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0
280. 붉은 것들.
280.
파노르모스는 때아닌 축제로 인해 도시 전체가 분주해졌다.
석공과 화가를 비롯한 도시의 모든 예술가를 불러 호라티우스의 석상, 그림 등의 예술품을 남기라 명했고 극단 역시 불러 호라티우스와 백인대의 이야기를 각색, 공연하게끔 지시했다. 호라티우스의 이름을 남기고 싶어 하는 테세우스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호라티우스를 비롯한 전사들의 장례식이었다.
파노르모스는 시칠리아에서 가장 큰 도시였을뿐더러 반란군에게 함락당한 적이 없었기에 예전의 부유함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따라서 나디르는 도시에 존재하는 모든 꽃이나 화려한 장식품들을 징발하여 장례 준비에 심혈을 기울였고 호라티우스가 사망하고 하루가 되기 전에 모든 장례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장례 준비가 완료됨과 동시에 파노르모스는 축제를 시작했다. 모두 테세우스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
떠들썩한 도시의 소음을 듣고 있던 나디르는 오늘따라 도시를 감싼 어둠이 유난히 포근하게 느껴졌다. 벌써 도시 전체에 퍼져가는 포도주의 향취 때문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쳐 갔다. 저도 모르게 호라티우스와의 지난 추억에 빠져들었던 나디르는 감상을 지우고 냉정한 표정으로 경계를 서고 있는 병사에게 말했다.
“테세우스 님은?”
사흘의 애도 기간이 끝난 후에는 처절한 피의 복수가 따를 것이다. 당시 테세우스는 어떤 분노도 표출하지 않았지만 타오르는 불꽃보다 맹렬한 분노를 품고 있음을 나디르가 어찌 모르겠는가? 그 분노는 시칠리아 전체를 태우고도 남을 것이다.
따라서 나디르는 축제 준비와 더불어 출정 준비를 동시에 진행하고 있었다. 테세우스가 나서는 즉시 모든 것을 불사를 수 있도록 말이다. 그 역시 호라티우스의 죽음에 분노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쪽에 계십니다.”
경계병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나디르는 문을 두들긴 다음 문을 열고 들어섰다.
퉁 퉁 퉁
끼이익.
“모든 준비가 완료. 음?”
그러나 그곳엔 잘 정리된 침구류만 남아 있었을 뿐, 테세우스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의 무구 역시 말이다.
“설마?”
테세우스는 경계할 것도 없이 포도주를 마시고 즐기라 명했다. 이를 어기면 어떤 이유에서든지 엄벌할 것이라 말했다. 당시에는 호라티우스의 잃은 분노 때문이라 여겼는데 이제 보니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경계할 필요가 없었기에 경계하지 말라 명한 것이리라.
“출정을 준비시켜라! 히메라로 즉시 출정한다!”
“예? 그게 무슨? 파노르모스와 그 근방에 거주하는 모든 이들은 의무적으로 사흘간 장례와 축제에 함께 해야 합니다. 예외는 없습니다. 그러니 그건 불가능합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자신을 수행하던 지휘관의 반문에 나디르는 어떤 말도 뱉지 못하고 그저 한숨만 깊게 내쉬었다. 나디르라고 해도 테세우스가 강력하게 지시한 명령을 어길 수 없었다.
“하아아······.”
호라티우스와 백인대에게는 포도주의 달콤한 향을, 본인은 비릿한 혈향에 취할 생각이었던가? 나디르는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사흘 후······.”
재차 명령할 필요도 없었다. 이미 착실하게 준비 중이었으니까.
나디르는 테세우스의 기상천외한 행보에 그저 말문을 잃었다. 못해도 수만 명이다. 수만 명을 한 번에 상대하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총사령관, 엄밀해 말해 별동대장이지만 어쨌든 홀로 저들을 상대하기 위해 움직이는 경우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렇다고 명령을 대놓고 어긴다면 명령불복종죄는 둘째치고 호라티우스와 전사들의 장례식이 엉망이 되어 버릴 것이다.
호라티우스가 자신에게 부탁한다고 말했던 것이 불과 몇 시간 전인데 그 부탁 하나 제대로 지키지 못할 줄이야. 그럼에도 크게 염려가 되지 않는 것은 테세우스의 믿지 못할 무위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 중 하나였기 때문이리라.
나디르는 이런저런 복잡한 심경에 휩싸여 결국 어떤 말도 이을 수 없었다.
지휘관도 이런 상황을 파악하고 급히 대답했다.
“심려 마십시오. 지금이라도 출정하려면 할 수 있습니다. 한데······. 테세우스 님께서 부재중이시니 장례는 어찌해야 합니까?”
날이 춥다면 잠시 뒤로 미뤄도 큰 문제가 없겠지만 여전히 푹푹 찌는 여름이다. 이미 부패가 진행되고 있을 텐데 사흘이나 뒤로 미룬다면······.
그것을 모를 테세우스가 아니다. 그리고 테세우스는 이미 자신만의 장례식을 시작했다. 따라서 나디르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후우······. 명하신 대로 거행한다. 단 사흘 후에는!”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그리 준비시키겠습니다.”
*
그 시각 테세우스는 모든 갑주를 갖춰 입고 방천화극을 본떠 만든 극을 들고 서늘한 눈빛으로 히메라의 성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차!”
테세우스는 짧은 함성과 함께 성문을 향해 말을 달렸다.
다그닥 다그닥!
주변에 자욱하게 내려앉은 어둠을 닮은 흑마는 거칠게 땅을 박차고 성문을 향해 달려갔고 테세우스는 극을 말 옆으로 내려뜨리고 있었다. 히메라의 성문은 당연히 굳게 닫혀 있었다.
“누구냐? 멈춰라!”
“멈춰라! 멈추지 않으면 사격을 가하겠다!”
두 차례의 경고가 울려 퍼진 후 곧바로 테세우스에게 화살이 퍼부어졌다.
쉬시시식. 쉬이이익!
그러나 테세우스는 귀찮다는 듯 가볍게 극을 휘둘러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화살을 걷어내며 질주를 멈추지 않았다. 화살뿐만 아니라 창이나 돌도 날아 들었지만 테세우스는 그야말로 아무렇지 않게 그 모든 것을 걷어내며 순식간에 성문까지 다다랐다.
히메라 성벽을 지키고 있던 반란군으로서는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뭐 저런 미친놈이?”
“뭐.. 뭐야? 저놈?”
“허허허. 저 미친놈 성문을 창으로 후려치려는 모양인데?”
병사들은 황당한 심정으로 테세우스를 바라봤지만 누구도 긴장하지 않았다. 적이라고 해봐야 고작 한 명이었고 두터운 성문을 나무 작대기 같은 창으로 후려쳐봐야 흠집도 내기 어렵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성 병기로 수십 번, 그 이상 후려쳐야 부서지는 것이 성문인데 그 모습을 보고 긴장하는 것이 이상한 일이리라.
콰지지직!
그러나 병사들은 믿기 힘든 굉음을 들었다. 그 굉음은 바로 성문에서 울려 퍼졌다.
“바.... 방금 뭐야?”
“서.... 설마? 성문을 부쉈다고?”
테세우스는 저들이 놀라거나 말거나 극으로 성문을 다시 후려쳤다.
콰지지직! 쩌저적!
단 두 번의 공격 만에 두꺼운 성문이 당장에라도 부서질 것처럼 위태로운 모습으로 변해버렸다. 지금의 광경을 대체 누가 믿을 수 있으랴? 성문을 홀로 부순다고? 이야기 속에서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눈앞에 벌어지고 있으니 저들은 두려움보다 황당한 심정에 휩싸였다.
“이 새끼들이! 성문을 보수하라고 했더니 얼마나 대충 보수했길래 저 모양이야?”
한 지휘관이 그것을 보고 신경질을 내자 반란군은 그제야 납득 하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더욱 현실적인 설명이었다.
콰직! 콰지지직!
그 가운데 테세우스는 히메라의 반란군이 미처 대응하기도 전에 성문을 부수고 성안으로 들어섰다.
다각. 다각!
말을 타고 성안으로 들어선 테세우스는 무덤덤한 목소리로 저들에게 말했다.
“내 이름은 퀸투스 세르토리우스 테세우스. 병장기를 버리고 항복해라.”
갑작스러운 소란에 성문 앞으로 우르르 몰려왔던 반란군들은 저마다 서로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테세우스? 중상을 입고 도망친 거 아니었어?”
“그럼 저놈은 뭔데?”
“알게 뭐냐? 죽여!”
“별 미친놈이! 혼자 말 타고 성안에 기어들어 와서 항복하라고?”
“크크크. 기어들어 오지는 않았지.”
“그게 중요하나?”
“시끄럽고 일단 죽여라!”
“죽어라!”
“와아아아!”
테세우스는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반란군들을 무심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저들 가운데는 호라티우스의 죽음과 관련이 없는 자들도 있을 것이다. 아니 관련 있는 자가 있다고 한들 그에게 호라티우스가 죽은 일에 대한 책임을 온전히 물을 수 있을까? 결국 자기기만일 뿐이다.
하지만 무기를 놓지 않고 달려드는 자는 그게 누구든 참해 버릴 것이다. 복수라 불러도 좋고 기만이라 해도 좋고 무엇이라 생각해도 상관없다.
호라티우스와 전사들의 넋을 기리는 파노르모스에는 포도주가 흐를 것이고 반란군이 자리하는 곳에는 붉디붉은 피가 흐를 것이다. 예외는 없다.
테세우스는 사나운 눈빛으로 극을 사선으로 휘둘렀다.
“크아아악!”
“아아악!”
다가오던 반란군들은 테세우스의 극이 지나간 궤적 그대로 갈라지며 붉은 피를 하늘과 땅에 흩뿌렸다.
*
테세우스가 히메라를 초토화하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몇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히메라를 초토화시킨 테세우스는 그 길로 헨나로 아그리겐툼으로 말을 달렸고 이 두 곳 역시 히메라와 별반 다를 것 없는 결말을 맞이했다.
테세우스가 도망치는 자들까지 추격하지 않았기에 이 소식은 세리누스로 퇴각하여 군을 재정비 중이던 스파르타쿠스 등에게 어렵지 않게 닿을 수 있었다.
“뭐? 지금 그 말을 믿으라고 하는 소리냐?”
크릭서스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겁에 질린 반란군을 바라봤다. 그는 아그리겐툼에서 세리누스까지 도망쳐 온 사람이었다.
“하. 하지만 사. 사실입니다. 전부 부.... 분명한 사실이란 말입니다. 노. 놈은 그러니까 테.... 테세우스는 사신입니다. 그야말로 무. 무신이란 말입니다! 놈은 홀로 성문을 부수고 성안에 무기를 든 자는 모조리 쳐죽였습니다. 지치지도 않고 피를 흘리지도 않는 괴. 괴물입니다! 도망치는 것 외에는 어떤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어떤 것도 말입니다!”
아그리겐툼에서 도망친 자만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었다. 히메라나 헨나에서 도망쳐 온 자들도 동일한 소리를 내뱉었다. 겁에 질려 정신이 나간 것으로 치부하기엔 모두가 똑같은 말을 뱉고 있었다.
“흐음.”
오이노마우스는 뭔가 수긍하는 표정으로 침음을 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날 만났던 테세우스는 뛰어난 무용을 지닌 자였지만 자신의 예상보다는 훨씬 못한 모습을 보였다. 자신이 전투를 치른 검투사의 악몽 디오클레스는 인세에 없을 괴물 같은 놈이었다. 그런 자를 홀로 상대하여 죽인 자라고 보기엔 많이 부족했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대단한 모습을 보여줬기에 계속된 전투로 지쳤기 때문이라 생각하고 넘어갔는데 만약 그가 테세우스가 아니었다면? 그리고 지금 모습을 드러낸 자가 테세우스라면? 자신의 추측과 완전하게 부합하는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히메라, 헨나에는 오천의 병력이 아그리겐툼에는 칠천에 달하는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다. 대체 어떤 사람이 그토록 오랫동안 지치지도 않고 계속해서 싸울 수 있단 말인가?”
가니쿠스가 황당하다는 듯이 반문하자 보고를 하던 사내는 발작적으로 외쳤다.
“그러니까 도망친 겁니다! 놈은 사람이 아닙니다. 괴물. 아니 무신이자 사신이란 말입니다! 무기를 들고 싸우려고 한 자들은 모조리 죽임을 당했습니다. 모조리 말입니다! 저도 도망치지 않았더라면! 으으으으.”
그때 한 전사가 급히 들어서며 보고했다.
“파노르모스의 소식입니다. 저희가 추격했던 자는 테세우스가 아니라 호라티우스라는 자로 테세우스의 심복이었던 모양입니다.”
“뭣이?”
“뭐?”
“로마에서 돌아온 테세우스는 명령을 내려 사흘 동안 축제를 열게 했고 포도주가 끊어지지 않도록 명을 내렸다고 합니다.”
보고를 듣고 있던 스파르타쿠스가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 사흘 동안 이곳엔 피가 끊어지지 않게끔 만들 생각이고.”
모두가 스파르타쿠스를 바라보자 다시 말했다.
“실로 무서운 사내로군. 게다가 그는 이미 이곳으로 향하고 있겠군. 우리의 숨통을 끊어서 호라티우스라는 자의 진혼제(鎭魂祭)를 지내기 위해 말이야.”
크릭서스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홀로 말인가? 그럼 무서울 것이 무엇이냐? 이곳엔 3만도 넘는 전사들이 있다. 놈이 얼마나 대단하던지간에 고작 한 놈을 처리하지 못할 리가 있나?”
하지만 말과 다르게 그의 표정 역시 눈에 띄게 굳어 있었다. 믿기 힘든 소문들이지만 이것들이 전부 사실이라면 자신들은 정말 무신과 전투를 치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때 다시 한 전사가 헐레벌떡 뛰어 들어오며 보고했다.
“스.... 스파르타쿠스 님! 테. 테.... 테세우스가 나타났습니다.”
회의장에 모인 모두가 서로를 바라볼 때 스파르타쿠스가 말했다.
“혼자인가? 아니면 군대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것인가?”
“소. 소문 그대로.... 소문 그대로입니다.”
그 말에 크릭서스가 버럭 화를 내면서 말했다.
“그래서 혼자라는 거야? 군대랑 함께라는 거야?”
“호. 혼자입니다. 말을 타고 조금 전 모습을 드러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