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마 무신의 기억-267화 (267/298)

# 267

267. 피로 물든 로마.

267. 피로 물든 로마.

“지금의 요청은 듣지 못한 것으로 하겠습니다. 왕녀께서 표한 감사가 진심이라면 더더욱 말입니다.”

아무 연고도 없는 타국을 위해 피를 흘리라? 왜 그런 짓을 한단 말인가? 재고할 가치가 없는 요청이었다. 테세우스의 단호한 거절에 이시아스는 순순히 수긍하는 표정으로 그에게 말을 꺼냈다.

“당신이 뜻이 그러하다면 결코 번거롭게 할 생각은 없어요. 하지만 은혜를 입은 입장에서 이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네요. 혹 히스파니아를 염두에 두고 계시나요?”

테세우스는 이시아스를 무심한 눈으로 바라봤다. 로마와 척을 질 생각이 아니라면 히스파니아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 로마도 지금쯤이면 히스파니아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눈치챘을 것이고 그게 아니더라도 자신이 히스파니아에 거점을 마련하는 것을 허락할 로마가 아니다. 그 이유야 너무나 당연하지 않은가?

“역시······. 모르실거라 생각하진 않았어요. 군을 움직이기 전에 향후 대책까지 마련하신 분이니 말이예요. 급박한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토벌에 임하기 전에 본국으로부터 지휘권을 요청한 일을 언급하는 것이리라.

“비록 아직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로마를 적대할 폰토스와 아르메니아를 견제하기 위해서라면 최소한 4개 군단은 움직여야겠지요. 그뿐이라면 모르겠지만 로마 본국에서도 스파르타쿠스가 이끄는 대규모 반란군이 일어나 콘술 루키우스 옥타비우스가 토벌하고자 했으나 도리어 대패를 당한 상황이고요. 무엇보다 테세우스, 당신은 로마 내부에 적이 상당히 많은 사람이더군요. 특별히 조사할 것도 없이 주변 정황만으로 눈치챌 수 있을 만큼 말이예요.”

“······.”

테세우스가 침묵을 지킨 채 자신을 바라보자 그녀는 잠시 멈췄던 말을 다시 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당신이 시칠리아 반란을 성공적으로 토벌한다면······. 과연 로마 본국은 당신에게 시칠리아를 안정시킬 것을 요청할까요? 프라에토르 크라수스가 토벌군을 구성한다고 하지만 이미 기세를 얻은 반란군을 수월하게 처리하기는 어려울 거예요. 그런데 그보다 더한 규모로 일어났던 반란군을, 시칠리아 정규군마저 무참히 격파한 그 반란군들을 사병들만으로 반란을 빠르게 종식시켰다고 알려진다면······. 그게 사실이든 과장이든 로마는 어떤 식으로든 당신 사병의 해산 및 지휘권 이양을 요구할 거예요. 그런 뒤 로마로 귀환할 것을 요청하겠죠. 테세우스, 당신이라는 사내가 매우 부담스러울 테니 말이예요. 정규군단은 로마 외부의 적들을 견제하기 위해 움직일 수 없으니 더더욱 그렇겠지요.”

“······. 이제보니 내게 향후 행보를 물은 것은 결국 로마를 전복할 마음이 있는지 파악하기 위함이었군. 내가 그럴 생각이 없다는 것까지 짐작하고 있으면서도 말이오. 카파도니아에서 왕녀를 로마까지 보낸 이유는 이러한 왕녀의 식견을 믿었기 때문일 테고.”

“미약한 재주일 뿐이예요. 하지만 당신은 이미 준비를 해두지 않았나요? 그게 아니라면······.”

“왕녀를 이대로 살려둬야 할지 모르겠소.”

“당신이 죽이고자 한다면 제가 뭘 어찌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제가 파악한 것을 노회한 로마의 세네토르들이 알지 못할까요? 지금은 혼란스러워서 의문을 품지 못하겠지만 결국엔······.”

“그땐 내가 로마에 없겠지.”

“당신을 따르던 사람들은요? 그래서 지금도 이 자리에 남아있는 것 아니었나요? 그게 아니라면 제가 당신을 잘못 파악한 것이겠죠. 당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거스르려 하지 말아요. 하지만 정히 그 운명을 거스르고자 한다면 그 쉼터를 카파도니아가 마련해주겠다는 거예요. 완벽하진 않아도 폭풍우까진 어려워도 소나기를 피할 지붕 정도는 될 수 있겠죠.”

“소나기를 피할 지붕이라······.”

“폰토스와 아르메니아가 연합한다면 속주로 편입된 비티니아는 몰라도 카파도니아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을 거예요. 당연히 군단 파병도 기대할 수 없겠죠. 카파도니아 병사들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테세우스 당신이 함께한다면 더욱 든든할 거예요. 로마는 카파도니아에게 생색을 낼 수 있고 당신은 당분간의 안전을 도모할 수 있으며 카파도니아는 혹시 모를 위험에 방비할 수단을 마련한 셈이니 모두가 웃을 수 있는 방안이예요.”

“나를 너무 높게 보는 것 아니오?”

“글쎄요. 당신이 스스로를 너무 낮춰 보는 것은 아니구요? 뭐 어쨌든 그건 이번 반란의 토벌 결과에 따라 확정되겠죠. 물론 당신이 원치 않으면 어떤 요청도 하지 않겠어요. 로마가 카파도니아를 도울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쯤은 확실히 알았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요청을 당신에게 개인적으로 부탁하는 것이 아니라 로마에 공식적으로 요청하고자 하는 이유는 제가 따로 언급하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겠죠. 로마에 공식적으로 요청할 수 있는 근거는 당신이 제 생명을 구해준 일과 더불어 역시나 이번 시칠리아의 토벌 결과에 달려 있을 테고요.”

“음······.”

“로마도 두려워하는 당신을 카파도니아로 부르는 일이 과연 현명한 일인지 염려가 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게 아니라면 애초에 당신에게 도움을 요청할 이유도 없었겠죠. 그러니 최선까지는 아니더라도 차선은 된다고 생각해요. 당신에게도 내게도 말이죠.”

테세우스가 이시아스를 바라보자 그녀는 고혹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끝맺었다.

“호라티우스 장군이 세 도시를 일주일 안에 함락시킨다고 했나요? 일주일 뒤 카파도니아로 돌아가겠어요. 그때까지 대답을 기다릴께요.”

말을 마치고 돌아가는 이시아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테세우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후우······. 카파도니아. 카파도니아라······.’

그녀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나름 일리가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로마의 상황도 상황이겠지만 시칠리아 토벌 이후 원로원이 어찌 나오느냐가 관건이겠군.’

*

크라수스는 지휘권을 인계받음과 동시에 자비를 들여 거의 3만에 달하는 대군을 단번에 일으켰다. 테세우스에게 재산의 절반을 넘긴 일은 실로 어마어마한 금액이었기에 누구도 의심하지 못했는데 그간 재산이 더 늘어났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게 아니었던지 크라수스의 재산은 여전히 엄청난 수준으로 보였다.

3만에 달하는 대군을 일으키고도 크라수스의 표정엔 전혀 어떤 근심조차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수많은 귀족들 역시 크라수스의 지휘 아래 모여들었는데 크라수스와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기회였을뿐더러 로마에 자신의 이름을 알릴 수 있는 매우 좋은 기회였기 때문이었다. 당연하게도 크라수스는 저들을 인색하게 대하지 않고 후하게 대우하며 모두 받아들였다.

포룸 카스트룸(로마군 야영지 내의 회합 장소)에 모인 지휘관들이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크라수스는 침묵을 지키며 저들의 대화를 듣고만 있었다.

“브루티움 지역은 이미 반란군 횡행하고 있어 거점으로 삼을 수 없는 지역입니다.”

브루티움은 레기움, 비보 발렌티아, 투리이 등을 포함 11개에 달하는 도시와 수많은 마을을 포함한 이탈리아 남부지역을 뜻했다. 스파르타쿠스 군은 이미 이 남부지역을 장악하고 그 세를 점점 더 불리고 있었던 것이다.

“브루티움을 장악했다면 서둘러야 하는 것 아닌가? 이곳 삼니움 지역에 밍기적거릴 때가 아니라 칼라브리아 지역까지는 병력을 전진 배치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보입니다.”

삼니움은 7개의 도시와 여러 마을, 칼라브리아는 6개의 도시와 여러 마을을 포함한 지역을 이르고 있었다.

“스파르타쿠스의 군세 역시 3만은 족히 넘는다고 하더군. 함부로 움직여서는 곤란해. 정찰병에 의하면 저들의 대군이 북상하고 있다고 하니 섣불리 전진하기보다 추이를 살피는 것이 현명해 보이는군.”

“제게 1 군단을 맡겨주시면 저들의 세가 얼마나 되는지 파악하고 오겠습니다. 맡겨주십시오.”

“제게 맡겨주십시오.”

이에 군단을 맡은 레가투스들이 저마다 나서며 크라수스에게 선봉을 달라 요청했다. 크라수스는 가장 먼저 선봉을 요청한 레가투스를 바라보며 명령을 내렸다.

“레가투스 뭄미우스.”

“예.”

“저들의 세력이 얼마나 되는지 파악하되 섣불리 교전에 임하지는 말도록. 아군은 아직 훈련이 더 필요하다.”

“알겠습니다.”

이에 뭄미우스와 그를 따르는 5천에 달하는 병력이 삼니움지역을 떠나 칼라브라아 지역에 이르렀다.

칼라브리아 지역에서 스파르타쿠스 군을 조우한 뭄미우스는 저들의 세가 생각했던 것보다 적은 것을 확인하고 공을 세울 기회라 여겨 섣불리 공격을 명했다.

하지만 이는 스파르타쿠스의 유인 전략이었다. 뭄미우스 군은 스파르타쿠스의 계략에 휘말려 대패를 당했고 병사들은 무기까지 버리고 달아났다.

이에 대노한 크라수스는 뭄미우스를 경책하고 달아난 병사들을 잡아다가 지금껏 거의 시행되지 않았던 데키마티오(Decimatio)라는 형벌을 시행케 한다. 이는 비겁하거나 잔인한 병사들에게 내리는 극단적인 형벌이었다. 병사 10명 중 1명을 제비로 뽑아 나머지 9명이 돌과 몽둥이로 참혹하게 때려 죽이는 형벌로 도망친 병사 1000명을 100개 조로 나누어 형벌을 시행했으니 이날 참혹하게 죽은 병사가 100명에 달했다.

이러한 일들을 통해 군기와 규율을 엄정하게 세운 크라수스는 직접 모든 군을 이끌고 브루티움으로 향한다.

군기와 균율이 엄정하게 섰으니 정규군이 아니라 시민군이라고 해서 얕볼 계제가 아니었다. 군사교육을 전문적으로 받은 지휘관들이 명예를 회복하고자 눈에 불을 켜고 있었기에 스파르타쿠스는 비등한 전력, 어떤 면에서는 더 많은 병력을 보유하고도 함부로 결전에 임하지 못했다.

대회전이 벌어질 때 일사불란한 지휘체계의 유무는 승패를 가를 정도로 중요하다. 하지만 자신이 이끄는 반란군은 자신을 따른다고는 하지만 이미 여러 패로 나눠진지 오래였다. 기습작전을 통해 로마군을 습격해서 작은 승리를 거두는 것은 가능하지만 대회전을 통한 정면승부는 필패에 가깝다고 여긴 것이다.

이에 스파르타쿠스는 크라수스와의 대회전을 계속해서 피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피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브루티움 깊숙이 추격해온 크라수스 군과 스파르타쿠스 군의 결전은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양군은 비보 발렌티아 근방의 숲에서 치열하게 격돌했고 양군의 전사자가 2만에 달할 정도로 피 튀기는 전투를 치렀다.

그러나 이번에도 스파르타쿠스 군이 승리했다. 후퇴 후 숲속으로 유인하는 작전에 휘말린 크라수스 군이 또 다시 패배하고 만 것이다.

콰앙!

“대체 뭐하는 작자들인가? 노예 반란군의 유인작전에 휘말려 기어코 패배하게 만들다니! 공에 정신이 팔려서 무엇이 우선인지도 모르는 머저리들이란 말인가?”

크라수스는 이 사실에 다시금 대노하며 지휘관들을 크게 질책했다. 패배의 책임을 진 지휘관들이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랴? 저들은 어두운 안색으로 크라수스의 분노가 그치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퀸투스 세르토리우스 테세우스가 반란 진압에 나서고 일주일도 되지 않아 서부 지역을 탈환했다는 소문이 퍼지는 시점에 3만에 달하는 대군을 이끌고도 제대로된 토벌은커녕 두 번이나 패배하다니! 이대로 주저앉는다면 나의 명예는 물론 너희들의 명예 역시 무사할 것이라 보는 것이냐?”

크라수스는 자신의 뜻대로 펼쳐지지 않는 광경에 분노를 거두지 못하고 계속해서 고함을 질렀다. 자신의 라이벌 폼페이우스는 물론이거니와 저 테세우스조차 승승장구하는데 이런 노예군조차 승리하지 못하고 번번히 패배하니 크라수스로서는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두 번의 패배가 애석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꼭 나쁜 일은 아닙니다.”

패배가 나쁜 것이 아니라니? 누가 이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는 것이란 말인가? 크라수스가 눈을 희번덕거리며 발언의 주인공을 확인하다가 눈매를 좁히며 사내를 바라봤다. 지휘관들 하나가 아니라 지금 막 포룸 카스트룸에 들어온 사내였는데 크라수스는 그 자가 누군지 모를 수 없었다.

“폰티펙스 막시무스께서 여기까지 어인 일로?”

그는 바로 폰티펙스 막시무스(최고위 제사장) 위에 오른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였다. 폰티펙스 막시무스는 단순한 성직자가 아니었다. 폰피펙스 막시무스는 정치적, 종교적 권위를 모두 가지고 있었고 매우 큰 명예를 지닌 직위였다.

신전은 군사 및 정치 권력이 전무했지만 폰티펙스 막시무스만은 정치에 관여하거나 군 지휘권을 보유하는 일이 모두 허용되었다. 물론 아무래도 예외적인 상황에 해당하겠지만 어쨌든 카이사르가 괜히 폰티펙스 막시무스 위에 오르고자 한 것이 아니라는 소리였다.

“프라에토르께서 괜찮으시다면 제게 잠시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카이사르의 행색을 보아하니 주둔지에 막 도착한 모양이고 자신이 분을 터트리는 중이라 보고가 들어올 새도 없었던 것이리라.

감정을 추스르던 크라수스는 카이사르의 전적에 대해 떠올렸다. 소아시아에서 군생활을 시작했고 토벌하기 어렵다던 시칠리아 해적들을 토벌한 전적이 있는 사내였다. 육지의 도적보다 바다의 해적이 훨씬 더 토벌하기 어렵다는 점을 상기하면 그만큼 그의 지휘력이 남다르다는 소리도 된다.

그것을 상기하던 크라수스는 주변 지휘관들을 손짓으로 무르며 카이사르에게 입을 열었다.

“로마의 폰티펙스 막시무스께서 로마의 패배를 가져오시진 않았을 테니 어찌 거부하겠습니까?”

크라수스는 언제 화를 냈냐는 듯 미소를 지으며 카이사르를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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