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1
281. 붉은 것들.
281.
“혼자? 혼자라고?”
그렇게 반문한 크릭서스는 벌겋게 변한 얼굴로 소리쳤다.
“놈이 우리를 얼마나 우습게 봤으면! 놈을 당장 잡아 죽여야 한다!”
그 말에 스파르타쿠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죽여야 한다.”
“내게 정예 전사 천 명만 달라! 당장 달려가서 저 오만한 놈의 목을 베어오겠다.”
“지금까지 말을 귓등으로 들은 것인가? 테세우스 저자는 성벽을 지키고 있는 오천 이상의 병력을 홀로 격파한 사내다. 소문의 절반만 되어도 천 명의 전사로는 어림도 없는 사내야!”
인상을 찌푸린 오이노마우스가 말을 뱉자 크릭서스가 코웃음을 쳤다.
“흥! 어떤 사람도 그렇게 오랫동안 전투를 치를 수 없다. 홀로 성을 함락시켜? 그것도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그렇게 믿도록 조작한 것이겠지. 놈이 정말 소문대로 무신인지 아닌지는 직접 상대해보면 판가름 날 터!”
“그 축제 언제부터였나?”
“예?”
“파노르모스의 축제! 그게 얼마나 되었냐고 묻는 거다!”
파노르모스의 소식을 가져온 사내가 잠시 멍하니 생각에 잠겨 계산하더니 대답했다.
“아마 거의 사흘 정도 되었을 겁니다.”
스파르타쿠스는 그 말에 안색이 더욱 어두워졌다.
“그럼 혼자가 아니겠군.”
“그게 무슨 소리인가?”
가니쿠스의 질문에 스파르타쿠스가 입을 열었다.
“이제 곧 테세우스의 병사들이 아니 이미 전설을 써 내려가고 있는 테세우스의 추종자들이 세리누스로 몰려들 거란 소리다.”
“음!”
“이런!”
“그러니 그전에 놈을 죽인다!”
스파르타쿠스는 그 말을 뱉으면서도 어두워진 안색을 지워낼 수 없었다.
놈을 죽이든 못 죽이든 전황은 이미 로마에 유리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이탈리아 본토에서 지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시칠리아를 함락시켜야만 했다.
그런데 실패했다. 테세우스 본인도 아니고 그의 심복이었던 호라티우스조차 넘어서지 못했다. 호라티우스가 보유한 병력의 숫자는 아군의 4분지 1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결과적으로는 패배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호라티우스가 테세우스인 줄 착각하고 있을 때는 그나마 상황이 나았다. 대단한 모습을 보였던 테세우스도 치명상에 가까운 상처를 입었고 그의 군대 역시 막강하다지만 아군보다 월등하게 적으니 충분히 승산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모습을 드러낸 테세우스는 홀로 세 도시를 함락시켰다. 크릭서스의 의심대로 그렇게 믿도록 조작했든 아니면 정말로 홀로 해낸 것이든 어쨌든 간에 세 도시와 1만7천에 달하는 병력이 사라졌고 아군은 테세우스를 극도로 두려워하고 있다. 줄곧 호전적인 태도를 고수하는 저 크릭서스조차.
아니 멀리 갈 것도 없이 소문이 사실이라면 자신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는 사내다. 심지어 빠른 시일 내로 로마 본토에서 지원군이 도착할 것이다. 과연 아군에게 승산이 있을까? 이러한 정황을 아군이 알게 된다면 끝까지 항전이라도 할 수 있을까?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사실상 이번 전투가 마지막 전투가 될 것이다. 승리하든 패배하든 더는 미래를 그릴 수 없었다.
테세우스에 대한 소문이야 둘째치고 세 도시가 순식간에 함락당한 것은 엄연한 진실이다. 이제 맞서 싸울 적은 그런 능력을 기본으로 보유하고 있다는 소리다. 그런 적을 상대로 싸우고 승전한다고 해도 그 후 로마의 지원군에 대항할 여력이 아군에게 과연 남아있을까?
퀸투스 세르토리우스 테세우스. 진실로 두려운 사내다. 단순히 믿지 못할 소문을 거론하는 것이 아니다.
고작. 고작 사흘이다. 그 사흘 만에 아군의 목줄을 무참히 뜯어버렸다. 무시무시한 포식자의 공격에 목줄이 뜯긴 이상 사냥당하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에 불과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놈이 얼마나 매서운 포식자든지 간에 놈의 명줄만큼은 반드시 끊어 놓아야겠다.
스파르타쿠스는 살의가 가득한 표정으로 크릭서스를 바라봤다. 이에 크릭서스는 전의에 가득 찬 모습으로 스파르타쿠스에게 말했다.
“곧 전사들을 추려서 출정하겠다!”
슬쩍 고개를 좌우로 흔든 스파르타쿠스가 대답했다.
“놈은 포악한 맹수다. 어떤 발톱을 숨기고 있는지 알 수 없으니 크릭서스! 너는 나와 함께 테세우스를 맞이하러 간다! 가니쿠스! 맹수를 잡을 덫을 준비해라! 그리고 오이노마우스!”
오이노마우스가 굳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스파르타쿠스가 말했다.
“놈이 소문대로 그토록 대단하다면 기존의 상식이 통하지 않는 괴물이라는 소리겠지. 그러니 네게 병력 오천을 맡겨 세리누스 성을 방비토록 하겠다. 성벽으로 놈을 유인할 테니 방심한 놈의 숨통을 끊어라!”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던 오이노마우스를 바라보던 스파르타쿠스가 외쳤다.
“출정한다!”
스파르타쿠스는 본인이 1만을 이끌고 크릭서스에게 1만을 맡겨 테세우스를 포위하도록 명했고 가니쿠스에게는 오천을 맡겨 후방을 경계토록 했다. 세리누스 성은 오이노마우스에게 맡겨 최악의 경우를 대비토록 했다.
다시 말해 테세우스, 한 사람을 죽이기 위해 2만5천이라는 대병력이 출정했다는 소리였다. 이건 누가 봐도 과한 대응이었지만 정작 그런 명령을 내린 스파르타쿠스는 기이하게도 미진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나 한 사람. 고작 한 사람일 뿐이다. 따라서 스파르타쿠스는 더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대로 반란이 스러질지라도 그 원흉만은 뿌리 뽑고 말리라.
*
비릿한 혈향이 콧속 깊이 파고들었다. 사방의 지축이 흔들리고 전의를 고양시키기 위한 함성이 끊이지 않고 울려 퍼졌다.
“와아아아아!”
척! 척! 척! 척!
대군의 움직임은 그 발걸음 소리만 들어도 사람을 위축되게 만든다. 저들이 내뱉는 고함은 심약한 자의 마음을 갈가리 찢고 그 속에 깊은 공포를 새겨 넣는다.
그때 의지가 되는 것은 옆에서 같이 고함을 내지르는 전우들이다. 그게 지금껏 자신을 괴롭힌 선임이든 불합리한 명령을 내리던 지휘관이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저들이 행한 악행이 당장 나를 죽이려는 살의보다 깊지 않은 한 의지가 되긴 매한가지다.
그렇게 같이 고함을 지르며 함께 피와 땀을 흘리며 온갖 추악한 감정이 휩쓰는 전장을 간신히 버티다 보면 전장이 죽든가 내가 죽든가 판가름이 난다.
그러나 곁에 아무도 없다. 천지가 개벽할 것처럼 적의 함성과 살의가 미친 듯이 요동치는데도 벌벌 떨며 내지르는 비명 하나 울려 퍼지지 않는다. 그저 적막한 고요만이 사위를 자욱하게 덮은 어둠처럼 테세우스 주변을 스산하게 맴돌 뿐이다.
두두두두두. 두두두두.
지축을 흔드는 소리는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끝없이 밀려오는 파도처럼 적의 대군이 밀려오고 있었다. 기병과 보병을 비롯한 각양각색의 병과로 구성된 적들이 자신을 죽이기 위해 미친 듯이 짓쳐 들고 있었다.
투구을 쓴 테세우스는 가만히 눈을 들어 적을 바라봤다.
‘마지막 가는 길까지 혈향을 풍겨서 미안하다. 그래도 지난 사흘간 포도주 향에 푹 취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나와 함께 전장을 누리던 것이 정말 영광이었다면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나와 함께 전장에 서자.’
테세우스는 붉은 피가 이리저리 엉겨 붙어 있는 극을 오른손으로 꽈악 쥐었다.
“가자. 비록 나의 공허한 바람일지라도······.”
테세우스는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유성우처럼 싸늘하게 눈빛을 흘리며 온갖 살의로 무장한 적의 대군을 향해 주저 없이 말을 달렸다.
두두두두두.
*
스파르타쿠스는 대군을 향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짓쳐 드는 테세우스를 바라보며 소문이 사실일 확률이 높겠다는 생각을 품었다. 저 모습만 미루어 짐작하면 저건 자신의 무위를 믿고 있거나 아니면 단순히 미친놈이라는 소리인데 그저 미친놈이라면 이미 죽어 나자빠졌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크릭서스! 계획대로 해라!”
스파르타쿠스는 크릭서스에게 크게 외친 다음 군을 이끌고 그에게서 멀어졌다. 크릭서스는 당장에라도 테세우스에게 달려가고 싶었지만 스파르타쿠스의 명령이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전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놈을 죽여라!”
“죽여라!”
두두두두두. 두두두두.
가장 먼저 테세우스에게 도달한 것은 당연히 말을 탄 기병이었다. 물론 그 전에 기병들이 활과 창을 비롯한 무기를 날렸지만 제대로 날아오는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밤이기도 했고 마상에서 활을 쏠 정도로 뛰어난 자들이라면 이미 시칠리아를 함락시키고 남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들은 그저 들고 있는 무기를 날린 것에 지나지 않았다. 어디 테세우스가 그런 눈먼 공격에 맞을 사람이던가? 아니 정확히 맞더라도 다마스쿠스 강철 갑주로 도배한 테세우스의 몸에 틀어박힐지도 의문이었다.
“죽어라! 테세우스!”
“오만한 놈! 죽어라!”
“죽어!!”
저마다 살의 가득한 말을 내뱉으며 테세우스를 향해 무기를 내질렀지만 저들은 피분수와 피보라를 동시에 일으키며 이리저리 내팽개쳐질 뿐이었다.
“크아아악!”
“아아악!”
그건 마치 거대한 망치에 얻어맞은 사람을 보는 것처럼 기괴한 모습이었다.
부부부붕!
테세우스는 극을 풍차 돌리듯이 붕붕 돌리며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기병들을 모조리 도륙했다.
팔과 다리가 비현실적일 정도로 허공에 치솟아 올랐고 말과 함께 사람이 같이 양단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미.... 미친! 저. 저게 사.... 사람이냐?”
“죽.... 죽여라! 놈은 고작 한 놈이다! 한 놈일 뿐이다. 죽여! 죽이라고!”
“으아아아아!”
“죽어라!”
“창으로 찔러! 가까이 다가서지 못하게 만들면! 크허허헉!”
테세우스를 포위한다고? 무시무시한 거력을 지닌 테세우스를? 무기가 제대로 박히지도 않는 단단한 갑주까지 걸친 테세우스를? 심지어 그는 사람을 죽이면 기력이 차오르는 기이한 능력까지 지닌 괴물이었다.
이런 괴물을 대체 무슨 수로 포위할까?
테세우스가 지나간 자리는 언제나 그렇듯 피와 살점 만이 즐비할 뿐이었다. 마치 거대한 거인이 몽둥이로 후려친 것처럼 온전한 시체를 찾아보기도 어려웠다.
테세우스는 극을 휘둘러 대여섯 명의 목을 단번에 쳐버린 뒤 이어서 극을 빙글 돌려 양옆으로 다가오는 전사들의 허리를 날려 버렸다.
촤아아아악!
그 행동이 어찌나 신속했는지 극의 궤적이 지나간 자리에서 진하디진한 붉은 핏물이 동시에 뿜어져 나왔다.
테세우스는 사방에서 솟구쳐 오르는 핏물의 파도를 헤치고 들어가 다시 사람을 육편으로 잘게 만들어버렸다. 그의 손속 어디에서도 자비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이미 경고했다. 항복하지 않는 자. 무기를 들고 싸우려는 자는 모조리 죽일 것이라고. 테세우스는 사신처럼 적병의 피를 탐하고 또 탐했다. 그건 마치 피를 탐하는 혈귀 한 마리 같았고 사람의 육체를 씹어먹는 괴물처럼 보였다.
“괴.... 괴물이다.”
“사.... 사신.”
“무. 무신이다. 전신 아레스라고 해도 이 자를 죽일 수 없을 것이야!”
“으아아아아!”
기세등등하게 테세우스를 향해 짓쳐 들었던 기병들이 분쇄되는 건 그야말로 순식간에 불과했다. 부딪치는 족족 무참하게 도륙당하니 그 누구라고 당할 재간이 있으랴?
크릭서스는 기가 질린 표정으로 테세우스를 바라봤다. 전에 만난 테세우스, 아니 호라티우스라고 했던가? 그도 대단한 실력자였지만······. 지금 자신들이 싸우려는 자는 인간이 아니라 숫제 괴물이나 다름없었다.
부풀려진 소문 따위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부풀려진 소문이 축소된 소문이었을 줄 누가 짐작할 수 있었으랴? 놈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전무후무한 괴물이었다. 오이노마우스의 경각심을 단순히 죽다 살아난 이의 두려움으로 치부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거다. 누구라도 이와 비슷한 광경을 봤다면 두려움에 휩싸이지 않을 수 없으리라.
“미.... 미친.”
어찌나 당황했던지 욕설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크릭서스는 정신을 다잡으며 큰 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그래. 놈은 스파르타쿠스가 예상했던 대로 강력한 포식자다. 놈이 인간이 아니라 괴물이라면 괴물을 잡는 방식으로 사냥하면 될 일이다.
테세우스의 목을 베어서 그 피를 취하고 그 고기를 씹어서 놈의 강력함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리라. 크릭서스는 희번덕거리는 눈으로 전사들에게 외쳤다.
“가까이 다가서지 말고 뒤로 물러서며 놈을 견제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