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마 무신의 기억-269화 (269/298)

# 269

269. 피로 물든 로마.

269.

“크릭서스, 가니쿠스, 카스투스 너희는 나와 함께 레기움을 둘러싼 크라수스의 장벽을 쳐부순다!”

“좋다!”

“그렇게 하겠다!”

크릭서스와 가니쿠스가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대답했다. 단 카스투스는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근심에 찬 표정으로 스파르타쿠스를 바라봤다. 스파르타쿠스는 호명하지 않은 한 명의 사내, 오이노마우스를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오이노마우스. 너는 물질에 능한 자들, 삼천을 데리고 야음을 틈타 시칠리아로 넘어가라.”

“시칠리아로?”

카스투스가 반문하자 다른 이들도 의아한 눈빛으로 스파르타쿠스를 바라봤다.

“지금 상황에서는 장벽을 부수고 승리하는 일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겠지만 어쨌든 승리한 이후의 일 역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순조롭게 승리하여 로마까지 진격해도 지금의 군세로는 결코 로마를 함락시킬 수 없다. 아니 그 전에 군을 더 이상 유지하는 것조차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어째서! 장벽과 토벌군을 모조리 박살내고 로마로 몰아친다면 저 로마에 물자가 부족할까? 괜한 걱정이다!”

카스투스가 고개를 내저으며 크릭서스의 말을 받았다.

“크릭서스. 로마는 다르다. 우리가 함락시킨 다른 도시들처럼 생각하면 곤란해. 그곳에는 정말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다. 그런 저들이 생존을 위협받으면 창칼을 들고 나서지 않는다고 어찌 장담할 수 있을까? 그러니 스파르타쿠스의 말이 맞다.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 문제다.”

“흥! 그런 자들은 수천수만이 몰려와도 무섭지 않다! 우리가 장벽을 넘고 로마의 성벽을 넘는 순간, 저들은 이리 앞의 양떼처럼 뿔뿔이 흩어질 자들에 불과하단 말이다.”

스파르타쿠스가 흥분한 크릭서스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크릭서스, 네 말이 맞다. 로마의 성벽을 넘을 수만 있다면 그때는 로마가 문제랴? 하지만 우리와 함께하는 여인과 아이들은? 그 전에 모두 죽고 말 것이다. 크릭서스, 너라고 해도 로마의 성벽을 넘으면서 동시에 저들을 보호할 수 있다고 말하지는 않겠지.”

크릭서스는 뭐라고 답변하려는 듯 입가를 움찔거렸지만 결국 아무 말도 뱉지 않았다. 스파르타쿠스의 말대로 자신들은 예전과 달리 전사로만 이뤄진 무리가 아니었다. 근 10만에 달하는 무리로 변모했지만 저들중 반수 이상은 전사가 아니었다. 굶주림과 창칼의 위협을 넘어갈 수 없는 연약한 자들은 모두 길바닥에서 처참하게 죽고 말 것이다.

카스투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무엇보다 겨울이 오기 전에 식량이나 적당한 거점을 마련하지 못한다면······. 로마를 겨울이 오기 전에 함락시킬 수만 있다면 상관없겠지만 우리는 레기움을 둘러싼 장벽부터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다. 그러니 로마의 성벽을 거론하기엔 너무 일러.”

잠잠하게 입을 다물고 있던 오이노마우스가 입을 열었다.

“북쪽에는 갈리아인과의 전투로 단련된 정규군단이 즐비하고 저 폼페이우스의 군단까지 자리하고 있다. 로마의 거주민들과 날씨 문제는 둘째 문제다. 북상하는 순간, 실전으로 단련된 정병들이 움직일 텐데······.”

“그래서 너를 시칠리아로 보내는 것이다. 네 정탐 결과에 따라 우리가 북상할 것인지 아니면 시칠리아로 향할 것인지가 결정되겠지.”

오이노마우스는 스파르타쿠스에게 다시 말했다.

“장벽을 부수느라 헛수고 할 것 없이 우리 모두 바다를 건너면 될 일 아닌가?”

“4만도 넘는 인원을? 시칠리아의 정규군이나 크라수스가 머저리가 아니라면 명성이 자자한 로마의 해군이 이미 길목을 지키고 있을 텐데 무슨 수로? 배가 있다고 해도 몰살을 면치 못할 수 있다. 헤엄쳐서 바다를? 죽겠다는 소리밖에 되지 않는다. 심지어 모두 합치면 10만에 달하는데 여인과 아이를 비롯한 노약자들은 그마저도 못하겠지.”

“으흠.”

“당장 물자가 필요하다. 장벽을 부수느라 많은 자들이 죽겠지만 토벌군이 보유한 물자가 필요해. 우리가 장벽을 부수고 크라수스군을 격퇴한다면 로마 역시 크게 긴장하겠지. 그렇게 시간을 벌고 시칠리아로 향할 수단을 강구해보거나 북상할 것인지는 그때가서 고민하면 된다. 로마의 적은 우리만 있는 것이 아니니 말이다.”

스파르타쿠스는 잠시 말을 멈춘 뒤 다시 말했다.

“야음을 틈타 바다를 건넌다면 로마의 해군이라고 해도 너희를 발견하기 어려울 것이다. 물론 극도로 위험한 일이다. 그만한 담력과 체력, 그리고 운이 따라줘야만 하는 일이겠지.”

그러자 가니쿠스가 눈을 좁히며 자기 의견을 말했다.

“성공적으로 시칠리아에 도착한다고 해도 고작 삼천 명이다. 오이노마우스를 믿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시칠리아의 반란이 소문대로 대규모 반란이라면 메사나를 함락시키지 못한 것에는 이유가 있기 마련인데 삼천 명으로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심지어 시칠리아의 반란은 테세우스라는 자에게 종식되었다고 하는 상황이 아닌가? 현 상황에서는 시칠리아 퇴각이 훨씬 더 위험한 일이 될 것이다. 차라리 그럴 바에는 모두 함께 힘을 합쳐서 북상하고 전진하는 수밖에 없다. 어차피 모두를 안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걸 어찌 알까? 실상은 로마군이 퍼트린 소문에 불과할지도 모르는 일이지. 그러나 사실이라고 해도 내 결정은 바뀌지 않는다.”

스파르타쿠스의 단호한 대답에 모두 입을 다물었다.

“오이노마우스. 내 생각도 너와 다르지 않다. 북상보다는 남하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라 여긴다. 하지만 도무지 그럴 수 없는 상황이 되었지. 그러니 우리 모두 목숨을 건 모험을 해야 한다. 시칠리아의 상황이 헛소문이라면 더할 나위없이 좋겠지만 소문이 사실이라고 해도 만약 저 퀸투스 세르토리우스 테세우스를 암살할 수만 있다면! 그래서 아직 꺼지지 않은 반란의 불씨를 다시 살릴 수만 있다면! 시칠리아는 우리의 안전한 보금자리가 될 수 있을뿐더러 로마의 적들과 협상할 수 있도록 만들 것이다.”

정탐을 하되 여의치 않은 경우, 테세우스를 어떻게든 죽이라는 소리였다. 병력을 이끌고 장벽을 향해 달려가는 것보다 훨씬 더 위험하고 지난한 임무에 가까웠다. 시칠리아가 어떤 상황인지는 이 자리의 누구도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으흠.”

“흠.”

저마다 침음을 뱉는 가운데 오이노마우스가 담담하게 말했다.

“살아서 다시 보자.”

“흥! 그건 내가 해야 할 소리다.”

크릭서스가 코웃음을 치며 그의 말을 받았지만 형언할 수 없는 진한 감정이 그의 눈빛에 서려 있었다.

“더 지체할 것 없이 내일 밤. 각자 맡은 역할을 수행한다.”

스파르타쿠스는 단호한 눈빛으로 회의를 끝마쳤다. 남은 건 이제 하나다. 목숨을 걸고 싸우고 남은 건 운명에 맡기는 수밖에.

*

테세우스 군은 폭풍처럼 시칠리아를 휩쓸었다. 호라티우스는 본인이 장담한 대로 일주일 안에 히메라, 헨나, 아그리겐툼을 함락시켜 시칠리아의 서부를 동부를 나눠버렸고 이에 멈추지 않고 서부의 드레파눔, 릴리바에움, 세리누스 세 도시에 고립된 반란군도 토벌해 버렸다.

중부와 서부를 손에 넣는데 걸린 시간은 모두 합쳐 3주가 채 되지 않았다. 테세우스 군은 저항하는 자는 철저히 죽이고 항복하는 자는 목숨을 살려줬는데 이에 사로잡은 반란군만 2만에 달했고 죽인 자는 그 두 배인 4만에 달했다.

시칠리아 거주민에게 ‘퀸투스 세르토리우스 테세우스’는 경외가 되었고 반란군에는 처절한 공포가 되었다.

물론 이는 시칠리아 섬 안에서만 퍼지는 경외와 공포였을 뿐이다. 시간이 지나면 로마에도 테세우스의 업적이나 소문이 알려지겠지만 시칠리아인이나 반란군이 가지는 경외나 공포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시기나 질투 내지 헛소문이라 여기는 비웃음이 그 자리를 차지할 테니 말이다.

아닌 게 아니라 엄밀히 말해 이곳 시칠리아 내에서도 테세우스의 신위를 보고 또 믿는 이들이나 경외를 표했을 뿐이니 말이다. 단 반란군의 경우는 예외였다.

시칠리아 중부와 서부를 거의 단숨에 손에 넣은 테세우스지만 의외로 직접 전투에 나선 경우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반란군은 오히려 그 사실에 더더욱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었다.

저 로마의 시민들이나 시칠리아 거주민들은 몰라도 반란군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2천도 넘는 전사들이 ‘퀸투스 세르토리우스 테세우스’ 한 사람을 이기지 못해서 처절하게 도망칠 수밖에 없었던 끔찍한 공포를 말이다.

그의 군대도 테세우스를 떠올리게 할 만큼 무시무시했지만 전신이라 여겨지는 테세우스가 자신의 군대와 함께 전장에 선다면 대체 무슨 수로 승리할 수 있을까? 승리는커녕 생존을 걱정해야만 할 것이다. 이 사실은 그야말로 뼈와 살을 녹이는 지독한 공포였기에 저들은 두려움에 떨지 않을 수 없었다. 테세우스 그자는 스스로 언급한대로 절망이자 두려움의 화신이 되어 용맹한 전사들을 겁쟁이로 만들어 버렸다.

“남은 도시들은 언제 탈환하실 계획이십니까? 테세우스 님의 명성을 듣고 군에 입대하려는 자들이 넘쳐나는 상황입니다.”

테세우스는 시칠리아 중앙이라 할 수 있는 헨나에 거주하고 있었다.

“시칠리아는 서부보다 동부가 더 중요한 곳입니다. 겔라, 카마리나, 시라쿠세, 카타나, 나서스, 틴다리스, 미라에 중 틴다리스와 미라에는 메사나로 퇴각한 정규군들에 맡긴다손치더라도 남은 도시들은 서둘러 탈환하셔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서둘러 명을 내리시지요.”

“저 노예놈들에게 더 이상 도시를 맡겨둘 수 없습니다!”

“대체 왜 움직이지 않으시는 겁니까?”

테세우스는 자신에게 말을 꺼낸 사람들을 바라봤다. 지난 반란에서 살아남은 귀족들이나 관리들이 한데 모여서 말하고 있었다.

테세우스는 가만히 저들의 말을 듣고 있다가 차가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너희가 잃은 땅을 왜 나보고 찾아달라고 하는 것이지? 마찬가지로 잃은 땅에 대한 권한을 되찾고 싶다면 마땅한 보상을 지급해야 할 것이다.”

“어찌! 법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로마에서 군권을 허락했다지만 점령지에 대한 소유권까지 허락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본래부터 이곳은 로마의 땅이니 개인의 점령지가 될 수 없습니다.”

“이상하군. 로마법은 시민의 사유재산을 인정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아닌가? 그렇다면 지금껏 너희는 로마의 땅을 불법점령하고 있었다는 소리더냐?”

“그.. 그것이!”

“이.. 인정합니다. 로마법은 시민의 사유재산을 인정합니다. 바로 그렇기에 로마법에 따라 그 땅을 저희가 돌려받아야 할 권한이 있습니다.”

“그것이 너희 땅이라면 너희가 지켰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 너희 땅에서 일어나는 일이니 너희의 노예가 반란을 일으키지 않도록 잘 처우했어야 하는 일이 아니냐? 너희 욕심을 따라 너희 마음대로 행하다가 땅을 잃어버린 후에, 모든 것이 어그러진 이후에 권한을 부르짖는 것이냐? 너희의 책임은 대체 어디 있느냐? 혹 너희가 원하는 것이 이 모든 땅을 로마에 귀속시켜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라면 지금이라도 그렇게 하겠다. 그리하겠느냐?”

“그.. 그게.”

“그.. 그런 뜻이 아니지 않습니까?”

“로마에서 군권을 허락했다지만 로마는 내게 군량 한 톨 지급하지 않았다. 반란으로 시칠리아가 엉망이 되는 시점에도 로마는 정규군에 대한 지휘권 역시 허락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순전히 내 재산으로 일으킨 내 사병으로 너희가 너희 땅에서 일어나게 만든 반란을 처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 땅의 주인이 누구냐는 차치하고 일차적으로 나는 나의 수고에 대한 대가를 받을 권한이 있다. 너희는 지금 이것이 부당하다고 말하는 것이냐?”

“······.”

테세우스는 서늘한 눈빛으로 다시 말을 이었다.

“엄밀히 말해 너희는 로마가 인정한 너희 땅을 적에게 빼앗겼을 때 그 소유권을 잃어버린 것이나 다름없다. 너희가 잃어버린 로마의 땅을 되찾았으니 응당 나는 거기에 따른 보상받을 권리가 있다. 그렇지 않느냐? 나는 너희에게 요구할 것 없이 로마에게 이 모든 것을 바치고 로마에게 보상을 받으면 될 일이다. 내가 그렇게 하기를 바라는 것이냐? 언제 내가 너희 땅을 빼앗겠다고 하더냐? 아니면 내가 너희 땅을 내 사병으로 침공하기라도 했더냐? 너희 땅을 내가 찾아줬으면 응당 거기에 따른 보상은 해야 할 것이 아니냐? 이것이 부당한 요구이더냐? 그리 생각하는 이들이 많은 듯하니 너희 스스로 너희 병력을 모집해서 싸우라고 하지 않더냐? 내가 기회를 주지 않더냐? 아니면 시간을 주지 않더냐? 그래도 이것이 부당한 일이더냐?”

“그.. 그게.”

“앞서 언급했다시피 땅을 찾고 싶은 자는 내게 그만한 보상을 해야 할 것이다. 그 땅이 내가 이미 점령한 점령지이든 점령할 곳이든지 간에! 너희가 보상하지 않는 땅에 대해서는 로마와 협상할 것인즉, 그때 가서 로마의 법정에서 부르짖어 보던가. 로마의 법정이 너희 목소리를 나만큼이나 경청할지는 의문이지만 말이다. 이건 비단 땅에 국한된 부분이 아니다. 그러니 다시 한 번 이 문제로 나를 번거롭게 만든다면!”

쿵!

테세우스는 묵직하게 발을 구른 다음 간결하게 말을 끊었다.

“나의 결정에 불복하는 것으로 알고 죽일 것이다. 내 인내심을 더 자극하지 마라. 물러가라!”

테세우스의 살의에 기겁한 저들은 서둘러 테세우스 앞에서 사라졌다. 그 모습을 옆에서 잠잠히 지켜보던 호라티우스가 말했다.

“테세우스 님의 본의를 들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동부 지역을 마저 정리하지 않는 이유 말입니다. 단순히 저들 때문이라고 생각하기엔 제가 판단하기에도 저들은 너무 가치 없는 자들이라 생각되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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