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7
257. 스파르타쿠스.
257.
테세우스는 말을 달리다가 어느새 자신을 뒤쫓아오는 이두마차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맹수보다도 민감한 감각을 지닌 테세우스가 그 정도 하나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이상한 일이리라.
테세우스는 말의 고삐를 슬쩍 잡아당겨 말을 멈춰 세운 다음 저들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천상의 전사처럼 우뚝 서서 자신을 바라보는 테세우스의 눈빛에 마부는 마른침을 삼키며 긴장을 감추지 못했지만 테세우스 앞에 마차를 멈춰 세우며 입을 열었다.
“도······. 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사님이 아니셨다면 무도한 도적들에게 끔찍한 일을 겪고 말았을 겁니다.”
테세우스는 말없이 사내를 바라보다가 아까는 무심코 지나쳤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사내의 복색이 로마인의 복색이 아니라 과거 셀레우코스 제국 문화권에 속한 지역의 복색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복색을 떠나서 사내의 얼굴 자체가 로마인이나 그리스인처럼 생기지 않았다.
당연히 전투를 앞에 두고 있는 테세우스가 그런 들을 살필 이유도 필요도 없으니 넘어갔던 사실이지만 여유를 두고 차근히 살피니 그러한 특이점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세심하게 신경쓸 이유가 없었다. 로마에 타국 사람들이 왕래하는 것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말이다. 따라서 테세우스는 냉정한 어투로 그에게 말했다.
“나를 따라온 이유가 뭐지?”
테세우스의 서늘한 눈빛에 사내는 말을 더듬으며 입을 열었다.
“도.. 도움을 요청드리고자.”
“도움?”
짧게 말을 뱉은 테세우스가 눈매를 좁히자 사내는 더욱 허둥거리며 입을 열었다. 마치 당장에라도 들고 있는 기묘한 무기로 자신을 베어버릴 것같은 압박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 그것이!”
그때 마차 안쪽에서 나긋한 여인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나세스, 물러나세요. 그리고 마차의 문을 열도록 하세요.”
그러자 나세스라 불린 사내는 크게 놀란 표정으로 마차를 향해 입을 열었다.
“하.. 하오나.”
“생명의 은인에게는 직접 인사드리는 것이 예의예요. 두 번 말하지 않겠어요.”
여인의 단호한 대답에 나세스는 테세우스를 힐끗 거리며 마차의 문을 열었다. 그러자 그곳에서 얼굴을 얇은 천으로 가린 여인이 마차에서 내린 뒤 테세우스를 바라봤다.
테세우스의 강렬한 기세에 그녀 역시 움찔하는 기색을 보였지만 마부와는 달리 담대하게 그의 앞에까지 다가와 예를 표하며 입을 열었다. 그 모습이 상당히 우아했기에 테세우스는 내심 작게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아니었다면 끔찍한 일을 당했을 것이 분명했는데도 두려움에 함몰되지 않은 당돌한 모습에 감탄했다고 해야 할까?
‘어디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취하는 예법을 볼 때 상당히 귀한 신분을 가진 여인이로군.’
또한 그 모습을 통해서 여인의 신분을 추측할 수 있었다. 하긴 마적떼들도 고귀한 가문의 여인이라 소리쳤으니 이건 별로 특별할 것도 없었다.
다만 여인이 이것까지 고려한 것이라면 현명한 여인이라 할 수 있으리라. 은연중에 고귀한 신분임을 드러내어 자신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끔 만드는 처세술이라 할 수 있으니 말이다. 물론 고귀한 신분만을 믿고 예의를 잃었다면 이 사실이 도리어 화가 되었을지 모르나 그녀는 매우 낮은 자세로 테세우스를 대했다.
“은인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전사님이 아니었다면 저는 몹쓸 짓을 당하고 결국 죽고 말았을 겁니다.”
테세우스는 예를 표하는 여인을 여전히 서늘한 눈빛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이제 보니 그렇지도 않았을 것 같군. 내게 굳이 도움을 요청할 이유도 없을 듯하고.”
그러면서 테세우스는 겁에 질린 듯한 표정으로 서 있는 마부를 슬쩍 주시했다.
나세스는 테세우스의 눈빛에 자신의 폐부까지 낱낱이 공개되는 것같은 느낌을 받고 더욱 긴장한 표정으로 테세우스를 바라봤다. 어찌 알아차렸단 말인가?
테세우스는 다시 여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러니 제 갈길 가시오. 도울 필요가 없는 자들을 도울만큼 여유롭지도 않으니까.”
여인은 더욱 낮게 몸을 낮추며 입을 열었다. 당황한 나세스가 그녀를 만류하려고 했으나 그녀는 가볍게 손을 내저어 그를 뒤로 물렸다.
“말씀하신대로 은인의 도움이 없었더라도 무사했을지도 모르지만 저들은 마적떼였습니다. 저들이 두렵지 않았다면 마냥 도망치고 있지만 않았을 겁니다. 그러니 저희의 목숨을 구해주신 것이 맞습니다. 아울러 은혜에 감사드리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했구요. 저 역시 나세스가 요청한대로 전사님께 안전한 곳까지 호위를 요청드리고 싶지만 은인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저희가 은인의 앞길을 막아서는 아니되겠지요.”
테세우스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여인을 말 위에서 내려다 보았다.
‘이대로 길 위에서 비명횡사한다면 별로 좋지는 않을 것같군. 마부로 위장한 살수라지만 전면전에는 아무래도 약세를 보일 테니······.’
테세우스는 눈앞의 여인의 태도가 자신의 마음을 움직였음을 딱히 부인하지는 않았다. 말 한마디가 천냥 빚을 갚는다고 했던가? 아무 것도 아닌 말 한 마디가, 태도 하나가 때로는 생사를 결정짓기도 하는 법이다. 더욱이 눈앞의 여인은 왕을 앞에 둔 신하처럼 자신을 낮추고 있었다.
처세술이 뛰어나다면 뛰어난 것이고 현명하다면 현명한 것이리라. 테세우스의 보호를 받는다면 누가 저들을 죽일 수 있을까? 운과 육감이 좋은 여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테세우스는 거두절미하고 입을 열었다. 저들이 어디 출신인지 어떤 신분인지 어떤 목적인지는 중요한 내용이 아니었고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내가 당신들을 모조리 죽일 것은 고려하지 않는 건가?”
“그랬다면 애초에 저희를 도와주시지도 않았겠지요. 상황이 갈수록 나빠지고 있으니 이런 상황에서 무엇을 숨기겠습니까? 저는 카파도니아의 이시아스라고 합니다.”
나세스는 이시아스가 자신의 이름을 밝히자 두려워하던 표정을 모두 지워내고 싸늘한 표정으로 테세우스를 경계하고 있었다. 사실 싸늘하다기보다는 극도로 긴장한 표정에 가까웠다.
“카파도니아의 이시아스?”
카파도니아는 셀레우코스 왕국 북쪽과 폰토스 왕국 남서쪽에 위치한 왕국으로 테세우스도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이시아스?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예. 카파도니아에서 시칠리아의 시라쿠세로 여행을 왔다가 갑작스러운 난리를 피해 이곳까지 급히 도망치던 중 은인의 도움을 얻게 되었습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은인의 존함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테세우스의 이름을 묻기 위해 먼저 자신의 이름을 밝힌 것이리라. 확실히 영리한 여인이었다. 자신의 이름을 밝히는 것이 무슨 거리낄 문제가 되겠는가? 따라서 테세우스는 거침없이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퀸투스 세르토리우스 테세우스.”
“테세우스?”
나세스가 깜짝 놀라며 그의 이름을 반문했다. 이시아스가 그를 가만히 바라보자 나세스는 차근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제가 아는 테세우스는 로마의 트리뷴이었고 검투사의 악몽이라 불린 디오클레스를 단신으로 살해한 사내입니다. 세르토리우스 가문의 테세우스라는 이름을 가진 사내는 그 외에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작년에 트리뷴의 권한이 부활되었으니 당해에는 세네토르가 되었을 겁니다.”
말하는 것을 들어보니 나세르 이자는 로마의 소문과 정세에 제법 박식한 것으로 보였다.
이시아스는 나세스의 말과 확신에 찬 표정을 보고 눈앞의 테세우스가 바로 나세스가 말한 그 장본인이라 여겼다. 로마의 정세에 대해서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기에 사실 그녀도 테세우스의 이름을 들어보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이에 그녀는 얼굴을 가린 천을 걷어내며 테세우스의 얼굴을 바라봤다.
“다시 소개드리겠습니다. 카파도니아의 아리오바르자네스 왕께서 제 아버지 되시며 아테나스 필로스토르고스 여왕께서 제 어머니 되십니다. 카파도니아의 왕녀 이시아스가 로마의 세네토르를 뵙습니다.”
천을 걷어낸 그녀의 나이는 상당히 육감적인 몸매와는 다르게 불과 앳되어 보이는 소녀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혼혈로 매우 이국적이고 화려한 미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이는 그녀의 아버지 카파도니아의 왕 아리오바르자네스 1세는 페르시아 혈통의 귀족 출신이었고 그녀의 어머니 아테나스 필로스토르고스는 그리스 귀족 출신이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녀와 그녀의 오빠인 아르오바르자네스 2세 모두 혼혈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테세우스에게 그녀의 미모는 안중에도 없었다.
‘카파도니아의 왕녀가 시칠리아는 대체 왜?’
뭐 시칠리아에 왕녀가 여행을 올 수도 있다. 드문 일이지만 아예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게다가 로마의 상원이 BC95년 카파도니아의 아리아라테스 9세의 퇴임을 명하고 아리오바르자네스 1세를 왕으로 삼았기에 카파도니아는 친로마 왕국이자 속국이라 할 수 있었다. 로마에 카파도니아 왕녀가 여행차 오는 일이 기이한 일은 아니라는 소리다.
하지만 왜 하필 노예반란이 일어날 때 로마에 그것도 시칠리아에 당도했단 말인가? 우연도 이런 우연이 없었다. 노예반란에 휘말린 타국의 왕녀를 조우하는 일이 어찌 흔한 일이겠는가?
하나 그녀의 우아한 예법과 호위하고 있는 자의 실력을 감안할 때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잠시 말을 아끼던 테세우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왕녀라고 보기엔 호위병력이 너무 적군.”
테세우스의 의문에 나세스가 입을 열었다.
“시라쿠세 역시 노예반란으로 함락되었습니다. 아시다시피 타국의 왕족이라 할지라도 로마 내에서 많은 병력을 소유하긴 어렵습니다. 따라서 왕족의 신분을 내세워 로마군의 호위를 받고자 하였는데 시칠리아의 상황이 심각해지자 로마군이······.”
자신들을 외면하고 퇴각했다는 말이 생략된 것이리라.
‘음. 예상대로 시라쿠세 역시 함락되었나?’
곰곰이 생각에 잠긴 테세우스의 표정을 살피던 나세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당장 도움을 청할 수 있는 로마군은 이미 메사나 지역으로 후퇴한 뒤였습니다. 하여 다급한대로 북서쪽의 파노르모스 지역으로 이동하고 있던 중이었으나 별 탈 없이 이곳까지 벗어난 것도 천운이었습니다.”
나세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시아스가 입을 열었다.
“로마의 동맹국의 왕녀로서 저를 보호해주실 것을 공식적으로 요청드립니다. 저 이시아스는 물론이거니와 카파도니아 왕실은 세네토르 테세우스 님의 호의를 결코 잊지 않을 겁니다.”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요청이다. 물론 이들을 살인멸구하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무시하면 될 일이지만 뭐한다고 그런 짓을 하겠는가? 달리 생각하면 이들의 증언은 시칠리아 정규군의 입지를 약화시키고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는데 큰 도움이 될 수도 있었다. 사사로이 군을 움직이더라도 말이다.
가장 간단한 것은 본국이든 시칠리아든 그런 것을 따지지 못할 때까지 처참하게 파괴되도록 내버려 두었다가 움직이는 일이지만 그건 너무 잔혹한 일이 아닌가? 물론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할 것이지만 별로 내키지 않는 일이었고 자신에게도 이로운 결과를 낳지 못할 것이 분명했으니 고려할 바가 되지 못했다.
“······. 원하는 요청이 파노르모스까지의 호위인 것이오? 아니면 나의 보호를 요청하는 것이오?”
“앞서 겪은 일이 있으니 시칠리아의 관리들은 믿을 수 없습니다.”
“보다시피 나는 혼자에 불과하오.”
테세우스가 완전무장을 갖추었다지만 현재 어떤 군대를 이끌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 자신의 뭘 보고 자신을 믿겠다고 말하는 것이란 말인가?
이시아스는 그런 테세우스를 지그시 바라보며 반문했다.
“혼자인가요? 정말로 그렇다고 할지라도 시칠리아의 관리들과 로마군이 지금 제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나요? 도움을 주시면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테세우스는 강단있게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이시아스의 눈을 바라보다가 말없이 말머리를 돌린 뒤 입을 열었다. 여행이라 표현하기는 했지만 분명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카파도니아의 왕녀가 직접 로마로 올 일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그녀를 도운 후 차차 확인하면 될 일이다.
“시간이 많지 않으니 바로 출발할 것이오. 준비하시오.”
“거듭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