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6
226. 돌아온 사냥철.
226.
손을 들어 주변을 잠잠하게 만든 마스타네소스는 사나운 눈으로 사비누스를 노려봤다.
“내가 그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지?”
“혹 기억하십니까? 전하께서는 지금껏 손해보신 적이 없으십니다.”
“그게 무슨 말이지?”
“아스칼리스와의 내전에서 세르토리우스 님과 테세우스 님의 활약이야 익히 아실 테니 따로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저희가 내전에서 어떤 역할을 감당했는지는 전하께서도 잘 아시리라 사료되니 말입니다.”
기억하지 못 한다고 한다면 배은망덕한 군주가 되니 그리 말할 수는 없었다. 세르토리우스 군이 아니었다면 아스칼리스와의 내전에서 필패했을 가능성이 다분했기 때문이다.
마스타네소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사비누스에게 말했다.
“물론 기억한다. 그 때문에 지금껏 양보한 것이고.”
팅기스의 권한을 야스미라에게 맡겨둔 일을 거론하는 것이라는 걸 사비누스도 잘 알았다. 그러나 사비누스는 의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양보라······. 정녕 그렇게 생각하시는지요? 아무래도 전하께서는 조금 전 제가 꺼낸 말에 동의하지 않으시는 모양이군요.”
마스타네소스가 눈을 치켜뜨자 한 신하가 역정을 내며 소리쳤다.
“이 무슨 망발인가? 전하께서 당신들의 공을 인정했기에 지금껏 팅기스를 내버려 둔 것이라는 걸 정녕 몰라서 하는 소리인가?”
사비누스는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역정을 내는 신하를 바라봤다.
“우리의 공을 인정했기에? 말은 바로 합시다. 팅기스를 마우레타니아가 품었다고 해서 지금의 발전을 이룩했을 것 같소?”
“뭣이라?”
저들이 몸을 들썩거리며 사비누스를 죽일 것처럼 노려봤지만 사비누스는 형형한 눈빛으로 저들을 주시하며 말을 계속했다.
“그도 아니면 팅기스를 마우레타니아가 품었다면 이때까지 마우레타니아가 팅기스로부터 얻은 이득보다 더 큰 이득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 망상이라도 품는 것이오?”
사비누스는 서늘한 눈빛으로 주변을 바라본 뒤 발을 구르며 말했다.
쿵!
“기억하시오? 심지어 아스칼리스의 손에서 팅기스를 빼앗아온 것도 우리 군이었소. 그럼에도 우리는 팅기스에 대한 권리를 적법한 계약거래를 통해 왕녀 야스미라에게 양도하고 물러났소.”
“적법한 왕이 여기 계시거늘 야스미라에게 그 권한을 양도한 것이 어찌 적법한 행동이란 말인가?”
“황당한 소리를 하는군. 당시 일을 조금도 기억하지 못하는 모양인데 아스칼리스 군에게 완전히 밀리던 것이 귀국의 현실이었소. 그런 귀국에게 팅기스를 양도한다면 아스칼리스에게 팅기스를 고스란히 바치는 꼴인데 지금 그랬어야 했다고 우리를 비난하는 것이오? 왕녀 야스미라에게 권한을 넘기되 방위조약을 맺는 것이 당시로서는 최선의 수였소. 무엇보다 우리는 전쟁을 통해 팅기스를 전리품으로 얻은 것이니 그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당연한 행동이오. 왕녀 야스미라는 팅기스를 그녀의 손에 넘기는 대가로 충분한 대가를 우리에게 지불했고 우리는 그에 대한 대가로 그녀와 팅기스를 보호해주기로 맹약을 맺었소. 막대한 보상금을 지불하기 싫어서 모든 부담을 왕녀가 해결하게끔 내버려 둔 이들이 이제 와 딴소리라니 참 우스운 이야기 아니오.”
당시 세르토리우스 군이 야스미라에게 팅기스를 그냥 넘긴 것이 아니다. 마스타네소스조차 부담스러울 정도의 금액을 대가로 요구했고 야스미라는 흔쾌히 그것을 받아들였다. 현재 그녀는 차후 상환을 통해 점진적으로 그 금액을 모두 갚은 상황이었다. 막대한 금액을 갚고도 남을 정도의 이득을 창출하는 곳이 팅기스이니 이들이 팅기스를 탐하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사비누스가 말했듯이 팅기스는 세르토리우스 군이 아스칼리스와 싸워 무력점령한 곳이다. 물론 팅기스의 본래 주인은 마우레타니아지만 반란군을 토벌한다는 명분이 있었기에 무단점령이 아닌 사실상 합법에 준하는 점령이었고 그마저도 팅기스를 보쿠스 왕의 딸 야스미라에게 넘김으로 문제의 여지를 남기지 않았다.
그러니 마우레타니아라고 해도 이제 와 세르토리우스 군의 팅기스 점령 및 권리 등을 문제 삼기는 어려웠다. 사비누스는 바로 이러한 점을 부각시킨 것이었다.
“하나 팅기스는 본래 마우레타니아의 것이었소. 당시의 상황이 그랬다고 해도 마우레타니아의 적법한 왕이 바로 섰으니 그간의 잘못된 관행을 바로 잡는 것이 올바른 수순일 것이오!”
또 다른 신하가 목청을 높이자 다른 신하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동조했다.
“옳은 말이오. 그때 일로 말미암아 지금까지 유예기간을 준 셈이니 이제는 적법한 권한을 되찾아 오는 것이 타당한 일이오.”
테세우스가 예측한 모습에서 한치의 오차도 없는 이들의 모습에 사비누스는 가볍게 혀를 찼다.
“그 말인즉, 우리와의 관계를 단절하겠다는 소리요?”
“당시의 상황과 지금의 상황은 완전히 다르지 않소? 그때는 삼자구도였지만 지금은 로마와 아국의 관계만 남은 상황이오. 그렇다고 당신이 로마의 사절도 아닌 바에야 관계의 단절이니 어쩌느니 언급하는 것도 이상한 일 아니겠소?”
신하의 말대로 당시에는 로마, 마우레타니아, 세르토리우스 이렇게 삼자구도였다.
“옳은 말이오. 국가의 일은 국가 간에 이뤄지는 일이지 개인이 국가와 어떤 거래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오. 애초에 급이 맞지 않으니 그럴 수밖에.”
테세우스의 영향력이 강대하다고는 하나 로마에 속한 이상, 로마의 의사와 관계없이 전쟁을 일으키거나 보복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하는 말이었다.
이들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마스타네소스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비누스에게 말했다.
“왕의 이름으로 팅기스에 대한 야스미라의 권한을 인정해주지 않는다면 어쩔 생각인가?”
사비누스는 그런 마스타네소스의 눈을 마주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왕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어찌 막을 수 있겠습니까? 뜻대로 하시지요.”
사비누스의 말에 미간을 꿈틀거리던 마스타네소스가 입을 열었다.
“그것이 전부인가? 나의 심기를 상하기 위해 이 자리에 온 것이라면 그 죄를 물어 네 목을 쳐도 상관없으렷다?”
“그것이 왕의 뜻이라면 역시 어찌 막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한 말씀만 더 올리자면 로마의 레가투스조차 결국 테세우스 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는 것을 잊지마시길 바랍니다.”
“감히!! 왕 앞에서 협박을 늘어놓는 것인가?”
마스타네소스의 장군으로 보이는 자가 서릿발 같은 기세와 함께 고함을 질렀다. 사비누스는 차분한 어조로 그에게 답변했다.
“로마의 트리뷴은 1년 간 로마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로마를 벗어날 수도 없는 분께서 어떻게 마우레타니아의 위협이 될 수 있겠습니까? 아니 그렇습니까?”
그것을 알기 때문에 너희가 이렇게 나오는 것 아니냐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음을 알아차린 이크람이 침음과 함께 입을 열었다. 아국이 이렇게 나올 것을 알고도 받아들이기 힘든 제안을 내놓았다는 것은 분명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으흠. 아국이 받아들이기 힘든 제안을 내놓은 뒤 뜻대로 하라고 하는 것은 대체 무슨 의도요? 정녕 아국을 모욕하려는 의도로 이곳에 온 것이오?”
이크람 역시 눈매를 좁히며 사비누스를 노려봤다.
“모욕이 아니라 잠시나마 같은 길을 걸었던 동료에게 충고하기 위해 저를 보내셨습니다.”
“충고?”
“그렇습니다.”
“그게 무엇이오?”
“남쪽의 게툴리족과 해상의 마사에실리족. 그들을 잘 아우러야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크람은 사비누스의 말에 눈이 번쩍 뜨였다.
“그게 무슨? 설마하니?”
“저희가 구태여 마우레타니아 왕국과 척을 질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말씀하신대로 저희는 국가의 격도 갖추지 않은 일개인일 뿐인데 말입니다. 좋은 의도로 와서 괜한 오해를 얻고 싶지는 않습니다.”
“좋은 의도? 좋은 의도라 했느냐? 그게 아니라면 무도한 무리들을 언급하는 이유가 무엇이란 말이냐?”
마스타네소스가 크게 분노한 얼굴로 소리쳤다.
“정녕 몰라서 하시는 말씀이십니까? 남쪽의 게툴리족이 나날이 강성해지고 있다는 소식은 저 멀리 로마에서도 들을 수 있었고 해상무역을 통해 마사에실리족 역시 부강해지고 있다는 소식 역시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었습니다. 전하께서도 아시다시피 힘을 가진 족속은 어떻게든 그 힘을 쓰기 마련이지요. 공교롭게도 전하의 영토가 그들과 근접해 있으니 실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사비누스의 말에 대노할 것처럼 보였던 마스타네소스는 의외로 침착함을 유지하며 입을 열었다. 물론 그의 얼굴은 분노로 크게 일그러져 있었다.
“더는 돌려 말하지 말고 고하라! 그가 내가 뭐라 전하라 했는지 모두 고하란 말이다.”
“명하신 대로 고하겠습니다.”
사비누스는 잠시 말을 멈춘 뒤 다시 말을 이었다.
“마사에실리족은 야스미라 왕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게툴리족은 테세우스 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요. 왕께서 테세우스 님의 제안을 받아들이신다면 전에 그랬듯이 팅기스를 취하는 것보다 더 큰 이득을 얻으실 수 있을 겁니다. 테세우스 님은 예전에도 그랬듯이 앞으로도 전하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 하십니다.”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저희가 뭘 어쩌겠습니까? 모든 것은 왕의 뜻대로 하십시오.”
담담하게 말을 맺는 사비누스를 보며 마스타네소스는 두려움을 느꼈다. 이빨 빠진 사자라고 생각했거늘 어찌 이리도 명확하게 왕국의 상황을 파악하고 있단 말인가?
팅기스를 점령하는 일은 단순히 팅기스의 부를 탐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부와 함께 커져가는 야스미라의 영향력이 목안에 걸린 가시처럼 성가셨기 때문이었다. 사비누스의 말따라 그녀는 나날이 부강해지는 마사에실리족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니 어떤 식으로든 제동을 걸 필요가 있었다.
또한 남쪽의 게툴리족. 테세우스가 저들과 함께 로마의 토벌군과 싸운 일은 마스타네소스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전쟁에서 귀환 후 전례없이 막강한 세를 떨치고 있었다. 빠르면 올해 늦으면 내년 쯤에 저들의 침략이 이뤄질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그러니 그 전에 전비를 확충해야 했다. 이는 팅기스를 취하려는 여러 이유 중 하나였다.
“다만 왕께서 결정하시기 전에 테세우스 님의 마지막 전언을 전하겠습니다.”
사비누스는 서신을 품에서 꺼내 마스타네소스에게 전했다. 마스터네소스는 사비누스에게 받아 그곳에 쓰인 내용을 읽었다. 그리 긴 내용은 아니었지만 마스타네소스는 입안이 바짝바짝 메말라 오는 것을 느꼈다.
<마우레타니아의 위대한 왕이시여. 저는 지금껏 수많은 전쟁을 치렀지만 두 가지 명확한 기준이 있습니다. 나와 함께한 자에게는 내가 얻은 과실을 항상 나눠주었으되 내 것을 탐하고 빼앗으려는 자는 모조리 짓밟아버렸다는 두 가지 기준 말입니다. 왕께서는 부디 아스칼리스와의 내전을 기억하시어 현명한 판단을 내리시길 바라는 바입니다. 앞으로도 마우레타니아 왕국에 왕의 이름이 울려 퍼지길 소망하며 이만 글을 마치겠습니다.>
팅기스의 발전은 국내의 정세 역시 안정시키는 데 큰 도움을 줬다. 부강해진 마사에실리족이 반란을 일으키거나 나날이 세를 더해가는 게툴리족이 침략전쟁을 걸어오지 않은 이유 중 하나가 테세우스의 이름 때문이라는 것 역시 모르지 않았다.
도대체 왜 로마에 항복을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막강한 세를 구축하고 있던 테세우스였다. 그는 은연중에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를 대적하고 나의 사람을 건드리려 든다면 네 왕국을 전화에 휩싸이게 만들고 네 왕권까지 빼앗아버리겠다고 말이다.
마스타네소스는 굳은 표정으로 한참 동안 서신을 바라보다가 양쪽 옆에서 불타고 있는 작은 화로 중 하나에 서신을 불태워버렸다.
“가서 전하라. 팅기스는 전과 같이 야스미라에게 맡길 것이며 왕의 이름으로 그것을 보증하겠다고.”
그것이 최선이었다. 차라리 팅기스라는 도시 하나를 속국의 형태로 두고 전체 왕국의 안전을 보장받는 것이 훨씬 현명한 선택일 테니까.
마사에실리족은 그렇다 쳐도 게툴리족은 매우 사나운 족속이다. 저들을 막으려면 상당한 피해를 감수해야만 할 것이다. 그런데 테세우스는 자신의 손을 잡으면 저들의 침략까지도 알아서 해결해주겠다고 제안한 것이다. 그러니 어찌 거부할 수 있으랴?
“실로 현명하시고 영민한 결정에 감사드립니다. 그리 전하겠습니다.”
사비누스가 그렇게 말하자 마스타네소스는 언제 인상을 찌푸리고 화를 냈냐는 듯 표정을 바꾸며 큰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귀한 손님이 왕국에 왔으니 연회장은 연회를 준비하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사비누스는 그 모습에 테세우스의 당부가 다시금 떠올랐다. 간단한 내용이지만 왕의 심기를 극도로 자극해서는 아니된다고. 그래서 사비누스 자신을 보내는 것이라고 말이다. 사비누스는 마스타네소스에게 정중하게 감사를 표했다.
“환대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