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9
279. 붉은 것들.
279. 붉은 것들.
폰티펙스 막시무스는 자신의 권한을 사용해 긴급 의회를 주최할 것을 요청했고 콘술 루키우스 옥타비우스는 흔쾌히 그것에 동의했다. 하여 예정에 없던 회의가 열렸고 로마 의원들은 분분히 의회장으로 들어섰다.
재적의원의 과반수 출석이 확인되자마자 더 지체하지 않고 콘술 루키우스 옥타비우스의 주관 아래 의회가 열렸다. 옥타비우스는 시칠리아의 반란 문제를 거론하며 시칠리아에서 돌아온 테세우스에게 발언권을 주며 당시 상황을 설명할 것을 요청했다.
이제 와 테세우스의 보고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가 시칠리아를 떠난 후 시칠리아는 다시 반란군에게 전복될 상황인데 말이다. 전복되기 전의 상황을 듣는 것이야 아무 의미도 없었다.
그럼에도 테세우스는 담담하게 자신이 행한 일들과 당시 시칠리아의 정황을 간략하게 축약해서 말했다. 테세우스의 보고를 들은 의원들은 저마다 웅성거리며 의견을 나눴다. 그때 머리가 반쯤 벗겨진 루푸스 의원이 날이 선 어조로 테세우스에게 외쳤다.
“테세우스 당신이 무슨 야료를 부린 것 아닌가? 그게 아니고서야 시칠리아의 상황이 어찌 그리 급변할 수 있단 말인가?”
테세우스는 루푸스의 말에 미간을 꿈틀거렸다. 시칠리아에 반란이 일어난 이유가 무엇이던가? 안정되어가던 시칠리아의 상황이 급변한 이유는 또 무엇이던가? 그게 자신 때문인가? 테세우스는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간신히 누그러뜨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야료? 지금 야료라고 했습니까?”
테세우스의 살벌한 기세에 루푸스는 당황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지.. 지금 나를 협박이라도 하는 건가?”
테세우스는 냉랭한 어조로 말했다.
“황당하기 짝이 없군. 안정되고 있던 시칠리아의 상황을 개판으로 만든 건 세네투스가 보낸 푸블리우스 바리니우스라는 걸 모르는 사람도 있습니까? 더욱이 그런 일이 발생할 때 나는 귀환령에 따라 로마로 오다가 폭풍우에 휘말려 목숨을 부지하기 바빴습니다. 그런데 내가 야료를 부려서 시칠리아의 상황이 급변했다? 세네토르 루푸스는 내가 무슨 신이라도 되는 줄 아나 봅니다.”
“뭐.. 뭣이?”
“세네토르 테세우스는 사병을 모집해 반란군을 토벌하는 공을 세운 사람입니다. 그가 무슨 야료를 부려서 반란군이 시칠리아를 장악했다고 말하는 것은 본인이 보기에도 심한 억측으로 보이는군요.”
그때 회의를 주관하는 루키우스 옥타비우스가 나서며 테세우스를 옹호했다.
“무엇보다 원인을 규명하는 건 나중에 해도 될 일입니다. 지금은 시칠리아 반란을 어떻게 해결할지에 대해 논의해야 할 시점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시칠리아의 반란이 이 이상 길어지면 본국의 식량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건 모두 아시는 바가 아닙니까? 식량지원이 끊어지면 어떤 일이 발생할 지에 대해서도 말입니다.”
“음.”
식량은 곧 권력이다. 시민들에 대한 원조가 끊어지면 분노한 시민들은 공화정의 권위를 인정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군대로 진압하는 방법이 있지만 그건 미봉책에 불과하다.
따라서 세네토르들은 옥타비우스의 말에 저마다 침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따라 지금은 해결책에 대해 논의해야 할 시점이다.
의원들의 반응을 살피던 옥타비우스는 말없이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카이사르와 눈이 마주쳤다. 분위기가 적당하게 무르익었으니 이제 본 용건을 언급해야 할 시점이었다.
“그러니 시칠리아에 토벌군을 보내야 한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으리라 믿겠습니다. 지난 토벌에 실패한 본 콘술을 신뢰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지만 이번 토벌은 저 루키우스 옥타비우스에게 맡겨주시지요.”
그 말에 묵묵히 침묵을 지키고 있던 폼페이우스가 눈매를 좁혔다. 그러자 폼페이우스와 친분이 깊은 세네토르 아티커스가 나섰다.
“콘술께서도 말씀하셨다시피 시칠리아 수복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차후 동방원정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일이니.”
옥타비우스는 굳은 표정으로 아티커스의 말을 잘랐다.
“제 뒤를 이은 프라에토르 크라수스도 반란군 토벌에 애를 먹었다는 사실은 알고들 계실 겁니다. 훈련되지 않은 병사들이 아니라 기본훈련이라도 이수한 병력이 내게 주어졌다면 결과는 달랐을 겁니다.”
그러자 친 크라수스파인 아퀴우스가 나섰다. 이 발언을 그대로 수긍한다면 크라수스의 공적을 깎아내리는 것밖엔 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프라에토르 크라수스 역시 정예병이 아닌 시민군을 이끌고 토벌에 나섰고 그 결과는 콘술께서도 잘 아십니다.”
이에 다시 아티커스가 말했다.
“혹 시칠리아 토벌에 정규군단 지휘권을 요청하시는 겁니까? 로마의 적은 동방에만 있지 않습니다. 대표적으로 북방의 갈리아족이 있고 시칠리아가 안정되기 전까지는 식량사정이 열악해질 것이 확실한 이상, 이집트 지역의 군단도 보강해서 행여나 다른 마음을 품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틀린 말이 아니요. 시칠리아에 정규군단을 보낸다면 이 모든 일에 차질이 생길 테니.”
테세우스는 말없이 의원들의 반응을 살폈다. 루키우스 옥타비우스가 나서지 않았다면 이 모든 것들이 모두 자신에게 쏟아졌을 것이다. 카이사르의 말대로 루키우스 옥타비우스는 아주 훌륭한 방패가 되어주고 있었다.
그들의 뒤를 따라 의원들이 제각각 반대의 말들을 툭툭 뱉었고 루키우스 옥타비우스는 굳은 표정으로 묵묵히 그것을 듣고 있다가 저들의 반대가 잠시 잠잠해진 후에 다시 말했다.
“정규군단을 요청할 생각은 애초에 없었소이다. 다만 로마의 대가문, 율리아와 유니아 가문의 지지가 있었기에 지난 실패에도 불구하고 나 루키우스 옥타비우스가 부족하지만 나의 모든 것을 걸고 나서겠다고 말하는 것이오.”
“율리아와 유니아?”
“두 가문이 옥타비우스 콘술을 지지한다고? 왜 갑자기?”
갑작스런 발언에 의원들은 웅성거리며 저마다 의견을 나눴다. 그 가운데 옥타비우스가 다시 말했다.
“반란군은 최소 4만 그 이상 되는 것으로 보이니 저들을 상대하기 위한 군대 역시 최소 3만은 넘어야 할 것이오. 당연히 함선과 같은 병기를 운용하는 인원은 미포함한 전투 인원만을 거론한 것입니다. 그래도 부족합니다. 반란군은 이미 수많은 전투를 통해 전쟁을 어떻게 수행하는지도 익혔을 테니 말입니다.”
루키우스 옥타비우스의 구체적인 발언에 상황의 심각함이 다시금 대두되었다. 이에 의원들은 침음을 흘리며 현 상황에 대한 우려를 드러냈다.
“음.”
“흐음.”
“하여 세네토르 테세우스를 조언자 겸 별동대를 이끌 레가투스로 삼아 이번 토벌에 함께 하고자 합니다. 지난 그의 전투 성과야 더 말할 필요도 없고 이번 역시 극히 어려운 상황에서도 시칠리아를 안정시킨 공적을 생각하면 그만한 적임자가 없습니다. 제가 토벌군의 총사령관으로 나서지 않더라도 그의 조력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뭐?”
루푸스가 반대하고자 했지만 크라수스가 미미하게 고개를 젓는 모습에 표정을 굳힌 채 물러났다.
나쁘지 않았다. 시칠리아의 반란은 안정적으로 처리하되 그 공은 콘술 루키우스 옥타비우스가 얻게 되는 셈이니. 엄밀히 말하면 율리아와 유니아 가문이 사이좋게 나눠 가지는 형국이 될 테지. 어쨌든 테세우스가 시칠리아 토벌에 대한 공적을 요구할 가능성은 확연하게 줄어든다.
크라수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폰티펙스 막시무스를 바라봤다. 바로 카이사르 말이다. 쉽게 다룰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만만치 않은 자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지금은 테세우스에게 연연할 때가 아니었다. 자신에 비해 이름도 영향력도 미미하던 자가 어느새 턱 끝까지 치밀고 올라온 상황이 아닌가?
*
결국 콘술 루키우스 옥타비우스가 총사령관으로, 테세우스는 조언자 겸 별동대장으로 시칠리아 토벌에 합법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율리아, 유니아 가문의 원조가 있더라도 대군을 꾸리는 것은 결코 수월하게 시행될 일이 아니었다. 바로 이번 회의를 통해 대군을 편성하기로 결정되었으니 아무리 빨라도 일주일 그 이상은 걸린다고 봐야 했다.
테세우스는 그 시간을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별동대 권한을 달라고 요청한 것도 그것을 위해서였고. 테세우스는 회의결과가 나오기 무섭게 그 길로 나디르가 준비한 배를 타고 시칠리아로 향했다. 바로 출발하는 것보단 시간이 지체되긴 했지만 그래 봐야 이 모든 일은 테세우스가 로마로 돌아온 지 만 하루도 되지 않아 마무리되었다.
합법적으로 군을 이끄느냐, 아니면 불법적으로 군을 이끄느냐는 향후 테세우스의 행보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내용이었으니 지체되었다는 표현 자체가 적절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지체라면 지체였다. 테세우스의 마음상태를 고려하면 말이다.
*
파노르모스에 당도한 테세우스는 바로 호라티우스의 행적을 찾아나서고자 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다.
테세우스는 급히 호라티우스에게 다가갔다.
온몸을 피로 물든 붕대를 감고 있던 호라티우스는 인기척 소리에 슬며시 눈을 떠 테세우스를 바라봤다. 한참을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던 중 호라티우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당신의 갑옷 제게는 너무 크더군요. 면목이 없습니다.”
“······. 그건 내가 해야 할 말이다.”
테세우스를 따라 들어온 나디르는 말없이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호라티우스는 다시 한참이나 침묵을 지키다가 다시 말했다.
“히스파니아, 그러니까 세르토에서 폼페이우스에게 패배 후.”
“그때도 그랬지만 이번 역시 나의 패배다. 상황을 예측하는데 실패했고 이길 수 없는 전장에 밀어넣은 내 잘못이고 내 실책이다.”
호라티우스는 무덤덤한 테세우스의 얼굴을 바라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게 매 순간을 가슴으로 울고 계셨습니까? 군인은 명령에 죽고 명령에 살아갑니다. 그렇기에 나를 살리기 위해 죽은 전우들을 위해 저는 울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랑스럽게 자신의 사명을 마쳤습니다. 그 증거가 바로 여기 있지 않습니까?”
호라티우스는 피로 물든 자신의 가슴을 주먹으로 치면서 말했다. 그러나 그 손은 가슴에 닿기 전에 테세우스의 팔에 붙잡혔다.
“호라티우스. 너 역시 임무를 마쳤다. 나는 실패했지만 너는······. 서부를 지켜냈다.”
무언가 더 말을 하고 싶지만 뱉을 말을 찾지 못한 테세우스는 그저 호라티우스의 손을 강하게 쥘 뿐이었다.
“그렇습니까? 이제 당신이 왔으니 제 임무는 확실히 완수되겠군요. 그러니 저는 이만 파노르모스산 포도주나 마시러 가야겠습니다.”
“······. 함께. 함께 마시기로 하지 않았나?”
“흐흐흐. 이미 너무 오래 기다려서 먼저 좀 마셔야겠습니다. 기다리는 놈들도 있을 테고.”
그 말을 마친 호라티우스는 말없이 지켜 선 나디르와 눈을 마주쳤다.
“부탁한다.”
나디르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호라티우스는 다시 테세우스에게 말을 꺼냈다.
“퀸투스 세르토리우스 테세우스. 당신과 함께 전장을 누빌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내가······. 내가 해야 할 말이다.”
하지만 호라티우스는 테세우스의 말이 끝나기 전에 이미 숨을 거뒀다.
세리누스를 방어하기 위해 호라티우스와 함께 움직였던 백인대는 호라티우스를 살리기 위해 치열하게 전투를 치렀다. 결국 호라티우스는 치명상을 입은 채 파노르모스까지 당도할 수 있었고 백인대는 전멸했다. 그들과 함께 성을 방어하던 나머지 오천의 병력은 뿔뿔히 흩어졌다.
그렇게 테세우스인줄 알고 호라티우스를 추격하던 반란군들은 파노르모스에 주둔중이던 테세우스의 병사들에게 철저하게 말살당했고 이에 놀란 스파르타쿠스는 급히 군을 뒤로 물리고 재정비에 나섰다. 테세우스를 죽이는 것에 실패했고 더 강력한 군대가 파노르모스에 주둔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따라서 시칠리아는 한시적 휴전 상태에 빠져 있었다. 이런 상황 가운데 치명상을 입고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던 호라티우스가 테세우스의 눈앞에서 숨을 거둔 것이다.
테세우스는 굳어가는 호라티우스의 손을 잡은 채 한참을 가만히 서 있었다. 호라티우스를 바라보던 테세우스는 나디르에게 조용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삼 일. 삼 일간. 성안에 존재하는 모든 포도주를 꺼내서 사람들로 하여금 먹고 마시고 즐기게 하라. 호라티우스의 이름으로. 돈을 주고 가져오든 무력을 써서 가져오든 사흘 동안 포도주의 향취가 파노르모스 곳곳에 가득하게 만들어라.”
나디르는 잠시 멈칫거리다가 곧바로 대답했다.
“명하신 대로 수행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