서 당신이 트리뷴에 오르길 바라는 겁니까?”
“말하지 않았나? 나는 평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고.”
그게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사비누스가 의문에 찬 표정으로 테세우스를 바라봤다.
“트리뷴에 오르고자 평민들의 지지를 얻은 것은 아니나 당금 로마에서 나보다 평민들의 지지를 받는 인물은 찾아보기 어려울 거다. 그리고 평민들은 내가 트리뷴에 올라 평민들의 권익을 보장해주길 원하고 있다.”
그건 사비누스도 잘 알았다. 평민들은 줄곧 찾아와 테세우스에게 트리뷴에 오르길 말하곤 했으니까. 테세우스는 귓등으로도 그것을 듣지 않았지만 말이다.
“흐름에 편승하는 거다.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지지하는 자에게 호감을 느낀다. 콘술에 오를 것이 매우 확실한 상황이니 나를 트리뷴으로 추대하여 평민들의 지지를 확보하고 그를 통해 보다 강력한 입지를 확보하기 위함이다. 아울러 구도 자체를 삼자구도로 형성하기 위함이다. 나를 떠들썩하게 방패막으로 세우고 그사이 자신들의 이권을 챙기겠다는 속셈이겠지.”
“으음. 대체 어떤 식으로 말입니까?”
“나는 세네투스(원로원)에 위협적인 인물이다. 로마의 군단을 격파함으로 이미 한 차례 저들에게 충격을 안긴 사례가 있지. 그런 인물이 평민들의 수호자인 트리뷴에 오른다면? 심지어 저들 중 상당수는 이미 내게 적대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지.”
“으음.”
“트리뷴은 입법권, 사법권, 거부권에 이어 신성불가침까지 보장받는 로마의 정치체제와는 전혀 동떨어진 막강한 권력을 가진 직위라고 할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로마의 정무관이 제 기능을 수행했다면 트리뷴이라는 직위는 나타나지도 않았을 것이고 더 존속하지도 못했을 테니 말이다. 이는 결국 부패와 부패가 낳은 막강한 권력이라는 소리다. 달리 보면 왕의 권한과 매우 흡사하다. 그런 걸 이전까지는 사용할 줄 모르다가 그라쿠스 형제 때에 이르러 비로소 그 권한을 깨닫고 사용하기 시작했다. 뭐 트리뷴에 오르기만 하면 자연히 세네토르가 될 수 있으니 괜히 세네투스와 반목할 필요가 없었겠지. 어쨌든 술라가 트리뷴의 권한을 무용지물로 만든 건 괜히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는 소리다.”
호민관에 오른 평민을 원로원계급이나 입성할 수 있는 원로원에 들게 해줬다는 건 호민관의 권한 행사를 무용지물로 만들기 위한 달콤한 당근이라 봐도 무방했다.
평민이 원로원에? 황송해마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태도 아니겠는가? 그런 관례를 그라쿠스 형제가 과감하게 깼고 이후 권세가들은 트리뷴이 가진 강력한 권력을 확실하게 인지했다. 그러니 공화정이라 쓰고 귀족에 의한 과두정이자 귀족정이라 읽는 정치체계를 열렬히 지지했던 술라가 호민관의 권한을 증오한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테세우스는 말을 끊은 뒤 망치를 잡으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말했다시피 트리뷴의 권한을 제한한 일은 로마법을 완전히 무시한 불법이니 레게스 코르넬리아(코르넬리우스 법)는 언제든 무효화될 수 있다. 무효화된다면 트리뷴의 권한이 그 즉시 부활하지.”
사비누스는 뭔가 눈치챘다는 듯 소리쳤다.
“설마? 그래서?”
“테세우스라는 사내도 부담스러운데 거기에 더해 트리뷴의 권한까지 풀린다면? 협박거리로 충분하지 않나? 그 협박을 하는 당사자가 로마의 콘술이라면 더더욱이나!”
“허······.”
“물론 저들도 트리뷴의 부활을 원하지 않는다. 불법이면서도 지금껏 레게스 코르넬리아가 폐지되지 않은 유일한 이유이지. 단지 1년의 임기 동안 세네투스를 협박할 수 있는 수단이자 나를 유명무실한 트리뷴에 몰아넣어 로마의 영향력을 최소화시키려는 일석이조의 계책이랄까? 훌륭한 계책이다. 그것을 당면한 당사자가 어떻게 피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계책이었으니까. 나와 세네투스의 갈등을 통해 어부지리를 노리려는 술책일지도 모르고 트리뷴 부활을 미끼로 나를 이용하려는 술책일지도 모르지. 그게 뭐든 충분히 가능성 있는 추측일 거다. 간단히 말해 내가 원하지도 않는 전장에 끌려가 허수아비처럼 서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소리다.”
사비누스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면서 테세우스에게 말했다.
“이 모든 걸······. 그러니까 트리뷴에 나설 것을 요청한다는 서신 한 장만으로 이 모든 걸 유추하신 겁니까?”
“염두에 두고 있었던 바니까. 자연스레 잊혀지길 바랬는데······.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나도 가만히 당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지.”
사비누스는 테세우스의 영민함에 다시금 혀를 내두르며 입을 열었다. 잠자려는 사자의 코털을 잡아당긴 것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이 스쳐갔다.
다만 트리뷴의 권한이 모두 말소당한 지금의 상황에 무엇을 어떻게 할지 사비누스는 감이 오지 않았다.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테세우스는 피식 웃으면서 아무것도 없는 모루에 망치를 후려쳤다.
까아아앙!
사비누스가 보기에 그 모습은 마치 모든 것을 부서버리겠다는 뜻으로 느껴졌다.
“뭘 더 할 필요가 없다. 검을 두들기는 도구로 망치면 충분하듯이 트리뷴으로 충분해.”
“로마를 두들기는데 말입니까?”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젓던 사비누스는 굳은 표정으로 테세우스에게 말했다.
“선거를 준비하겠습니다.”
“뭐. 굳이 그럴 필요까지······. 쓸데없는 일이다. 싸움을 벌이든 타협을 하든 저들끼리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둬.”
하긴 테세우스에 대한 평민들의 지지를 생각하면 호민관에 당선되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호민관에 당선되기 위해서 테세우스에게 필요한 것은 출마여부를 결정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하긴······. 알겠습니다. 다만 기대하겠습니다. 제가 받을 글라디우스 말입니다.”
“그거야 뭐······. 물론 기대해도 좋을 거다.”
*
촤아아아악!
거센 파도가 뱃전을 강하게 때렸다. 파도의 포말과 더불어 바닷물에 흠쩍 젖은 해적이 측면에서 다가오는 배를 보고 급히 외쳤다.
“우현으로! 우현으로 틀어! 어서! 제.. 젠자아아앙!”
콰아아아앙! 콰지지직!
트라이림의 램(충각)으로 인해 배의 측면을 들이받친 헤미올리아(2단 갤리, 바이림을 개조한 배로 해적들이 애용)는 그대로 두동강 난 채로 바다에 가라앉았다.
바다 곳곳에서 고통에 찬 음성이 울려 퍼졌고 불길과 검은 연기가 하늘 높이 치솟았다.
“으아아악!”
“크아아아아악!”
“이 주변을 좀 먹는 해적들이다. 잔혹하기로 악명이 높은 작자들이니 자비를 보이지 말고 모조리 쳐 죽여라!”
“예! 알겠습니다.”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병사들은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며 해적들을 궤멸시켰다. 난전에 가까운 형국이었지만 우왕좌왕하는 해적들과 달리 토벌군은 난전의 진형조차 계산된 것인지 착실하게 해적들의 함선을 파괴하고 있었다.
속수무책이었다.
약탈이나 즐겨했지 언제 해적들이 함대전을 수행해보기라도 했던가? 지휘권이라도 통합되어 있다면 그나마 달랐겠지만 이 일대 해적을 통합한 해적은 존재하지 않았고 설혹 그렇다하더라도 해적의 속성상 군대처럼 일사분란한 체계를 유지할 수 없었다.
“다행히 작전대로 이뤄지고 있군.”
전투소음과 함성, 치솟아 오른 불길과 연기는 치열한 전장 그 자체였지만 한 사내만은 정갈한 복장과 정갈하게 빗어넘긴 헤어스타일을 고수하고 있었다.
“예. 카이사르 님. 이번 전투를 승리를 이끈다면 저들의 본거지를 완전히 궤멸하는 쾌거를 이룩할 수 있습니다.”
“전투는 이제 막 시작했고 승리는 함부로 장담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내게 와서 아부나 떨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야 피해를 줄일 수 있을지부터 연구해보는 게 어떤가?”
카이사르의 날카로운 발언에 표정이 굳은 지휘관은 멍한 표정으로 카이사르를 바라보다가 급히 대답했다.
“예? 옛! 알겠습니다!”
“참 우습지 않나?”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차분한 어조로 대답하는 나디르를 보며 미소를 짓던 카이사르가 다시 말했다.
“자네도 알다시피 급조한 함대야. 몇 년, 몇 달은커녕 한달도 채 걸리지 않아 결성한 함대라 이말이야. 그런데 보게.”
카이사르가 가리킨 저편으로는 완파된 또다른 해적선이 바닷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모두 카이사르 님께서 뛰어난 전술과 계획으로 인해······.”
“자네는 나를 너무 띄엄띄엄 보는군.”
차가운 눈빛으로 미소를 지은 카이사르가 다시 말문을 뗐다.
“계획? 전술? 물론 중요하지. 하나 전술이나 계획은 적당하게 수립하면 된다. 중요한 건 행동력이다. 계획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느냐가 일의 성패에 있어서 제일 중요하다. 이는 대규모 접전일수록 더욱 그러하지. 규모가 커지면 커질수록 신묘한 전술이나 계획은 비중이 작아진다. 그럴수록 기본이 중요하다. 보급물자, 병사들의 훈련과 군기, 병력의 규모 같은 것들 말이야.”
조용히 전장을 바라보는 나디르에게 카이사르가 다시 말했다.
“물론 계획과 전술이 중요하지 않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해상전을 준비해야 하는데 육상전을 준비하고 멈춰야 할 때 진군을 명한다면 그 전투 역시 패배하고 말 테니까. 내가 말하고 싶은 게 뭔지 알겠나?”
“음. 이들이 그러니까 토벌대가 이미 준비된 군대란 뜻으로 하신 말씀이십니까?”
“맞아. 내가 저들을 규합하고 지휘하기 시작한 건 한 달도 채 되지 않았어. 물론 내 마음에 차지는 않지만 해적들을 상대하기엔 부족함이 없는 병력이지. 그게 우습다는 소리다. 저들은 해적들을 처리할 수 없어서 내버려 둔 것이 아니다. 해적들을 처리해도 별다른 재미를 보지 못할 것을 알기에 내버려 둔 것이다. 어쨌든 자신들은 건드리지 않고 자기들은 손해 보지 않으니까. 이번에도 내가 채찍과 당근을 저들에게 내밀지 않았다면 저들은 해적들을 토벌할 수 있으면서도 움직이지 않았겠지. 간단히 토벌할 수 있던 해적들은 저들의 방관 아래 간단히 토벌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세력을 형성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타협하려 들겠지. 사람들을 약탈하고 살해한 해적들과 말이야.”
카이사르는 냉정한 표정으로 또다시 바다에 가라앉는 해적선을 바라봤다.
“그러니 나는 해적과 저들의 차이점을 잘 모르겠군. 개인이나 상인의 일은 이득을 기초로 이뤄지는 게 일반적이나 국가의 일이라는 건 이득만을 기초로 이뤄지면 안 된다. 하물며 개인의 일이라고 할지라도 이득만을 추구하는 자는 신뢰하지 못하고 큰일을 맡기기 어렵다. 그런데 오늘날 로마에는 상인밖에 없는 것 같군.”
과연 테세우스가 지켜보라 했던 사람이란 말인가? 속으로 크게 감탄했지만 나디르는 그저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
“바꿀 것이다. 바로 나 카이사르가! 그 자리에 부디 너도 함께였으면 좋겠군.”
나디르는 잠시나마 흔들리는 눈빛으로 카이사르를 바라봤다. 카이사르 이 자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줄 아는 사내다. 무엇을 기초로 두고 움직여야 하는지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저는 테세우스 님의 명을 따를 뿐입니다.”
카이사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말했다.
“내 제안은 유효하다. 그것만 기억하도록. 아울러 해적 토벌이 완수된 뒤에는 말했듯이 지체하지 않고 내가 있을 곳으로 돌아가겠다.”
로마로 가겠다는 뜻이리라. 나디르는 별 대답 없이 가볍게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