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마 무신의 기억-271화 (271/298)

# 271

271. 장벽을 넘어.

271.

쐐에에엑!

피이잉

필룸과 화살을 비롯한 수많은 투척무기들이 매섭게 스치고 지나갔다.

“크아아악!”

“아악!”

“죽어라!”

“비켜서!”

“자리를 확보해!”

옆에서 같이 내달리던 전사들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고 이미 사다리를 타고 올라간 전사들은 도중에 추락하거나 장벽 위에서 분투를 치르고 있었다.

“훅 훅 훅!”

짧고 강하게 숨을 뱉으며 거침없이 달리던 스파르타쿠스는 카스투스가 이끄는 병력을 바라봤다. 스파르타쿠스 역시 전장의 일선에 섰으니 전장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병력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고 해도 유기적이고 체계적인 명령체계를 구축하지 못했으니 어차피 불필요한 일이었고 지휘 방식 역시 일선에서 병력을 이끄는 방식을 선호했기에 그런 형태로 전쟁을 치른 적도 없었다. 그러니 예전과 동일하게 각 병력을 이끄는 크릭서스나 가니쿠스, 카스투스 등을 믿을 뿐이다.

스파르타쿠스는 시선을 돌려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장벽과 사다리를 바라봤다.

“먼저 올라겠습니다.”

“아니! 내가 먼저 가겠다!”

스파르타쿠스는 검투사를 제치고 달리던 기세 그대로 사다리로 뛰어올랐다. 사다리에는 이미 전사들이 스파르타쿠스 위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었고 스파르타쿠스 밑에도 금세 전사들이 줄줄이 달라붙었다.

후두두둑!

“크아아악!”

자신 위에서 먼저 올라가던 한 전사가 위에 떨어진 묵직한 돌을 얻어맞고 피를 흩뿌리며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하지만 스파르타쿠스는 눈 하나 깜작하지 않고 더욱 속력을 내며 사다리를 올랐다. 걸쳐진 사다리는 하나가 아니었기에 이와 같은 일은 장벽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물론 장벽의 문을 공략하는 병력도 있었지만 조잡한 공성병기뿐이라 그곳을 뚫을 확률은 더욱 희박했다.

후우웅!

사다리 끝에 다다라 장벽을 넘으려는 순간, 글라디우스가 그의 머리를 향해 날아왔다. 스파르타쿠스는 유연하게 몸을 뒤로 젖혀 검을 피했지만 실로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글라디우스가 그의 목젖을 스치고 가며 살갗에 작은 생채기를 남겼기 때문이다.

스파르타쿠스는 뒤로 젖혔던 몸을 튕기듯이 앞으로 이동시키며 검을 내지른 병사의 목을 오른손에 들고 있던 검으로 잘라버렸다.

촤아아악!

병사는 깜짝 놀란 표정 그대로 목이 잘려 장벽 아래로 떨어졌다. 스파르타쿠스는 그대로 장벽 위에 올라 양손의 쌍검을 이용해 종횡무진하며 병사들을 베어 넘겼다. 결국 그의 놀라운 활약과 전사들의 활약으로 인해 간신히 국소 지역이나마 장벽을 확보했다.

“와아아아아!!”

“와아아!”

정신없이 로마군을 베어 넘기던 스파르타쿠스는 그제야 한숨 돌릴 수 있는 여유를 가지고 전장을 살폈다. 이제 장벽을 넘어 적을 부수기만 하면 되는······. 스파르타쿠스는 자신의 생각을 더 이어갈 수 없었다.

장벽 너머에서 지금껏 보이지 않던 군대가 정렬한 채로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 수가 못해도 1만은 넘어 보였다.

“크라수스.”

스파르타쿠스는 그것을 보는 순간, 어찌된 일인지 금세 알아차렸다. 크라수스가 주변 도시 등지에서 시민군을 더 모집한 것이다. 아니 장벽 위에서 싸우던 이들이 새로 모집한 병사들일 테고 저들이야말로 주력부대로 보였다. 멀리서 봐도 신병들이 보일 수 없는 엄정함과 체계적인 진형을 구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쩐지 생각보다 저항이 극심하지 않더니······.”

북쪽과 남쪽으로 적의 병력을 나누었다고 생각했지만 틀렸다. 오히려 자신들의 병력이 더 잘게 나눠진 것에 불과했다. 이대로 장벽을 넘는다면······.

승산이 없다. 모조리 각개격파 당하고 말 것이다. 장벽을 넘어섰지만 장벽을 넘어서면 준비하고 있던 저들에게 모조리 몰살당하고 말 것이다. 만반의 준비를 갖춘 채 대항해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는데 장벽을 넘어서느라 기력을 소진한 자신들이 무슨 수로 저들을 상대한단 말인가?

스파르타쿠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불안한 예감이 진실로 다가오자 쓰라린 감정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그것도 잠시 스파르타쿠스는 냉정한 표정으로 급히 명령을 내렸다.

“뿔나팔을 불어 후퇴를 명해라!”

“예? 장벽을 점령했는데 어째······. 엇! 저.. 저들은?”

반문하려던 검투사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저 멀리 모습을 드러낸 로마군과 스파르타쿠스를 번갈아가며 바라봤다.

“뭐하나! 뿔나팔을 불어 후퇴하라 명해라!”

“아... 알겠습니다.”

뿌우우우우웅! 뿌우우우웅!

이윽고 후퇴를 알리는 뿔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

한 지휘관이 큰소리로 우렁차게 보고했다.

“후퇴하려는 것이 분명합니다!”

크라수스는 만면에 웃음을 띤 채로 지휘관에 말했다.

“기병대를 준비시켜! 한 놈도 놓치지 않고 말살한다. 특히 주동자인 스파르타쿠스와 그 일당들은 절대 놓치면 안 된다!”

“알겠습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크라수스는 순조롭게 이뤄지는 전투를 보며 카이사르에 대해 다시금 생각했다. 카이사르의 조언이야말로 오늘의 광경을 자아내게 만든 일등공신이었으니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콘술이라. 그와 함께라면 폼페이우스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겠군.”

크라수스는 진한 미소를 지으며 전장을 바라봤다.

*

“젠장! 젠장!”

피로 온몸을 붉게 물든 크릭서스가 분통을 터트리고 있었다. 그 주변에는 고작 천 명 남짓한 사내들만 남았을 뿐이었다.

“진정해. 카스투스는 우리가 이대로 무너지는 것을 원치 않을 거다.”

가니쿠스가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카스투스는 본인이 스파르타쿠스인 것처럼 가장하여 로마군을 유인했고 그로 인해 자신들이 이만큼이나마 살아남을 수 있었다.

“사로잡힌 형제들은 모조리 죽을 것이다. 이대로 치욕스러운 삶을 이어가느니!”

“아직. 아직 끝나지 않았다.”

크릭서스가 그 말에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스파르타쿠스를 바라봤다.

“그게! 그게 무슨 소리냐?”

“시칠리아로 넘어간다! 그곳에서 다시 시작한다.”

가니쿠스가 그 말에 반색하며 스파르타쿠스를 바라봤다.

“오이노마우스에게 무슨 연락이라도 온 것이냐?”

스파르타쿠스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럼 왜 시칠리아로 도망치겠다는 소리냐? 도망치느니 죽을 것이다!”

“크릭서스. 죽음으로 도망치고 싶다면 그건 나중에 해도 되는 일이다.”

“뭐라?”

“비록 오늘 패배했지만 나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스파르타쿠스의 담담한 말에 가니쿠스가 고개를 주억이며 말했다.

“그래. 시칠리아라면······. 그래 시칠리아라면. 성인 남자와 노인은 모두 죽이겠지만 여인과 아이까지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럴 가치를 못 느낄 테니까. 따르겠다!”

스파르타쿠스의 눈이 크릭서스에게 향했다. 그 눈을 마주하던 크릭서스는 분을 누그러뜨리며 말했다.

“복수. 복수할 기회가 있는 것이냐?”

“그렇게 만들어야지. 포기할 텐가?”

“아니! 그럴 수 없다!”

“이동한다! 저들의 추격이 더욱 거세질 테니 지체할 수 없다. 이대로 바다를 건넌다.”

*

계획은 언제나 계획에 불과하다. 계획대로 이뤄지는 것이 쉽다면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그로 인해 절망하겠는가?

과거의 일을 보고 미래를 예측하려 하지만 과거는 과거일 뿐, 과거는 미래가 될 수 없다. 그러니 미래를 완벽히 예측한다는 것은 누구라도 불가능한 일이며 그런 미래의 불확실성은 누군가에게는 두려움이, 누군가에는 설렘이 되기도 하는 법이다.

테세우스가 미래를 예측하고 움직이려고 하나 그 미래가 어찌 바뀔지, 자신의 삶이 어찌 바뀔지 무슨 수로 알 수 있을까?

로마는 테세우스가 생각한 것보다도 신속했다. 테세우스에 대한 미움이 그만큼 깊다고 해야 할까? 안타깝게도 상황은 테세우스가 예측한 것과 다른 형태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호라티우스가 눈을 희번덕거리며 테세우스에게 말을 꺼낸 자들을 바라봤다.

“다시 말하는 것이 뭐 어렵겠나? 공화정은 세네토르 테세우스의 지휘권을 회수하며 모든 병력을 해산 및 인계할 것을 명한다.”

“지금 그게 말이 되는 소리요?”

호라티우스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경계를 서고 있던 병사들의 눈빛 역시 완전히 달라졌다. 이에 로마의 원로원의 명을 받고 시칠리아로 달려온 푸블리우스 바리니우스와 그 일당은 흠칫하며 주변을 살폈다.

잠시 뒤 주변을 살피던 바리니우스의 부관 루키니우스 코시니우스가 긴장한 표정으로 외쳤다.

“이건 무슨 뜻입니까? 로마의 명령에 불복하겠다는 뜻으로 여겨도 되겠습니까?”

“이게 무슨! 고작 센튜리를 이끌고 와서 모든 병력을 인계하라? 그딴 헛소리를 받아줄 것이라 생각하오?”

천 명도 아니고 고작 백인대 하나를 이끌고 와서 모든 병력을 인계하라고? 이런 개소리가 어디 있단 말인가? 호라티우스가 다시 분을 터트리자 테세우스가 손을 들어 그를 제지한 다음 푸블리우스 바리니우스에게 말했다.

“공화정의 뜻이 그러하다면 그렇게 해야지.”

“테세우스 님!”

호라티우스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테세우스에게 소리쳤지만 테세우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푸블리우스 바리니우스에게 말했다.

“공화정의 지시는 그것이 전부인가?”

“아닙니다. 세네토르께서 로마에 귀환하셔서 이번 사태에 대한 보고를 직접 하셔야 합니다. 그것이 저희가 받은 명령입니다.”

“로마로 귀환이라······. 좋다. 그렇게 하지.”

호라티우스는 분을 참지 못하고 얼굴이 붉게 변했지만 더 말을 뱉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그럼 병력의 인수인계를..”

푸블리우스 바리니우스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 때 테세우스가 고개를 저었다.

“그것 역시 그리하지.”

호라티우스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테세우스를 바라봤고 푸블리우스 바리니우스 일당은 더욱 진한 미소를 지었다.

“단! 내게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겠어.”

그 말에 바리니우스의 표정이 대번에 변했다. 반면 호라티우스의 표정은 그제야 편안해졌다.

“그건 무슨 뜻입니까? 로마의 명령에 불복하시겠다는 뜻입니까?”

“불복? 이상한 소리를 하는군. 내가 누구로 보이나?”

“예?”

“모르는 것 같아서 친히 말해주지. 내 이름은 퀸투스 세르토리우스 테세우스. 나는 로마의 시민이자 로마의 세네토르다. 로마의 법이 언제부터 시민의 재산을 강탈하도록 바뀐 것이지? 병력을 인계하라? 좋다. 하지만 내 사병을 인계받고 싶다면 그만한 대가를 지불해라!”

“하지만 이건 의회의 명령입니다!”

“나는 그 의회의 의원이다. 게다가 의회의 명령이 언제부터 로마법보다 위에 있었지? 아니면 내가 모르는 사이에 딕타토르라도 임명되었나?”

“그.. 그것이.”

“시칠리아 토벌을 행하는 데 있어서 로마가 내게 무슨 지원을 했나? 병력? 보급? 그 어떤 것도 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시칠리아의 절반, 그 이상을 점령했으면 보상을 해주는 것이 이치에 맞는 일 아닌가?”

“그건 제가 판단할 부분이 아닙니다. 세네토르께서 로마에 가셔서 직접 건의하시면 될 문제입니다.”

“그럼 이 문제는 내가 로마를 다녀올 때까지 보류되겠군.”

테세우스는 거기까지 말한 뒤 바리니우스의 말은 기다리지도 않고 호라티우스에게 명을 내렸다.

“호라티우스!”

“예!”

“최초 모집했던 1만 병사를 데리고 파노르모스 근방의 주둔지로 복귀하라!”

“명하신 대로 수행하겠습니다.”

“그 외에 별개로 남은 병력만 해도 2만은 될 것이다. 거부할 텐가? 그렇다면 저들을 모두 해산시킬 테니 너희가 알아서 모집하도록! 해산 및 인계라고 했으니 내가 굳이 인계할 필요는 없을 터. 애초에 세네투스가 인계하라고 강요하지 않은 것 역시 이치에 맞지 않는 명령이라는 걸 인지하고 있다는 소리니!”

테세우스의 서늘한 눈빛에 바리니우스 등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닙니다. 받아들이겠습니다.”

“더 할 말이 남았나?”

“아닙니다.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푸블리우스 바리니우스 일당이 사라지자 호라티우스가 살기 어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저들을 해치우는 건 일도 아닙니다. 반란이 종식되지 않은 상황이니 더더욱이나!”

지휘권을 돌려받기 위해 백인대 정도에 불과한 병력과 사람을 보낸다? 이건 미끼다. 호라티우스의 말대로 저들을 처리하는 것은 일도 아니지만 그렇게 되면 세네투스가 내밀은 미끼를 무는 행위밖에 되지 않는다. 저들이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다만 시칠리아 반란이 너무 수월하게 진압되니 이쯤에서 자신을 제어하려고 든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쳐갔다. 가소롭고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토벌을 어찌 완수할지는 둘째치고 아닌 말로 자신이 불복해서 반란을 일으키면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란 말인가? 피로 물든 삶을 두 번이나 생생하게 겪지 않았더라면······.

‘후우. 의미 없는 생각이다. 아직은. 적어도 아직은 그럴 생각이 없다.’

테세우스는 얼마 전 카이사르에게 받은 서신의 내용을 상기했다. 그가 약조했던 카이사르에 대한 지지를 요청하고 있는 내용이었다.

‘일단 카이사르가 콘술에 오르면 저들의 견제도 그만큼 무의미해질 터.’

“내버려 둬라. 그보다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게 무엇입니까?”

“협조하지 않은 귀족들의 재산 목록은?”

“명하신 대로 파악해두었습니다.”

“푸블리우스 바리니우스에게 로마로 귀속시킬 재산이라 일러줘라. 욕심이 많은 작자로 보이니 알아서 뜯어 먹을 것이다.”

“예?”

짧게 반문하던 호라티우스는 미간을 좁히며 명령의 의미를 곱씹다가 테세우스에게 말했다.

“그보다 정말 로마로 향하실 겁니까?”

테세우스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호라티우스에게 말했다.

“글쎄. 그건 두고 보면 알겠지. 파노르모스로 복귀한다.”

“사로잡은 포로들은 어찌합니까?”

넘겨주면 거의 반드시 처참하게 살해당할 것이다. 차라리 그럴 바에는······. 테세우스는 짧게 한숨을 내쉰 뒤 입을 열었다.

“저들에게 넘길 이유가 있나?”

“물론 아닙니다. 그럼 그리 시행하겠습니다.”

그렇게 테세우스의 통치 아래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던 시칠리아에 다시 여러 변수가 생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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