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6
276. 호라티우스.
276. 호라티우스.
크릭서스의 도발을 들은 호라티우스는 신뢰하는 100명의 병사들에게 만반의 준비를 마쳐 놓으라고 명한 다음 테세우스의 갑주를 걸쳤다.
하지만 호라티우스는 이내 곧 테세우스의 갑주를 벗었다. 테세우스가 남기고 간 갑주는 탈부착이 가능한 형태로 제작되었기에 갑주를 입고 일종의 퍼포먼스는 가능했지만 치열한 전투를 치르기엔 아무래도 무리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조절이 가능하다지만 먼저는 테세우스의 체형에 맞게 제작된 갑주였고 둘째는 익숙하지 않은 갑주였다.
“어둠 속이었고 지금 역시 어둠 속이니 투구만으로도 충분하겠지.”
따라서 호라티우스는 테세우스의 갑주대신 지금껏 자신이 전장에서 착용하던 익숙한 형태의 갑주, 곧 로리카 하마타의 형식을 따른 갑주와 테세우스가 제작해준 글라디우스를 착용했다.
사실 이 갑주 역시 로마에 있을 당시 테세우스가 다마스쿠스로 이리저리 보강했기에 물결치는 어두운 금속이 갑주 곳곳에 드러나 있었을 뿐만아니라 단단함 역시 다른 갑주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테세우스의 투구를 쓰고 이 갑주를 걸치면 당연히 어둠 속에는 그가 호라티우스인지 테세우스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것이다.
결국 테세우스의 무구 중 그의 투구만을 착용하고 가볍게 몸을 풀던 호라티우스는 서늘한 눈빛으로 연신 도발하는 크릭서스를 바라봤다.
“딱히 응하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를 보좌하는 지휘관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말하자 호라티우스가 입을 열었다.
“왜 내가 분에 못이겨 놈을 격살하고자 나서는 것 같나?”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무시하면 될 일이지만······. 아니 일반적인 상황이라고 해도 무시할 수 없을 것 같군. 저 새끼를 반드시 죽여야만 분이 풀릴 것 같으니 말이야.”
“음.”
“뭐. 어쨌든 그게 이유는 아니고 내가 이 도발을 무시한다면 테세우스 님에 대한 저들의 공포가 희석된다. 역시 단순히 그뿐이라면 이런 위험한 일에 총지휘관이 응하는 일은 없어야겠지만 공포가 사라지면 사라질수록 억지력이 사라진다는 이야기이니 적은 숫자로 대군을 상대해야 하는 아군으로서는 피해야 할 일이다. 공포를 더할 수 있다면? 방어가 아니라 저들을 공략할 수도 있겠지.”
거기까지 말한 호라티우스는 짧게 말을 맺었다.
“이건 핑계고 일단 저놈을 좀 쳐죽여야겠다. 다만 혹시 모르니 너희들이 수고 좀 해줘야겠어.”
“뒤는 염려 마십시오.”
“호라티우스 님이 안 나선다면 저라도 나설 참이었습니다.”
“저도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병사들이 흉흉한 살기를 발하며 호라티우스에게 외치자 최초 호라티우스에게 말을 건넸던 부관이 다시 말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부분이 그겁니다. 굳이 호라티우스 님이 나설 필요가 없습니다.”
호라티우스는 말없이 사내를 어깨를 한 번 짚은 뒤 준비된 말 위에 오르며 크게 외쳤다.
“성문을 열어라!”
드드드드득! 쿠웅!
거친 소음과 함께 성문이 열리자 호라티우스는 지체하지 않고 거대한 체구를 가진 사내에게 말을 달렸다.
*
두두두두두.
말을 타고 달려오는 로마군을 바라본 크릭서스는 고함을 지르던 것을 멈추고 근육을 수축하며 다가올 전투에 대비했다. 저자가 테세우스든 아니든 세리누스 성안에서 가장 용맹한 사내라는 점에는 이견을 가지기 어려울 테니 말이다.
호라티우스는 적정거리에서 말을 멈춘 뒤 말에서 내려와 크릭서스를 향해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의 손에는 그가 지금껏 수많은 전장에서 적의 배와 목을 가를 때 썼던 글라디우스와 수많은 위기를 넘기게 했던 스쿠툼이 들려 있었다.
“네놈이 테세우스냐? 으하하하! 오늘 네 피로 목을 축여야겠구나.”
호라티우스는 아무 말없이 인상을 찌푸리며 크릭서스에게 달려들었다. 물론 그의 표정은 투구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테세우스의 놀라운 무용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 괴물같은 테세우스 휘하의 여러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끝없이 전투기술을 갈고 닦은 자신이다.
보아하니 검투사였던 모양인데 테세우스라는 이름은 검투사 나부랭이 따위가 거침없이 입에 올릴 이름이 아니다.
호라티우스는 바람처럼 크릭서스에게 짓쳐 들었다. 호라티우스는 글라디우스를 내밀었는데 그것을 본 크릭서스는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몸을 획 뒤틀었다. 빙글 돌면서 역수로 쥔 검을 호라티우스의 몸에 박아 넣으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호라티우스는 마치 그것을 노렸다는 듯 글라디우스를 거두고 체중을 담아 스쿠툼으로 몸을 뒤틀기 위해 자세가 슬쩍 흐트러진 크릭서스를 강하게 후려쳤다.
콰아아앙!
“크흐흑!”
호라티우스도 큰 몸집을 지닌 사내였지만 크릭서스는 그보다 큰 몸집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호라티우스의 공격이 워낙 절묘했기에 크릭서스는 속절없이 뒤로 물러나며 쓰러지지 않기 위해 균형을 잡아야만 했다.
호라티우스가 그것을 가만히 보고 있을 사내가 아니었다. 호라티우스는 그대로 다시 짓쳐들며 물러서는 크릭서스의 움직임을 따라 기민하게 따라붙었다.
어디론가 도약하기 위해선 힘을 비축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전투도 마찬가지다. 적을 공격하든 적의 공격을 방어하든 최소한의 여유가 필요하다.
몸의 균형을 잡기 위해 그 여유를 사용하고 있는 크릭서스에게 공격이든 방어든 할 여력이 남아 있을까? 뛰어난 전사는 그 간극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줄 안다.
단 한 번도 검을 내지르지 못하고 테세우스에게 제압당한 것이 어디 한두 번이던가? 순간을 자신의 기회로 만드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호라티우스는 뼛속 깊이 박아넣고 숙달한 사내다.
놈이 얼마나 뛰어난 검투사였고 얼마나 많은 전투를 치렀던지간에 그 전투는 자신과 비등하거나 자신보다 약한 사내와의 전투가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어느 경지에 이른 후에는 약한 상대와 싸우는 것이 대부분이었을 테고.
가소로울 지경이다. 우물 안에 개구리에 불과한 놈이다. 개구리가 주제도 모르고 울어대니 쳐죽일 수밖에.
호라티우스는 물러서는 크릭서스보다 더 빠르게 다가서며 스쿠툼 뒤에 감춰놓았던 글라디우스를 매섭게 휘둘렀다.
크릭서스는 정신없이 물러서다가 모골이 송연한 느낌에 급히 방패를 들어 호라티우스의 검을 막아냈다.
쿠우웅! 콰직!
“아니?”
방패에서 느껴지는 충격에 방패가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는 것을 직감한 크릭서스는 놀란 표정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전투를 위해 잘 정비된 무구를 챙겨왔다. 검에 한두 번 얻어맞는다고 부서질 방패 같으면 애초에 들고 오지도 않았다는 소리였다.
그런데 고작 칼질 한 번을 막았다고 심각한 손상을 입어? 검이 방패를 날카롭게 파고드는 감각이었다. 지닌바 힘과 기술이 대단하거나 들고 있는 검이 엄청나거나 둘 중 하나였다. 지금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게 무엇이 되었든 눈앞의 사내는 지금껏 만난 그 어떤 적보다도 강력한 적이었다. 크릭서스는 정신이 번쩍 들며 옆으로 급히 몸을 굴렸다.
후우우웅!
그가 몸을 굴림과 동시에 단단한 스쿠툼이 그가 있던 자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호라티우스는 크릭서스의 야수같은 반응에 평범한 놈이 아니라는 걸 확인했다. 테세우스를 만나기 전 자신이라면 아마도 놈을 이기기 요원한 일이었을 것이다.
호라티우스는 힘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고 스쿠툼을 휘두른 그대로 몸을 돌려 자연스럽게 자세를 바로 하며 잠시 숨을 돌렸다.
크릭서스는 놈이 자신을 향해 짓쳐 들면 발목을 노릴 생각으로 빠르게 주변을 훑어봤지만 호라티우스는 이미 자세를 바로 하고 다음 전투를 대비하고 있었다.
아니 자신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자신이 발목을 베려고 주변을 훑는 순간 다시 짓쳐 들었다.
“젠장!”
크릭서스는 욕설을 뱉으며 급히 몸을 일으켰다. 다시금 전투의 흐름이 놈에게 넘어갔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크릭서스도 이대로 당하고만 있을 생각이 없었다. 크릭서스는 호라티우스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가 방패를 놓고 움켜쥔 흙을 냅다 호라티우스의 얼굴에 뿌렸다.
쏴아아아악!
백전노장이라 할 수 있는 호라티우스가 지저분한 전투라고 겪어보지 못했겠는가? 호라티우스는 스쿠툼을 가볍게 들어 모래를 막아냈다.
“놈!!”
크릭서스도 지금의 공격이 먹힐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투구까지 쓰고 있었으니 더더욱 그랬을 것이다.
다만 놈이 모래를 막기 위해 몸을 움직이면 그것으로 전투의 흐름을 자신이 빼앗아 올 수 있을 거라 판단했을 뿐이었다.
크릭서스는 호라티우스가 자신의 스쿠툼으로 시야를 가린 사이 땅을 강하게 박차고 호라티우스에게 날아올랐다. 양손에 장검을 들고 독수리가 먹잇감을 움켜쥘 것처럼 하강했다. 체중을 실은 공격이었다. 어지간한 적은 이 공격에 죽임을 당했고 그렇지 않다면 자세가 크게 무너졌다.
그러나 호라티우스는 시야가 가려졌음에도 크릭서스의 모두 예상했다는 듯이 방패를 치켜들었다가 그의 공격에 맞춰 쭈욱 내리면서 옆으로 튕겨냈다.
크릭서스는 양손에 전해져야 할 강한 충격은커녕 푹 꺼지는 느낌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내려치던 것을 멈추고 급히 몸의 근육을 수축했다.
투우웅!
호라티우스는 크릭서스의 내려치기 공격을 스쿠툼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받아냄과 동시에 공중에 떠있는 그를 스쿠툼으로 쳐서 옆으로 떨어지게 만들었다.
남은 건 이제 하나.
균형을 잃고 비틀거릴 놈의 육체에 차디찬 검날을 쑤셔 넣는 일이었다.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호라티우스는 스쿠툼으로 그를 쳐냄과 동시에 오른손에 들고 있던 글라디우스를 찔러넣었다.
사아아악!
독사가 혀를 날름거리는 것처럼 소름 끼치는 소음과 함께 허공을 가른 글라디우스가 자신이 취할 제물을 향해 날아갔다.
그러나 이번에도 글라디우스는 공연히 허공을 갈라야만 했다. 다만 사냥감의 핏물 정도는 가볍게 맛볼 수 있었다.
호라티우스는 땅에서 내려서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시 옆으로 몸을 날린 크릭서스를 바라봤다. 옆구리에 상처를 입히기는 했지만 깊게 들어가지 않았다. 생채기를 조금 낸 수준에 불과할 것이다.
호라티우스는 거친 숨을 내쉬며 경계태세를 취하는 크릭서스에게 천천히 다가섰다.
크릭서스는 호라티우스의 그런 모습에 두려움마저 느껴졌다. 그는 어떤 욕설이나 말도 뱉지 않았다. 마치 죽을 자에게는 어떤 말도 할 필요가 없다는 듯이 말이다.
그때 수목 뒤편에서 호라티우스를 향해 화살이 날아들었다.
피이잉! 피이이잉!
“역시 그랬나?”
호라티우스는 가소롭다는 듯 가볍게 말한 다음 주저 없이 몸을 돌렸다. 바로 세리누스 성이 있는 방향이었다. 테세우스를 모욕한 놈을 살려두는 것이 아쉽긴 하지만 지금은 이만하면 충분했다. 나중에 죽여도 될 일이다. 급할 것이 없었다.
“테세우스! 너는 어디도 못 간다!”
말총머리와 날렵한 몸을 가진 사내가 장검을 들고 호라티우스를 향해 달려왔다. 바로 가니쿠스였다. 크릭서스가 홀로 테세우스를 죽일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신중한 가니쿠스는 소문을 단순히 헛소문이라고 치부하지 않았다.
시칠리아 반란군 역시 로마에 극심한 증오를 가졌을 텐데 공포를 가지고 싸우는 것조차 두려워한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따라서 크릭서스에게 맡겨두되 언제든 자신이 그를 도와줄 수 있도록 주변에 매복하고 있었다. 아울러 지근거리에는 자신과 줄곧 함께였던 검투사들 역시 매복하고 있었다.
크릭서스와 처음 검을 나누는 순간 가니쿠스는 알아차렸다. 소문대로 무시무시한 사내는 아닐지라도 크릭서스가 홀로 상대할 수 있는 사내는 아닐 것이라는 판단이 섰다.
따라서 가니쿠스는 은밀하게 주변을 포위하라는 명을 급히 내리고 본인은 크릭서스와 함께 그를 죽이기 위해 더 가까이 다가섰다. 테세우스의 공포가 강력한 만큼 둘이 죽이든 여럿이 죽이든 그건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어떻게 죽이든 죽이면 될 일이었다.
가니쿠스의 공격에 호라티우스는 눈을 서늘하게 빛내며 그의 검을 글라디우스를 막아냈다.
챙!
“이것이 너희의 수준인가? 1대1로 싸우자고 제안해놓고 불리해지니 명예마저 저버리는구나.”
“긴말 말고 죽어라!”
가니쿠스는 사나운 표정으로 계속해서 장검을 휘둘렀지만 호라티우스는 스쿠툼과 글라디우스를 이용해 어렵지 않게 그 모든 공격을 파훼했다. 심지어 크릭서스까지 가세했음에도 딱히 불리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였다.
챙 채챙!
“혹 너희가 나를 함정에 빠뜨렸다고 착각하고 있나?”
그 가운데 호라티우스가 가소롭다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랬다면 유감이로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