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1
221. 당선 후.
221. 당선 후.
1월 17일에서 25일 총 8일 동안 선거유세 기간이 주어졌다. 언급했다시피 로마에서는 정치집회가 허용되지 않았기에 후보자들은 포룸에서 유권자들, 곧 시민들을 만나거나 무료관람권을 나눠주고 매일이 멀다하고 연회를 벌여 유권자 확보에 힘을 쏟았다. 선거에 나서는 모든 후보가 당선되고자 연일 연회나 경기를 열었으니 선거유세는 매우 떠들썩한 축제와도 비슷했다.
하나 테세우스만은 예외였다.
그는 유세에 나서지도 않았고 연회를 열지도 않았으며 당연히 관람권같은 것도 나눠주지 않았다. 물론 로마시가지를 경유하다보면 포룸(광장)을 지나는 경우가 많기에 자신에게 말을 건네고 인사하는 시민들과 악수하고 통성명을 나누는 경우가 없지 않았지만 테세우스가 의도한 만남은 결코 아니었다.
사비누스는 감탄에 찬 표정으로 테세우스가 만들어준 글라디우스를 살펴보다가 테세우스에게 말했다.
“정말.. 대단한 검입니다. 어떻게 이런 검을? 로마의 대장장이들이 테세우스 님의 무구를 본다면 차마 그 얼굴을 들지 못할 겁니다.”
호라티우스는 상기된 표정으로 테세우스에게 말했다.
“명령만 내리십시오. 누구든 베어버리겠습니다.”
테세우스는 호라티우스를 바라보며 고개를 휘휘 저었다.
“검을 나눠준 것은 누굴 해하라고 준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보호하라고 준 것이다. 누군가를 해하는데 검을 쓰기 시작하면 자신이 휘두른 검에 제 목이 달아나고 말 테니 명심하도록.”
호라티우스는 테세우스의 말에 씨익 웃으며 말했다.
“설혹 제 검이 제 목을 베는 한이 있더라도 테세우스 님의 목숨을 지키는 것이 저의 임무입니다.”
호라티우스의 맹목적인 충성에 테세우스는 고개를 미미하게 흔들다가 말했다.
“호라티우스 네게는 검이 아니라 갑주를 줘야 했는데 실수했군.”
호라티우스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얼른 말했다.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으흠. 노린건가?”
“노려야지요. 이런 무구라면 누구라도 얻고 싶을 겁니다.”
사비누스와 마찬가지로 검을 연신 살펴보던 호라티우스가 테세우스에게 말했다.
“그나저나 테세우스 님은 선거유세를 안 하십니까? 뭐 문지방이 닳도록 넘나드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굳이 유세할 필요가 없는 것 같기는 하지만······.”
이곳은 테세우스가 로마에 마련한 대장간이라 사람들이 잘 몰라 찾아오지 않지만 테세우스 집은 이미 그가 호민관이 된 것마냥 평민들이 찾아와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곤 했다.
그렇다고 해도 후보 당사자가 어찌 이리도 유세에 무관심 할 수 있단 말인가?
호라티우스의 말에 여전히 글라디우스를 살펴보던 사비누스가 무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유세를 하지 않아도 당선될 테니 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음? 그건 또 무슨 말입니까?”
“트리뷴은 2명씩 뽑는 것이 관례이나 과거에 10명까지 뽑은 적도 있다. 물론 트리뷴의 권한도 말소시킨 이때에 10명이나 되는 트리뷴을 뽑을 리는 없겠지. 그러니 관례대로 2명을 뽑을 공산이 크다.”
사비누스의 말대로 BC 450경에는 10명이나 되는 호민관이 있었다. 마찬가지로 호민관이 2명 이상인 경우는 크게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2명을 뽑는다는 건 저도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게 테세우스 님이 유세에 나서지 않는 일과 대체 무슨 연관이 있다는 겁니까?”
그 말에 테세우스가 입을 열었다.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건 위험한 일이지만 어쨌든 당금 로마를 간단히 분류하자면 나를 반대하는 세력과 나를 품에 안으려는 세력 두 세력이 있다. 엄밀히 말해 그들 모두 아군은 아니지만 어쨌든 대외적으로 나는 나를 품에 안으려는 세력에 속해 있다. 그럼 나머지 한 자리는? 어떤 세력이 얻게 될까? 어떤 세력이 얻어야 그나마 잡음이 없을까?”
“잠깐. 잠깐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트리뷴은 평민을 위한 관직입니다. 심지어 그 권한도 말소당했고요. 그런 트리뷴을 저들이 신경 쓸 연유가 무엇입니까?”
그 말에 사비누스가 글라디우스를 조심스럽게 검집에 집어 넣으며 말했다.
“트리뷴은 임기 후 자동적으로 세네투스(원로원)에 입성할 수 있게 된다. 현재 켄소르(감찰관)가 없으니 굳이 거론할 필요는 없겠지만 원칙적으로 켄소르의 승인이 없이도 세네토르(의원)가 된다는 소리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대체?”
“트리뷴은 더 이상 평민을 위한 관직이 아니라 평민이 귀족 사회에 진입하기 위한 등용문에 불과하다는 소리다. 귀족들이 트리뷴에 관심이 없어도 트리뷴에 오를 이들은 저들에게 관심이 많겠지. 대다수의 평민들이 테세우스 님을 지지한다고는 하나 모든 평민이 테세우스 님을 지지하지는 않아.”
“그래서요?”
“간단히 말해서 저들은 테세우스 님의 대항마로 자신의 수족처럼 부릴 트리뷴을 만들려고 할 거라는 소리다. 테세우스 님을 품에 안으려는 세력은 두 자리 모두 자신의 사람으로 채우려는 속셈일 테고.”
“으음?”
“테세우스 님이 당선가능성이 낮다면 모를까? 이런 상황에서 유세를 하는 건 저들의 알력싸움에 힘을 보태는 일밖에 되지는 않는다. 한쪽이 완전한 우군이라고 해도 적을 필요 이상 자극하는 건 어리석은 일인데 아군이라는 자들도 우군이 아니라 적에 가깝지. 물론 저들은 테세우스 님이 유세에 나서서 자신들의 이익에 부합되는 결과를 내주길 바라지만 그로 인한 위험은 모두 테세우스 님이 져야만 할 거다.”
호라티우스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입을 열었다.
“차라리 눈앞에서 창칼이 오가는 전장이 낫겠습니다. 이건 숫제······.”
“보이지 않을 뿐 역시나 치열하고 잔혹한 전장이다. 날아오는 창칼이 무엇인지도 볼 수 없다면 애초에 전장에 발을 디디지 않는 것이 상책이겠지. 그런 눈으로 볼 것 없다. 나도 볼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그저 테세우스 님께서 움직이지 않는 연유를 생각하다보니 보였을 뿐이야.”
사비누스를 향했던 호라티우스의 눈은 다시 테세우스에게로 향했다. 호라티우스와 눈을 마주한 테세우스가 무덤덤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딱히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저들의 방식을 쫓아갈 필요도 없다. 그러기엔 너무 늦었고 저들이 더욱 능숙하다. 그저 순리대로 밑바닥에서부터 하나씩 하나씩 밟아가다 보면 순리에서 벗어난 것들은 자연히 스러질 뿐이다.”
테세우스의 담담한 말에 호라티우스는 글라디우스를 검집에 거칠게 집어 넣으며 말했다.
“무슨 말씀이든지 하명만 하십시오.”
테세우스는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검을 쓸 생각으로 말한 것이라면 아마 그 검은 1년 간은 묵혀둬야 할 거다.”
“으흠.”
“다만 로마가 아닌 곳에서 힘을 쓸 필요가 있을 듯한데······.”
“제가 쓸모가 있다는 건 눈에 보이는 전투때문이라 믿겠습니다.”
테세우스는 미미하게 고개를 흔들며 호라티우스에게 말했다.
“아니 일단은 그런 일이 없기를 바래야겠지. 전투는 없을수록 좋으니 말이야. 다만 이 일은 호라티우스뿐만 아니라 사비누스 자네 역시 마찬가지야.”
사비누스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테세우스에게 말했다.
“하명하십시오.”
“이곳에서 내가 위협당할 일은 거의 없을 거다. 700명이나 되는 형제들이 나를 지킬 테니 더 많은 이들이 나를 보호하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야. 다만······.”
“으흠.”
테세우스가 말을 꺼내기를 주저하는 것처럼 보이자 사비누스가 침음을 뱉은 후 다시 말했다.
“하명하십시오.”
“히스파니아. 히스파니아가 불안하다. 꽤 많은 공백이 있었으니 분란이나 혼란 역시 가중되었을 것이다. 로마에서 파견된 관리는 제 이득을 채우기에 급급할 테니 분란을 잠재울 생각조차 없을 테고 설혹 분란을 잠재우고자 해도 이는 거버너(총독)의 권한을 가지고 있어도 히스파니에 대한 현 로마의 영향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게 안팎으로 불안해지면 그간 엮어놓은 울타리가 찢어지게 된다.”
“으흠. 이해했습니다. 아직 당신의 영향력이 히스파니아에 살아있을 때 제가 가서 당신의 건재함을 알리고 아울러 트리뷴 위에 오른 것 역시 공표하라 이 말씀이십니까? 그 말씀을 주저한 것은 로마에 온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에게 히스파니아로 떠나라 말해야 하기 때문이고 말입니다.”
연륜은 무시할 수 없었다. 테세우스는 사비누스의 눈에서 세르토리우스의 눈빛을 느꼈다.
“염려마시지요. 로마의 화려함과 달콤함은 이미 충분히 누렸습니다. 더 이상 누리려고 한다면 검집의 끈을 제 허리에서 풀어야겠지요. 세월이 더 흐르면 그러고 싶어질지 모르겠지만 그게 지금은 아닙니다. 제가 히스파니아로 가겠습니다. 하명하실 일은 그것뿐입니까?”
“궁극적으로는 히스파니아에 가야겠지만 현재 가장 시급한 일은 마우레타니아다.”
“으흠. 보쿠스 왕의 딸이자 마스타네소스의 누이 야스미라와의 협약을 염려하시는군요. 하면 제가 야스미라 왕녀가 거주하는 팅기스로 가야 합니까?”
“팅기스 역시 나중 문제다. 마스타네소스를 만나는 것이 먼저다. 이때쯤이면 내전에 대한 휴유증을 어느 정도 극복하고 자신의 입지를 구축했을 터, 전과 같이 팅기스의 야스미라를 우리의 접선책으로 내세운다면 마스타네소스는 그녀를 쥐도 새도 모르게 암살할 수 있다. 그건 그녀에게도 우리에게도 현명한 선택이 될 수 없다. 증거가 있다고 해도 현재는 군대를 일으켜 저들을 칠 수 없는 노릇이고 안팎으로 입지를 구축한 지금의 마스타네소스라면 증거조차 남기지 않을 테니 말이다.”
“흠. 하지만 야스미라를 내버려 두고 마스타네소스와 직접 만남을 가지면 마우레타니아 왕국 내의 그녀의 영향력이 감소되니 이 또한 그녀의 목숨을 장담할 수 없게 됩니다.”
“상황이 바뀌지 않았나? 그때 나는 로마와 반목하던 사이였고 지금의 나는 로마인이다. 바로 그렇기에 함부로 군대를 일으킬 수도 없는 노릇이고.”
“확실히······. 전에는 로마와 적이었으니 상관없었지만 허가없이 함부로 군을 일으켜 타국을 친다면 상당히 위험한 일이 발생하겠군요. 마스타네소스도 그것을 알고 있을 테니 현재 야스미라의 상황은 바람 앞의 등불과 같은 형국이겠습니다.”
“그렇게 맥없이 당할 여인은 아니다. 하나 위험하다는 것에는 이견을 가질 수 없지.”
그나저나 자신의 권력과 이득을 공고히 하려는 왕에게 무슨 말을 전한단 말인가? 전에는 내전으로 인해 국력이 형편없어진지라 로마와 세르토리우스 어느 한쪽에 가담하지 않고 균형을 지키려고 애썼지만 테세우스의 말대로 내전이 어느 정도 수습되었을 테니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을 내버려 두면 그건 왕이 아니다. 마스타네소스가 내버려 둬도 그 휘하의 신하들이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로마인이 아닐 때와 로마인일 때의 차이점이 그 해답인 것으로 보이지만 잠시 고민한 것으로는 도무지 그 해답을 알 수 없었다.
“으흠. 더더욱 예상이 되지 않는군요. 마스타네소스를 만난 후 제가 무슨 말을 전하면 됩니까?”
*
1월 중순에 폭풍처럼 몰아친 선거는 별다른 사건 사고없이 무사히 끝났다. 이런 저런 일로 이번 해의 선거가 늦은 점이 없잖아 있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44개 직위에 달하는 정무관 모두의 이름을 거론할 수 없고 간단히 콘술과 트리뷴 당선자의 이름만 거론하자면 콘술 프라이오르에는 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 부르불리우스가 콘술 포스테리오르에는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가 당선됐다.
트리뷴에는 퀸투스 세르토리우스 테세우스와 그나이우스 시키니우스라는 자가 당선됐다. 그나이우스 시키니우스가 어떤 이들과 연관된 이인지는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다만 당해에도 켄소르는 선출되지 않았다. 원로원까지 감찰하는 감찰관을 누가 달가워하겠는가? 결의만 한다면 언제든 부활할 수 있는 직위지만 굳게 봉인된 무덤처럼 로마의 저편에 묻혀 있을 뿐이었다.
한 해의 첫 회의는 유피테르의 신전에서 행해졌고 1월이 며칠 남지 않은 시점이었기에 당선 후 삼일 뒤 28일에 첫 회의가 주관되었다.
테세우스는 미처 동이 트기도 전에 카피톨리누스 언덕에 올라 유피테르 신전을 바라봤다. 회의는 새벽녘부터 해질녘까지 주최된다. 가장 먼저는 해당 신전에 대한 제사를 시행하고 그 결과를 들은 후에 회의가 시작되지만 말했다시피 로마는 신정일치의 국가가 아니기에 이러한 행위는 사실상 절차나 관습에 지나지 않았다.
‘이곳에서 처음 만났던 자가 크라수스였던가?’
정확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그럴 것이다. 크라수스를 만나러 카피톨리누스 언덕을 올랐던 기억이 선명하니까.
‘당해의 첫 회의. 일단은 지켜보도록 하지.’
테세우스는 한겨울의 새벽녘을 담은 차가운 눈빛으로 유피테르 신전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