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8
258. 난세의 재림.
258. 난세의 재림.
비티니아는 폰토스 왕국의 서쪽에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왕국으로 이곳의 왕인 니코메데스 4세는 BC 94년 니코메데스 3세의 죽음으로 왕위를 계승했다.
왕위 계승 후 몇 년은 무탈하게 왕국을 이끌었으나 그의 외종조부이자 폰토스 왕국의 미트리다테스 6세의 지원을 얻은 그의 형 소크라테스 크레스토스의 반란으로 왕위를 잃고 간신히 로마로 도망친다.
니코메데스 4세는 로마의 도움으로 다시 왕위를 되찾기는 하나 BC 88년 미트리다테스 6세의 침공으로 다시 로마로 도망친다.
미트리다테스 6세는 자신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재림이라 부르며 스스로를 메가스(대왕)라 칭하게끔 할 정도로 야심이 넘치는 왕이었다. 실제로 전쟁 초기 로마군을 격파하며 뛰어난 면모를 보여주기는 했으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펠릭스라는 걸출한 인물 앞에 모든 전투에서 패배하고 간신히 왕위만 유지하게 된다.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가 로마에서 술라의 세력을 초토화시킴에 따라 술라가 급히 로마로 돌아갈 일만 없었더라면 왕위 유지는커녕 술라의 손에 사로잡혀 처참하게 살해당했을 것이다. 이것이 제 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의 전말이다.
그러면서 술라는 자신의 부관 두 명과 군단을 남겼는데 그 중 한 명인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무레나가 폰토스 왕국에 속한 코마나를 공격함으로 제 2차 미트리다테스 전쟁(BC 83-81)이 시작된다.
무레나는 카파도니아 왕국에 거하며 폰토스 왕국을 침공했으나 미트리다테스 6세는 알리스에서 무레나를 습격, 그를 격파하는데 성공하고 카파도니아의 모든 로마군을 축출해버린다.
이에 술라는 가비니우스를 파견해 카파도니아의 아리오바자네스 1세와 미트리다테스 6세를 화해시키고(미트리다테스 6세는 자신의 어린 딸을 아리오바자네스 1세와 약혼시키고 카파도니아의 영유권을 인정) 무레나를 소환시킴으로 전쟁을 종식시킨다.
제 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역사대로라면 이 전쟁은 BC 73년 미트리다테스 6세가 아르메니아의 티그라네스 2세와 함께 로마를 침공함으로 일어나며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라는 명장에 의해 종식된다. 이 전쟁 후 미트리다테스 6세는 자결함으로 생을 마감한다.
제 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이 일어난 계기는 비티니아의 왕 니코메데스 4세가 유언으로 왕국 전체를 로마에 증여했기에 발생했다. 로마의 상원은 비티니아 전체를 로마의 속주로 삼았기에 미트리다테스 6세는 매우 큰 압박감을 느꼈을 것이다.
로마가 흑해를 접하고 있는 트라케(트라키아인의 거주지)에 이어 비티니아까지 삼킨다면 흑해에 대한 영향력이 훨씬 더 막강해질 터, 이는 미트리다테스 6세가 과거 비티니아를 침공한 이유와도 연관된 부분이었기에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공교롭게도 이 사실은 카파도니아의 왕녀 이시아스가 로마로 향한 이유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테세우스는 미간을 좁히며 모닥불에 비친 이시아스를 바라봤다.
“지금 뭐라고 했소?”
“들으신 그대로입니다. 비티니아의 니코메데스 4세가 별세할 때 유언으로 비티니아 전역을 로마에 증여했습니다.”
참고로 이 니코메데스 4세는 카이사르와 동성애 소문으로 얽혔던 바로 그 왕이었다. 본래 역사에서는 BC 74년에 사망하는데 역사가 또다시 틀어진 모양이었다.
화산폭발에 노예반란까지 일어난 마당에 별 관심도 없는 머나먼 동쪽 지역의 이야기를 왜 계속해서 꺼내냐했더니 이런 폭탄같은 발언을 던지기 위한 밑밥이었단 말인가? 테세우스는 표정을 굳히지 않을 수 없었다.
“제가 로마로 온 진정한 이유입니다. 비공식적으로 로마로 향할 수밖에 없던 이유이기도 하고 말입니다. 비티니아 왕국과 저희 왕국의 사이는 친밀한 편이었기에 폰토스 왕국보다 빠르게 소식을 전달받을 수 있었지만 함부로 경거망동할 수 없는 중대한 사안이었으니까요.”
테세우스는 이시아스가 말한 저의가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카파도니아는 비티니아와 마찬가지로 폰투스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곳이었다. 두 왕국 간에는 갈라티아라는 로마에 속한 지역이 하나 있을 뿐이었고 친로마 왕국이라는 것까지 비슷했다.
비티니아 왕국이야 왕의 유언이 그렇게 떨어진 이상 로마에 예속되는 것이 수순이라지만 카파도니아는 그렇지 않고 지난 2차 미트리다테스 전쟁 때 폰토스 왕국에게 크게 당한 기억이 있으니 카파도니아는 로마 본국의 상황을 서둘러 파악할 필요를 느꼈을 것이다.
로마에 협력할 것인지 아니면 폰토스 왕국 편에서 로마를 대적할 것인지를 결정하기 위해서 말이다. 로마가 폰토스에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다면 왜 로마를 대적하겠느냐만은 자국보다 타국이 우선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로마의 상황이 나쁘다면 지난 의리를 지키다가 피를 보는 건 결국 카파도니아만 될 것이다.
“로마군의 호위를 제대로 받을 수 없던 이유 역시······.”
“예. 이런 난리통에 카파도니아의 왕녀라고 외친들 누가 믿을까요? 믿는다고 한들 정세에 문외한인 군인들이 신경쓸 일도 아니었겠죠. 다만 시라쿠세의 관리들이 혹여나 싶어 저를 보호하긴 했지만 저들도 목숨이 경각에 달하자 저는 아랑곳하지도 않더군요.”
테세우스는 마음속 작은 의문이 풀리긴 했지만 그 대가로 전화에 휩싸이는 로마를 상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씁쓸한 감정에 침묵을 지키고 있는 테세우스에게 이시아스가 다시 말했다.
“하지만 로마가 이런 상황이라면······.”
테세우스는 모닥불에 비춰 발갛게 보이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
“로마는 쉽사리 자신의 영토를 내어줄 나라가 아니오. 게다가 미트리다테스 그 자가 그토록 위험한 왕이라면 더더욱이나 그렇겠지. 하지만 그때까지 카파도니아가 무사할 것이라고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을 것이오.”
“제가 어떤 선택을 내려야 한다고 보시나요?”
“그 전에 카파도니아가 폰토스보다 로마를 택하려는 이유가 무엇이오?”
“카파도니아는 아직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았어요.”
“폰토스에 마음이 더 있었더라면 굳이 로마의 상황을 살피러 이곳까지 올 필요도 없었겠지.”
“정탐하기 위해서 왔을 수도 있지요.”
그녀의 반론에 테세우스는 부지깽이로 말없이 모닥불을 뒤적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니라면, 또한 개인적인 감정일 뿐이라면 모르겠지만 당신은 내게 시종일관 미트리다테스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했소.”
이시아스는 테세우스를 바라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후우······. 비단 제 감정만은 아니예요. 부왕께서도 폰토스 왕이라면 치를 떨고 계시지요.”
“크게 두 가지 이유였겠군. 하나는 로마의 상황을 파악하고 폰토스 왕국의 움직임을 로마에 미리 알려 카파도니아를 어떻게든 돕게 만들려는 이유 말이오.”
로마 본국이 아니라 시칠리아로 들린 것은 카파도니아에서 배를 타고 로마로 가기 위해서는 어차피 장화처럼 생긴 이탈리아 밑바닥을 경유해서 와야 할 테니 겸사겸사 들린 것으로 보였다. 물론 정확한 이유야 테세우스가 어찌 알겠느냐만은 이곳 시칠리아가 로마의 식량창고라는 걸 모를 사람으로 보이진 않았으니 이곳의 물류량을 확인하고 로마의 경제를 가늠하고자 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예. 맞아요. 로마에 가보지도 못하고 죽을 뻔했지만 말이예요.”
“지금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요.”
“아마도 그렇겠지요. 하지만 한입으로 두말할 분으로 보이진 않네요.”
딱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단 한 마디 말로 목숨을 걸고 지켜줄 사람으로 만들어버렸다. 이에 테세우스는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입을 열었다.
“사람을 다루는 능력이 상당히 능숙하군.”
“혹 마음에 거슬렸다면 용서하세요. 하지만 제가 뭘 할 수 있을까요. 제게는 테세우스 님과 같은 뛰어난 능력같은 건 없어요. 연약한 여인이 살아남기 위해 허언한 것이라 부디 이해해주세요.”
테세우스는 가볍게 예까지 표하는 그녀를 무심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배를 구하는 것조차 어려울 것이오. 그러니 내 호의는 파노로모스까지요. 로마로 가는 것은 당신들이 알아서 해야 할 일이오.”
테세우스의 말에 이시아스는 정말 얼음처럼 차가운 사내라고 생각했다. 빈말이나 허언이라도 따뜻하게 말해줄 수 있는 것 아닌가? 호위병사는 물론 배와 선원을 비롯해 재물까지 잃은 자신이 로마의 도움이 없이 무슨 수로 로마까지 갈 수 있단 말인가? 이에 이시아스는 테세우스의 도움에 대해 고마워하는 것과 별개로 내심 야속한 마음이 들었다.
“은인에게 많은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로마로 가는 배편만 구해주신다면 나머지는 저희가 알아서 할께요.”
“카파도니아가 파악한 내용을 폰토스가 모를 것이 생각하는 건 지극히 오만하고 위험한 생각이오.”
“예? 그게 무슨 말인가요?”
“카파도니아는 이 일의 다급함과 로마에 대한 신뢰를 얻기 위해 당신을 사신으로 파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그 일 역시 미트리다테스가 알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소리요. 심지어 카파도니아는 이미 폰토스에게 함락당한 적이 있지 않소? 비티니아는 말할 것도 없고 카파도니아에도 미트리다테스가 심은 사람이 있을 것이오.”
이시아스가 심각한 표정이 되자 테세우스가 다시 말했다.
“로마에서 카파도니아의 왕녀가 피살당한다면 이유야 어쨌든 그건 로마의 책임될 테고 일이 그리되면 로마를 적대하진 않더라도 로마에 도움을 주지는 않을 테니 미트리다테스로서는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러니까 지금 말씀하시는 내용은?”
“이곳 시칠리아의 상황과 비교하는 것이 모순이기는 하나 이곳 시칠리아보다 로마가 당신에게 더 위험한 곳이 될 수 있소. 더욱이 재난과 반란에 정신이 팔린 로마가 타국의 왕녀에 대해 깊게 신경쓸 것이라 보기도 어렵고.”
“······.”
“로마로 가겠다면 배편을 알아봐 줄수는 있소. 하나 안전은 책임질 수 없소.”
이시아스는 계속해서 침묵을 지킨 채 묘한 눈으로 테세우스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제가 어떻게 해야 하나요? 시간이 촉박하다는 것은 당신도 아실 테니 일신의 안전을 위해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예요. 아니 테세우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시간이 생각했던 것만큼 촉박하지는 않을 거요.”
“그게 무슨? 그게 무슨 뜻인가요?”
지금껏 자신의 말을 귓등으로 들었단 말인가? 이시아스는 잠시 황당한 마음이 들었지만 지금껏 보여준 테세우스의 모습에 믿음을 가지고 귀를 기울였다.
“미트리다테스는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무레나에게 대승을 거두고 카파도니아를 짚어 삼키기까지 했지만 술라가 보낸 가비니우스의 중재를 따라 점령지를 내어주고 평화 협정을 맺었소. 심지어 두 번째 전쟁은 무레나가 먼저 시작한 전쟁이었지.”
테세우스가 잠시 말을 멈추자 이시아스는 그 말의 의미를 곱씹다가 말했다.
“술라를 두려워했기에 멈췄다고 보는 건가요?”
“로마와 직접 싸우고 대패까지 겪은 미트리다테스라면 잘 알 것이오. 그러니까 자국의 역량과 적국의 역량을 누구보다 잘 알겠지. 그렇기에 승전을 거두고도 평화협정을 맺은 것일 테고. 다시 전쟁을 치른다면 결코 홀로 로마에 대적하지 않소. 그러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하지. 섣불리 카파도니아를 건드리진 않을 거요. 그 전에 물을 것이 있소. 그 근방에 폰토스 왕국 말고 강성한 왕국이 어디가 있소? 일단 셀레우코스는 아닐 테고.”
“아르메니아의 티그라네스. 지혜롭고 용맹한 왕으로 명성이 자자한 왕이예요. 파르티아와 셀레우코스 왕국은 물론 수많은 적들과 싸워서 승리한 왕이기도 하지요.”
“그럼 아르메니아와 동맹을 맺겠군. 카파도니아는 아르메니아가 폰토스는 비티니아를 나누기로 협정을 맺고 말이오. 그런 점에서 카파도니아가 폰토스가 아니라 로마를 택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소.”
이시아스는 당황한 표정으로 테세우스에게 말했다.
“이.. 이를 어쩌죠? 이를 어쩌면 좋죠? 폰토스와 아르메니아가 연합한다면 그 근방에서 저들을 막을 왕국이 없어요. 게다가 로마는 현재······.”
당황한 이시아스를 바라보던 테세우스는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게 어떻게 할 것을 물었으니 답해주겠소. 물론 선택은 당신이 내리도록 하시오. 일단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나라면 로마로 가지 않겠소. 자신의 신분과 내용을 증명해줄 수 있는 자에게 대신 전해줄 것을 의탁하겠지. 협상이 완료된 이후에 로마로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테고. 아예 본국으로 돌아가는 방법도 있겠지.”
테세우스의 말에 마음을 진정시킨 이시아스가 그를 바라봤다.
“아니오. 본국으로 돌아갈 수는 없어요. 다만 그렇게 해주실 건가요?”
로마의 세네토르라면 적절한 인사가 아닌가? 조금 전까지 차갑게 보였던 인상이 그렇게만 느껴지지 않았다.
“혼란이 지속되길 원하지 않을 뿐이오. 서신을 보내는 일이야 어려운 일도 아니고 세네투스 역시 이 일의 위험성을 파악할 역량은 있겠지. 다만 직접 겪었다시피 이곳 시칠리아의 상황도 안전하지는 않소. 그러니 선택하시오.”
테세우스의 담담한 말에 이시아스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려는 그 때 수풀을 헤치고 다가온 나세스의 낮은 음성이 울려 퍼졌다.
“이.. 이걸 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