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마 무신의 기억-272화 (272/298)

# 272

272. 장벽을 넘어.

272.

그로부터 2주라는 시간이 흘렀다. 테세우스는 파노르모스 항구에 정착 중인 트라이림 위에 오르기 전에 호라티우스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대로 시칠리아 반란이 해결된다면 군을 해산하라.”

아닌 게 아니라 이미 삼천에 달하는 병력은 해산하여 본업으로 돌아갔고 7천에 달하는 병력이 휘하에 남아 있는 상황이었다.

“시칠리아에서 모집한 병사들이라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지만 말씀드렸다시피 히스파니아에서부터 따라온 병사들은 테세우스 님께서 직접 명하셔도 따르지 않으려 할 겁니다. 저 역시 저들을 억지로 해산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 그래서 하는 말이다. 그 후로도 별다른 문제가 없다면 히스파니아로 저들을 이끌어라. 고향을 떠나온지 시일이 꽤 되었고 전장의 경험도 충분히 쌓였으니 고향에 돌아가면 생각이 달라지겠지. 마우레타니아 지역 출신은 팅기스의 야스미라 왕녀에게 몸을 의탁하게끔 만들어도 괜찮은 선택일 거다. 히스파니아 지역 역시 여전히 혼잡한 상황일 테니 본인의 입지를 다지기에 적당한 환경일 테고.”

“테세우스 님!”

“일단 그렇게 하라. 그리고 호라티우스. 군에 뜻이 남아 있다면 카이사르를 찾아가면 중용해 줄 것이다.”

잠시 주저하던 호라티우스가 슬쩍 분통을 터트리며 말했다.

“무슨 말씀이 그렇습니까? 설마 이대로 영영 떠나시는 겁니까?”

테세우스가 그 말에 피식 웃으며 호라티우스를 바라봤다.

“떠날 때 떠나더라도 애써 만든 무구는 찾아가야지.”

다마스쿠스로 만든 무구 일체를 호라티우스에게 맡기고 떠나려는 참이었기에 하는 소리였다. 하지만 호라티우스는 웃음기 없는 눈빛으로 테세우스를 바라봤다.

“아무래도 느낌이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미 2주나 기다리지 않았나? 더 지체한다면 저들에게 빌미를 주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게다가 내가 인계한 2만에 달하는 병력과 더불어 메사나의 시칠리아 정규군까지 합치면 4만은 족히 넘을 텐데 푸블리우스 바리니우스가 큰 실책을 범하지 않는 한 이곳의 반란은 순조롭게 토벌될 것이다.”

“제가 걱정하는 것은 그런 게 아닙니다. 그럼 그 애써 만든 무구라도 챙겨가시지요.”

“챙겨가면? 로마에서 착용할 수도 없거니와 그것을 착용하고 저들을 도륙하기라도 할까? 내가 무구를 착용하든 아니든 무구 착용이 원천적으로 금지된 로마라면 크게 위험할 것도 없다.”

딱히 틀린 말이 아니었지만 호라티우스는 꺼림직 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저 말없이 눈매를 좁히던 호라티우스는 테세우스에게 다시 말했다.

“아그리겐툼은 버리고 히메라와 세리누스 입니까?”

만에 하나 헨나가 함락 당하거나 푸블리우스 바리니우스가 크게 패배할 경우 테세우스가 알려준 대비책이었다.

테세우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럴 일은 없어야겠지만 두 곳을 방비한다면 적어도 재건 중인 서부지역 도시는 그나마 온전하게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

“4만이 하지 못한 일을 7천이 말입니까? 그건 당신이 없이는 불가능한······. 음?”

그렇게 말을 꺼내던 호라티우스는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 테세우스를 바라봤다. 무구를 그래서 남겨두고 가는 것이었던가? 이어지는 테세우스의 말에 호라티우스는 자신의 생각이 옳았음을 확인했다.

“여전히 나를 두려워한다면 얕은 기만책 정도는 될 수 있겠지. 내 불찰이다. 로마의 세네투스가 그토록 빨리 움직일 줄 알았다면 뒷일을 생각할 것 없이 모든 반란의 불씨부터 지워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와 그런 소리는 불필요한 소리겠지.”

테세우스는 말을 잠시 끊었다가 다시 말했다.

“반란이 다시금 타오를 확률은 희박하다고 여기지만 만에 하나 4만이 무너진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기 마련일 테니 결코 무리하지 마라! 정히 어렵다면 파노르모스 한 곳만 수비하도록!”

“염려 마십시오.”

“그래. 염려하지 않는다.”

테세우스는 신뢰가 가득한 눈으로 호라티우스를 일별한 뒤 거침없이 트라이림 위에 올랐다. 그런 뒤 다시 몸을 돌려 호라티우스에게 말했다.

“두둑하게 나온 뱃살을 만지며 이곳 파노르모스(팔레르노)산 포도주로 목을 축이고 기름진 새끼 돼지를 나눠 먹을 날이 기대되는군.”

호라티우스는 헛웃음을 터트리며 입을 열었다.

“그만한 능력을 가지고 참으로. 참으로 소박한 소원이십니다. 뭐 좋습니다. 반평생을 비릿한 혈향에 절었으니 남은 생은 향긋한 포도향에 취해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요.”

“하하하. 그날을 기대하지.”

크게 웃음을 터트리는 테세우스를 바라보며 호라티우스 역시 진한 미소를 지었다.

부귀영화, 권세도 좋지만 좋은 사람을 만나 좋은 시간을 나누면 그것이야말로 좋은 삶이 아니겠는가? 모두 가질 수 있다면 그 역시 좋겠지만 과욕일 뿐이다. 열 개를 누리려다 하나도 못 누리느니 열 개를 포기하고 가진 것 하나라도 제대로 누릴 수 있다면 이를 어리석은 선택이라 말하진 못하리라.

호라티우스는 이해할 수 없던 테세우스의 마음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

휘이이이잉!

“갑자기 날씨가 미치기라도 한 건가? 대체 왜 갑자기 이런 일이!”

라에리우스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소리쳤다.

로마로 항해를 시작한 지 만 하루가 되던 날, 갑자기 하늘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하더니 거센 폭풍우가 미친 듯이 몰려왔기 때문이었다. 수십 년의 바다 생활과 더불어 수년을 폼페이의 트라이에라코스로 복무했지만 이런 날씨는 정말 난생 처음이었다.

“돛! 돛을 접어! 이대로라면 찢어진다!”

돛이 찢어질 만큼 강맹한 바람이 불어닥칠 정도였으니 넘실거리는 파도는 말할 것도 없었다. 노련한 항해술이 아니었다면 배가 전복되어도 벌써 전복되었을 것이다. 그것만 봐도 라에리우스의 항해술은 결코 미흡한 솜씨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상기후라고 해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맹렬한 폭풍우가 바다 위를 몰아치고 있었기에 라에리우스는 당황한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

“노를 저어! 파도를 타야 한다! 어서!”

성난 파도를 제대로 얻어맞으면 제아무리 단단한 배도 산산조각이 나고 말 것이다. 이에 라에리우스는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재차 소리쳤다.

쏴아아아아!

하늘에서는 빗줄기가 거세다 못해 얼굴을 후드러패는 것처럼 쏟아졌다.

“배에 물이 찼다! 어서 퍼내!”

“서둘러라! 배가 물에 가라앉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선원들 전부가 이 사태를 막아보려고 동분서주하고 있었지만 자연재해 앞에 인간의 노력이란 가소롭기 그지없었다. 마치 저들의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하늘에서는 노란 섬광을 번쩍이며 토해냈다.

콰아아아아앙!

“으아아아악!”

“돛! 돛대가!”

“제.. 젠장!”

하늘에서 내려친 샛노란 뇌전이 돛대를 순식간에 불살라 버린 것이다. 어찌나 강맹한 뇌전이었는지 돛대가 새까맣게 타다 못해 이리저리 형편없이 갈라져 버렸다. 그토록 거센 빗줄기에도 불구하고 바짝 마른 나무에서 허연 연기가 연신 피어올랐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거센 빗줄기가 불로 인한 2차 피해는 잡아줬다는 점이었다.

“돛! 돛대가!”

“나도 봤다! 지금 그런 게 중요한 것이 아니야! 정신 똑바로 차리고! 노.. 노를!”

라에리우스는 명령을 내리다 말고 저도 모르게 입을 쩍 하니 벌릴 수밖에 없었다. 배의 양옆에서 산처럼 거대한 파도가 밀려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파도를 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최대한 노를 저어도 저만한 파도를 무슨 수로 헤쳐간단 말인가?

이에 라에리우스는 테세우스를 바라봤다. 테세우스 역시 가만히 있지 않고 선원들을 돕고 있었는데 산처럼 거대한 파도가 나타나자 파도를 힐끗 바라본 뒤 라에리우스를 바라봤다. 눈이 마주친 라에리우스는 고개를 미미하게 좌우로 흔들며 면목 없다는 표정을 지은 후 크게 소리쳤다.

“몸을 띄울 수 있다면 그게 무엇이든 얼른 붙잡아라!”

테세우스는 라에리우스의 말에 더는 무엇도 할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을 알고 씁쓸한 표정으로 급히 나무 갑판에 해당하는 곳을 잡아 뜯었다.

우지끈!

이게 다 무슨 난리란 말인가? 테세우스가 느끼기에도 이는 결코 평범한 폭풍우가 아니었다. 심지어 점점 더 그 기세를 더해가고 있었다.

‘베수비우스 화산에 이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폭풍우라니······.’

연이어 발생하는 이상 현상에 테세우스는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았다.

그렇게 테세우스가 적당한 부유물을 집어 드는 순간 양옆에서 몰아쳐 오던 파도는 그대로 트라이림을 씹어먹듯이 덮쳤고 그로 인해 트라이림은 단번에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

쏴아아아아! 철썩!

쏴아아아! 철썩!

짜다 못해 쓴맛이 느껴질 정도로 많은 양의 바닷물을 마신 테세우스는 물을 게워내며 어슴푸레 눈을 떴다.

온몸이 바닷물로 완전히 젖어있었고 몸 구석구석에 모래 알갱이 돌아다니는 불쾌함이 느껴졌지만 살아남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폭풍우였다.

“다른 사람들은······.”

함께 배에 탔던 다른 사람들의 생사는 알 길이 없었다. 다만 막강한 체력을 지닌 자신조차 기진맥진할 정도였으니 그보다 못한 다른 사람들이야 십중팔구는 익사했을 확률이 높았다.

일단 정신을 차리자 몸에 활력이 빠르게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매우 허기가 졌지만 못 참을 정도는 아니었기에 테세우스는 이곳이 어디인지 알아 보기로 결정했다. 그러면서 먹을 것을 구해도 될 일이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곳이 바위로 이뤄진 섬이라는 걸 금세 알아차렸다. 섬에 나무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먹을만한 열매가 달리는 나무는 어디에도 없었다. 규모가 작은 섬이었기에 조금 높은 곳에 올라가니 섬의 경계선이 두루 보일 정도였다.

작은 바위 섬이니만큼 어떤 사람도 살지 않을 것이 분명했고 자신이 확인하기에도 사람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어딘지도 알 수 없는 무인도로군.’

테세우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바다 저편을 바라보다가 저 멀리 점으로 보이는 섬을 발견했다. 점처럼 보이긴 하지만 상당히 먼 곳에 있으니 어쨌든 이곳보다 거대한 섬으로 보였다. 물론 그마저도 현재의 날씨가 화창하고 테세우스의 시력의 범인의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기에 보이는 수준이었다.

다시 주변을 살피니 그 점처럼 보이는 섬을 북쪽으로 두고 좌편에는 하나의 커다란 섬과 우편에는 육지로 보이는 지형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다만 좌편 아래로 점처럼 보이는 섬이 하나 더 보이는 것 같았다. 섬이 작아서라기보다는 이곳과 거리가 멀어서 작게 보이는 것으로 보였다.

‘로마로 항해하는 중에 폭풍우를 만났고 그 폭풍이 나를 어디로 보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예측가능한 지점은 코르시카, 사르데냐 근방일 확률이 높다. 로마보다 상당히 먼 곳에 위치한 두 섬이지만 지난 폭풍을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러니까 이 좌편의 섬은 코르시카, 좌편 아래는 사르데냐일 가능성이 매우 높고 우편의 육지는 이탈리아 본토겠군.’

가능성이 높다고 표현했지만 거의 확신에 가까운 생각이었다. 따라서 앞으로 어디로 나아갈지는 이미 마음을 정했다.

“일단 배를 좀 채워야겠군. 그런 뒤 뗏목과 노를 만들어서 본토로 이동하면 될 테고. 이 지역의 바다에도 상어떼가 존재하는지는 모르겠다만 무턱대고 바다로 나갈 일이 아닌 건 확실하다.”

배로 이동 중이었고 아직 뜨거운 여름이 완전히 지나지 않았기에 튜니카를 걸친 것이 전부였지만 다행히 테세우스는 유사시를 대비해 몸안에 단검 한 자루를 상시 챙겨두고 있었다.

테세우스는 주변을 살펴 단검으로 적당한 나무를 잘라 창대를 만든 뒤 튜니카의 밑단을 길게 찢어 단검과 창대를 단단하게 묶었다.

“이만하면 작살은 되었고.”

조잡하게나마 급조한 작살을 바라보던 테세우스는 문득 호라티우스에게 무구를 맡기지 않았더라면 애써 만든 무구를 모조리 잃어버렸겠다는 생각이 스쳐갔다. 아울러 호라티우스가 느낌이 좋지 않다고 했던 말도 말이다. 잠시 묘한 표정을 짓던 테세우스는 다시 고지에서 바닷가로 나아갔다.

이곳의 식생과 암석으로 둘러싸인 섬의 환경을 헤아릴 때 섬 자체에는 먹을 것이 없어 보였고 있어도 희박할 테니 그럴 바에는 바다 생선을 잡아서 배를 채우는 것이 효율적이었다. 자신의 능력이라면 작살로 생선을 잡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닐 테니 확실히 그편이 현명한 판단이었다.

주변 정황을 파악하고 나아갈 방향 역시 정리하자 허기가 더욱 맹렬하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지체할 이유가 없던 테세우스는 바다로 들어가 가만히 서서 사냥감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얼마 뒤 은빛 비늘을 가진 이름모를 물고기가 바다 속을 헤엄쳐서 빠르게 다가오는 것을 발견한 테세우스는 벼락같이 작살을 집어던졌다.

촤아아아악!

이윽고 맑은 물에 붉은 물감을 푼 것처럼 물고기의 피가 바다에 퍼졌지만 테세우스가 작살을 들었을 때는 이미 절명한 모양인지 조금의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테세우스는 비슷한 행동을 몇 번 더 반복한 다음 지금까지 사냥한 물고기를 들고 다시 해안가로 돌아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