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2
282. 무신(武神).
282. 무신(武神).
크릭서스의 후퇴명령에 전사들은 구사일생한 표정으로 빠르게 물러서기 시작했다. 뒤편에 자리한 자들은 느끼지 못했는지 모르지만 테세우스와 가까이 있던 자들은 그 어떤 맹수보다 포악한 살의에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었기 때문이다.
인간이 아니라 맹수, 아니 세상의 어떤 것을 초월한 기묘한 존재를 맞닥뜨린 기분이었다. 겁에 질려 전사들이 내뱉는 말, 괴물이나 사신, 무신이라는 호칭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병을 제외한 보병들은 아직 테세우스와 맞닥뜨리지 않았는데도 그러했다.
테세우스는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기병들이 양옆으로 갈라지는 모습을 지켜봤다. 물론 그의 양손은 여전히 적의 육체를 무참히 가르고 있었다. 적의 숫자가 워낙 많았기에 어차피 저들의 전술 행동을 막는다는 건 테세우스라고 해도 불가능하다.
지금도 저들의 이동을 멍하니 지켜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치열하게 전투를 치르는 중이었으니 말이다.
테세우스는 반란군이 자신을 진형 깊숙이 유인한다는 것을 바로 눈치챘다. 그렇다면 적의 진형 안으로 파고들 것이 아니라 외곽을 돌며 차근히 적을 도살하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테세우스는 방향을 틀지 않고 세리누스 성을 향해 계속해서 직진했다. 적이 무슨 계략과 함정을 파두었는지는 알 바 아니었다. 또한 호라티우스와 전사들에게 마지막으로 함께 달리자고 말해놓고 방향을 튼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리석을 정도로 위험한 짓거리다. 테세우스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세리누스를 향해 달려가는 장애물이 무엇이든 부숴버리고 나아갈 뿐이다.
두두두두.
흑마는 터질 것처럼 잔뜩 부푼 근육을 자랑하며 다시금 땅을 박찼다. 어찌나 거세게 땅을 박찬 것인지 흙과 작은 돌이 이리저리 튀어 올랐다.
그러나 튀어 오르던 흙먼지를 비롯한 돌멩이는 금세 찐득한 붉은 안개에 휩싸여 눅눅하게 젖은 채로 대지로 돌아갔다. 씻어낼 수 없는 비릿한 향은 덤으로 품고 말이다.
촤아아아악!
테세우스는 극을 현란하게 휘두르며 적의 투사체를 모조리 걷어내고 아울러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적을 무참하게 베어버렸다.
“으아아악!”
“크아아악!”
전사들의 비명은 테세우스의 질주를 장식하는 배경음악처럼 날카롭고도 음울하게 전장에 울려 퍼졌다. 무언가 찍히고 베이는 잔혹한 소리는 맹수가 사냥감을 뜯어먹는 소리처럼 질척하게 전사들의 귀를 어지럽혔다.
어떤 전장이든 두렵기 매한가지지만 이토록 두려운 전장은 단연코 처음이었다. 마치 맨몸으로 맹수 앞에 선 것처럼 의지할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의지가 되던 동료들의 살의에 찬 함성은 어느새 새된 비명이 되어버린 지 오래였고 공포라는 포식자가 전장 곳곳에 도사리며 그 날카로운 이빨로 온몸을 잘근잘근 씹은 뒤 뱉어냈다.
“히이이익!”
“으아아아아!”
나름대로 오와 열을 유지하며 테세우스를 견제하던 반란군은 테세우스를 맞닥뜨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무기까지 버리고 도망치는 군대로 전락해버렸다.
“괴. 괴물이야.”
“싸.... 싸울 수 없어!”
하지만 도망친 자들은 뒤편에서 날아온 아군의 화살 등에 의해 모두 죽임을 당했다.
“겁쟁이처럼 물러서는 자는 그게 누구든 죽일 것이다!”
크릭서스와 그의 명을 받은 지휘관들이 병력 사이를 돌아다니며 외쳤지만 한편으로는 짙은 회의감이 들었다. 전장에서 도망치는 자들을 향해 경고하면서 회의감이 들기는 또 처음이었다. 솔직히 이 괴물 같은 놈 앞에서 누군들 무작정 도망치고 싶지 않겠는가?
아군의 수는 3만에 다다르고 놈은 고작 한 명이지만 놈의 믿지 못할 무위를 보고 있노라면 그 3만이 모조리 놈의 손에 죽고 말 것이라는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그야말로 황당한 생각이지만 테세우스를 목격한 이들에게는 그 황당한 소리가 벗어날 수 없는 진실로 다가왔다.
소문으로 들었을 때도 황당한 소리라며 믿지 않았는데 그 소문조차 축소된 것이라고 느껴지는 현실이 주는 괴리감에 제정신을 유지하기도 어려웠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테세우스’라는 공포에 잠식당한 것이다.
이런 식으로 후퇴하다가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군이 붕괴해버릴 것 같은 위기감을 느낀 크릭서스가 재차 명령을 내리려는 그때 가니쿠스가 이끄는 자들이 나섰다.
엄밀히 말해 가니쿠스와 그의 부대가 테세우스를 향해 진격한 것이 아니라 크릭서스가 이끄는 부대가 후방에 대기 중이던 가니쿠스 부대까지 밀려났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었다.
가니쿠스는 눈을 빛내며 전사들에게 외쳤다.
“던져!”
이에 그물을 준비하고 있던 자들이 테세우스를 향해 그물을 집어 던졌다. 검투사 중 그물과 삼지창, 단검으로 싸우는 레티아리(그물투사)를 주축으로 이뤄진 부대였다. 레티아리는 그물을 던져 적을 포박한 후에 적을 처리하는 것이 주 전투 방법이었던 만큼 당연히 그물을 다루는 실력이 지금껏 임기응변으로 그물을 던졌던 자들보다 월등히 뛰어날 수밖에 없었다.
크릭서스의 부대가 앞에서 육탄돌격으로 시간을 버는 사이, 가니쿠스와 오천의 부대는 테세우스의 경로를 예측하고 적절한 위치를 선점할 수 있었다.
가니쿠스는 스파르타쿠스의 명령대로 움직이기는 했지만 테세우스가 정말로 크릭서스의 부대를 뚫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어느 정도 뚫고 들어오다가 돌격력을 잃은 테세우스가 크릭서스의 부대 안에 포위될 것이라 예상한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자신의 예상과 전혀 달랐다. 크릭서스가 이끄는 부대는 성난 야수의 시선을 묶어두기 위한 제물에 불과했다.
가니쿠스는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 서늘한 눈빛으로 레티아리들이 던진 그물에 이리저리 휩싸이는 테세우스를 바라봤다. 그의 무위가 신화 속 신들을 떠오르게 만들 정도로 대단하다는 것은 알겠다. 그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광경이 지금도 펼쳐지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놈은 너무 오만했다. 인간이 맹수를 사냥할 수 있는 것은 힘과 체력을 비롯한 전투능력이 맹수보다 뛰어나기 때문이 아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효율적인 도구사용을 빼놓을 수는 없으리라.
가니쿠스는 테세우스가 그물을 극으로 잘라내거나 걷어내는 모습을 확인하고는 더욱 긴장한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지체하지 말고 계속해서 던져! 그래 봐야 놈은 혼자다! 일단 놈의 말을 봉쇄해라! 땅에 깔린 그물을 잡아당겨!”
공중에서 흐물거리는 그물을 대체 어떻게 저리도 간단하게 베어버릴 수 있는지는 일단 차치하더라도 테세우스의 극에 이리저리 잘려 떨어진 그물이라고 해서 유용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테세우스 저자는 괴물이다.
그러나 놈이 타고 있는 말까지 괴물은 아니지 않은가?
“히이이이잉!”
땅에 떨어진 그물은 흑마의 다리에 걸려 이동하게 어렵게 만들었고 적절한 시기에 당겨진 그물은 말이 균형을 잃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찌이이익!
그러나 말이 넘어지려는 찰나 테세우스가 당겨지던 땅바닥의 그물을 극으로 베어냄으로 말은 간신히 균형을 잡을 수 있었다. 그런 일들이 한 번도 아니고 수시로 일어나고 있었다. 공중에서 날아오는 그물을 걷어냄과 동시에 땅바닥까지 확인하다니 대체 테세우스 저자는 정말 무슨 무신이라도 된단 말인가?
하지만 가니쿠스는 개의치 않고 다시 소리쳤다.
“물러서면서 계속 던져라!”
이에 전사들은 계속해서 그물을 던졌고 그들의 노력이 헛되지 않아 테세우스의 몸을 옭아맬 수 있었다.
“지금이다! 놈을 죽여!”
가니쿠스가 말하기도 전에 노련한 검투사들은 테세우스를 향해 빠르게 짓쳐 들었다. 저들의 창은 당장에라도 테세우스의 몸을 뚫을 것처럼 흉흉하게 날아들었다.
하지만 저들은 테세우스를 얕봐도 너무 얕봤다. 엄밀히 말하면 그의 믿을 수 없는 괴력을 말이다.
우두두둑! 뚜두둑!
테세우스의 몸을 옭아맨 그물이 한순간에 찢어지고 독사보다 매서운 그의 극이 허공을 갈랐다.
촤아아아악!
그물이 찢어지는 것과 테세우스를 향해 달려들었던 전사들의 육체가 짓이겨지는 것은 거의 동시에 발생했다.
“아아아악!”
“크아악!”
그러나 가니쿠스가 준비한 함정은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계속해서 잡아당겨!”
가니쿠스의 서슬 퍼런 명령에 전사들은 미리 깔아뒀던 그물을 다시 잡아당겼다. 이미 바닥에 그물에 많이 깔려 있었기에 작은 움직임만으로도 흑마의 발을 엉키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테세우스니까 아무렇지 않게 그물을 찢어버리는 것이지 흑마의 날렵한 다리가 무슨 힘이 있어 그물을 찢어낼 수 있겠는가?
“히이이이잉!”
테세우스를 태운 말이 다시금 휘청이자 테세우스는 극으로 휘청이는 땅을 짚어 말의 균형을 잡았다.
흑마는 균형을 잃은 채 옆으로 쓰러지며 발을 헛디디다가 극으로 땅을 짚은 테세우스의 괴력에 의지해 다시 균형을 바로 세울 수 있었다. 직접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콰지지직!
그러나 그 순간 테세우스가 서 있던 지반이 그대로 풀썩 내려앉았다. 너무나 순식간에 땅이 내려앉았기에 테세우스도 어떻게 대처할 시간이 없었다.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말의 속도 역시 정지한 것처럼 느려졌기에 어떻게 무너진 지반을 뛰어넘을 수도 없었다.
결국 테세우스는 말과 함께 무너진 지반 아래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됐다! 놈을 잡았다!”
가니쿠스는 진땀 어린 손을 움켜쥐며 소리쳤다. 땅이 무너진 곳에는 날카로운 나무창들이 박혀 있었다. 그런 곳에 균형을 잃은 말과 함께 떨어졌으니 저 괴물 같은 놈도 별수가 없으리라.
하지만 신중한 가니쿠스는 그럼에도 긴장을 풀지 않고 외쳤다.
“불을 던져라! 서둘러!”
그 명령은 테세우스가 아래로 떨어지자마자 즉시 터져 나왔고 이미 테세우스의 괴물 같은 모습에 질린 전사들은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횃불을 아래로 집어 던졌다.
이 함정은 테세우스를 상대하기 위해 만든 것은 아니고 로마의 군대가 쳐들어올 것을 대비하여 만들어 둔 것이었다. 그 함정이 한 사람을 잡고자 쓰일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지만 가니쿠스는 미리 함정을 만들어 놓은 스파르타쿠스의 혜안에 깊이 감탄하고 있었다.
저 괴물 같은 놈을 함정도 없이 상대하려고 했다가는 얼마나 많은 전사들이 죽임을 당할지 계산조차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놈은 목창이 박힌 구덩이에 떨어졌고 그 구덩이 역시 자신의 명령에 따라 불구덩이로 변할 테니 괴물 같은 테세우스도 이제는 끝이다.
*
콰지지직!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지반이 무너지는 것을 느낀 테세우스는 급히 아래를 확인했다. 날카로운 목창이 빽빽하게 들어선 것을 얼핏 확인한 테세우스는 미간을 좁히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별수 없다.’
말과 함께 아래로 떨어지던 테세우스는 재빨리 몸을 움츠려 흑마의 등을 밟아 약간의 추진력을 얻어 뛰어오른 뒤 극을 벽면에 깊게 박아넣었다.
이미 말과 함께 떨어지고 있던 도중이었기에 테세우스 혼자만 훌쩍 뛰어오른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고 그럴만한 추진력을 얻을 여유도 없었다. 단지 벽면에 극을 박아넣을 약간의 시간을 번 것에 불과했다.
푸우우욱!
히이이이잉!
테세우스가 추진력을 얻은 만큼 그 반작용으로 흑마는 더욱 빠르게 바닥으로 추락했고 결국 짧은 단말마와 함께 살점과 피를 튀기며 목창에 깊숙이 박혀 버렸다. 벽면에 극을 박은 채 매달려 있던 테세우스는 흑마를 내려다보던 눈을 돌려 말없이 하늘을 바라봤다.
그 순간 하늘에서 불덩이들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목창을 깔아놓은 바닥 아래에 건초를 깔아두었던지 불덩이가 떨어지는 순간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 불덩이의 주인은 바로 횃불이었다.
화르르르르.
그대로 바닥에 떨어져도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저 목창일뿐이고 극으로 베어버리든 갑옷을 이용해 빗겨내든 어떻게든 살아남았을 테니까.
하지만 바닥에 떨어졌다면 테세우스라고 해도 화상을 입는 것은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테세우스는 서늘한 눈빛으로 왼쪽 허리춤의 중검을 뽑아 벽에 박아넣으며 극을 잡아뽑았다. 벽면을 손으로 잡고 오를 수도 있지만 벽면상태가 무른 편이었기에 이 방법이 훨씬 안전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콰직. 콰직.
그렇게 어느 정도 벽면을 타고 오르던 테세우스는 그대로 팔에 힘을 줘 구덩이를 완전히 벗어났다. 구덩이가 완전히 불구덩이로 변하기 바로 직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아. 아니?”
“노... 놈이 살아왔다!”
“아... 아직 놈이 살아있다!”
“이. 이.... 괴물 같은 놈!”
“어. 어떻게? 대체 어떻게 살아난 거야?”
테세우스를 발견한 반란군들이 기함을 토하며 뭐라고 지껄였지만 테세우스는 무심한 표정으로 중검을 다시 왼쪽 허리춤에 납검하고 극을 오른손으로 가볍게 말아쥐었다.
그리곤 눈을 들어 세리누스 성을 바라봤다. 아직 거리가 좀 있기는 하지만 문제없었다. 주변을 살펴보니 자신이 빠진 구덩이는 아마도 미리 파놓았던 함정인 모양이었다. 주변으로 비슷한 함정 여러 곳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가만히 서서 주변을 살피던 테세우스는 다시 세리누스 성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테세우스의 갑주는 적들의 피와 구덩이에서 피어오르는 불꽃의 붉은 기운을 받아 온통 붉은 빛으로 번들거렸다.